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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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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03회 작성일 08-02-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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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탱자가 회수를 건너듯
―윤대녕의 「탱자」
(문학과 사회 2004년 겨울)

서영인(문학평론가)


󰡔은어낚시통신󰡕이 출간된 지 꼭 10년이 지났다. 그간에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했으며 적지 않은 장편과 작품집을 꾸준히 출간하며 건재하고 있지만 윤대녕은 10년 전 그때처럼 평단과 언론을 집중시키는 작가는 아니다. ‘존재의 시원으로 회귀하는 글쓰기’라는, 등록상표처럼 윤대녕을 거론할 때마다 언급되곤 했던 어떤 경향이 이제 더 이상 우리 문학의 트랜드는 아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참으로 많은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고 당대 문학을 호명하는 명명법은 그 소설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전환과 변환을 거듭했다. 이념과 현실에 맞서는 개인과 일상의 복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2000년대의 한중간에 선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반복하기 민망할 만큼 진부해지기도 한다. 개인적 경험을 들추어 보니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여행과 돌연한 만남이 주는 신비주의와 몽롱함에 거북해 했던 당시의 기억이 새삼스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문학적 경향이란 얼마나 짧은 주기 속에서 사라지고 변환되면서 또한 반복되는 것인가 하는 느닷없는 감상이 밀려오기도 한다. 오랜만에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며 세상이 참으로 빨리도 변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시대를 분석하고 탐구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겠지만,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경향이 변화를 한낱 유행으로 만들고, 그 유행의 교체를 촉진함으로써 문학을 과잉 소비시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의 윤대녕은 10년 전의 윤대녕이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라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는데, 윤대녕이 짊어지고 있는 한 시대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무게가 이후의 작품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윤대녕이 그 때의 윤대녕과 어떻게 다른가가 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화 없는 일상과 관습화된 삶을 뚫고 문득 찾아오는 존재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 내면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늘 어디론가 떠나야 했고 낯선 타자와 조우해야 했던 주인공들은 최근 윤대녕 소설에서도 간간히 드러나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 빈도나 작품에 대한 장악력은 줄어들었다. 「탱자」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데, 「탱자」의 고모는 일상을 훌쩍 떠나 여행길에 나섰지만 그것은 낯선 존재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난 삶을 기억하고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 한 편의 작품을 가지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윤대녕의 소설은 일상으로 더 가까워졌으며 그 일상을 껴안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들의 지난하고 고독한 삶의 무게에 더 귀를 기울인다. 「탱자」는 낯선 일상을 떨치고 훌쩍 다른 존재로의 모험을 떠나는 소설이 아니라 그 한번의 떠남이 치러야 했던 대가, 그 후로도 오래오래 계속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이며 삶을 붙들어 매는 일상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탱자」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은 고모이지만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화자는 조카인 ‘나’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고모의 내면보다는 고모가 발설하는 과거의 이력에, 그리고 현재의 고모의 모습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깨알 같은 작은 얼굴에 타고난 박색이었고 마르고 키까지 작아서 어려서부터 사람대접을 못 받은 고모는 가족에게서조차 소외된 인물이었다. 심지어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계집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살았던 고모에게 일상이란 견디기 힘든 노역과도 같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마을 유지라 할 만한 시골 면장의 집안은 더더욱 고모를 견디기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 열여섯 살의 고모는 절름발이 담임선생과 야반도주를 함으로써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 속에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자신의 존재를 찾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단 한번의 일탈이 고모의 일생을 저당 잡는다. 일탈과 모험의 대가로 고모는 자신에게 닥쳐온 삶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기만 해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절름발이 담임선생과 눈이 맞았던 것은 절름거리며 힘겹게 걷는 선생의 뒷모습에서 삶을 애써 견딜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외로움과 적막함을 읽었기 때문일 테고 그 외로움을 아는 자들끼리의 삶 속에 뛰어들므로써 자신의 소외를 떨쳐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더기 차림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고모는, 박대를 견디며 집안에서 거의 하녀처럼 살아야 했고 소문이 두려워 어디론가 떠밀리듯 시집을 가야 했으며, 이미 떠밀린 삶은 그렇고 그런 불행을 안겨다 주었고 그래서 내내 고독했다.
그리고 지금 늙어 삭아 버린 육신으로 고모는 생전 가보지 못했던 설악을, 경주를 여행하고 홀로 조카가 살고 있는 제주도로 찾아온다. 평생 적막했던 일상을 훌쩍 떠난 길이겠지만 그 길은 이미 일상이란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는 자의 길이다. 야반도주 후 거지꼴로 돌아와 12년을 부엌데기로 견디게 했던 그 절름발이 선생은 이제야 함께 살자고 손을 내밀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건네준 탱자 몇 알을 들고 바다를 건너왔지만 그 바다를 건너온다고 탱자가 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물을 건넌다고 단번에 달라질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고모는 그리고 곧 죽었다. 암 선고를 받고서야 평생토록 발목에 매어 달렸던 일상을 떠나올 수 있었지만 그 떠남은 이제 일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롯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은, 죽음 아래에 번득이는 다른 삶에 대한 욕망과 미련으로 안타깝다.
윤대녕은 탱자가 회수를 건너듯 훌쩍 뛰어넘어 다른 존재로 이탈하고 싶은 열망을, 그러나 그 열망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삶이란 바다를 건너도 그 아릿한 향기를 잃지 않는 탱자를 품에 안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담담히 고모의 삶을 쓰다듬는다. 확실히 시대를 구획 짓던 새로운 감수성의 세계는 더 이상 윤대녕의 것이 아니다. 고모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회한에 가득 차 있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세월과 삶의 무게를 품어 안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고모의 시선이, 몇몇 한적한 은둔자들과의 관계 말고는 구체적 삶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 ‘나’의 시선이 삶을 지나치게 정태적인 관조주의로 색칠하는 것도 분명하다. 불안한 일상과 이탈에의 욕망이 삶의 현실원리와 만나면서 빚어내는 긴장력이 이제 중견이 된 작가의 작품 속에서 빛나기를 기대해 본다. 그 장면은 90년대 초반의 문학사에 등재된 윤대녕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세월의 깊이를 얻는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서영인․
2000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평론 「쿨한 일상의 딜레마-김영하론」 등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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