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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추모특집 ◈故 이형기 시인의 문학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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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故 이형기 시인의 문학 강연
시는 무엇을 만드는가?
이 자리에는 시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도 여러분 오셨고, 또 전문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와 소설 그 밖의 문학작품을 사랑하는 분들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많은 시를 읽었을 겝니다. 또 오늘도 다섯 분이 낭송한 서른 편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못한 시도 인류는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역사가 가지고 있는 시의 수는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보다 수가 많습니다.
진주 남강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 시비그러나 아무리 시가 수가 많고 그 종류가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시는 그 겉모양이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요런 사실 때문에 전문가들이 시는 언어의 구조물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구조물이란 말은 까다로운 말 같습니다만, 언어의 조직체죠. 언어의 조직체는 구체적으로는 문장이란 뜻입니다. 시는 문장이올습니다. 문장으로 되어있지 않은 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가끔 구비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문장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 구비문학도 그 말들을 문자로 정착시키면 곧 문장이 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예비문장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시는 다 문장입니다. 그 문장은 언어의 조직체니까, 문장을 형성하는, 시라고 하는 기본단위는 인간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시를 형성하는 그 언어는 시 이외의 다른 언어 행위하고 특별이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의 대화를 형성하고 있는 언어나, 또 무슨 학술제의 과학적인 저서를 형성하는 그런 언어나, 시 언어나, 겉모양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문기사에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시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고, 과학 논문에 사용하고 있는 그런 언어를 시도 그대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시만을 위한 특별한 언어가 따로 없다는 이 말씀입니다. 보통 일상적인 그런 언어들이 다 시를 이루고 있는 겝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형적 겉모양은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를 형성하고 있는 문장과 시가 아닌 다른 문장을 즉각적으로 구분을 해 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를 모르는 사람도 신문기사를 시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또 육법전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런 문장을 시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육법전서를 채우고 있는 문장의 언어의 겉모양은 시를 형성하고 있는 언어와 똑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구분이 되는가? 이것은 언어의 겉모양보다는 그 내용의 차이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봐야 되겠죠. 그러니까 시가 똑같은 언어의 구조물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아닌 다른 언어의 구조물 문장하고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그 특성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문장을 형성하고 있는 기본단위가 되는 언어의 겉모양이 아니고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내용이란 무언고? 바로 의미올습니다. 언어는 의미라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을 전달 받음으로써 언어가 비로소 언어 구실을 합니다. 내용은 의미이니까 의미가 통하지 않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것은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언어는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냥 소리의 구조물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소리의 구조물이 특별한 미적 효과나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는 음악이란 것이 있습니다.
시의 경우, 언어의 경우에는 그냥 소리의 구조물로 그치지 않고 그 소리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반드시 전달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라고 하는 그 문장의 특성을 살피기 위해 언어가 가지고 있는 바, 그 내용에 해당하는 의미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거 대단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제가 언어학을 제대로 알 리가 없습니다만, 귀동냥에 의하면 아직도 언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는 그런 언어학 이론은 없습니다. 의견 백출이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본격적으로 언어의 의미가 무언지 밝혀낼 수가 없지요. 그러나 뭐, 괜찮습니다. 언어학의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언어의 의미가 무언가를 다 알아버리면 그 언어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무얼 먹고 살게요? 우리는 모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언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료가 있어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사전입니다.
사전은 무얼 하는 책입니까? 언어의 의미를 풀이해 놓고 있는 책이올시다. 그러니까 어떤 말의 의미에 관해서 갑, 을 두 사람이 견해의 차이를 보일 때, 어느 쪽의 의견이 옳으냐, 그것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사전을 찾아보면 됩니다. 그러니 언어의 의미의 정의까지는 몰라도 언어의 의미의 구체적인 모양은 사전이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그래야 되겠죠. 그 사전을 펼쳐서 언어의 의미의 한 모양을 우리가 확인해 봅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 할일이 없으면 그냥 특별한 의도 없이 사전을 뒤적뒤적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일 없이 낮잠 자는 것보다는 그게 좀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또 할일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잔소리하는 것보다는 좀 낫다 싶어서입니다. 그런 사전을 뒤져보는 습관을 통해서 어느 날 제가 호수라는 말은 도대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 언어인가 하고 사전의 호수라고 하는 대목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호수라는 말이 사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지가 움푹 패여서 물이 고인 곳, 이래 놓았습디다. 저는 좀 이상했어요. 그러나 가만히 또 생각을 해보니까 아주 이건 틀림없이 정확한 해석이더군요. 이번에는 물이라고 하는 항목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 이래 놓았어요. 그렇지요. 우리가 중학교의 화학시간에 다 배운 대로, 물은 산소와 수소가 1대 2의 비율로 화합이 되어서 만들어진 물질입니다. 그러니까 호수, 혹은 물, 이런 말은 또 그 말이 지시하는 어떤 대상은, 제일 정확한 의미가 사전에 풀이해 놓은 바대로라고 봐야겠지요. 사전이 풀이해 놓고 있는 물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나, 또 호수라고 하는 말의 뜻은 인종의 차이나 국적의 차이, 종교의 차이, 성별의 차이, 이런 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아, 그거 참 옳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해석이올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인은 호수를 육지가 움푹 패여서 물이 고인 곳이라, 그렇게 풀이하지 않고, 호수를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시인의 해석에 의하면 호수는 내 마음이올시다. 또 물의 경우도 배를 땅에 붙이고 낮은 곳으로만 기어가는 물은 눈이 없다. 박목월 시에 보니까 그런 구절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시의 작자의 해석에 의하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 없는, 그러면서 배를 땅에 붙이고 낮은 곳으로 기어가는 살아있는 어떤 생명체, 이렇게 해석되어 있습니다.
김동명의 내 마음이라는 시에서 인용해온 호수라는 말의 독특하고 특이한 해석이나 박목월의 시에서 인용해온 이런 물에 대한 이 해석, 이것은 물론 객관성이 없는 겝니다. 시인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이죠. 그러니까 사전에는 올라갈 수 없는 언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주관적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느냐 하면 다 알아 듣습니다. 그냥 알아들을 정도가 아니고, 호수를 뭡니까? 육지가 움푹 패여서 물이 고인 곳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나, 물, 그것은 산소와 수소가 화합된 물질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의 그 무미건조함을 훨씬 넘어서서 뭔가 마음의 울림이 오는 일종의 감동을 느낄 수도 있는, 그런 이해가 가능한 것이 시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언어의 의미올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언어의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전이 풀이해 놓고 있는 바와 같은 의미,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객관적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풀이해 놓고 있는 해석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풀이하는, 이런 객관적인 사물의 이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사전이 풀이해 놓고 있는 바와 같은 언어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의한 사물 이해의 내용과 결과를 밝혀주는 겝니다. 잘 아시다시피,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죠. 그리고 그런 이성의 힘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그 사물의 총체인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여러 가지 아주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가치 있는 결과, 유익한 결과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과학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류 역사상 일찍이 유래가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과학의 발달이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수준의 과학의 발달, 현대문명의 여러 가지 내용과 양상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특성은 고도한 과학문명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놓은 이 과학이 현대문명의 특징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이성이 놀라운 현대의 과학문명을 만들어 놓고 있지요. 그러나 인간은 그 과학을 만들어내는 이성만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 과학과 함께 사물에 대해서 객관적 분석적 이해하고는 성질이 다른 주관적 이해, 감정을 투영시키는 그런 이해의 능력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감성, 느끼는 힘에 기인하는 감정의 소산이지요. 인간의 모든 주관은 기본적으로 이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또 느끼는 존재인 겝니다. 서양 사람들은 감정을 휠링이라고 합니다. 느낌이라고 하는 거지요. 인간은 사물을 그냥 따지고 생각하고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고, 느끼면서 살아요. 느낌은 무엇에 바탕을 두는 것인가? 그 느낌이라고 하는 인간의 생명활동의 한 현상은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의 마음의 한 현상입니다.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종류의 심리 현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느낌의 힘의 뿌리는 마음에 있는 겝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정체를 밝히기는 어렵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모르죠. 모르지만 인간은 누구나 분명하게 마음이라고 하는 이상한 어떤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힘, 이성의 소재는 머릿속일지 모르죠. 보통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두뇌에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두뇌에는 이성이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가슴에 있고, 그 감정은 우리의 심장에 있고, 또한 우리의 마음속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 마음속 어디인지는 모르죠. 그러나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주관의 뿌리올시다. 그러니까 언어의 주관적인 의미는 그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마음을 통한 이해의 결과를 보여주는 겝니다. 호수를, 그것은 육지가 움푹 패인 곳에 물이 고인 곳으로, 이렇게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내 마음이라고 이해하는 그런 결과, 이것은 그렇게 말한 그 사람, 즉 시인 김동명의 마음을 투사한 대상 이해의 결과인 겝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이 아니고, 배를 땅에 대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만 흘러가는, 기어가는, 어떤 순리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물을 이해하는 것은, 물이라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 즉 시인 박목월의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그 대상에 투사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의 눈이라고 하는 그 이상한 눈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본 그 결과가 언어의 주관적인 의미-전문적인 용어로는 내포적 의미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전문적인 용어야 어떻게 되었건-주관적 성격을 갖는 의미를 형성을 하는 거지요. 문학이나 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요소의 투사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언어의 겉모양은 과학언어나 일상적인 언어하고 똑같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형성하는 의미에 있어서는 반드시 인간의 마음을 투사한 주관적인 그런 사물 이해의 결과를 담고 있는 그 의미, 요것을 이렇게 조직해 놓은 것이 시를 형성합니다.
그런 시가 무슨 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 주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런 결과를 언어로서 조직해 놓은 것이 시다. 그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는 반문이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 사물을 객관적 이해한다고 했는데,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마이크도 마이크 하나만 있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마이크가 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철강산업이 없으면 이거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또한 이것을 통해서 듣는 사람, 소리가 커진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겝니다.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과 관계를 이루어서 관계의 그물을 형성해가는 겁니다. 그 관계의 그물이 제일 큰 단위 이것을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물을 하나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라고 하는 것도 물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없으면 세계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세계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인간 때문에 세계가 있거든요. 사물 하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물과 관계가 되는 큰 사물을 이해하고, 그리하여 가장 큰 관계의 그물인 세계를 이해하고, 동시에 그 세계를 세계로서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인 인간의 삶을 이해한다. 그렇게 됩니다.
사물을, 세계를, 인간의 삶을, 마음의 눈을 통해서 이해한 결과, 이것도 빨리 말하면 주관적으로 이해한 결과죠. 그것이 시다. 그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느냐? 그러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렇게 이해한 결과는 현대의 참 눈부시고 놀라운 과학문명을 낳았다는 사실을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대단히 참 가치 있는 이야기이고 아주 놀라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사실을 사실 그대로만 이해를 해간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그건 아주 똑똑한 사람 될지 모르죠. 영리한 사람이 될지 모르죠. 유식한 사람이 될지 모르죠. 그러나 그런 인간은 우리가 쉽게 말하면 바늘로 콕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 될 뿐입니다.
아주 사물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표본적인 존재는 컴퓨터가 다 그것을 입력시킨 로봇이 됩니다. 똑똑하고 재주 있고 그런 인간, 그러나 마음을 갖지 않는 인간, 마음은 자기 인격의 제일 기본 핵심입니다.. 그것이 없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바라보고 할 때 어떻게 되겠어요?
보드레르라는 사람이 그럽디다. 인간이 문자를 배운다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마음이 시원치 않은 작자한테 글자를 가르쳤더니, 사물을 마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는, 또 그런 것을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글지를 가르쳤더니, 이 자가 글자를 아는 능력을 무엇에다 사용하는가? 위조수표 만드는 데 써먹더라 그랬어요. 여러분, 오늘날 보드레르의 이 말은 조그만 예입니다만 이 보드레르가 예로 든 요런 사실이 우리 사회에 얼마만큼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까? 오늘날 현대 신문에 엄청나게 나오는 그 각종 범죄 사건들, 그거 무식한 사람들이 합디까? 멍청한 인간들이 합디까? 똑똑하고 잘난 인간들이 다 저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요? 그들의 똑똑함, 그들의 잘남을 마음에 의해서 통제받지 못한 그 지식들을, 인격적인 요소가 결여되어있는 그 지식들을, 보드레르가 말한 위조수표 만드는데 써먹는 식으로 써먹는 겝니다.
오늘날 현대 범죄는 블루칼라가 아니고 화이트칼라가 저지른다 하는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세계적 현상입니다. 마음의 눈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런 반문을 하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 사람의 정신은 내부에 이런 생각이 있는 겝니다. 흥, 마음 좋아하는구만, 마음이 밥 먹여 주는가? 그렇지요. 마음은 밥을 먹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밥 먹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것은 반찬 몇 가지 더 먹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좀 연장시키면 남보다 좀 나은 집에서 사는 일이고, 남보다 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는 소리입니다. 그런 것만이 삶의 전부고, 그런 것만이 삶의 가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 밥 먹여 주느냐, 그래요. 그러나 어디 마음이 밥 먹여 주느냐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세상이 된다면, 이 사회와 이 세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현실적인 물질적인 차원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이해를 따지는 그런 일 가지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세상밖에 안 되는 겝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라고 하는 마음의 눈을 통한 사물의 이해는 인간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인 겝니다.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만들어낸 이 엄청난 참 높은 수준의 현대의 고도의 과학문명들 때문에 인간이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굉장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전 세계의 인류가 역사상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시대는 없는 겝니다. 이거 뭐 정치를 잘해서 그런 거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의 발달, 그것에 의한 과학의 발달 때문에 그래요. 서양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주 호화롭게 사는 것을 뭐라 합니까? 솔로몬의 영화라 하지 않아요? 오늘날 우리나라의 보통 중산층도 솔로몬 이상의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겝니다. 솔로몬 지까짓 놈이 아무리 잘 살아봤자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그냥 방안에 앉아서 말 주고받고 이거 못합니다. 전화가 없으니까요. 솔로몬 지가 아무리 잘 살아 봤자 세계의 끝으로 하룻만에 날아갈 수도 없습니다. 비행기가 없으니까요. 현대 과학문명은 이렇게 인간에게 물질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엄청난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는 겝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와 행복 속에서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요?
옛날 우리나라 속담에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흘을 굶고 나면 남의 집 담을 뛰어넘지 않을 자가 없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물질적 빈곤이 바로 범죄의 온상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경제적 범죄는 가난뱅이한테서 저질러지고 있습니까? 돈 많은 인간들이 더 규모가 큰 경제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 다 아는 일 아닙니까? 수십억을 가진 인간이 더 모자라서 또 도둑질하는 이런 세계 아닙니까? 진짜로 사흘을 굶어서 남의 집에 가서 무언가 훔쳐왔다면 나는 그런 인간은 상을 줘야 되지 않을까싶어요.
이런 일이 왜 생기는가요? 물질적인 궁핍이나 결핍이 범죄의 원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충만이 더 많은 욕구를 자극해서 엄청난 규모의 범죄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거의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이런 현상이 뭔가요? 마음이 밥 먹여 주느냐 하니까 이렇게 되는 겝니다. 사물에 대한 시적 가치를 없애버린 그런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그냥 물질적인 가치, 그냥 인간도 물질적인 존재 즉 육체적인 존재, 이렇게 됩니다. 이거 아주 무서운 일이올시다. 여러분,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는 아니올시다. 물론 밥 먹어야지요. 그러나 밥만 먹고 사는 존재는 아니올습니다. 제가 모래 환갑입니다만, 이젠 부끄럼 없어서 그렇지요, 제가 중학생 때, 요새 말로 지금 고등학생 때입니다. 저쪽에 여학생이 지나가요. 그러면 아이구, 젊은 놈 밥만 먹고 못살겠네. 이랬습니다. 왜? 사랑도 있어야 되겠다 이거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꼭 인간을 갖다가 물질적인 존재 그렇게만 보면은 사랑이란 것 필요 없습니다. 성적인 접촉이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렇잖아요? 마음의 가치 마음의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세계를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고 하는 그런 태도를 갖지 아니하면, 따라서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실례의 말씀이지만, 그냥 암컷에 불과합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는 수컷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해가지고야 이게 되는 일인가요?
시는 그렇게 소리치지 않지만은 마음의 눈으로 사물의 세계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눈으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본 그 결과를, 시 쓰는 그 인간이 자기 나름으로는 의미 있게,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도 일종의 경험입니다. 그런 종류의 경험을 자기 나름대로 의미 있게 조직해 놓은 그 결과입니다. 그런 경험의 조직의 결과가 독자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수가 있어요. 어떤 시를 읽고 아이구, 나는 이 시는 시원치 않으니 안 읽을란다. 이래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종류의 시는 이건 좀 괜찮다, 이럴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대개의 시에 대한 반응은 여하간 그래도 시 쓰는 그 인간 자신은 말이죠, 자기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서 자기 나름의 경험을 조직해 나가는 겁니다. 좀 상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로 하자면 자기 나름으로 새빠지게 해가지고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의미 있는 것도 있어요. 마음의 눈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이해한 그 결과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니까, 꼭 특별히 갑, 을, 병, 정, 어떤 특정인이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학적인 사물 이해의 결과는 인류 공통의 재산입니다. 무슨 아인슈타인이 발명했다고 하나요? 발견했다고 하나요? 그런 상대성의 원리도 그거 여러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겝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가지고 사물을 세계를 이해한 그 결과는 모든 사람이 다같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그 마음은, 그 사람의 개성과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고 있는 거예요. 마음은 다 다릅니다. 이건 그냥 일반론 가지고 희석될 수가 없는 겝니다. 인간은 남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지요. 혼자 못삽니다. 그러나 언제나 남과 더불어만 사는 그런 측면 인간의 본성이 전부는 아닙니다. 남과 더불어 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는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개성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개성은 인간의 감정입니다. 감정의 뿌리가 되는 마음, 이런 거와 아주 표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을 통해서, 마음을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고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나 세계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런 빈틈없고, 틀림없고, 똑똑하고, 차돌같이 아주 매끈매끈하고, 그런 인간, 우리가 보통 말할 때도 그 자식은 좀 인간답지 못해, 이럽니다. 좀 반편 같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때로는 참아야할 때 성도 불쑥 내고, 말하자면 감정의 노출이 자유로운 이런 인간에게는 아무개 참 인간적이다, 이래 안 합니까?. 시라고 하는 이 언어는, 사물을 마음의 눈을 통해 보는 바라보는 이 언어는,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서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본 그 결과와 그런 경험을 시 쓰는 그 인간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자기 나름대로 의미 있게 조직해 놓은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눈을 통한 사물의 이해의 결과는 이게 또 언어의 차원으로 돌아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습디까? 가령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인간의 마음은 마음이고, 호수는 호수입니다. 별개의 것입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의 유명한 깃발의 첫 줄 아닙니까? 이것은, 그것이 기지요. 기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사전에 보면 객관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표지나 상징으로 쓰이는 헝겊, 또는 종이, 그렇죠. 이게 아주 기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그런 이해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를, 헝겊이나 종이에 불과한 물리적 차원에서 보면 그런 기를,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호수, 그것은 내 마음. 물, 그것은 땅에 배를 붙이고 낮은 곳으로만 기어가는 어떤 생명체. 이게 어떻게 되어 있는 겝니까? 구체적으로. 전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죠? 물은 산소와 수소가 1대 2의 비율로 화합되어서 이루어진 물질이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물이 이거 땅에 무슨 배를 부치고 기어가는 짐승,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지금 이런 예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눈을 통해서 사물을 이해한 그 결과는 언제나 거짓을 만들어낸다는 소리입니다. 거짓, 허구죠. 거짓은 무엇이 만듭니까? 물론 인간이 만들지만 인간의 어떤 능력이 허구를 만드는가요? 우리는 이런 물건을 들어올리는 능력도 있습니다. 여기서 시원치 않게 지껄이는 능력도 있습니다. 인간은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을 만드는 이 능력은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이 상상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거짓의 세계는 또 무엇인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과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허구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기는 합니다. 깃발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되는 그런 세계, 물이 땅에다 배를 부치고 기어가는 어떤 눈이 없는 짐승의 세계, 호수가 내 마음이 되는 그런 세계를 보여주기는 합니다. 그 세계가 어디 있나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세계는 어디에 있나요? 현실에는 없지요. 허구의 세계이니까.
사실의 세계는 현실입니다. 그렇지요? 현실의 없는 다른 세계입니다. 현실의 이쪽에 있는 세계가 아니고 현실의 저쪽에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뜻에서 허구의 세계는 초현실의 세계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다 이 말이죠. 모든 시는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는 초현실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뭐, 할라고, 초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내는가? 그 초현실의 세계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밥 먹고 사는 거, 월급 올라가는 거, 아파트 조금 나은데 이사 가는 거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 잘 아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초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내는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은 현실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을 아주 이거 최고이고 이것이면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거기 만족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무엇 때문에 현실 저쪽으로 나갈라고 해요? 그러니까 현실 저쪽으로 나가는 사실이 아닌 거짓의 세계, 초현실의 세계, 요것을 만드는 인간의 상상력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꿈꾸는 힘이올시다.
실지로 꿈은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서 뭔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그게 꿈이지요. 그런데 시라고 하는 이 이상한 언어 행위가 보여주는 이 허구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시라고 하는 것은 다 어떤 천재가 번뜩이면 쓰여진다 이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제 나름으로는 소설도 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아주 맑은 정신으로 의도적으로 쓰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꿈입니다. 일부러 하는 거짓말입니다. 이게. 그런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상상력이지요. 그러니까 이 상상력을 통해서 현실의 이쪽이 아닌 저쪽에 있는 초현실의 세계, 거짓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본인이 뭐라고 하든 근본적으로는 늘 지금 있는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부정의 의식을 밝혀나가는 겝니다.
그런 뜻에서 이 시인이라 하는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숙명적으로 현실과 그 현실의 질서를 지킬려고 하는 소위 체제에 대해서 불온분자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이 작자들은 거기서 뭔가 잘못된 걸 찾아내는 인간들입니다. 왜? 시가 이성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가지고 있는바 상상력을 가지고 닦아냅니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요. 이 상상력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가 시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시인이고 또는 시적인 존재입니다. 그가 하자면, 쓰자면, 시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시인입니다. 요런 논리, 불교에서 말합니다. 인간은 실제론 그가 부처가 아니래도, 되자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니라. 그러니까 모든 중생이 부처다. 그래 안 합니까?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의 저쪽으로 넘어서는 세계를 만드는, 즉 꿈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설령 실제로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시인인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시인입니다. 시인이 될 수 있는 이 가능성 갖지 않으면 시의 독자가 성립되지 않는 겝니다.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모든 존재는 시인이 될 수 있는 게지요.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 즉 시인이 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꿈꾸는 인간, 그런 꿈을 의도적으로 직업적으로 꾸고 있는, 그리하여 언어화시키고 있는, 이 시인이라고 하는 인간은 아무리 좋은 세상에 갖다 놓아도, 이 세상 좋습니다, 흡족합니다, 하고 만족하는 이가 없어요. 여러분 그 보드레르라고 하는 시인을 아시겠죠? 그 보드레르의 산문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제목은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 이런 시인데. 시인 화자하고, 시인 자신하고, 시인의 영혼이 대화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시인이 그 자기 영혼을 보고 세계의 굉장한 유람지 여러 군데를 댑니다. 야, 영혼아 여기가 따분하니까 어디어디를 가면 어떻겠나? 이를테면 금강산에 가면 어떻겠나? 영혼아, 아, 시원치 않으니까, 알프스 저쪽에 가면 어떻겠나? 영혼아, 여기가 시원치 않으니까, 로마의 온천에 가면 어떻겠나? 영혼이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러다가 자꾸 남태평양, 발리섬, 등등 가면 어떻겠나? 하니까, 듣다듣다 못해서 영혼이 소리 한마디 탁 하고 그 시가 끝납니다. 아무 데고 좋다. 이 세상 밖으로만 나간다면.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봅시다. 그런 영혼이면, 그 영혼은 이 세상 밖으로 데리고 가면, 그때는 가만 있겠나요? 아닙니다. 그때는 데리고 간 그곳이 이 세상이 되어서 또 소리칩니다. 아시겠지요? 아무 데도 만족하는 데가 없어요. 만족하면 그땐 꿈이 없는 거니까.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도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꿈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집이 없는 이는 집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다. 그럴 수 있겠죠. 아이가 학교에 제대로 못 들어갔다면 아이가 학교에 잘 들어가는 것이 꿈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 아무 꿈이 없습니까? 만일 이루어져서 그것으로 그만이라면 그때는 꿈을 상실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죠? 이 보드레르의 영혼, 이것은 영원히 꿈을 상실하지 않는 존재의 표본입니다. 그런데 보드레르의 영혼이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은 꿈꾸는 것을 업으로 하는, 맑은 정신으로 일부러 꿈꾸고 있는, 즉 일부러 의도적으로 상상의 세계, 거짓 세계, 초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이 시인들은 꿈꾸는 선수들입니다. 그게 직업인 겝니다. 선수가 아니고 프로 꿈꾸는 자들이에요. 프로 야구선수가 아니고 프로의 꿈꾸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좋은 데 데려가도 거기에서 또 다른 데 가겠다고 한다. 이런 것을 아주 일찍이 꿰뚫어 보고 그런 시인들을 쫓아내버린 아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2,300년 전에 희랍이 낳은 굉장한 철학자 플라톤이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플라톤의 공화국이라는 책은 안 읽어보셨더라도 이름은 들었을 겝니다. 리파블릭이니까 공화국이 맞지요. 이 플라톤의 공화국은 플라톤 자기가 만든 이상의 공화국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공화국은 더 이상 나쁜 게 없거든요. 완벽하단 말예요. 그 완벽한 나라에는 모든 사람이 다 골고루 잘 사는 나라입니다. 아무도 불평이 있을 수가 없는 이상한 나라이니까, 그런 나라 아니겠어요? 거기서 시인은 내쫒아 버렸습니다. 그 유명한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입니다. 왜? 그 작자는 데려다 놓으면, 이게 완벽하면 왜 완벽하냐 하고, 그것도 픽 하고 뛰어나간다 이 말입니다. 요런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온분자입니다. 좋게 말하면 본질적으로 꿈꾸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의 꿈은 어떤 꿈이냐, 아파트의 경우와 같이, 자동차의 경우와 같이, 아이의 학교의 경우와 같이, 실현되는 꿈인가? 실현되면 그 다음에 또 올라가지요. 그러니까 이미 실현된 그 결과를 허무화시키는 꿈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작자의 꿈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꿈, 영원히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그런 꿈, 요것을 꾸고 있는 겝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인간들입니다. 실제로 시는 구체적으로 그렇게 명백하게는 나타나지 않아도 이걸 살펴보면 그런 게 훤히 드러납니다.
여러분, 모든 시가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시가 과거와 상실을 노래합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상실이 있죠. 상실 가운데에서도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의 상실, 시간이 과거가 되는 겝니다. 시는 경우에 따라서 미래를 노래할 수도 있죠. 미래를 노래한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미래도 그것은 언젠가 현재가 되는 겝니다. 현실이 된다는 겝니다.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시간이 있어요. 과거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절대로 현재로 실행이 될 수 없는 과거와 절대적인 상실의 어떤 대상, 그것을 시가 자꾸 노래해요. 고향이 그립다. 고향이 실제로 그리우면 지가 가면 되지. 아, 기차 타고 가거나, 하루 다녀오는 것도 만족치 못하면 아주 이사 가서 살면 되지. 그리 안 하면서 늘 고향이 그립다 해요. 왜? 없는 고향을 그리 하는 겁니다. 상실한 고향입니다. 고향을 소유하고 있으면 누가 고향을 노래해요? 고향에 살면서도 시인이라는 인간은, 프로로 꿈꾸는 그 인간은, 고향 상실감에 늘 젖어있는 겝니다.
시인이라는 인간은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팔십 노인입니다. 열두 살 먹은 아이가 써도 나의 살던 고향은 그 뭡니까? 아이가 하는 소리 아닙니까? 내가 과거에 살았던 고향이 그립다. 그 말 아니에요? 아주 이게 선험적으로 상실의 시각이 발달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상실했으니까 찾아야지요. 꿈꾸는 능력이 선험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시인이라고 하는 이 꿈꾸는 자가 꾸는 그 꿈의 내용은 물질적 차원에서 말하는 그런 꿈하고는 달라서 실현되지 않아요. 실현이 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허무화시키고 또 다른 저쪽을 찾아 나갑니다. 그러니까 시가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시는 우리에게 마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를 보여주고 그런 작업을 통해서 동시에 영원히 불가능한 꿈을 만들어내는 겝니다.
영원히 불가능한 꿈 그까짓 것을 어떻게 꾸어? 그러니까 실현되는 꿈이 가치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물론 그거 가치 있습니다. 그러나 실현되는 꿈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꿈이 실현되었을 경우 인간은 그러면 그때는 아무 꿈도 없는 목석같은 존재로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아요? 시인이라고 하는 이 꿈꾸기 전문가들이 영원이 실현되지 않는 꿈을 자꾸 계속해서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은 꿈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이한 존재로서 영속할 수가 있는 겝니다. 시인이라는 작자들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옷 주는 것도 아니고, 제 자신도 늘 따라지이고, 이렇게 살지만은, 이것은 밥하고 관계없는, 그러나 또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또 인간일 수 없는, 중요한 이 조건을 늘 뒷받침해 주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물질적 가치, 과학 때문에, 이성의 발달 때문에, 그것이 결과 된 이 물질적 가치, 이것만이 가치의 전부다 이렇게는 말할 수가 없지만은 그것이 가치의 주다. 이런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밥 먹여주느냐, 이러죠. 그런 시대에 있어서는 당연히 시인 그까짓 것 없으면 없을수록 더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디서 그런 능력을 부여받았는지 몰라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이 시라고 하는 선천적으로 불온한 인간, 선천적으로 현실에 대해서 아무리 좋아도 거기에 아, 좋습니다, 하고 엎드려서 안주할 줄을 모르는 인간, 오직 찬양만을 일삼는 그런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요 인간은 씨가 마르지 않아요. 이상합니다. 그 씨가 마르지 않는 현실적인 따라지 존재, 그러나 그들의 힘에 의해서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힘도 인간의 세계를 세계로서 존재하게 하는 중요한 받침대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신화에 우후닠의 신화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우후닠이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에 서른여섯 명이 존재하는 난쟁이이고 절름발이 이름입니다. 실재하는 인간은 아니죠. 이 세계에는 이 서른여섯 명의 절름발이 난쟁이에 의해서 세계는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고 그래도 유지가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세계를 지탱하는 36분지 1, 즉 우후닉이라는 사실을 제가 자각하면 그냥 죽어버린답니다. 그리고 신이 또 새로운 우후닉을 하나 보내준다 그래요. 시인이 그런 존재까지는 안 될는지 몰라도, 아무리 밥이, 밥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없는 인간의 세계에서 물질적 가치 이외에, 물질적 가치라고 하는 척도에서 보면 그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고, 불면 날라가 버리는 것, 이러한 가치도 자기 나름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거기에 근거를 두고 끊임없이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그런 꿈을, 영원히 불가능한 꿈을 쫒아가고 있는, 그런 시인들도 꿈꾸는 존재인 인간을, 꿈꾸는 존재인 인간으로 있게 하는, 기본적인 아주, 아주 중요한 받침대라고 하는 사실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원치 않은 말씀 들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이형기 시인께서 지난 2월 2일 타계하셨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 원고는 1992년 10월 24일 인천문화회관에서 있었던 인천문인협회(당시 지회장 이병화) 주관의 문학의 밤 행사 때 초빙되어 들려주신 강연의 녹취록입니다. 강연 시간은 약 1시간 정도였으며 최대한 육성대로 채록하였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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