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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시/하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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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두자
보랏빛 노래
지하실에 보관해 둔 감자들이
햇살 부스러기를 따라 길을 내고 있다
놀라서 상자를 열자
어둠을 살라 물기를 채우는 새싹들의 모반
몸속 깊이 잠든 생명들이
비집고 파고들며 겨울을 건너온 길이 보인다
피가 돌고 살이 붙은 씨눈의 포자
달아날까 조심조심 품어 왔으나
발아래 떨고 있는 겨울의 말이 되었고
흐린 하늘의 말이 되었다
어둠 속에 가두어 숨도 못 쉬게 덮어놓고
시간만 허물고 있더니
지병처럼 닫힌 마음 열어 여린 손끝으로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려는 저 유혹들
보랏빛 향기로 알싸하게 젖어오는 꿈,
어깨 툭툭 치며 일어서는 생명의 노래가
나는 가슴이 따끔거리고 목이 메어 밭은기침이 난다
내 안에 피는 꽃
마당 한 귀퉁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너 별들이 빤짝이는 주먹을 때리자 새벽이 푸른 눈을 뜨고 물관부의 물방울이 투명하게 울려 퍼질 때 너의 몸은 잠시 환한 내면을 열어 보인다 별들의 주먹이 아로 새겨진 아름다운 떨림의 흔적 슬쩍 하늘에다 긴 꼬리표를 매단다 열리지 않은 층층의 꽃술 주머니가 질긴 꽃대를 뚫고 터진다 어떻게 알았을까 꽃은 밤마다 뒤척이는 설렘, 방황의 산불을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 한 마리 내 앞을 지나 새벽 끝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자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굳은 잎맥 열어 재끼고 꽃잎은 별 같은 슬픔 하나를 버린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완전한 이별을 선택한다
하두자․
199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물수제비 뜨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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