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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③/고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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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③
속담에 나타난 제주인의 삶의 모습
고재환
3. 식생활(食生活)
■ 방울 봥 궂인물 도고리 다 들이쓴다.
(쌀 한 방울 보고 구정물 한 함지박 다 들이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영감”이라고 했듯이, 먹고사는 문제는 삶의 제일순위에 해당한다. 현재도 예외일 수는 없지만, 옛 분들은 한 톨의 곡식알도 금싸라기나 다름없이 귀히 여긴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라기보다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식량난으로 오금을 펴고 사는 날이 많지 않았으니까. 제주도의 지반은 거의가 다공질성(多孔質性)의 현무암과 척박한 화산회토(火山灰土)로 돼 있어, 우량은 많으나 지하로 쉬 스며드는 누수현상이 심해서 지표수(地表水)가 모자라다. 해서 논농사는 거의 없고 밭농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보리․조․콩․메밀과 같은 잡곡류가 주된 농산물이다. 쌀밥은 생일날이나 잔칫날, 기제삿날이 아니면 좀처럼 먹지 못한다. 쌀밥 향수징에 걸렸다고나 할까, 겨울에 내리는 싸락눈을 보면 저것들이 쌀 방울이었으면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을 텐데, 가슴 설레기 일쑤다. 그렇다고 쌀만 귀하고 잡곡은 흔했다는 말이 아니다. 흉년이 드는 날이면 잡곡밥도 없어서 못 먹는다. 오죽했으면 쌀 한 방울을 건져내기 위해 함지박에 가득 찬 구정물을 다 마신다고 했을까. 다음의 속담들만 보더라도 식생활의 문제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정 아이덜은 곤밥 주켕 민 울곡, 조팝 주켕 민 안 운다.
(강정 아이들은 쌀밥 주겠다고 하면 울고, 조밥 주겠다고 하면 안
운다.)
․설귀떡 늬만이 먹으민 싀 참은 더 걷나.
(설기떡 이만큼 먹으면 시오리 더 걷는다.)
․밥이 인이여.
(밥이 인삼이다.)
․초신착도 지름 랑 구민 먹나.
(짚신짝도 참기름 발라서 구면 먹는다.)
제주도에는 강 대신 내/개천뿐인데, 이들은 비가 많이 올 때만 흐르고 평상시는 깡마른 건천(乾川)이다. 그런데 서귀포시 강정동에 있는 강정천은 평상시도 맑은 물이 흘러 그 주변에는 논밭이 형성돼 있어 벼농사를 짓는 부촌에 속한다. 그래서 “일강정, 이법환.”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다. 이 말은 ‘*강정’이란 마을이 첫 번째이고, ‘*법환’이란 마을은 두 번째라는 비교 우위를 드러낸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속담대로라면 ‘강정’에 사는 아이들은 쌀밥 귀한 줄을 몰랐다는 말이 된다. 이곳의 아이들은 칭얼대며 울 때 쌀밥인 곤밥을 주겠다고 하면 별것 아니라고 해서 계속 울다가도 조밥을 주겠다고 해야 울음을 멈춘다는 아이러니가 바로 그것이다. 딴 곳의 아이들에게 조밥은 지겨울 정도인데, 곶감 주겠다고 해야 안 울었다는 전래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잡곡밥을 먹고 자란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조밥은 보리밥만 못하다. 그것도 차조밥은 나은 편이나 메조밥은 지어서 식으면 다시 밭에 뿌릴 수 있을 정도로 알알이 흩어진다. 숟가락이 있어서 다행이지 없었다면 손으로 쥐어 먹어야 될 판이다. 이처럼 같은 고장에서도 지역적인 차이가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또 쌀을 빻아서 찐 백설기도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다. 그것을 이빨의 크기만큼 떼어먹으면 당장 효과가 드러나는 보약도 아닌데, 어찌 힘이 나서 시오리를 더 걸어갈 수 있단 말인가. 사실이 아닌 거짓말이지만, 그만큼 쌀로 만든 음식이 귀했다는 것을 귀담아 들으라는 것이다. 쌀만이 아니다. 잡곡도 풍족치 못해 식량이 떨어지면 삼순구식(三旬九食)도 어쩔 수 없었던 당시에는 겨밥이 아닌 잡곡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다. 밥이 영약인 인삼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밥이 일한다.”는 말과 같다. 하루 세 끼니를 안 거르고 꼬박꼬박 다 챙겨 먹을 수 있다면 굳이 인삼을 먹지 않더라도 몸이 튼튼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짚신짝에 참기름을 발라서 구면 정말 먹을 수 있었을까. 거짓말이다. 그 참뜻은 참기름의 효능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이다. 옛 분들은 음식에 맛깔을 내는 조미료의 으뜸으로 참기름을 꼽았던 데서 비롯된 농담이다. 나물이나 횟감을 무칠 때 참기름을 아끼지 않고 듬뿍 친다. 그것은 요즘 시중에서 파는 상품용 참기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직접 가꾸어 거둬들인 참깨를 볶아서 짜낸 것을, 다시 무쇠솥에서 구수하게 고아낸 진짜 참기름이다. 거기에다가 우리 어머니들의 흙에 전 투박하고 풋풋한 손맛이 녹아들었으니 어찌 맛이 없으랴. 설령 실제로야 먹을 수 없는 짚신일망정 그런 손맛과 정성을 함께 발라서 구우면 먹을 수 있다는 참기름 예찬론이다.
이렇듯 옛날의 식생활은 지금과는 천양지차다. 땅바닥에 밥알이 떨어졌을 때 주워 먹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주워 먹기커녕 그 꼴이 추하다고 나무라서 만류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돼 있다. 1950년대만 해도 떨어뜨린 것을 주워 먹는 것을 예사로 알았고, 심하면 밥알에 묻은 흙을 떨어내고 먹는다. 밥알만이 아니다. 곡식 알맹이도 땅에 떨어진 것을 일일이 주워야지 그냥 버리면 죄짓는다고 꾸짖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옛 분들은 언제 악천후(惡天候)인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조정에서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굶주려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음이 옛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 정조 때 채제공의 번암집에 게재된 <만덕전>의 주인공인 의녀(義女) 김만덕의 구휼담(救恤談)이다. 정조 18년(1794) 8월에 큰 비바람과 바닷물로 백곡이 멸종돼서 굶주려 죽는 자가 많았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보면, 이때 제주목사 이우현은 조정에 청해서 이전미(移轉米) 12,000석, 백미 1,345석, 조(租) 2,275석, 보리 6,555석을 17척의 배로 싣고 온 것 외에, 이 목사 자신의 비축곡 316석을 더 보탰다. 이듬해도 계속 기근이 겹쳐 내탕전 15,000냥을 조(租)로 바꿔 구제했고, 이 목사 역시 자비곡(自備穀) 1,430석을 풀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호구가 줄어들게 됨으로, 이 목사는 문책을 받은 바 있다. 바로 이 무렵 김만덕은 본시 양가에서 태어났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방생활을 했었는데, 그간에 모았던 재산을 털어 육지부에서 곡식을 사들여 굶주린 제주도민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이 상을 내리고자 했을 때 이르기를, 오직 임금을 뵈는 일과 금강산을 구경하는 일이 평생의 소원임을 아뢰자, 그 소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궁중에 들일 수 없으므로, 잠시 내의녀(內醫女)로 삼고, 그의 소원인 알현과 금강산 구경의 뜻을 이루도록 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나마 되새기고 기리기 위해 1977년 1월에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남쪽 기슭에 기념관과 탑이 세워졌고, 매해 열리는 제주도민의 축제인 ‘탐라문화제’를 즈음해서 사회봉사에 헌신한 여성을 뽑아 ‘만덕상’을 수여하고 있다. 또 요즘은 그 위상을 더 높이고자 ‘김만덕연구보고서’가 발간되는 등 위대한 ‘제주여성상’으로 부각시키려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위 국 하영 먹으민 가시어멍 눈 멜라진다.
(사위 국 많이 먹으면 장모 눈 망가진다.)
지금도 식사 때 서너 사람 몫을 먹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대식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식량 사정이 여유가 없던 옛날의 대식가는 두려운 존재이다. 그 뒷바라지가 만만치 않아서다. 장모의 입장에서 사위가 대식가일 때는 더 걱정이다. 먹거리 장만하느라 고생할 딸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아닌, 장모 자신이 직접 피해자가 될 수가 있다. 모처럼 사위가 찾아왔는데 씨암탉은 못 잡아 줄망정 밥 한 끼쯤은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 도리이다.
제주도의 재래식 부엌은 내륙지방과는 달라서 불을 때는 솥 아궁이가 방으로 연결돼 있는 온돌형 화덕이 아니다. 돌을 삼발이 모양으로 세우고 그 위에 솥을 앉혀 불을 지피게 돼 있다. 땔감도 평시에는 장작이 아닌, 짚이나 들에서 베어들인 억새와 같은 검불들이다. 그것도 어쩌다 습기가 찰 경우는 불을 때면 연기가 부엌에 가득 차서 눈물을 안 쏟고 못 배긴다. 그러니 사위가 국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그만큼 더 많이 끓여야 하니, 연기의 피해를 덤으로 입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장모의 눈이 망가진다고 한 것이다.
제주인의 식생활문화 중 특이한 것은, 식사 때 국을 빠뜨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밥과 국은 떨어질 수 없는 짝꿍이다. 아마 세계 유일의 ‘국문화’ 일번지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옛 분들은 지금도 아무리 반찬이 좋아도 국이 없으면 역정을 내신다. 반찬은 없어도 되지만 국은 꼭 있어야 한다. 봄철에는 주로 나물국과 냉이를 캐어다가 끓인 ‘난싯국’이다. 유다른 것을 꼽는다면, 죽순처럼 솟아나는 양하(蘘荷)를 잘라내서 끓인 된장국인데 그 향긋한 맛은 냉잇국 이상의 별미다. 이 양하는 열대 아시아가 원산지인데, 음력 7월 중순으로 접어들면 뿌리에서 솟아나는 검붉은 빛의 꽃 몽우리가 솟아난다. 그것을 제주어로 ‘양에간’이라고 하는데, 잘 다져서 메밀가루 넣어 끓인 국은 고깃국 대신 먹는 특식이다. 이제는 이 ‘양에국’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고, 바다에서 잡은 극피동물인 성게의 노르스름한 속을 꺼내서 끓인 ‘성게국’이 되레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따금 시원치 못한 식당에서는 보라성게가 아닌 말똥성게로 끓인 것을 ‘성게국’이라고 해서 내놓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쓴맛이 나서 별로다. 보라성게로 끓여야 쓴맛이 없고 입안에 상큼한 바닷내음이 감돌아 참 맛이 난다. 또 ‘깅이국’도 있다. 이 국은 썰물 때 돌멩이를 치우며 잡은 바닷게를 제주어로 ‘깅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빻아서 걸러낸 물에 날미역을 넣어서 끓인 것이다. 맛이 고수하고 감칠맛이 있는데다가 먹으면 다리가 가벼워진다고 해서 노인들은 좋아했다.
여름철이 되면 국거리가 더 다양하다. 날씨가 무더워서 냉국을 선호하는데, 해초류인 미역․청각․톳을 물에 잘 빨아서 행군 다음 알맞게 썰어서 된장을 풀면 되고 오이냉국도 마찬가지다. 특히 농촌에서는 김을 매러 밭에 갈 때면 된장에 버무린 이들 냉국거리를 가지고 가서 그늘에 뒀다가 점심때 물만 부으면 된다. 이때 반찬은 주로 마늘장아찌와 무장아찌인데, 무장아찌는 농담으로 쇠고기 반찬이라고 하면서 내놓는다. 어쩌다 냉국거리가 없으면 된장만은 있어야 한다. 냉수에 그 된장을 풀면 건더기는 없지만 냉국 대용으로 먹을 수가 있으니까.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목장에 놓은 우마를 돌아보러 갔다가도 반찬으로 가지고 간 된장을 덜어서 장국을 만들어 먹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렇다고 나물이나 해초류로 만든 국만이 전부가 아니다. 식도락가들이 즐길 법한 횟국도 해 먹는다. 음력 5월과 6월 알이 꽉 찬 자리돔을 잘게 썰거나 다져 만든 물회는 참으로 일미다. 그것도 제주시 앞 바다에서 떠올린 자리돔을 더 알아준다. 지금은 제주를 대표하는 먹거리인 토속음식으로 자리잡았지만, 옛날에도 여름철 횟국으로 술꾼들에게는 더 없는 서민형 안주다. 이처럼 자리는 횟감으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콩을 놓고 뼈까지 먹을 수 있도록 조리면 반찬으로도 일품이다. 횟감 말이 나왔으니 두 가지만 더 소개하면, 제주어로 ‘다니’라고 부르는 두툽상어가 있다. 그 생김새가 상어새끼처럼 작게 생겼지만 껍질을 벗기고 먹을 만큼의 크기로 뼈째 썰어서 양념된장에 찍어먹거나 횟국을 만들면 뽀드득뽀드득 씹히는 맛은 ‘자리물회’가 저리 가라다. 또 하나는 그물로 떠낸 싱싱한 멸치로 만든 ‘멜횟국’인데, 소주라도 한 잔 곁들이면 그 맛은 참으로 희한하려니와 애호박이나 배추를 넣고 끓인 ‘멜국’의 맛도 그만이다.
가을철로 접어들면 어류(魚類)의 맛이 제일 좋아지는 때이다. 10월 23일께 상강이 지나면서부터는 바닷고기의 살이 토실토실해지고 기름기가 많아져서 횟감도 좋지만, 구워 먹거나 국을 끓여도 맛있다. 요즘은 찌개도 끓여 먹지만, 예전에는 찌개가 아니라 국이다. 바닷고기로 국을 끓이면 비린내가 나서 어찌 먹을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식생활의 관습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썩힌 홍어회를 안 먹어본 사람은 역겨워하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없어서 못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비늘을 떨어내고 무나 호박, 풋고추를 매콤하게 썰어 넣고 끓인 것을 따끈할 때 먹으면 반찬이 있으나마나다. 근간에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갈칫국’ 맛을 보고는 놀란다. 전날 과음해서 속이 쓰릴 때도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속이 풀리고 개운해진다고 해서 애주가들이 즐겨 찾고 있다.
겨울철의 국으로는 맷돌에 간 콩가루를 잘 개어서 끓인 콩국이 으뜸이다. 함박눈이 마당에 소복소복 쌓이는 저녁때는 텃밭에 구덩이를 파서 묻어둔 고구마를 꺼내다 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채롱에 꺼내서 콩국을 한 대접씩 앞에 놓고 온 식구가 어깨를 맞대고 둘러앉으면 얼굴이 환히 펴진다. 이때 먹는 고구마와 콩국의 맛은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쩌다 동네에 돼지 추렴을 하면, 그간 어렵사리 푼푼이 모아 주머니에 돌돌 말아서 넣어두었던 지폐를 선뜻 집어 들고 나간다. 큰맘 먹고 돼지 다리 하나를 들고 와서 솥에 넣는 날이면, 잔치 기분 그대로이다. 한데 그 고기는 썰어서 먹으면 식구가 여럿일 때는 한꺼번에 없어져 버린다고 해서 두서너 점씩만 맛을 보고 국을 끓여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돼지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풍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혼인잔치 때 돼지고기를 삶았던 진국이 설설 끓는 가마솥에 모자반을 넣은 ‘국’ 역시 제주도 고유의 토속음식이 하나다. 기제사 때 올리는 국인 갱에도 돼지고기를 썼고, 잔치 때 돼지고기 국수를 하면 대단한 성찬으로 알아서 아무 집에 잔치 잘 차렸다고 소문이 자자할 정도다. 근간에는 돼지고기를 잘게 찢어 고사리를 넣고 푹 끓인 것을 ‘육개장’이라고 해서 즐겨 먹고 있다.
왜 그럼 제주도에는 이처럼 식생활문화 중에서 ‘국문화’가 유별난 것일까? 그 답은 한마디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식량이 모자라서 생계유지가 어려웠으므로, 국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데서 웬만한 식품류는 다 국거리 재료가 됐던 것이다.
■어멍은 개물리멍 빌어온 장 아방은 굴레에 다 담나.
(어머니는 개 물리면서 얻어온 장 아버지는 한입에 다 담는다/먹는다.)
요즘의 사람들은 밥보다 반찬에 더 신경을 쓴다. 밥이야 쌀밥을 먹는 것이 체질화돼 버렸으니 좋다 궂다 타박하지 않지만 반찬인 경우는 다르다. 한두 끼는 같은 반찬이라도 되지만 그 이상일 때는 맨날 같은 반찬이라고 투덜거린다. 그래서 가정주부들은 반찬거리에 꽤 고심한다. 그런데 자주 식탁에 올려져도 투덜거리지 않는 것이 있다. 메주를 쑤어 만든 잘 익은 양년된장이다.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옛 분들은 어떠했을까. 부잣집이면 모를까 반찬투정은 고사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 허리가 휘어지는 판국에 된장이면 그만이다. 비단 제주도에 한정된 것이 아니지만, 식생활에서 장은 밥․국과 함께 음식의 삼대 요소다. 밥이 모자랄 때는 국으로나마 충당할 수 있도록 언제나 풍족히 끓여서 양껏 먹을 수 있게 돼 있다. 그러자면 간을 맞출 장이 필요하다. 소금은 그 대용품일 뿐 장을 따르지 못한다. 나물국만 하더라도 소금을 넣고 끓였을 때는 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장은 일년 내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돼 있어야 한다. 말이 그렇지 여유 있게 담가놓고 먹는 집이 흔치 않아서 도중에 떨어지기 쉽다. 그럴 경우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는 어머니는 그냥 있을 수가 없으니, 남의 일을 해서라도 그 품값으로 장을 구해 와야 한다. 재수가 없으면 그 집에 기르는 사나운 개한테 장딴지를 물려 피가 쏟아져도 원망 한마디 못 하기 일쑤이다. 그때 치료는 약 대신 된장을 발라서 처매주는 주인의 응급처치가 전부이다. 그토록 어머니는 고생을 무릅쓰고 얻어온 장인데도 아버지는 귀한 줄 모르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반찬이라고는 된장뿐이니 빨리 없어지기 마련이지만, 아껴서 조금씩 먹는 게 아니라 듬뿍듬뿍 떠서 먹어버린다. 여기에 드러난 남자의 꼴은 여간 몰인정하고 야박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아들놈 역시 게걸스럽고 매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멍은 좁만씩 빌어온 장 아은 말똥만씩 먹나.
(어머니는 좁쌀만큼씩 얻어온 장 아들은 말똥만큼씩 먹는다.)
․장 고린 집이 일레 안 간다.
(장 고린 집에 일하러 안 간다.)
․드릇 가온 장, 상뒤 가온 비바리.
(들에 가온 장, 상두꾼에 가온 처녀.)
․숭년엔 뒌장 사발에 밧 판이 준다.
(흉년에는 된장 한 사발에 밭 한 뙈기 준다.)
가장인 아버지는 그런다고 치더라도 자식녀석인 아들마저 그러니 말이 아니다. 모자지간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심봉사 젖 동냥질하듯 겨우겨우 좁쌀만큼 씩 얻어 모은 된장인데, 말똥만큼씩 떠먹어 버리면 당장 내일 또 다시 구걸행각을 나서야 하니, 장 없는 고충과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장을 귀히 여겼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린 장 오래 간다.”는 말처럼 맛을 그르친 장은 따돌려지고 만다. 장만 따돌림당하는 것이 아니라, 더 딱한 것은 품앗이마저 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장맛이 없으면 밥맛이 좋을 리 없으니 피할 수밖에. 품앗이를 제주도에서는 ‘수눔’이라고 해서 서로 어울려 김을 매고 정을 나누는 이웃사촌으로 돈독한 우의를 쌓았는데, 장맛으로 인해 품앗이를 피한다는 것은 그만큼 장의 가치가 컸음이다. 본래 고리지 않은 장이라도 떠내서 오래 두거나 숟갈로 휘젓고 나면 색깔도 변하고 맛이 한물 가버린다. 그래서 들에 가지고 가서 먹다 남아서 가지고 온 장은 맛이 없으므로 알아주지 않았는데, 그것을 상두꾼이 우글거리는 데 갔다 온 처녀에 빗댄 것은,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기발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남존여비의 숨은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이런 경우의 장의 위력은 독 안에 담아서 뚜껑을 닫아둔 단순한 반찬거리가 아니다. 한 사발의 된장으로 밭을 가질 수 있는 거금의 금덩어리나 다름없는 효용가치가 그것이다. 아무리 먹을 것이 귀한 흉년이라고 한들, 단 한 사발의 된장으로 밭과 맞바꾼다니, 괜히 해보는 엉뚱한 소리라고 부인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그런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궁지에 몰렸을 때의 절박함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먹는 사람의 수효를 줄여야 된다는 “흉년에 밭 팔지 말고 입 하나 덜라.”고 한 속담도 있고 보면, 삶의 융통성과 지혜는 당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어찌 생각하면 된장 한 사발에 밭 한 뙈기 준다는 것은 우둔한 처신으로 비쳐지기 쉽고, 입 하나 줄이라는 것은 지구에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으라고 한 말처럼 비중 있게 들릴지 모른다. 삶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생이별로 이산가족을 만들지 않으려면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혈육의 정이고 도리이다. 재산은 없다가도 있는 것, 일회성의 생명은 한번 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된장 한 사발이 밭 한 뙈기보다 낫다는 것은 상황논리에 맞아떨어지는 판단일 수 있다. 농사꾼한테 흉년은 가족의 생사를 좌우하는 막다른 벼랑 끝이었으니까. 아마 현대인들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 승용차 한 대를 주고받는 해프닝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집에서 직접 장을 담가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다가 먹으면 그만인데, 고생스럽게 담가 먹을 것이 뭐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고생은 귀하고 아까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만든다. 그보다 더한 것은 내 정성과 손맛이 발효돼서 가족들의 혈관에 맑은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게 되는 행복감이다. 그래서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중기획사업의 하나로써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는 솜씨와 정성은 대해서 날을 봐 가며 공을 들였던 것이다. 진사일(辰巳日)은 피하고 오일(午日)을 일로 택해서 되도록 연말에 담는 것이 통례다. 모처럼 담근 장이 잘 익을 수 있도록 장독도 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둔다. 행여 장맛을 그르쳐 주부의 자질에 금이 갈까 두려워 숯도 띄우고 고추도 띄운다.
어디 그뿐이랴. 집을 비우고 나들이를 하거나 밭일을 하러 갈 때는 신신당부를 한다. 비가 오면 일차로 장독의 뚜껑을 닫으라는 것과 마당에 멍석을 펴고 널어둔 곡식을 담아 들이라고. 일고여덟 살 적이니 대답만 그럴듯하게 하고는 낮잠에 취해 깜박 놓치고 말 때가 있다. 어머니는 그것을 미리 예감을 하고 있음인지, 집 어귀에서부터 호통을 치며 황급히 들어선다. 그제야 엉겁결에 맨발로 장독대로 내닫는다. 허겁지겁 비에 젖는 곡식을 담아 들이고 나면 불문곡직(不問曲直) 종아리에 부지깽이 자국을 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맞은 매에는 분노의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저 잘못을 때리는 회초리 그대로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다. 할 일을 못한 잘못을 깨우치는 사랑의 매였다. 육년 전 향년 101세로 세상을 뜨실 때 손자놈만 먼저 종명의 순간을 지켜봤을 뿐,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강의시간에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했던 불효의 아픔이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것은 웬일일까.
주) *강정: 서귀포시 서쪽 해변에 있는 마을 이름.
*법환: 서귀포시 ‘강정’ 바로 동쪽에 있는 마을 이름.
고재환․
1937년 제주 출생
․저서 제주속담총론 제주도속담사전 외
․제주교육대 명예교수 ․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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