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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김영산 작품론/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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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74회 작성일 08-02-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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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산 작품론|

벽과 벽의 환상을 가로지르는늙은 게임광의 고백
―김영산의 게임시 읽기―

조하혜(시인)


‘화려한 게임의 팔 할은 전쟁’이라고 불혹을 넘긴 시인은 눈부신 환타지의 세계에서 아이처럼 무한한 전쟁놀이에 푹 빠져있다. 불혹(不惑)이라는 나이의 벽을 넘어선 그에게 전통적 서사의 찬란했던 우주의 초월적 신성은 게임의 환상으로 대치되었다. 스스로 ‘자연정원의 시대는 끝나 있었다(시작노트)’고 고백하는 그에게 유기체적 순환의 자연 서사가 보여준 희망과 안정의 세계는 철거개발 중인 오봉산 봉우리 소나무 기둥에 코팅된 종이 푯말 ‘자연 속에 내가 살고/내 정성에 자연 산다’처럼 무용지물(「철거(2005)」)이거나, 스카이 라이프에 목을 매달고 날마다 흐느껴 울며 기도하는 10층 여자(「어떤 기도」)처럼 광(狂)적인 것이 되었다.
불혹의 벽을 넘기면서 시인은 아무래도 낙타처럼 점점 불룩해지는 의혹의 혹을 낙태할 수 없었던 게다. 한때 견고한 성채와 같았던 빛나던 옛 맹세처럼 혁명도 사랑도 청춘도 기울고, 루카치가 말한 밤하늘의 빛나던 숭고한 별도 비틀거리는 여름 해변가의 쓰레기더미처럼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를 고래고래 부르며 밤새 먹은 술을 아무렇게나 게워놓는 자본주의의 밤 풍경 아래 하나 둘, 빛을 잃어갔을 게다.

누가 전철역 바닥에 한 무더기 똥을 싸놓았다
얼굴을 찡그리고 외면하고 가는데
눈앞에 붉은 것들이 어른거린다
가던 길 멈추고 보니 피가 흥건하다
피똥이다, 어느 노숙자가 싸놓았나
―「멀리 돌아가는 성(城)」 부분

이런 광경은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걷는 환승역에서 노숙자의 것으로 보이는 ‘피똥’(「멀리 돌아가는 성(城)」)처럼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멀리 돌아서 가야하는 성(城)’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광경 속에서 죽음을 본다는 것이고, 이미 죽음은 ‘자살도 못한 죽음’이란 표현처럼 헤어날 길도 없는 도처에 적재된 죽음의 배설물로 견고한 성(城)을 쌓아올렸음을 의미한다.
순환을 통한 회복과 재생의 희망을 보여주었던 자연 서사가 방향성을 잃고 시적 서정조차 건강하지 못할 때, 시인은 제 몸에 신음과 고통을 각인하며 고통의 경전을 써 대리라.
그러나 누군가는 이러한 배설과 쓰레기들을 피해 히말라야와 같은 정신의 고산준령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쓰레기들의 잔해를 모아 냉동 포장해 두었다가 살 만한 새로운 세기가 되면 해동시켜야 한다고 하고(연민의 마음일랑 이해하지만 난 이 생각이 제일 싫다. 적어도 강력히 난 냉동식품이 아니니까), 피똥과 더불어 피똥을 싸며 가야 한다고 배추처럼 술독에 절여져서는 요절을 위해 달리기 시합이라도 벌이는 양 치기처럼 스러져갔으며, 퇴행을 반복한 끝에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바꾸어달고 만화 속 인물이나 인형극의 끈 달린 인형으로 태어났으며, 자발적으로 실험실로 기어들어가 인간탈출을 감행하거나, 쓰레기의 DNA를 분석하는 냄새나는 직업의 세계에 뛰어들어 업(業)을 업고, 운명의 감수를 써내려가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 가운데 ‘전쟁’은 가장 잘 나가는 상품코드가 되어 급성장 매출 1위, 포털사이트 검색 연속 1위로 당당히 등극하였다. 베트남, 코소보, 이라크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 십자군 전쟁……. 사랑과 전쟁, 장미와 전쟁, 비만과 다이어트-영영 끝나지 않을 살과의 전쟁, 내신전쟁, 마켓팅 전쟁, 기타 등등. 전쟁의 유행으로부터 시인은 도처에 만연한 죽음의 성을 돌며, 고통의 경전을 읊조리다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전쟁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었으며, 게임광이라 불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전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서두른다
나는 전철을 탈 때마다 감전된 것처럼 서두른다
―「멀리 돌아가는 성(城)」 부분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2002, 한길사)에서 욕망의 삼각형을 들어, 욕망의 모방이론에 대해 설명한다. 즉 개개인이 느끼는 욕망은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자기만의 욕구 같지만, 이런 믿음은 근거 없는 ‘낭만적 거짓’일 뿐이며, 욕망의 주체인 나는 다른 사람이 이미 선망하는 대상을 갖기 원한다는 것이다.
덩달아 서두르고, 바삐 걸으면서 시인은 자신의 행동이 ‘사람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반사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고백한다.

피똥이다, 어느 노숙자가 싸놓았나
파란 의자 밑에 웅크리고 있다
둥근 가장의 어깨는 성(城)과 같다― 견고하니 무너진다
―「멀리 돌아가는 성(城)」 부분

어느 가정의 가장이었을 법한 노숙자의 피똥을 보며, 둥근 가장의 어깨를 상상하다가 그 어깨에서 성(城)의 견고함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불혹(不惑)의 벽을 넘어선 시인의 낙타와 같은 혹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불혹이란 명칭의 유래는 나이 마흔에 도달한 이의 삼킬 수 없는 어떤 견고한 혹, 낙타와 같이 어쩌면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하는, 굳은살처럼 파버릴 수 없는 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결코 소리 내 울지 않는 울음주머니 같은, 고통이 그 혹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음 직하다.

가출한 아내, 올망졸망한 어린 눈빛들이 어른거린다
자살도 못 한 죽음이 어른거린다
곧 죽으리라
죽으리라
도시의 피로는 쌓이고 쌓여
멀리 돌아서 가야하는 성(城) 같은 것을 이루었다
―「멀리 돌아가는 성(城)」 부분

‘가출한 아내와 올망졸망한 어린 눈빛’을 가진 자식들을 둔 가장의 어깨는 견고했던 만큼 노숙자의 ‘피똥’처럼 무너져 내리는 성이 되었고, 이러한 광경 속에서 자신의 어깨에 달라붙은 ‘피로’처럼 언젠가 자신을 덮칠 죽음의 성을 돌아가리라 결심하는 불혹에 이른 사내는 가상현실 속의 환타지의 성(城)을 찾아 게임 속으로 빠져든다.

성(城)은 어디 있는가

로랜 협곡의 성(城), 처절한 전장이 될 것이다. 저주의 바람이 불 것이다. 음산한 분위기, 창처럼 솟은 성(城)이 하늘을 찌른다 길드 마스터의 레벨 200이상, 길드 인원 20명 이상의 조건을 충족시킨 길드만이 공성전 선포를 할 수 있다.
―「뮤 공성전」 부분

게임 시놉시스를 고스란히 옮겨 적은 이러한 게임시들 속에서 시인은 적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서, 자신의 욕망을 확보할 공간을 욕망한다.

게임― 게임 공간 속은 가상 세계이다
그 넓은 대륙 바다에 섬이 하나 있다
그 섬이 실제 돈 이천만 원에 거래됐다

나도 그 섬을 사고 싶다
―「섬」 전문

가상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점차 게임의 세계 속에서 존재감(존재 욕망)을 느끼는 서사의 줄거리는 흡사 우리에게 영화 <플라이> 혹은 칸느영화제 수상작인 <크래쉬>나 2004년 국내에 개봉되었던 <스파이더>로 알려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엑시스텐즈>라는 영화 속 줄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엑시스텐즈’는 인간의 신경계와 직접 연결되어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만드는 게임의 일종인데, 게임을 시작한 12명의 체험자는 현실을 떠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인간성을 잃어가게 되면서 극은 이러한 게임을 반대하는 현실주의자들과의 전쟁 속으로 치닫고,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혼동한다. 결국 시뮬레이션 게임을 끝내고 현실 속으로 돌아온 이들은 게임의 개발자를 저격하는 저격수가 되어 가상현실의 인물처럼 행동하게 된다.
인간의 척추에 바이오포트라는 게임 접속 기계를 설치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 장면이나 무료하고 지루한 현실 속에서 점차 가상현실 게임에 중독되어 가는 줄거리는 공상과학의 미래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눈앞에서 현실화되어 가는 게임현실에서의 존재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임 없는 세상은 지옥이다/(중략)/나는 게임에 질 때마다 내 플레이를 자책하며 우울증에 빠졌다/그러나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게임뿐,
―「프로게이머」 부분

‘게임 없는 세상은 지옥’이라고 서슴지 않고 표현하는 위의 시를 읽으며, 나는 토도로프의 서사형식이 생각났다. 서사의 부재는 죽음이요, 서사의 존재는 삶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증명해냈던 구조주의자처럼 시인에게 게임의 서사는 현실에서 결여된 존재의 욕망을 대신한다. 이때 게임의 서사는 서사적이지 않은 삶을 살면서 이야기를 통해 상실과 쾌락을 보상받길 원하는 욕망, 즉 서사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보여주고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주체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점차적으로 잠재적 주체에서 영웅의 모습으로서 자신을 발현해나갈 수 있기를 욕망한다.

게임에는 레벨이라는 게 있지
적과 싸워 물리치고 죽이면 레벨이 올라가지
레벨이 오르면 캐릭터의 능력치가 증가하고
업(UP) 시키려면
싸워서 이겨야 해,
업(UP)시키려면
업(業)이야,
업(業),

―「게임은 진화한다․1」 부분

시 <게임은 진화한다 1>의 소재가 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종족끼리의 생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 게임 속의 생존자들은 싸워야 하는데, 이때 싸움은 레벨을 업(UP)시키기 위한, 즉 여타의 목적이나 의미를 위한 싸움이 아닌, 생존 자체를 위한 싸움, 싸움을 위한 싸움을 싸우는 것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싸움은 적의 정체성이나 주체의 정체성의 문제를 초월해 적이 존재한 상황과 싸움의 상황을 일종의 업(業)으로 수용한다.
전쟁의 화염이 한반도를 스쳐간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것은 지워낼 수 없는 업(業)처럼 불 닿는 전쟁의 불씨를 태우고 있다. 북핵에 대한 관심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온 천지에 천둥벌거숭이와 빨갱이들이 설치고 다닌다고 외치며 한미공조와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뉴스에 연일 오르는 전쟁기사에도 아랑곳 않고 연애기사에 골몰하거나 아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의 블로그 속에서 세계를 공유하고 세계의 변형을 모색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신인류의 탄생에 대하여, 시인은 ‘게임을 하면서도 게임왕국의 주인이 될 수 없다(시작노트)’고 자신의 비관된 처지를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현실의 불안, 걱정’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주인인 세계 속에서 엄연한 성인으로서 그는 현실이 넘을 수 없는 벽과 벽의 환상을 가로질러 게임광을 자처하며 적과의 공존을 업(業)으로 수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임 가운데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베틀로얄급의 살인본능, 즉 폭력을 선두에 내세운 전쟁 본능은 익숙한 전쟁 시나리오 속에서, 이미 가상현실이 아닌 전쟁의 혐오 속에서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서, 게임이 아닌 현실 속에서, 공존과 화평이 있을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평화 혹은 전쟁만이 가능한 세계 속에서 적은 오로지 완벽하게 악한, 더 이상 위악적이지도 역행적이지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적이 되어, 우리들의 눈앞에서, 우리들의 영토에서, 우리들의 행성에서 사라져 갔거나 사라져야 마땅한 극악무도한 어느 것보다 해로운 것이 되었다.
스스로 게임광을 자처하고서도 ‘현실의 불안, 걱정’ 때문에 게임에 몰입이 잘 안 된다고 말하는 어눌한 시인의 고백을 들으며, 만연된 전쟁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 서사욕망을 대신할 존재 공간을 찾아 키 작은 아이들 틈으로 들어간 불혹 시인의 낙타 같은 어깨와 눈알을 상상해본다. 늙어가는 당신의 슬픈 얼굴을 닮았다.


조하혜․
1994년 ≪현대시사상≫ 등단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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