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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문화산책/함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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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원작이 있는 영화․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붉지 않다
―영화 <춘향뎐>에 나타난 이미지와 서사―
함종호(영화평론가)
1. 고전 춘향전에 내재된 시간, 혹은 그 해체적 특성
예술은 인간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인간의 삶에서 시간의 진행 양상을 간과할 수 없다면, 예술은 곧 시간의 진행 양상에 의해 전개된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함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작품 가운데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들을 밑바탕으로 하여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향유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향유되었다는 점에서, 고전은 때때로 적당히 변주되고, 다양하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마치 인간의 삶은 특정한 순간의 반복이 아니듯이 말이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인 시간은 순환적이거나 직선적인 양상을 띠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추가 달린 시계를 떠올려보자. 시계추는 일정한 거리를 반복 운동한다. 이 때 시계추가 반복 운동한 거리는 1초라는 시간 단위로 개념화된다. 이 점은 바로 시간의 순환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1년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계절의 순환으로 개념화되고, 또한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주기적인 순환이 어느 샐러리맨의 삶을 개념화하는 것과 같다. 반면 순환적인 시간이 축적되고, 그러한 축적에 대한 기록이 남겨지면, 그것은 역사가 된다. 역사는 순환적인 시간에서 직선적인 시간으로의 전환을 가져온다. 축적된 시간에 대한 기록, 즉 역사는 직선적인 시간이 일련의 방향성을 내포하듯이, 특정한 의도나 주의, 주장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직선적인 시간은 일종의 방향성을 띠고, 특정 담론의 체계 내에서 구조화된다.
시간에 내재되어 있는 순환적이거나 직선적인 성격은 그러나 시간에 대한 개념 규정이 선행될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간이 흐른다.’라고 할 때의 시간은 1초, 2초, 혹은 1년, 2년 같은 분절된 시간 단위가 나열되는 형태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1초와 2초 사이에는 미쳐 개념 규정화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시간의 연속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1과 2 사이에는 유리수 혹은 무리수와 같은 무수히 많은 수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삶에서 시간의 진행 양상을 간과할 수 없고, 예술은 인간의 삶을 반영한다면, 이때의 예술작품은 순환적이거나 직선적인 시간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직선적 시간의 성격에 의존하고 있는 예술의 경우, 그것은 수많은 시간의 지속을 생략한 채 개념화된 인간 삶의 존재론적 물음을 현시하고 있음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예술작품은 인간 삶의 존재론적 물음을 단적으로 규정내리거나, 때로는 하나의 중심 테마로 압축시켜 제시한다. 그러나 흔히 말해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죽어 있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변용되어 수용되는 살아 있는 것으로써의 고전이라면, 그것은 그것이 향유되어온 수많은 시간만큼이나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1초라는 시간, 혹은 1년이라는 시간 안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의 지속을 가정할 수 있듯이, 그러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 역시도 서로 다른 무수히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을 고전은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공주는 멋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는 동화 속 주인공들도 행복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고전 속 주인공의 삶은 단적으로 규정내릴 수 없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인간 존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현재 다방면에서 전개되는 타자성 논의를 보자. 이러한 논의는 한결같이 인간 존재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해체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해체적 특성을 고전은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다.
고전이 이러한 해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춘향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익히 알다시피 춘향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여기서 판소리계 소설이란 판소리를 소설의 형태로 기록한 것을 말한다. 본래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 사설을 한편으로는 그대로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력을 발휘하여 부분적으로 변용시켜 수용해왔다. 이는 판소리를 즐기는 청중들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판소리를 즐기는 청중 가운데에는 양반도 있었고, 하층민도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았으며, 그런 그들의 삶의 태도가 판소리에 나타나는 등장인물의 삶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판소리를 소설로 기록한 판소리계 소설은 많은 이본을 가지고 있다. 춘향전만 하더라도 120여 종이 넘는 이본을 가지고 있다. 이들 많은 이본들에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은 약간씩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춘향전의 ‘춘향’이 기생으로(「남원고사」), 대비속신한 규중의 여인으로(「남창」), 혹은 양반의 서녀로(「열녀춘향수절가」) 그 신분이 바뀌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춘향의 신분문제는 춘향전의 주제를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가령 국문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춘향전의 주제에 대한 고찰을 참고한다면, 춘향전은 ‘정절’, ‘신분갈등’, ‘관민갈등’, ‘사랑’ 등의 주제로 이해될 수 있다. 춘향전의 주제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고전의 해체적 특성을,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춘향전이 국내외적으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인식되고, 아직까지 대중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데에는 춘향전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해체적인 특성, 즉 복잡성과 다양성에 기대고 있는 바가 크다. 이러한 춘향전의 해체적인 특성은 등장인물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사실상 춘향이 기생인가, 대비속신한 규중 여인인가, 혹은 양반의 서녀인가 하는 구분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춘향은 기생, 대비속신한 규중 여인, 양반의 서녀 등이 지니고 있는 성격 모두를 종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춘향전의 주제 또한 ‘정절’, ‘신분갈등’, ‘관민갈등’, ‘사랑’ 중 그 어느 하나로 규정 내릴 수 없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시간 개념 가운데 1초는 시계추가 반복 운동한 거리의 종합이듯이, 그리고 시계추가 반복 운동한 거리에서 무수히 많은 시간의 분절을 가정할 수 있듯이, 우리 인간의 모습도,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삶도 하나로 개념화될 수 없는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춘향은 ‘정절’, ‘신분갈등’, ‘관민갈등’, ‘사랑’ 등의 주제의식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인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은 해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점은 등장인물의 종합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오늘날 고전을 어떻게 변용, 수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이 점은 장르를 달리하여 고전 작품을 변용,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춘향전만큼 장르를 달리하여 변용, 수용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춘향전은 시로, 연극으로, 창극으로, TV 드라마로, 영화 등으로 새롭게 각색되어 변용,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춘향전이 영화 장르로 변용, 수용된 것만 보더라도 무려 13편이나 된다. 더욱이 <춘향전>을 영화화한 것 가운데 몇몇 작품은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것들이다. 1935년에 만들어진 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은 최초의 유성영화로, 1961년에 만들어진 영화 <춘향전>(홍성기 감독)은 최초의 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된 영화로, 1971년 만들어진 영화 <춘향전>(이성구 감독)은 최초의 70mm 영화로, 1999년 만들어진 <성춘향뎐>(The love story of Juliet)은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기록된다. 이처럼 춘향전을 영화화한 몇몇 작품들이 한국 영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춘향전이 가지고 있는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전 춘향전이 가지고 있는 해체적인 특성, 즉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우리 영화사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던 영화감독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영화 텍스트로 여겨졌던 것이다.
고전에는 순환적이거나 직선적인 시간의 양상이 내재해 있음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 있다. 특히 고전 춘향전에서 순환적인 시간의 양상은 판소리 소리꾼에 의해서 계승,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다른 예술 장르에서 변용,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서사구조의 형태로 드러나고, 직선적인 시간의 양상은 판소리 <춘향가>가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으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다른 예술 장르에서 변용,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정 주제 의식의 강화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간의 지속에 내재된 수많은 시간의 분절을 전제로 할 때 시간의 순환적 양상과 직선적 양상이 비로소 그 의미를 갖출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춘향전에 나타난 복잡성과 다양성의 양상을 고려하여 재해석, 재창조하려는 노력은 그간 간과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을 살펴볼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춘향뎐>은 고전의 해체적 특성, 즉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충분히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춘향뎐>의 형식미-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충돌
임권택 감독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작 있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주목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런 그가 새천년을 겨냥하며 야심 차게 내놓은 작품은 <춘향뎐>(2000년)이었다. <춘향뎐>의 원작은 조상현 창본 <춘향가>이다. 판소리는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가 공존하는 예술 장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춘향뎐>에서 시도된 형식적인 새로움은 바로 그 음악적인 요소를 어떻게 영화에 접목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장르는 본래 음악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춘향뎐>에서처럼 음악적인 요소(판소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극이 전개되는 형식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음악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극이 전개된다고 해서 <춘향뎐>이 뮤지컬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흔히 뮤지컬에서는 극중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지만, <춘향뎐>에서는 극중 인물 대신 극 바깥에 존재하는 소리꾼이 판소리를 가창하기 때문이다. 이 때 <춘향뎐>에서 가창되는 판소리는 일종의 내레이션의 역할을 한다. 또한 그것은 영화에서 사용되는 배경음악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영화에서 배경음악은 극적 상황에 걸맞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에 그 역할이 놓이지만, <춘향뎐>에서의 판소리는 극중 상황에 걸맞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극을 전개시키는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춘향뎐>이 개봉되었을 때부터 일찍이 많은 평자들은 <춘향뎐>에서 시도된 이러한 형식적인 새로움에 크게 주목한 바 있다. 그리고 많은 평자들은 판소리를 영화에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전통미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춘향뎐>이 구현하고 있는 형식미가 단순히 판소리를 영화에 접목시키려 했다는 점만을 가지고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춘향뎐>의 형식적인 특징은 새롭게 이미지를 배치하고자 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판소리를 어떻게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효과적인 배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춘향뎐>은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시각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그것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와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지가 충돌하여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화의 구조는 인간의 지각 작용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은 뇌라는 이미지와 세계라는 이미지가 충돌하여 생겨나는 이미지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지의 작용, 반작용의 결과이다. 여기에 <춘향뎐>은 시각 이미지(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영상)와 청각 이미지(판소리)의 충돌을 하나 더 끼워 넣는다. 예를 들어 광한루에 나와 그네 타고 있는 춘향을 방자가 부르러 가는 장면이나, 신관 사또의 명을 받아 군로 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가는 장면 등은 해학적이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아내고 있는데, 이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가 상호 충돌하여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장면에서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는 각각 움직이며, 조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중심적인 이미지가 되어 주변적인 이미지들을 응축시키고 급기야는 유사한 다른 이미지들을 연상시킴으로써 의미를 확장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것은 해학이 될 수도 있고, 풍자가 될 수도 있으며, 비애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베르그송의 이미지 존재론에 의하면, 주체로서의 인간의 의식이나 대상으로서의 사물보다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은 이미지이다. 즉, 인간의 의식이나 사물보다 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이미지인 것이다. 가령 내 앞에 놓인 토마토를 보고 ‘토마토는 붉다.’고 판단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토마토를 붉다.’고 의식적으로 판단한 것은 ‘토마토’ 그 자체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체로 환원될 수도 없다. 그것은 단지 ‘붉거나 붉지 않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춘향뎐>의 춘향도 기생이거나 규중 여인의 이미지로 존재한다. 인간 주체를 동일성의 차원으로 규명 내릴 수 없듯이. 이는 앞에서 살펴본 시간에 대한 논의와도 관련이 있다. 시간은 지속성을 갖는다. 1초, 2초 등의 시간 개념은 시간의 지속성에 비해 차후에 구성된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지속성, 그리고 그러한 시간 이미지는 구체적인 개념이나 의식, 또는 대상에 비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춘향뎐>에서 시도된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 혹은 이들 이미지의 작용, 반작용은 영화 <춘향뎐>을 특정한 개념으로 규정된 춘향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를 통해 <춘향뎐>은 고전 춘향전을 특정 담론 체계로 구조화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특정 담론 안에서 구조화되는 직선적인 시간으로부터 미처 분절되어 개념화되지 못한 시간들을 끄집어내 확장시키려는 행위와 같다. 그네 타는 춘향을 방자가 부르러 가는 장면이나, 군로 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가는 장면에서 보이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조화, 혹은 배치는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서사적 시간의 측면에서 보면 불필요한 것이지만, 특정 서사에서 소외된 우리 인간의 삶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서사는 등장인물 상호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에 의해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가 일정한 방향성을 획득하고, 특정한 의미를 갖기 이전에 벌써 그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는 먼저 우리 눈앞에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또한 흔히 서사는 특정 주제의식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작용, 반작용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는 그러한 특정 주제의식으로의 귀결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즉, 이미지는 서사의 외부를 이룬다. 그러므로 앞서 예로 든 <춘향뎐>의 몇몇 장면은 특정 주제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하여 몇몇 평자들은 이들 장면의 영상미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정작 이들 장면은 영화 서사에 어울리지 않는 불필요한 장면이라 평하고 있지만, 이러한 평가는 영화를 서사 중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내려진 평가이다. 존재론적인 차원, 더 정확히 말해 이미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이들 장면은 인간 존재의 더 근본적인 차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므로 그 의의 또한 크다 할 수 있다.
사실 고전 춘향전은 우리에겐 이미 상투적인 서사이다. ‘만남-이별-만남’이라는 춘향전의 서사 구조 또한 여타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본 구조일 뿐만 아니라, 춘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너무 낯익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춘향뎐>은 원작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원작이 지닌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이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데에는 <춘향뎐>의 원작이 조상현 창본 <춘향가>라는 점에 있다. 이미 앞서 살펴 본 바 있듯이, <춘향가>는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춘향뎐>은 원작에 충실하게 이들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를 모두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는 <춘향뎐>이 행하고 있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조화 내지는 배치라는 새로운 형식 실험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이처럼 <춘향뎐>에서 행하고 있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와 조합은 영화 서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인 시도는 그간 영화에서 행해진 바 없는 새로운 시도였다.
3. <춘향뎐>에 나타난 시선의 분리
형식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춘향뎐>은 춘향전의 상투적인 서사를 지양하고자 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춘향을 복잡성과 다양성의 차원에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앞서 우리는 춘향전에 나타나는 주제 의식을 ‘정절’, ‘신분갈등’, ‘관민갈등’, ‘사랑’ 등으로 파악된다고 한 바 있는데, <춘향뎐>에서는 이러한 주제 의식이 춘향의 다양하고도 입체적인 묘사를 통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춘향뎐>이 개봉되었을 당시 평론가 심영섭은 <씨네 21> ‘개봉 영화 20자평’에서 “<춘향뎐>에는 춘향이 없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짧지만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의 지적처럼 <춘향뎐>에는 춘향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춘향뎐>에 나타난 춘향의 존재는 춘향 자신에 의해 존재 근거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춘향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규정 내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춘향뎐>은 춘향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고 있지 않다.
사실 춘향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 고려해야 할 문제는 그의 신분 문제이다. 이미 앞에서 거론한 바 있듯이, 춘향전 이본들에 나타난 춘향의 신분은 기생, 대비속신한 규중 여인, 양반의 서녀 등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춘향의 신분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의 행동 체계가 달리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춘향전의 주제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유도 또한 바로 춘향의 신분 규정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츈향이 거문고 믈니치고, 젹무인임즁문의 분벽창 고요다. 원앙금침 잣벼를 촉하의 포셜고 셜부화용 드러여 츈졍을 아니 아릿답고 그럽다.
“도령님 몬져 버시오.”
“나 몬져 버 후의 너 아니 버랴나보다. 잡말 말고 너부터 버셔라.”
츈향이 몬져 버 후의 니도령도 마 벗고 에후루쳐 허험셕 안고 두 몸이 몸이 되엿고나.
2)“나상을 버셔라.”
춘향이가 쳠음 이릴 안이라, 북그러워 고을 슈겨 몸을 틀 졔, 이리곰슬 져리곰슬 녹슈에 홍연화 미풍 맛나 굼이난 듯, 도련임 초 벽겨 졔쳐노코 바지 속옷 벽길 젹의 무한이 실난된다.
위 인용문은 각각 「남원고사」와 「열녀춘향수절가」의 한 대목이다. 이들 인용문은 춘향의 신분 변화에 따라 그의 행동 양상이 어떻게 변모하는가 하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춘향이 기생으로 설정되어 있는 「남원고사」의 경우, 이도령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려 할 때 춘향은 이도령에게 먼저 옷을 벗으라고 할 정도로 대담성과 적극성을 보이는 데에 비해, 춘향이 양반의 서녀로 설정되어 있는 「열녀춘향수절가」의 경우, 춘향은 부끄러움을 표시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춘향이 기생일 때와 양반 서녀일 때의 행동 양상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 영화 <춘향뎐>의 경우, 춘향은 대개 규중 여인의 조심성과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춘향과 이도령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만큼은 노골적인 성애의 장면을 삽입시킴으로써, 춘향의 이중적인 모습(기생으로서의 모습과 양반 서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춘향의 모습은 고전 춘향전에 내재된 상투적인 주제 중 어느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가로막는다.
영화 <춘향뎐>에서 묘사되는 이중적인 춘향의 모습은 과거 영화에 비춰진 춘향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일례로 1961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춘향전>(홍성기 감독), <성춘향>(신상옥 감독)의 경우, 춘향과 이도령의 육체적인 사랑의 장면은 배제되고 있는데, 이는 양반 서녀로서의 춘향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며, 더 나아가 이들 영화가 추구하는 주제의식은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아니라 춘향의 정절에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는 다분히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 춘향전에 접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영화 <춘향뎐>은 춘향과 이도령의 육체적인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춘향을 기생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를 진실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굳이 정신분석학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은 육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와는 반대로 이를 억제해야 한다는 도덕성에 사로잡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영화 <춘향뎐>에서는 춘향을 통해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춘향뎐>에서의 춘향이 기생이면서 동시에 규중 여인인 이중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춘향을 둘러싼 시선과 응시의 분리 문제로 접근하여 살펴볼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 주체는 바라보는 주체(시선)와 보여지는 주체(응시)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춘향뎐>의 춘향은 그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이자 동시에 타인이 바라보는 시선(응시)의 객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우리가 구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며,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 할 때 주체의 시선을 지배하는 것은 응시가 된다. 그렇다면 <춘향뎐>에서 춘향이 기생이면서 동시에 규중 여인의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춘향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인 응시에 의해 구조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춘향뎐>에서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춘향은 수청들 것을 강요하는 변학도에게 “제 비록 기생의 자식이오나 기적에 이름 올리지 않고 여염집 여자로 자라났나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은 기생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그 고을 어느 양반은 “네 맘대로 기생 구실을 안 할 수는 없느니라. 구관을 보내고 새로운 사또를 모시는 것은 법전으로도 당연하고 관례로도 당연하거늘 요망한 말 다시 말고 수청 올려라.”라고 변학도 입장을 대변해준다. <춘향뎐>에서의 춘향은 이처럼 바라보는 주체(규중 여인으로서의 시선)와 보여지는 주체(기생으로의 응시)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춘향에게 있어서 시선과 응시의 불일치는 주체의 결핍을 낳고, 이러한 주체의 결핍은 자신을 규중 여인으로 인정해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허구적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도령은 춘향의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불망기를 써 주어야 했으며, 이들이 나누는 매우 뜨거운 육체적인 사랑 또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비례하여 매우 강렬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고전 속의 등장인물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살아간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시간의 양상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고전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수용하는 문제는 직선적 시간의 성격을 지닌 예술의 형식, 그러니까 단편적인 서사 전개에 몰입하거나 특정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예술 형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영화 <춘향뎐>은 고전 춘향전이 지닌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삶의 모습을 형식적인 실험과 춘향을 이미 개념 규정한 상태에서 전개되는 서사적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노력 등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함종호
․1970년 출생 ․현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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