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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젊은 시인 3인 집중조명/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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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식
겨울 나그네
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가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 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할 어떠한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나도 안다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당연한 싸움
남해 보리암
겨울비와 안개는 모든 전망을 지웠다
저 바람 소리, 말을 달리는 바람이
창을 꼬나들고 네게 달려든다
부당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겨울 해변의 풍광이 유리처럼
온몸을 베고,
이 산에 올라와서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싸움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만불전(萬彿殿) 앞에 와 나를 들여다보고 서있는
온 세상의 물기들
얼음 수족관인 지구를 깨고
부당한 내 죽음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이 겨울의 끝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구에서 보내는 한철,
지구 밖의 죽음을 꿈꾸는 것
하여 그것은 별이 되는 일
배웅
오래 前 고상돈 대원이 죽었다
그는 여전히 대원이고
여전히 눈 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가 입었던 체크무늬 남방은
아직도 그의 몸 위에서
언뜻언뜻 햇살과 어울리다가
다시 꽁꽁 얼어갈 것이다
山 잠을 자는 그에 대한
우리의 배웅은 이토록 길고도 질긴 것이다
눈사태가 오고 있다
너무도 큰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그는 대원이다
흰 예배당 같은 눈더미를 온몸으로 받는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흰 예배당에서
그는 안식하고 있는 중이다
얼굴이 검게 탄 그가
“나마스떼” 인사를 건넨다
대원은 안식 중이다
나도 안식으로 가는 중이다
*고상돈 대원 : 1977년 9월 15일 고상돈 대원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원정에 성공한다. 그 후 2년 뒤인 1979년 6월 알래스카의 매킨리 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는 길에 빙벽에서 추락해 사망 영원한 ‘산 사나이’로 남는다
*나마스떼 : 네팔의 인사말로 나의 신이 당신의 신에게 몸을 숙인다는 뜻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허리를 숙이며 한다.
발의 죽음
안개 속에서
雪山에 묻고 온 내 발이 운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꽁꽁 언 발이 엉엉 운다
바람의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은 암흑의 눈 속에서
내 부고장을 받아도 조문도 못 할
썩지 않을 푸른 발이 운다
텅 빈 십자가가 발 무덤 위에서
바람의 유전자와 입을 맞춘다
산상을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처럼
칠흑의 하늘을 걸어보는 것
내 발의 꿈이다
내 발의 죽음이다
해변의 조르바
내 춤을 보라
내가 퉁기는 絃의 불꽃을 보라
오오 밥풀떼기 같은
빛나는 별을 보라
한낱 술주정뱅이의 노래를 들으라
해변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되는 법
저기 부딪쳐 오는 밤 파도에서
누구나 죽음을 느끼는 것
바다의 광산에서 노동하는
물고기들이여
물결을 파라
해저의 광맥을 파 제껴라
밤마다 내가 꾸는 꿈은
깊게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
고통도 없이 부푼 내 배가
바다 위에 떠오르는 것
소리여 絃이여
내 죽음을 용서해다오
겨울, 고백, 2004
지난 연말
술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다 다리를 삐었다
몸의 고통, 구토와 기절로 어두운 골목길에서 헤맸다
억울한 죽음이 내게 몰려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연말, 기부스를 하고 며칠 동안
그 한심하다는 텔레비전만 보며 살았다
눈먼 부부가 아이를 키우고
난쟁이 분식집 아저씨는 밥을 지어
크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위해
못 할 것이 없다고 울면서 말했다
‘어머나 어머나’ 노래를 수십 번 들으며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 한심하다는 풍문의 텔레비전보다 내 삶이
나은 것이 없었다
눈 한번 내리지 않은 깊은 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가을 귀뚜라미
개․꽃․가오리․고래․靈이 있는 나무
魂이 나간 귀뚜라미
가을이다
한 걸음만 더 지상 밖으로
시작노트
육박
지난겨울 산책을 나갔다가 다친 너구리 한 마리를 목격했다. 아마 올무에 걸렸다가 풀려났던 모양이다. 그는 지향을 잃고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나와 마주쳤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몹시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모든 감각의 회로가 그의 생에 접속되어 있을 터였다. 가능하면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나는 조심스럽게 내 길을 걸었다. 문제는 그가 걸어가는 방향이 민가를 향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죽음의 길을 뜻하기 때문이다. 민가의 개들은 있는 힘을 모두 모아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아주 천천히 서로 육박해 가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싸움을 나는 슬며시 외면했다. 내게도 저 같은 어느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내 몸의 긴장을 스스로 다스리며 주저 없이 그 길을 걸어갈 용기가 내게 필요하다. 그 용기는 내게서 오는가? 아니면 적에게서 오는가?
나는 요즈음 육박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있다. 초월이라는 말보다도 더 매력적이다. 그 말 속에는 실천의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일생일대의 싸움을 위한 육박, 지금 내 적은 나다.
우대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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