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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신작단편/김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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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유리방
김태용
나는 지금 유리를 통해 너를 보고 있다.
너는 유리방에 갇혀 있다. 아니 갇혀 있다는 말은 틀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너는 유리방에 살고 있다.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다면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너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너는 아름답다. 유리의 필터를 통과한 너는 아름답다. 나는 너를 유리처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한 말을 할 수도 있다. 너를 묘사하는 것은 쉽다. 쉬운 만큼 또 어렵다. 네 앞에서는 아름답다는 말도 제 언어의 의미를 잃는다. 너는 고귀하다. 너는 실루엣도 그림자도 없다. 존재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너와 유리방, 그리고 너의 매혹적인 언어뿐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다. 쿠션들을 다 뜯어낸 나무의자다. 네가 있는 곳이 유리방이라면 내가 있는 곳은 나무방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무의자와 나무탁자, 그리고 너를 바라보는 곳을 제외하면 다른 면은 모두 적갈색의 나무로 되어 있다. 탁자 위에는 두루마리 휴지 한 개와 작은 생수병이 놓여 있다. 바닥에는 내던져진 재떨이가 있다. 나는 너를 볼 때 담배를 피지 않는다. 모든 연기가 너에게로 가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볼 수 없다. 그것이 너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나는 생각한다. 너는 아직 움직임이 없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인형처럼 너는 차가워 보인다. 유리방과 나무방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다. 편지함 같은 그곳을 통해서만이 나는 너와 접촉할 수 있다. 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꺼낸다. 구겨진 것을 곱게 편다. 연필을 꺼내 거기에 쓴다. 나의 글은 스무 자를 넘은 적이 없다. 다 쓰고 나선 사인을 한다. 그것을 틈에 넣는다.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너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편지를 받은 너는 미소를 짓고 옷을 벗는다. 너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 속에서 말들이 나온다.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나를 자극한다. 나는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손을 쑥 집어넣는다. 너는 혀를 내밀어 허공을 핥는다. 또 다시 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너는 춤을 춘다. 너의 검고 반짝이는 음모가 유리에 달라붙는다. 거미처럼 기어 다닌다. 나는 바지를 내린다. 나무의자에 닿는 엉덩이가 차갑다. 말을 탄 것처럼 의자에 앉아 들썩거린다. 엉덩이에 시뻘건 나무문양이 새겨질 때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염을 토한다. 너는 윙크를 한다. 유리방에 빨간 조명이 꺼진다. 암흑이다. 너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너는 어둠에 갇힌다. 문을 닫고 나오면 몇 개의 눈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유리의 안구를 가지고 있다.
나는 유리방에 살고 있다.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가 살고 있는 유리방이 세상을 가두고 있다고. 나는 유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조롱할 수 있다. 머리 위에는 빨간 조명이 돌아간다. 푸줏간 고기살점 같은 빛이 하얀 살결 위에 뚝뚝 떨어진다. 나를 따뜻하게 채찍질하는 이 빨간 빛이 좋다. 작은 디지털 알람시계가 있다. 숫자가 몸을 바꿀 때마다 나 역시 모습을 달리한다. 사실 나는 유리방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거울이다. 반대편에서 보면 투명한 유리지만 내 편에서는 적나라하게 나를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곳은 유리방이 아닌 거울방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거울을 보며 가장 아름다운 표정을 짓고 포즈를 취한다. 거울의 밑 모서리 부분에는 작은 틈이 하나 있다. 그 안으로 지폐 한 장이 배달된다. 그것을 손에 쥔다. 적당한 온기가 느껴진다. 글씨가 쓰여 있다. 이젠 글씨를 보고서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다. 너의 필체는 독특하다. 딱딱한 고딕체 같으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운 선이 엿보인다. 글씨를 만져본다. 손에 연필 흑심이 묻는다. 너는 글을 쓰고 나서 꼭 사인을 한다. 아무리 찬찬히 뜯어보아도 어떤 글자인지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아무 뜻도 없는 하나의 기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보이지 않는 너의 존재처럼. 너의 요구는 강하지만 표현은 정중하다. 너는 꼭 경어를 쓴다. 지폐가 부족해도 나는 너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다. 너는 나에게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말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나는 중얼거린다. 무성영화 배우의 이해될 수 없는 제스처처럼 아무 말이나 중얼거린다. 옷을 벗고 춤을 춘다. 거울에 몸을 붙인다. 새벽 밀물 같은 소름이 돋는다. 가능하다면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너를 안아고 싶다. 머릿속을 난타하는 단조로운 알람소리가 들린다. 나는 너에게 윙크를 한다. 빨간 조명이 꺼진다. 유리방에는 어둠이 머리를 풀고 눕는다. 그 위에 주저앉는다. 어둠을 한 움큼 건져 얼굴에 끼얹는다. 축축한 지하실의 습기가 느껴진다. 어둠 속에는 그 어둠보다 진한 눈이 있다. 검은 안구들이 차가운 나의 몸을 핥는다.
유리방을 나오면 나는 더 이상 유리방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한다. 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내와 딸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직장에서 월급을 받았다. 한 달 동안 인사처럼 조간의 헤드라인을 말하고, 비슷비슷한 서류들을 정리하고, 상사의 잔소리를 듣고, 동료들의 음탕한 농담을 받아치며 여직원의 치마 속을 눈으로 만져본 대가로 받은 것이다. 월급봉투가 들어있는 안주머니를 만져본다. 심장 부분에서 조금 아래에 위치한 그것. 아내에게 나의 심장을 꺼내 보여줄 수는 없을까. 마른 피딱지로 덮여 있는 바람 빠진 심장을. 나의 걸음을 따라 가등이 명멸한다. 사람들과 몇 번 어깨를 부딪친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빠르게 지나간다.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런 나를 누군가 또 다시 치고 간다. 그 누군가의 뒤를 쫓아가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불쾌한 혀가 쑥 빠져 나오면 그 혀를 깨물어 주어도 좋을 것이다. 며칠 전 아내와 상사가 같은 말을 했다. 둘이 몰래 만나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만 같았다. 무기력해.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같군. 상사로부터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농담 같아 비실비실 웃음까지 흘렸는데, 아내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을 때는 서글픔이 밀려와 화장실에 틀어박혀 타일의 개수를 헤아리기까지 했다. 어느새 집 근처까지 걸어온 나를 발견한다. 아내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무언가 싱싱하고 시큼한 과일이 먹고 싶다는 말. 아내는 지금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과일가게에 들러 오렌지를 산다. 주인 말로는 아주 달다고 한다. 아주 신 것을 찾고 있다고 하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잡화점에 들러서는 종이인형이 든 알록달록 사탕을 산다. 딸애가 좋아하는 것이다. 딸애의 방에는 종이인형이 가득하다. 그 종이인형을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종종 보았다. 휴일에는 종이인형 하나를 건네주며 자신이 말하면 무조건 네네, 하고 대답을 하라고 했다. 종이인형을 바라보았다. 꼽추노예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구겼다. 딸애가 놀란 눈을 하고 입을 벌렸다.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이렇게 말했다. 꼽추는 등이 구부러져 있어야 제격이지. 딸애는 내 말을 듣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딸애의 얼굴을 후려치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때 부엌에서 칼질을 하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가 들고 있는 칼에는 생선의 피가 묻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딸애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딸애가 안겨든다. 딸애를 안아 올린다. 얼굴을 비빈다. 딸애가 얼굴을 돌리며 따갑다고 소리친다. 아내는 과일봉투를 건네받고 딸애에게 사탕을 꺼내 준다. 딸애가 춤을 춘다. 아내는 오렌지를 코밑에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나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심장을 만지작거리다가 하얀 월급봉투를 꺼내고 만다. 식사를 하고 나선 거실에 앉아 드라마를 본다. 아내는 쉼 없이 오렌지를 까먹고 있다. 손끝에는 오렌지 물이 들어 있다. 딸애가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 한다. 아내가 조용히 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방 쪽으로 간다. 텔레비전 속 누군가 말한다. 가족이 싫은 거야. 머뭇거리자 딸애가 말한다. 가족이 싫은 거야. 방으로 들어가 다락으로 올라간다. 다락에는 내 작업실이 있다. 처음 이 집을 장만했을 때는 아내에게 꿈의 공작실이라고 말해주길 부탁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젠 철 지난 옷과 그릇세트를 보관하는 창고가 되어 있다. 곳곳에는 노끈으로 묶어놓은 책들이 가득하다. 책들마다 그 책의 무게만큼 먼지를 덮고 있다. 몸 하나 누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웅크려 앉는다. 어디선가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쥐가 책을 갉아먹는 소리 같다. 쥐는 어느 책의 어느 활자를 갉아먹고 있을까. 다락 한편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다. 창을 열면 목련나무가 보인다. 글이 써지거나 안 써지거나 목련나무를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다락문을 열고 올라온 아내가 코끝을 간질이면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아내를 안아주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목련나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니 분명 그 나무였으나 제철이 와도 목련이 피지 않았다. 대신 밤마다 검푸른 나방들만 목련나무 주위에 몰려들었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한다. 직장 때문은 아니다. 가족 때문도 아니다. 목련나무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창작욕이 일듯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을 잃었다. 으레 그런 일들이 벌어지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었는데 말 그대로 그게 끝이었다. 내 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어 그 동안 나의 손을 빌려 글을 썼다면 그가 죽은 것이다. 그를 만난 적도 말을 해본 적도 없기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그를 어떻게 다시 살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끝난 것이다.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책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본다. 책들은 말이 없다. 누구보다 더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이 없다. 내일 이것들을 고서점에 팔아버릴 것이다. 이번엔 정말 그렇게 되길 바라며 묶인 책을 힘껏 움켜쥔다.
유리방을 나오면 나는 더 이상 유리방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주머니에는 지폐가 가득하다. 지폐들은 저마다 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다. 고급향수 냄새가 나기도 하고, 병원의 포르말린에 절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기도 하다. 나는 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은 간혹 나의 어깨를 치며 간다. 몇 명은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몇 명은 잠시 동안 나를 쳐다보고 돌아서기도 한다. 잊어버린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 듯 그들의 눈동자는 심하게 떨린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차갑게 외면한다. 가야할 곳이 있다. 오빠의 부탁이다. 나는 오빠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다. 거절할 이유도 없다. 오빠의 부탁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오빠의 두 다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빠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다리를 잃은 오빠는 더 이상 나를 범하지 못한다. 오빠가 불구가 되고 나서 나는 옷을 벗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오빠 위에 올라탔다. 오빠는 몸을 떨며 오줌을 쌌다. 울부짖으며 나를 밀쳐냈다. 나는 오빠의 책을 찢어 하녀처럼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아냈다. 택시를 잡아 뒷자리에 앉는다. 기사가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어디서 나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담배 피워도 되나요. 나는 이미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상태다. 기사가 창문을 열어준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지요.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담배 연기가 어스레한 거리를 뚫고 나간다. 거리의 네온들에 눈이 부시다. 이제 네온이 없는 도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말기 암환자의 호흡기처럼 도시는 네온을 통해 거친 숨을 내뱉고 있다. 제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담배를 피는군요. 나는 피식 웃는다. 아마 나의 긴 손가락 탓일 것이다. 내가 피는 가느다란 담배처럼 적당히 마른 손가락. 내 손가락을 한번 피워 볼래요. 말을 한다면 기사는 급브레이크를 밟을 것이다. 앞차를 박고 뒤차에 받힐 것이다. 나는 머리를 찧고 피를 조금 흘려도 좋을 것이다. 담배를 휙 밖으로 집어던진다. 기사가 애써 헛기침을 한다. 좀 전에 경찰차가 지나갔어요. 저도 봤어요. 기사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다. 나는 기사의 얼굴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욕을 읽는다. 택시기사에게 정액이 묻은 지폐를 건네고 잔돈은 사양한 채 내린다. 뒷골목으로 접어든다. 유흥가 한 구석에 찾는 곳이 있다. 그곳은 책방이다. 보통 책방은 아니고 고서점이다. 번쩍거리는 주변과 부조화를 이루는 낡은 공간이 야릇한 매력을 준다. 처음엔 냄새나고 퀴퀴한 공간이 온몸에 거슬렸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마리 서사. 곧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간판이긴 하지만 그 글자는 묘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입 안 가득 맴도는 노래처럼 달콤하다. 주인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대꾸하는 법이 없다. 주인은 오빠를 알고 있을까. 두 다리가 없어진 오빠에 대해 말해 준다면 몇 권의 책을 덤으로 얹어주기라도 할까. 오빠는 이 서점만 고집한다. 한번은 다른 곳에서 책을 사 가지고 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을 속였다고 욕을 하며 책을 나에게 집어 던졌다. 환지통이라고 하나. 자신의 절단된 부위가 마치 있는 것처럼 가렵고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오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력이 강해지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천리안 같은 것이 생긴 것일까. 나는 오빠가 마리 서사를 고집하는 이유보다 어떻게 마리 서사의 책을 알아볼 수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더구나 헌책이라면 식별하기가 훨씬 어렵지 않을까. 곧 나의 궁금증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풀렸다. 마리 서사에서는 책의 밑 부분에 연필로 기호를 그려놓는 것이다. 세모, 동그라미, 네모, 가위표, 물음표 등으로 말이다. 그것은 가격을 식별할 수 있는 표시일 뿐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속으로 오빠를 얼마나 비웃어 주었는지 모른다. 오빠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눈으로 훑어가며 책을 찾는다. 역시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서점 주인에게 물어보면 간단할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오빠가 마리 서사를 고집하는 것처럼 책을 내 손으로 찾는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고집인 것이다. 책 따위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지만 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몇 줄 읽기도 하고,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요즘에는 글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오빠는 책을 읽을 뿐 글을 쓰지 않는다. 아니 내가 모르는 곳에서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식사는 마주 앉아 하면서 배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듯이 말이다. 그래, 나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아직 한 번도 쓴 적이 없지만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오빠 몰래 오빠의 책을 읽고, 오빠가 사 오라는 책은 어느 순간부터 오빠보다 먼저 읽고 있다. 나도 이젠 오빠에게 책을 권해줄 수 있다. 글을 쓰면 책을 만들 것이다. 멋진 하드커버로 만들어 오빠에게 읽어보라고 던져줄 것이다. 오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두 팔마저 자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책을 찾았다. 마술적 삶. 물음표가 되어있다. 나는 사인이 있는 지폐를 주인에게 내민다.
나는 고서점에 책을 모두 팔았다. 놀란 주인은 어찌된 일이냐고 재차 묻는다. 나는 밝게 웃으며 아저씨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라고 말한다. 더불어 가지고 간 드링크제 한 박스를 내민다. 이걸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은 당신이요.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사양한다. 그만 두십시오. 저는 지금 아주 홀가분합니다. 더 이상 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책값만 적당히 쳐주세요. 형편없는 것들이긴 하지만요. 주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서랍을 열어 돈을 세어 준다. 지폐 뭉치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온다. 주인이 뒤에서 중얼거린다. 불쌍한 인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뭉치를 만지작거린다. 어차피 같은 종잇장일 뿐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같은 나무로부터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걸음을 빨리 해서 걷는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면 내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한다. 그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미소를 지어 보인다.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아내 말도 있고 해서 직장에는 휴직서를 냈다. 다락에 있는 책을 정리해서 밖으로 내놓는 것만 해도 하루가 걸렸다. 아내는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건 내 짐이고 내 죄야. 누구도 도와줘서는 안 되지. 오랜만에 자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딸애는 얼굴을 찡그린 채 먼지 먼지라고 말하며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아내는 내심 걱정이 되는지 정말 괜찮은 거야. 좀더 생각해 봐라고 말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전화를 건다. 딸애가 받는다. 우리 예쁜 공주님, 왕비마마 좀 바꿔 주렴. 엄마, 아빠가 이상해. 엄마보고 왕비마마래. 아내는 다락을 정리하고 있다고, 갑자기 너무 텅 비어 허전하다고 한다. 어디로 갈 거야. 아직 모르겠어. 괜찮다면 집으로 그냥 들어와. 글쎄 거리를 좀 걸어보기라도 해야지. 정말 괜찮은 거야. 물론이야. 집에 갈 때 아주 싱싱하고 시큼한 오렌지 사 갈까. 아내가 피식거리며 웃는다. 나도 따라 웃자 내 웃음소리를 오랜만에 들어 좋다고 말한다. 이젠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어. 아내가 다시 웃는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이상하다는데. 부러 그럴 필요는 없어. 끊을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온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디를 가도 그 끝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 전에 발을 끊은 술집으로 향한다. 술집은 주인이 바뀌어 있고 인테리어도 달라져 있다. 부드러운 재즈 대신 요란한 록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위스키를 마신다. 석 잔을 단숨에 마시고 일어난다. 오랜만에 마셔서인지 몸이 비틀거린다. 탁자 위에 지폐를 올려놓고 나온다. 혀끝이 찌릿찌릿하다. 조금 걷다가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를 마신다. 시뻘건 꼼장어 안주가 눈앞에서 춤을 춘다. 이가 빠진 노인처럼 웃음이 피시시시 새어 나온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옆에 앉은 청년들이 문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엇을 읽었고, 그 작가의 사생활은 소설처럼 정말 더럽다고, 나는 새벽 2시에 수음을 한 뒤 글을 쓰기 시작해. 이런 소리를 되는 대로 지껄이고 있다. 갑자기 욕지기가 인다. 입 안에 담긴 소주가 바닥으로 토해져 나온다. 몇 사람이 뒤로 물러난다. 그러니까 소설은 허구일 뿐이야. 왜 자꾸만 그것을 잊어먹는 거야. 그들은 아랑곳없이 계속 떠들고 있다. 소주병을 들어 나머지를 마시고 바닥에 던져 버린다. 그제야 나를 쳐다본다. 그들 중의 한 명이 중얼거린다. 난 저런 사람을 꼭 소설에 쓰고 말 거야. 다가가 그 놈의 멱살을 잡는다. 다른 녀석이 나를 걷어찬다. 나는 바닥에 엎어지고 몇 대 더 맞는다. 전혀 아프지가 않다. 더 때려 줘, 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슬금슬금 밖으로 기어 나온다. 옷을 털며 차도로 뛰어든다. 승용차 한 대가 급정거를 한다. 창문이 내려가고 안에서 욕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차가 떠난다. 택시를 탄다. 어디로 가십니까. 유리방. 기사는 나를 쳐다보며 다시 묻는다. 유리방. 유리방이라 했잖소. 그런 데가 있단 말이요. 유리방, 여자, 유리방. 아, 알겠소. 알겠소. 기사가 손사래를 치곤 음흉하게 웃으며 핸들을 꺾는다. 잠시 잠이 들었나보다. 기사가 나를 깨운다. 여기가 어디요. 어디긴 어디요. 유리방이지. 여긴 유리방이 아니요. 저것 봐요. 저 유리에 갇혀 몸을 꼬고 있는 색시들이 안 보이유. 여긴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고말고 어서 내려요. 나는 머뭇거리다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내민다. 이게 뭐유. 더럽게 뭐라고 써 있잖소. 뭐요. 이것 봐요. 젠장, 이건 내 꺼야. 나는 지폐를 낚아채곤 다른 지폐를 던져준다. 문을 열고 나오려 할 때 기사가 중얼거린다. 미친 새끼. 기사의 말대로 유리방이 맞다. 내가 찾는 유리방은 아니지만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혹시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이 팔을 잡고 귓속에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다. 그녀는 나의 팔을 잡은 적이 없다. 이것들은 모두 가짜다. 유리방은 껍데기일 뿐이다. 나는 욕을 하며 여자들의 팔을 뿌리친다. 돌멩이를 주워 유리에 던진다. 유리가 깨진다. 여자들과 사내들이 몰려나온다. 도망친다. 얼마 달리지 못하고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흙을 입에 문 채 여자에게 말한다. 당신인가요. 그 순간 무엇인가 나의 머리를 내리친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오빠가 자살했다. 이것은 내 소설의 첫 문장이다. 마리 서사에서 책을 사 가지고 온 날 오빠는 휠체어에 앉은 채 죽어 있었다. 나는 오빠의 몸에다 내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오빠를 화장하고 나선 휠체어에 앉아 오빠가 읽던 책에 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첫 문장 이외엔 어떤 글도 쓸 수 없었다. 오빠의 책에는 오빠가 자살했다라는 문장으로 가득했다. 마치 오빠가 자살했다라는 모양의 지네가 기어 다니는 듯했다. 유리방과 마리 서사 그리고 휠체어가 내 삶의 전부를 말해 주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마리 서사에서 책을 한 권 샀다. 그 책의 첫 표지에는 글씨가 씌어 있었고 사인이 되어 있었다. 책들을 뒤적거려보니 한두 권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나는 책들을 펼쳐 사인이 있는 것들은 무조건 사들였다. 작자가 누구이고 무슨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방안 한구석에는 그의 사인이 담긴 책이 탑처럼 쌓여 있다. 유리방에서도 나는 그의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책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에 더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그전보다 지폐가 더 많이 들어온다. 누군가는 내가 펼치고 있는 책이 또 다른 음부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뒤 가끔씩 책을 음부에 비벼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돈을 줄 테니 그 책을 달라고 했지만 그런 적은 없다. 그의 책이다. 그는 오지 않는다. 요즘엔 부쩍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책이 아니었을까. 책 속의 인물들이 걸어 나와 나에게 사인을 한 지폐를 건넨 것이 아닌가. 나는 유리방에서 그를 기다린다. 마리 서사에서 그의 책을 찾는다. 휠체어에 앉아 오빠의 책과 그의 책에 번갈아 가며 글을 쓴다. 그렇다. 두 번째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책이었다. 그리고 계속 쓰게 된 것이다. 오빠가 자살했다. 그는 책이었다. 오빠는 책에 손을 자주 베곤 했다. 오빠는 그 피를 책에 떨어뜨렸다. 피에 젖은 활자들은 스스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빠가 잠든 사이 활자들은 서로의 몸을 걸고 책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다음 날이면 활자들이 조금씩 여백으로 밀려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오빠는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고 피를 흘렸다. 오빠가 책에 머리를 박고 잠든 어느 날 활자 하나가 책에서 튀어 올라 오빠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곧 오빠의 기다란 혀가 책으로 떨어졌고, 활자들은 숲 속 난쟁이들처럼 아우성을 치며 오빠의 혀를 타고 입 속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빠가 목이 막혀 캑캑거릴 때마다 활자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몸을 비틀었다. 그날 밤 오빠는 숨이 막혀 죽었다. 사인은 스스로 목을 조른 자살로 판명되었다. 오빠를 화장하고 나는 오빠의 책을 뒤져 활자들이 없어진 곳에 새로운 활자들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작업이었다. 손의 지문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고 머리가 허옇게 세고 있었다. 이가 몇 개 빠지고 그 사이로 시린 바람이 들락거리며 안부를 물었다. 썩은 활자들이 몸을 파고들었다. 내 몸을 숙주삼아 기형적인 활자들을 낳고 또 낳았다. 오빠의 책에서 탈각(脫却)된 활자들을 모두 적어 넣을 무렵 그가 찾아왔다. 그는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활자들로 이루어져 있던 그는 자기를 읽어보라고 했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자 그는 그건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를 보고 내가 처음 읽은 문장은 이러했다. 나는 지금 유리를 통해 너를 보고 있다.
나는 다시 유리를 통해 너를 보고 있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황홀할 지경이다. 너는 그 동안 많이 야윈 것 같다. 얼굴 윤곽에 음영이 진하게 드러나 있다. 나 역시 많이 야위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식물처럼 침묵을 지키며 최소량의 일조와 수분으로 살아갔다. 일어나 보니 처음 보는 여자와 조그만 계집아이가 근심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침이 잔뜩 묻은 막대 사탕이 들려져 있었다. 여자는 손수건으로 눈을 콕콕 찍었고 그럴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유산을 했다며 오렌지 오렌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들을 보고 내가 처음 한 말은 유리방이었다. 여자는 나에게 거울을 보여 주었다. 봉두난발에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거울을 갈라지게 만들었다. 나는 거울을 집어 던졌다. 거울의 파열음과 동시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척했다.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내 예상대로 얼마 후 그들은 나를 두고 사라져버렸다. 아니 내가 그들을 사라지게 했다. 나는 주머니에 지폐를 한 장 넣고 몇날 며칠이고 유리방을 찾아 헤매었다. 유리방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어떻게 유리방과 너를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가닥의 희망으로 꿈속에서 본 미로를 따라온 것일 뿐이다. 나는 지금 깨어있는가. 깨어있는 것은 내가 맞는가. 나는 지폐를 한 장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젠가 너에게 준 것이다.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내 손에 쥐어졌을까. 이런 확률은 잘 계산되지 않는다. 너는 책을 읽고 있다. 너는 변했다. 유리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니. 너의 손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책이 된 듯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일찍이 너의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네가 들고 있는 책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읽은 기억이 있다. 책을 읽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틀림없이 그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너에게 말을 하고 싶다. 그건 별로 가치가 없다고. 세상에는 그것보다 가치 있는 책이 얼마든지 많다고. 그리고 책을 읽지 않을 때 세상은 더 가치를 발한다고. 너는 책을 읽으며 나의 지폐를 기다리는가. 나무의자에 앉아 너를 바라본다. 너는 정말 책을 읽고 있는가. 나는 지폐를 구깃거린다. 연필을 꺼내 쓴다. 손이 심하게 떨린다. 글을 써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내가 쓰는 활자들이 맞기나 한 걸까. 글을 다 쓰고 나선 사인을 한다. 틈에 넣는다.
나는 유리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책은 이제 손에서 자라난 또 다른 손 같다. 나는 책의 활자들을 바라보며 내 운명을 읽는다. 이것 역시 너의 사인이 있는 책이다. 앞표지에 너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연필을 부러뜨렸다. 연필 깎는 칼로 책상 모서리를 깎아대며 자책했다. 실로 아름다운 책이다. 이 책은 내 눈에서 빛을 거둬가고 내 손의 지문을 지웠다. 나약한 나를 구원해 준 것이 책이었다면 나를 더 나약하게 만든 것도 책이다. 이제 나는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다. 너의 글처럼 대단한 책은 아니다. 무엇 때문에 너는 이 책을 그렇게 찬양했을까. 벌써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읽을수록 그나마 있던 책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나는 책을 높이 든다. 숲을 지키는 고목처럼 나는 딱딱하다. 오늘도 너는 오지 않는가. 알람시계가 나의 눈을 초조하게 한다. 지폐 한 장이 배달된다. 나는 책을 떨어뜨린다. 책 모서리에 발등이 찍힌다. 아픈 것도 잊은 채 지폐를 주워 든다. 너의 사인 위로 붉은 조명 빛이 눈을 모은다. 지폐에 적힌 너의 글을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손이 떨리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너는 무슨 말을 이토록 하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가. 너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글을 써 왔을 것이다. 아니 너는 한 번도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두렵다는 너의 활자를 어루만진다. 나는 팬티를 벗고 지폐를 구겨 음부 속에 넣는다. 다리를 모은 채 책을 들어 앞표지를 찢는다. 네가 오기를 기다려 준비한 연필을 들고 거기에 글을 쓴다. 당신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순간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저를 바라보고 있으시겠죠. 제가 당신이 된 것인지, 당신이 제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저만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그 거울 이면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제 얼굴에 투영해 보았지요. 이 거울은 아주 견고합니다. 하나의 딱딱한 서적처럼. 유리방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유리를 통해 거울을 보는 것이다. 결국 책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이 되겠죠. 물론 당신은 이미 잘 알고 있으실 겁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당신은 글을 쓸 수 없었고,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차이 같지만 사실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유리와 거울의 차이 정도겠죠. 그 무의미를 한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당신의 글이 좋습니다. 당신이 마리 서사에 판 책들은 제가 모두 사들였습니다. 저는 책보다 당신의 글을 더 꼼꼼히 읽었습니다. 당신이 책에 대해 말을 하면 저는 당신이 적은 글을 외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글을 통해 당신을 보았고, 당신은 당신의 글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만져 보면 마른 책장 같은 느낌이 들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신을 안으면 몸에서 퀴퀴하고 따뜻한 고서 냄새가 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신을 볼 수 있다면 아, 당신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의 글을 볼 수만 있다면 저는 글을 쓰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유리방처럼 투명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글을 읽고 싶습니다. 당신 안에 갇힌 더 좋은 글을 읽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너의 글을 읽고 아름다운 치욕을 느낀다. 너는 존재하고 있는가. 너도 이미 한 권의 책이 된 것은 아닌가. 내가 현실의 문을 닫았을 때는 꿈의 문이 보였다. 꿈의 문을 열자 끝없이 환상의 문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도망쳤다. 그 수많은 문을 열수가 없었다. 손을 대면 손이 없어지고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그 문은 내 앞에 더 가까이 놓여 있었다. 그 경계에서는 활자들이 파수를 서고 있었다. 나는 좌절했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너는 여전히 유리방에 있다. 너의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리고 있다. 조그만 벌레 같은 활자들이. 너는 내가 보이는가. 나의 존재를 믿는가. 유리방은 유리방이 맞는가. 종이를 구겨 입 속에 넣고 씹어 먹는다. 무언가 딱딱한 것에 이가 부러진다. 침을 뱉자 ‘피’라는 활자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을 발로 뭉개버린다. 몸을 날린다. 유리방에 몸을 던진다. 유리방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마치 딱딱한 하드커버의 고서 같다. 몇 번이고 유리방에 몸을 던진다. 몸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다. 거울이 깨졌다. 나의 아름다운 몸도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떨어진 나의 파편을 주워 모은다. 하나하나 퍼즐을 맞춘다. 거울을 다 맞추고 그것을 들어 벽에 세운다. 유리방이다. 유리방에서 너는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유리를 통해 너를 보고 있다.
김태용․
1974년 서울 출생
․2005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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