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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시/최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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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폭설
불 꺼진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소년은 담배를 문다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어둠과 담배연기
더 이상의 불길한 생각이 몸에 달라붙지 않도록
소년은 몸을 떤다
꿈같다, 몽롱한 담배연기 속에서
소년은 때 묻은 청바지 지퍼를 내린다
변기 위의 자신을 위로해 줄 게 아무것도 없다
소년은 자위를 한다, 움찔움찔
창 밖으론 폭설이 쏟아진다
아, 즐겁고도 불쾌한……
소년은 그 우울함의 정체를 더는 알고 싶지 않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귀퉁이에 기댄 채
소년은 본드를 한 통 짜서 비닐봉지에 넣는다
형광 불빛들 반짝거리며 터진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 같은 환각의
헐거운 틈을 메워보기라도 하려는 듯
소년은 자꾸 눈을 감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발밑에는
학생증 한 장 달랑 들어있는 빈 지갑이 뒹굴고 있다
문고리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소년의 풀린 눈동자에 하얗게 폭설이 덮인다
저수지 가까운 동네
개구리들은 못생긴 형상을 등에 업고 숨어 있다
겨울잠 들다가 나온 우리는 모두 추리닝을 입었다
앞서가는 발자국들이 누런 양말짝처럼 떠내려 오고
초등학교 때 친구 하나는 이 저수지에 빠졌다
날선 칼 달린 스케이트화로는 헤엄을 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스케이트를 벗겼을 때 발가락엔
퉁퉁 불어터진 개구리의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수문 가까이 돌을 들추면 벌겋게 녹물이 피어오르고
굳은 촛농처럼 개구리들은 떠오른다
온갖 것이 다 몸 씻은 물이니 약수보다 낫지, 누군가는
개구리를 잡을 때마다 으스스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커다란 쇠 손잡이로 울음을 틀어막고 있는 수문
그 캄캄한 너머까지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어두워지면 얼음의 투명한 막 속에서
저수지는 오히려 이상한 빛으로 반짝거리고
그만들 가지, 저수지는 조용히 우리를 마을로 흘려보낸다
들판을 들추어보면 어김없이 폐가가 있고
반은 농사꾼이나 다름없는 우리들 젊고 말없는 수컷들은
별 중요한 말도 없이 모여 개구리를 구울 것이다
쩡쩡, 우는 저수지를 머리맡에 물그릇처럼 이고
사람들이 꼼지락꼼지락
차가워진 피를 데우기 위해 이불 속을 파고드는 저녁
마을은 분지이고 유난히 겨울은 길어
누구나 먼 길을 떠나는 꿈을 꾸기엔 적당치 않지만
그러나 저수지의 가느다란 지류를 타고
멀리 흘러가 보았으면 하는 깊이도 모를 동경,
문득 잠에서 깨어 개구리나 붙잡는 우리들도 한번쯤은
가슴 속에서 웅웅거리며 우는
녹슨 수문의 손잡이를 가만히 만져보았었다
퇴화된 꼬리뼈를 세우고 수로(水路) 바닥을 걸어가는 양서류들,
뒷모습이 모두 구부정하다
최금진․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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