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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고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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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05회 작성일 08-02-2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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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낯선 일상의 공포
―박정요의 「비」
(창작과 비평 2004년 겨울)

고인환(문학평론가)


박정요의 「비」는 실재와 헛것, 현재와 과거, 사실과 환상 등을 교묘하게 병치시킴으로써 근대적 일상의 반복성을 전복하고 있다. 이러한 반란은 화자의 내면을 직조하는 섬세한 감수성과 안정된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잔잔하게 진행되는데, 작품을 읽어갈수록 그 울림의 파장은 점차 강렬해진다. 한 주부의 일상을 따라가던 느슨한 시선이 치명적인 카운터펀치로 되돌아온 형국이랄까.
먼저, 소설의 표면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자. 화자는 남편을 만나러 회사 근처의 까페로 가는 길이다. 결혼 3년이 되어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불임상담을 받으라는 ‘시어머님’의 성화에 ‘큰 시누이’가 병원 예약을 한 날이다. 화자는 남편을 미리 만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 생각이다. 그녀는 결혼 전 임신을 한 경험이 있는데, ‘너무 어린 나이인데다 상대방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아이를 지웠다. 인공유산 후유증으로 골반 염증성 질환을 앓아 나팔관이 유착됨으로써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달려간 까페에 남편은 없었다. 우연히 한 남자와 합석하여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낙태 경험)을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내보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전원을 켜니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의 일이 바빠 병원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회사 근처 까페에서 남편과 약속한 적이 없다. 시어머니에게 남편하고 만나서 함께 병원으로 가겠다고 한 말을 착각한 것이다. 곧 남편이 까페로 오고, 합석했던 남자와 헤어진다.
자잘한 에피소드의 연쇄는 이러한 중심 서사를 회절(回折)하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 은폐된 상실과 부재의 흔적을 소환한다. 먼저, ‘비’(날씨)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그녀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갈 때만 해도 날씨는 화창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 지하도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다. 비를 맞으며 화자는 언젠가 이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듯한 느낌을 갖는다. 달리느라 저절로 벌어진 입속으로 빗방울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목구멍은 화염을 토한 듯 칼칼했고 발바닥이 불에 덴 듯 뜨겁던 상황까지 똑같다.
또한 화자는 전철이 한강 위를 달릴 때, 햇빛이 강물 위로 미끄럼을 타는 듯한 풍경이 너무나 예쁘고 평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경험을 한다. 그런데 5호선 전철은 강 아래 ‘하저터널’로 다니므로 강물을 볼 수 없다. 그러면 그녀가 바라본 그 물빛은 무엇이었을까. 혹 과거에 보았던 물빛을 방금 본 것처럼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재/과거, 실재/헛것이 뒤엉킨 듯한 느낌은 화자의 어두운 내면과 대비되며, 우울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는 까페에서 우연히 만난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부터 단 한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다. ‘그’도 대학 2학년 때부터 도전한 고시에 번번이 낙방하고, 다단계 사업을 하는 직장에 취직하였으나 실패하고 지금은 실업 상태이다. 이들은 일상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대방의 처지에 공감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의 한숨은 그녀가 빨려 들어갈 만큼이나 큰 숨이었고, 그녀 또한 그를 빨아들일 만큼 크게 한숨을 쉰다. 특히, 화자는 남편에게 고백하는 날을 하루하루 미루는 동안, 마치 ‘지옥’ 속에 있는 듯했고, 시간을 더 이상 연장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다고 느낀다. 그녀는 ‘원래 내 이름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자신의 이름이 낯설어,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공동명의로 함께 소유한 것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그’는 화자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이름을 알아낸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았을 뿐, 소리 내어 발음한 적이 없었다.
이렇듯, ‘엉뚱한’ 남자와의 만남은 화자의 일상을 낯설게 한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마저 알아보지 못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할 말을 잃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유리문을 들어서면서 두리번두리번 하던 남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앞자리의 그도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했는지 윗몸을 살짝 일으켰다.
“아는 분이야?”
다가온 남자가 앞자리의 그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첫마디부터 반말인데다 처음 보는 여자에 대한 조심스러움이라든가 예의 같은 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태도였다.
“남편 되십니까? 보시다시피 빈자리가 없어서 잠깐 합석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군요. 그럼 저는 이만.”
그가 그녀와 남자를 번갈아보며 말해놓고 일어서더니 남자가 걸어오던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남자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여겨보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흘겨보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렇게 맨날 꺼놓을 거면서 핸드폰은 왜 가지고 다니는데?”
그녀더러 핸드폰을 꺼놨다고 늘 화를 내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앞사람을 새삼스레 살펴보았다. 황달기가 있어 보이는 눈자위며 미간으로 몰린 짙은 눈썹과 왼쪽 뺨에 파인 조그만 마맛자국이 남편인 것 같았다. 유난히 작은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는 것도 똑같았다. 삼년도 넘도록 함께 산 남편을 못 알아보다니, 그녀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박정요 「비」(pp.193-194)

남편과 함께 한 3년 동안의 일상이 한 순간에 전복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 해야 할 말들을 이미 차례차례 다 한 느낌이다. 어떤 비밀이나 의혹 같은 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남편의 편안한 낯빛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남편과 실제 남편이 서로 다른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알고 있는 자신과 실제의 그녀도 다른 사람일 것이다.
박정요의 「비」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삶이 삼켜버린 상실과 부재의 흔적을 포착하고 있다. 일상이 은폐하고 있는 상실과 부재의 기표는 ‘그녀가 알고 있는 남편/실제 남편’, ‘남편이 알고 있는 그녀/실제의 그녀’ 혹은 ‘남편/남편의 이름’ 사이의 점이지대에서 유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유영하는 삶의 표지는 진부한 일상을 낯설게 하고, 그것을 넘어선 삶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을 환기한다. 억눌린 욕망이 소환하는 낯선 공포는 일상의 지층에 균열을 내는 충만한 드러남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 순간은 일상의 관습적 질서와 이를 거부하는 타자의 공간이 한몸으로 현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인환․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등 ․계간『문학과 경계』편집위원.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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