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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젊은 시인 3인 집중조명/김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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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재개발도 안 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곳
삶이 문턱에서 허덕거린다
햇살은 아무나, 것이나 붙들어 들어갔다 뺐다 하고
선과 악이 날마다 쌈박질하며
그 속으로 더욱 궁둥이를 들이밀고
사람들은 달아나려 매번 자기를 죽이면서도 눈을 뜨는
내 바닥 불륜의 씨앗이 작은 방죽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는
닭장촌, 그곳
정착지도 모르고 날아들었다가 가로등 불빛에
타 죽어가는 날벌레 명줄 같은 금기의 자유
오누이가 사랑을 하고 사촌오빠가 누이를 범해 애를 낳는
온몸 짓푸른 얼룩을 감추기 위해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엄마가 얇은 시멘트 벽 옆집 남자랑 도망가 없어도
어른이 되어가는 그곳
수많은 세대들이 서너 개의 공동화장실을 들락거려도
그곳 문밖에 버려진 작은 화초들, 으깨진 보도블록에서 솟아나는 풀들
바닥 틈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간혹 보일 듯 말 듯한 꽃도 토해 놓고
나 도망가다 멈춰선 그곳
나방
창문에 달라붙은 나방 한 마리
그 자리에서 빙빙 돈다
문이 열려 있어도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하지 못한
눈먼 아니 아무것도
찾지 않는 한 마리 나방
팔딱거리는 가슴 때문인지
누워서도 쉴 새 없이 날개를 파닥거린다
무엇을 향한 갈증인가
날개가 찢어지고 쏟아지는 비틀린 언어들
침묵 속으로 둥글게 둥글게 말리는, 몸뚱이는
다시 애벌레로
생에 한 번 나방은
시를 쓴다
관(棺)으로
그녀를 만나다
그곳에 가면
초경의 열병 온몸으로 앓으며
처음 했던 자위행위 같은 내 사랑이
남아 있다
나 이미 멀리 떠나왔으되
아직도 거기, 그녀
날것으로 사랑하고 있다
가끔은 그곳에 간다
몸뚱이에 기름기가 쫘악 빠져나갔을 때
찬 것이나 뜨거운 것은 다 토해내는 뱃속처럼,
몇 번 뒤틀리다가 잠잠해지지만
뒤이어 찾아오는 허기에 숨이 가쁘다
나는 본다
잊혀지거나 버린다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생하게 퍼덕거리고 있는 그녀
나를 가르고 간다
비릿하다
가리봉 엘레지
햇볕이 타는 한낮
가리봉오거리
슬리퍼에 맨발로
술 취해서 돌아다니는 후줄근한 남자
시장 복판에서 한바탕 몸씨름과 입씨름을 하다가
여자에게 허리춤 잡혀 끌려가고
무사(無事)한
그래, 이곳도 서울
아직 뱉어내지 못한 징그러운 삶이 있는
여일(餘日)
남부순환도로 담벼락 옆엔
커다란 고물상이 있어
매일같이 고물들이 시끄럽다
삐죽이 열어 놓은 양철문 틈으로
즐거운 듯 불을 쬐고 있는 고물들이,
선택이란 남지 않은 시간의 문
밖으로 나와 숨을 쉬는데
아니지 아닌가 가만 보니
고물들에 파묻혀 꼬물거리는 노인네들
등 굽어 순한 노인네들 여기 다 모였네
칭칭 동여맨 목도리 수건
사이로 쉴 새 없이 쫑쫑거리며
막 세상을 본 풀벌레들처럼
어디로 데려가 줄 막차를 기다리며
큰 포대자루에 담겨 차곡차곡, 가지런한
고물들 옆에 나란히 앉아 주름을 접고 있는
길 끄트머리에 닿은 노인네들
남은 시간마저 벗어버리고 있는 건지
삶의 수분이 충만해진다
시선 들어 저 공장 너머엔
이른 봄 햇살이 만삭으로 부풀어올랐다
기쁨이라는 것은
가리봉오거리 가는 공장들 담 아랜
우울한 가슴들이 다 모였다
담벼락에 달라붙어 눌은 먼지들 빈 담뱃갑
썩은 나뭇잎 비닐봉지 팔다리는 물론, 머리 없는 나무들
한겨울 매일같이 옷깃 세우고 지나다닌 길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저만치 앞에서 자꾸 눈앞을 아른거리는 무엇에
꽃가루 날리는구나 눈 조심해야지 생각만 하며
그러나 다가갈수록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왔다갔다 길을 어지럽게 했다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없는
없지만 눈에는 계속 톡톡 튀어오르는
생의 반란이 이렇게 찾아올까
썩은 썩어버린 듯 내던져진 작은 나무들에
아주 작은 초록눈들
삐죽이 솟아나 있었다 쌀알만한 눈들이
나무 가지가지마다 하늘을 우러러 다시,
자꾸 내 발길을 붙잡고 눈을 낮추도록 하고
쉼 없이 돌아가는 공장 기계소리 귀 기울이게 하고
제 모양도 갖추지 않은 제 색깔도 못 낸,
삶의 늪 구덩이 속에서 나를 향해 가슴을 여는 그것들
보고 있노라니 주위가 초록 물들어간다
기름때와 계급
내 손에 손톱에 까만 때 낄 때가 있다
무심코 움츠러드는 삶
그 사람, 그 사람 손등과 바닥에 접힌 주름들
골이 깊고 선명하다
큰 산은 골이 깊고 나무들은 크듯이
갈래갈래 첩첩으로 패여 있는데
십대 후반부터 밥을 먹듯 기계와 살아온
오십여 년이 주름져 양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떻게 보나 노동자였다 뭉툭하고 씻어도 씻기지 않는
기름때 주름 속에 녹아 선을 긋고
검은 빛 도는 손에 삶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그 사람에게 부여된 노동자계급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자꾸 곁눈질을 한다
음미해 보지 않은 것을 찾아서
요즘 그 손은 검은 기름때가 싸악 빠져 말끔하다
운동가도 투철한 사상가도 아니지만
노동자 자체였던 그 사람은
컴퓨터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고,
ON-OFF하는 시간
거기에
분류되지 않는 계급이 있다.
세다가 새는
땅거미 가만가만 내려앉는
구 종점 네거리 언덕배기 인력사무소 앞에
야전가방 하나씩 둘러맨 사람들
오야지를 에워싸고
내밀어진 손들에 하루치 몸값이 착착,
20여 년 날일 쫑내고 낙향한
노총각 조씨가 툴툴거리며 그랬던 것처럼
센다 천 원짜리 닳고 닳도록 세고 또 세 본다
아무리 세어도 한 장이 두 장 열 장이 되지는 않고
하루를 세고 열흘을 세고 일 년을 세며
생을 셈해 보며 탁 풀리는
손안에 움켜쥔 서푼짜리 삶이 샌다
노가다 판에도 초록은 우우 우거져 여름은 깊어가고
열병
생을 감싸 안은 불꽃은
날몸뚱이로 문 밖에서 기웃거린다
겨우내 웅크리고 키워온 붉은 동백
밀어낸다 느슨한 햇살 속으로
그리고 툭, 자살했다
그대 내딛는 발길에
한잎 한잎 뭉개지며
길을 만들었다
흔적은 짓물러지고
내 것인지 네 것인지
코끝에 아른거리는 냄새가
몽유병처럼 떠돈다
붉은 불꽃 노랗게 타오를 때
냉큼 따먹으리라
김사이․
71년 해남 출생
․2002년 계간 ≪시평≫에 시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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