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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김사이 작품론/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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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4회 작성일 08-02-26 22:16

본문

|김사이 작품론|

민중의 현실로 하방(下方)하는 시쓰기
―김사이 시에 대한 단상―

고명철(문학평론가)



김사이 시인은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아니 망각하고 있었던 민중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김사이 시인은 동세대 시인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현실 인식을 가다듬고 있다. 동세대 시인들 대부분에게서 나타나는 문화취향의 시적 태도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다. 그에게 시쓰기는 고통스런 현실로 하방(下方)하는 일이다. 하여 삶의 고통과 정직하게 맞대면하는 일이다.

재개발도 안 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곳
삶이 문턱에서 허덕거린다
햇살은 아무나, 것이나 붙들어 들어갔다 뺐다 하고
선과 악이 날마다 쌈박질하며
그 속으로 더욱 궁둥이를 들이밀고
사람들은 달아나려 매번 자기를 죽이면서도 눈을 뜨는
내 바닥 불륜의 씨앗이 작은 방죽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는
닭장촌, 그곳
정착지도 모르고 날아들었다가 가로등 불빛에
타 죽어가는 날벌레 명줄 같은 금기의 자유
오누이가 사랑을 하고 사촌오빠가 누이를 범해 애를 낳는
온몸 짓푸른 얼룩을 감추기 위해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엄마가 얇은 시멘트 벽 옆집 남자랑 도망가 없어도
어른이 되어가는 그곳
수많은 세대들이 서너 개의 공동화장실을 들락거려도
그곳 문밖에 버려진 작은 화초들, 으깨진 보도블록에서 솟아나는 풀들
바닥 틈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간혹 보일 듯 말 듯한 꽃도 토해 놓고

나 도망가다 멈춰선 그곳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전문

철거민촌의 쇠락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철거민촌의 이 음울한 풍경은 어느 낯선 곳의 풍경이 결코 아니다. 조금만 주변을 돌아다보면 쉽게 목도할 수 있는 풍경이다.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고달픈 삶의 더께가 무겁게 가라 앉아 있는 풍경이다. 사실 재개발지역도 아닌 철거민촌의 삶이란 비유컨대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삶의 근거지가 송두리째 빼앗겨버릴 순간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란 죽음을 기다리는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때문에 시적 화자인 ‘나’는 이 철거민촌에서 도망가고자 한다. 철거민촌의 풍경 바깥으로 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아직 이 풍경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풍경을 외면하고 싶지만, 철거민촌에는 악다구니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사이 시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이처럼 소외된 현실에서 삶을 묵묵히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적 애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일용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외면하고 있지 않는다든지(「세다가 새는」), 고물상에서 일하는 노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여일」)도 그러한 맥락에 의해서다.
그런데 김사이 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급변하는 노동현실에 따라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래 생산직 혹은 사무직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구분되는 노동자가 출현하고 있는 데 대해 시인은 주목한다. 이제 우리 노동자에게 낯익은 노동 현장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음을 시인은 응시한다.

그 사람, 그 사람 손등과 바닥에 접힌 주름들
골이 깊고 선명하다
큰 산은 골이 깊고 나무들은 크듯이
갈래갈래 첩첩으로 패여 있는데
십대 후반부터 밥을 먹듯 기계와 살아온
오십여 년이 주름져 양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떻게 보나 노동자였다 뭉툭하고 씻어도 씻기지 않는
기름때 주름 속에 녹아 선을 긋고
검은빛 도는 손에 삶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그 사람에게 부여된 노동자계급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자꾸 곁눈질을 한다
음미해 보지 않은 것을 찾아서

요즘 그 손은 검은 기름때가 싸악 빠져 말끔하다
운동가도 투철한 사상가도 아니지만
노동자 자체였던 그 사람은
컴퓨터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고,

ON-OFF하는 시간
거기에
분류되지 않는 계급이 있다.
―「기름때와 계급」 부분

산업화시대의 주체였던 노동자계급이 정보화시대로 옮아가면서 그 노동자계급의 위상 또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직시하고 있다. 산업노동자인 시절 노동자가 손에 검은 기름때를 묻혔다면, 정보화시대의 노동자는 첨단의 기술을 이용하는 것으로 더 이상 손에 검은 기름때가 묻힐 필요가 없다. 온갖 기계를 작동하고 제어하는 컴퓨터가 노동자의 노동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노동 현장의 급변화는 노동자의 노동을 강화시키는 현실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는 것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첨단의 기계가 노동자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노동자가 일터에서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노동의 소외’라는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된다. 김사인 시인은 이러한 노동 현장의 급변화를 예의주시한다. 정보화시대에도 그에 걸맞은 노동은 존재할 터이지만, 이 노동은 산업화시대의 노동과 그 성격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과연 노동자 계급의 위상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새로운 문제가 대두된 셈이다. 아직도 종래 산업노동자의 노동 현실의 문제가 첩첩으로 쌓여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노동자 혹은 민중에 대한 시적 관심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게 김사이 시인이 놓치고 있지 않는 시적 인식이다.
그래서인가, 시인이 각별히 애정을 쏟고 있는 시적 공간은 ‘가리봉오거리’다. 노동자의 삶이 묻어나는 곳, 민중의 희로애락이 배여 있는 곳, 그곳은 민중의 억척스러운 삶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러면서 그곳은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키우는 곳이다.

가리봉오거리 가는 공장들 담 아랜
우울한 가슴들이 다 모였다
담벼락에 달라붙어 눌은 먼지들 빈 담뱃갑
썩은 나뭇잎 비닐봉지 팔다리는 물론, 머리 없는 나무들
한겨울 매일같이 옷깃 세우고 지나다닌 길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꽃가루 날리는구나 눈 조심해야지 생각만 하며
그러나 다가갈수록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왔다갔다 길을 어지럽게 했다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없는
없지만 눈에는 계속 톡톡 튀어오르는
생의 반란이 이렇게 찾아올까
썩은 썩어버린 듯 내던져진 작은 나무들에
아주 작은 초록눈들
삐죽이 솟아나 있었다 쌀알만한 눈들이
나무 가지가지마다 하늘을 우러러 다시,
자꾸 내 발길을 붙잡고 눈을 낮추도록 하고
쉼 없이 돌아가는 공장 기계소리 귀 기울이게 하고
제 모양도 갖추지 않은 제 색깔도 못 낸,
삶의 늪 구덩이 속에서 나를 향해 가슴을 여는 그것들
보고 있노라니 주위가 초록 물들어간다
―「기쁨이라는 것은」 전문

산업노동자의 위상이 쇠락해가고 있다는 것을 가리봉오거리의 풍경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는 가리봉오거리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삶을 체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삶의 반란”을 꿈꾼다. “썩어버린 듯 내던져진 작은 나무들에/아주 작은 초록눈들/삐죽이 솟아나”듯이, 가리봉오거리 사람들도 새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될 것을 꿈꾼다. 그들은 아직 꿈을 포기할 수 없다. 이 땅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의 가치를 존중받고, 노동의 신성한 가치가 복원될 때까지 가리봉오거리의 꿈을 쉽게 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리봉오거리에는 “아직 뱉어내지 못한 징그러운 삶이 있”(「가리봉 엘레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사이 시인은 노동자 혹은 민중의 고달픈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시세계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해해서 안 될 것은 김사이 시인의 시세계가 민중지향성으로만 수렴되고 있지는 않다. 김사이 시인에게 민중의 현실이 외면할 수 없이 중요한 것처럼 시인 내면의 풍경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 기실 외적 풍경이란 주체의 내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김사이 시인의 내면 풍경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가.

창문에 달라붙은 나방 한 마리
그 자리에서 빙빙 돈다
문이 열려 있어도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하지 못한
눈먼 아니 아무것도
찾지 않는 한 마리 나방
팔딱거리는 가슴 때문인지
누워서도 쉴 새 없이 날개를 파닥거린다
무엇을 향한 갈증인가
날개가 찢어지고 쏟아지는 비틀린 언어들
침묵 속으로 둥글게 둥글게 말리는, 몸뚱이는
다시 애벌레로
생에 한 번 나방은
시를 쓴다

관(棺)으로
―「나방」 전문

길 잃은 나방이 창문에 달라붙어 날갯짓을 하고 있다. 창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창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처절한 날갯짓을 하고 있다. 이 날갯짓을 하면서 나방의 생명은 소진되고 있다. 하여 나방은 절박하다. 자신의 날갯짓이 공중에서 퍼덕거리는 허무의 날갯짓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존재증명의 몸짓이어야 한다. 시인은 나방의 이 절박하고 처절한 날갯짓을 “생애 한 번 나방은/시를 쓴다//관(棺)으로”라고 노래한다. 그렇다면 나방의 날갯짓은 죽음의 형식을 통한 삶을 노래하는 것인바, 나방의 애타는 날갯짓은 삶을 향한 애착이며 몸부림이다.

그곳에 가면
초경의 열병으로 온몸으로 앓으며
처음 했던 자위행위 같은 내 사랑이
남아 있다
나 이미 멀리 떠나왔으되
아직도 거기, 그녀
날것으로 사랑하고 있다

(중략)

잊혀지거나 버린다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생하게 퍼덕거리고 있는 그녀
나를 가르고 간다
비릿하다
―「그녀를 만나다」 부분

시적 화자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은 “초경의 열병 온몸으로 앓으며/처음 했던 자위행위 같은 내 사랑이/남아 있”는 곳이다. 성인의 신체 징후를 보이던 곳이다. 여성으로서 새로운 생명성을 부여 받은 곳이다. 시적화자는 그곳에서 자신을 “날것으로 사랑하고” 싶다. 때 묻지 않은 생명의 강한 비릿함을 맛보고 싶다. 그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생의 원시적 감각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생에 대한 이 강렬한 충동은 김사인 시인의 시세계의 밑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초경의 비릿한 내음은 곧 생의 원시적 감각과 생의 강렬한 충동의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시적 에너지다. 이 시적 에너지는 다음의 시에서도 감지된다.

생을 감싸안은 불꽃은
날몸뚱이로 문 밖에서 기웃거린다

겨우내 웅크리고 키워온 붉은 동백
밀어낸다 느슨한 햇살 속으로
그리고 툭, 자살했다
그대 내딛는 발길에
한잎 한잎 뭉개지며
길을 만들었다
흔적은 짓물러지고
내 것인지 네 것인지
코끝에 아른거리는 냄새가
몽유병처럼 떠돈다
―「열병」 부분

붉디붉은 동백이 툭, 고개를 떨군다. 동백은 자신의 고양된 생명의 기운에 못 이겨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동백의 하강은 생명의 종언이 아니다. 생명의 또 다른 충일감으로 지상을 가득 메운다. 동백꽃잎이 “한잎 한잎 뭉개지며” 그 선홍의 핏빛이 대지를 물들이고, 피의 비릿한 내음은 대지를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시킨다. 마치 초경(初經)의 비릿한 내음이 생명의 또 다른 징후를 보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명성으로 충만된 시적 화자의 삶이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니다. 시적 화자를 둘러싼 세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민중의 삶을 곤혹스럽게 한다. 1980년대에 절규했던 민중변혁의 시대는 급변하는 현실의 정황 속에서 그 현실적 힘을 상실했고, 전지구적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노동은 소외되고 있다.
요컨대 젊은 시인 김사이는 민중의 현실에 대한 하방(下方)을 통해 현실 대응력을 잃어가고 있는 작금 시단에 활명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비록 저간의 시들처럼 세련되거나 단련된 미학은 아닐지언정 현실에 대한 예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김사이의 시적 매혹을 간과할 수 없다. 앞으로 더욱 웅숭깊은 현실 인식을 토대로 김사이 시인만의 민중시의 지평을 개척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들지만 우직하게 그 길을 계속 걷기를 기원한다.


고명철․
1970년 제주출생
․저서 󰡔'쓰다'의 정치학󰡕 등
․현재 광운대 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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