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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우대식 작품론/하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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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식 작품론|
적멸의 꿈과 五里의 상상력
―우대식의 시세계―
하상일(문학평론가)
우대식의 시는 죽음 속의 삶 혹은 삶 속의 죽음이라는 역설적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이에 맞서는 시적 진실을 지향한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초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모순과 긴장을 형성하는데,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펼쳐진 “五里”의 시공간은 그의 시가 개성적으로 창조해낸 역설적 세계이다. ‘五里의 시공간’은 물리적인 사유와 인식을 훨씬 넘어서는 적멸의 꿈을 간직한 곳이다. “五里만 더 걸으면” 보이는 “좁다란 오솔길”과 “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五里”에 있는 “봄”과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어머니”(「五里」,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이하 늙은>)는 소멸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소멸은 “바람보다 몸이 가벼워질 때/깊은 침묵으로 서서히/지워질 뿐/쓸쓸한 추락으로 땅 위에 몸을/박지는 않는” 새의 죽음과 같다. 하지만 시인은 새의 죽음에 대해 “이 지상에서 꿈꾸지 않았으므로/아프지 않은 죽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새들의 무덤은 없다」, 늙은)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소멸이 아름다울 수 있는 진정한 이유를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지상에서의 삶을 배제하고 꿈꾸는 적멸의 세계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실과 초월의 경계 위에서 소멸과 생성의 양가성을 획득하는 시적 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하지만 현실의 모습은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 “평행의 보폭”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의 모순을 가로지르는 시인의 상상력은 언제나 절망적인 벽에 부딪침으로써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고여 있”는 이 세계와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시인은 현실의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할 어떠한 경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겨울 나그네」)하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은 이 세계와의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이것이 “당연한 싸움”임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다. “얼음수족관인 지구를 깨고/부당한 내 죽음을 완성하는” 역설적 전략을 견지함으로써 “부당한 죽음”으로 가득 찬 현실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해 보리암/겨울비와 안개는 모든 전망을 지웠다/저 바람 소리, 말을 달리는 바람이/창을 꼬나들고 네게 달려든다/부당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겨울 해변의 풍광이 유리처럼/온몸을 베고/이 산에 올라와서/이 세계에 대한 나의 싸움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만불전(萬佛殿) 앞에 와 나를 들여다보고 서있는/온 세상의 물기들/얼음수족관인 지구를 깨고/부당한 내 죽음을 완성하는 것/그것이 이 겨울의 끝이다/앞이 보이지 않는 지구에서 보내는 한철,/지구 밖의 죽음을 꿈꾸는 것/하여 그것은 별이 되는 일
―「당연한 싸움」 전문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으로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겨울 나그네」)한 화자는 스스로 “모든 전망”을 지움으로써 현실과 당당히 맞서려 한다. 이 세계는 “부당한 죽음”이 난무하는, 그래서 “겨울 해변의 풍광”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마저도 “유리처럼/온몸을 베”는 폭력적 실체로 각인될 수밖에 없는 너무도 ‘부당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남해 보리암”으로 가는 길에서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싸움이 당연한 것”이라는 실존적 깨달음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 지금이 “겨울의 끝”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지구에서 보내는 한철”이라는 극한적 세계인식은 화자에게 “지구 밖의 죽음을 꿈꾸”게 하는데, 여기에서 ‘죽음’은 소멸과 생성의 모순과 긴장을 초극하는 적멸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시인이 꿈꾸는 적멸의 세계는 현실의 욕망과 미래의 전망에 집착하는 세속적 태도로부터 멀리 달아난 세계다. “골격만 남은 나무 끝둥 같은 것이/눈을 맞고 앉아 있”(「歲寒圖」, 늙은)는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내리는 눈에 뒤덮여 그대로 사라져 버릴 듯하지만, 그 속에서도 “소나무의 푸르름”은 더욱 생명력을 발함으로써 자연의 풍경을 온전히 간직한 곳이 바로 적멸의 세계이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사물들의 경계가 지워지고 삶과 죽음의 관습적 인식마저 사라진, 그래서 무거운 현실의 죽음조차도 “안식”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적멸의 꿈은 실현되는 것이다. 우대식의 시에서 ‘죽음’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닐 정도로 그의 시에는 도저한 죽음의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의 시에 형상화된 죽음의 세계는 음울하고 비극적인 의미를 불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밝고 희망찬 의미로 전이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결코 죽음을 삶의 끝이라는 시간의식에 기대어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래 前 고상돈 대원이 죽었다/그는 여전히 대원이고/여전히 눈 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가장 높은 곳에서/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 셈이다/그가 입었던 체크무늬 남방은/아직도 그의 몸 위에서/언뜻언뜻 햇살과 어울리다가/다시 꽁꽁 얼어갈 것이다/山 잠을 자는 그에 대한/우리의 배웅은 이토록 길고도 질긴 것이다/눈사태가 오고 있다/너무도 큰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그는 대원이다/흰 예배당 같은 눈더미를 온몸으로 받는다/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흰 예배당에서/그는 안식하고 있는 중이다/얼굴이 검게 탄 그가/“나마스떼” 인사를 건넨다/대원은 안식 중이다/나도 안식으로 가는 중이다
―「배웅」 전문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원정에 성공하고 이후 알래스카의 매킨리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는 길에 추락해 영원한 ‘산사나이’가 되어버린 산악인 고상돈을 제재로 한 인용시는, 시인이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비록 고상돈 대원은 이십여 년 전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지만, “그는 여전히 대원이고/여전히 눈 속에 누워 있을” 뿐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가 평생을 꿈꾸며 살았던 “가장 높은 곳”은 이제 “가장 깊은 곳”으로 바뀌었는데, 그 높고 깊은 세계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꿈이 실현된 적멸의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남은 자들은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으므로 “산 잠을 자는 그에 대한/우리의 배웅은 이토록 길고도 질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다고 말하지만, 시인은 “그는 안식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흰 예배당 같은 눈더미를 온몸으로 받”으며 여전히 지금도 “나마스떼”하고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생생하다. 결국 시인은 그의 삶을 뒤쫓아 가길 진정으로 소망한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을 소멸시킴으로써 한없이 가벼워지려는 시인의 욕망은 죽음의 세계와 깊숙이 맞닿아 있다. 고상돈 대원이 영원히 살고 있는 적멸의 세계에서 그 역시 영원히 안식하고 싶은 것이다.
내 춤을 보라/내가 퉁귀는 絃의 불꽃을 보라/오오 밥풀떼기 같은/빛나는 별을 보라/한낱 술주정뱅이의 노래를 들으라/해변에서는 누구나/시인이 되는 법/저기 부딪쳐 오는 밤 파도에서/누구나 죽음을 느끼는 것/바다의 광산에서 노동하는/물고기들이여/물결을 파라/해저의 광맥을 파 재껴라/밤마다 내가 꾸는 꿈은/깊게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고통도 없이 부푼 내 배가/바다 위에 떠오르는 것/소리여 絃이여/내 죽음을 용서해다오
―「해변의 조르바」 전문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혼과 육신의 혼연일체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로 인간의 행복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 인간들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 속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조르바는 이러한 세상의 허위성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깨달으며 만물과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교감하는 통합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변의 조르바」는 시인의 자의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춤”, “현의 불꽃”, “빛나는 별”, “술주정뱅이의 노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는 부당한 현실을 초극하는 방법으로 예술적인 자유를 동경한다. “해변에서는 누구나/시인이 되는 법”이라는 말에서처럼 그의 시적 태도는 아주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부딪쳐 오는 밤 파도에서/누구나 죽음을 느끼는” 실존적 삶의 정직성을 구현하려 한다. 그래서 화자는 “밤마다 내가 꾸는 꿈은/깊게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고통도 없이 부푼 내 배가/바다 위에 떠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만물과 인간의 교감을 지향하는 조르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죽음의 너머에는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내게 몰려온다는 생각”이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은 “눈 한번 내리지 않은 깊은 밤이/오랫동안 계속”(「겨울, 고백, 2004」)되더라도 오히려 “밤마다 무덤을 떠올리”며 “한 편의 시”를 쓰는 마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밤에 쓰는 시”는 소멸의 세계인 동시에 새로운 생성을 이루기 위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지금 아픈 감옥이다/갇힌 몸 하나 이 밤을 밀어간다/산은 내 집을 밀어/타다 남은 앞마당의 휘날리는 재와 함께/빈들, 빈산으로 몰아가고/어둠과 길은 서로의 몸을 섞는다//주막에서 주막으로 가는/적조한 이 生/유랑의 족속들처럼 갈대를 가르며/헤매다 돌아온 이 밤/나는 살아있습니까/내 감각의 섬모를 세상에 디밀지만/소리가 없다//내가 세상을 밀 때마다/나는 점차 사라지고/아픈 감옥 하나 부서진다//밤마다 무덤을 떠올리는 것도,/밤마다 한 편 시를 쓰는 것도,
―「밤에 쓰는 詩」 전문
그에게 시는 “유서”와 같은 생의 무게가 담겨 있다. “주막에서 주막으로 가는/적조한 이 生/유랑의 족속들처럼” 살아온 시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나는 점차 사라지고/아픈 감옥 하나 부서”지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신산한 삶의 길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죽었다 죽었다”(「遺書」, 늙은) 되뇌이는 그에게 시는 적멸의 꿈으로 난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세계를 초월하는 실존적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굳게 확신한다. 그는 첫 시집의 「자서」에서 “시는 내게 음울한 낡은 집이며 동시에 숨은 神”이라고 말하면서, “숨은 神을 찾다 죽”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스스로의 묘비명을 적었다. 이처럼 그의 시는 죽음에의 욕망과 친화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 욕망의 끝을 따라가 보면 “끝이 보이는 화아한, 그렇게 화아한”(「山役 3」) 세계가 펼쳐져 있어 아이러니하다. 그곳에서 시인은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세계이다.
항아리에 고인 빗물,/빗물 위에 뜬 별/부러진 나뭇가지도 손 담그는 밤/저기 회청빛 강에서/어머니 걸어오신다/켜켜이 쌓인 어둠 쓸며/호미 한 자루로 쪼그려 앉아 오신다/불타는 집 속에서/흔적으로 남은 못 한 개/머리 비녀로 꼽고 오시다 점점/가신다 진흙 이겨/사람 하나 만들어 놓고/아프게 가신다/산도 넘고, 산맥도 길게 넘어/천 길의 고원에서/어머니 문 열고 집으로 들어가신다
―「항아리」 전문
소멸과 생성의 자리가 겨우 五里만큼에 불과하다는 그의 시의식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러한 五里의 상상력에는 ‘오시는 어머니/가시는 어머니’의 양가적 지향이 존재한다. 어머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키듯 “진흙 이겨/사람 하나 만들어 놓고/아프게 가신다”. 그가 발 딛고 서있는 현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뚜렷이 구별하는 긴장과 모순 속에 놓여 있지만, 어머니는 이미 이러한 경계를 초월적으로 깨달은 자의 평온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인의 궁극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어머니’는 “지구 밖의 죽음을 꿈꾸는” “별”(「당연한 싸움」)이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흰 예배당에서” “안식”하고 있는 “고상돈 대원”(「배웅」)이며, 사물과 인간을 한몸으로 인식하는 “조르바”(「해변의 조르바」)와 같은 존재다. 시인은 이들을 통해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적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진정한 길찾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한 걸음만 더 지상 밖으로”(「가을 귀뚜라미」) 나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五里만 가면/五里만 더 가면” 하며 그의 상상력을 뒤따라가는 필자의 감각은 너무도 둔감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이해하기란 너무도 역부족일 만큼 필자는 세속적인 삶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아포리아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점점 아둔해지는 나의 감각도 세상으로부터 가벼워지기 위한 한 방법일까? 그의 시를 읽으며 “내 발길은 더러 허공의 길마저도/밟을 수 있을 것 같”(「야크의 꿈」, 늙은)은 착각에 빠져든다. “五里만 가면/五里만 더 가면” 그가 진정으로 꿈꾸는 적멸의 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을 듯한데, 필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五里의 상상력은 세속적인 욕망과 전망에 대한 집착을 비워낸 가벼움 속에서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발걸음은 아직도 무거운 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적멸의 꿈으로 가는 五里의 상상력은 필자에게 여전히 五里霧中이다. 안개 바깥의 세계는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감으로 긴장이 가득할 뿐, 안개 속 진실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안개 속으로 성큼 들어서지 못한 채 여전히 그 경계를 머뭇거릴 뿐이다. 五里만 가면, 五里만 더 가면 …….
하상일․
평론집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 등
․현재 부산대, 부경대, 경성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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