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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정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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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69회 작성일 08-02-2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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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우리’는 ‘당신’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기호 「당신이 잠든 후에」
(세계문학 2004년 겨울)

정재림(문학평론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시봉과 진만에게는 직업이 있었다. 하지만 새벽시간에 교대로 잠을 자다가 점장에게 걸려 해고를 당하고 만다. 변변한 기술도 연고도 학력도 없는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궁리해 낸 일이란 달려오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상처를 입고 그것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는 것. 이른바 자해공갈인 셈이다. 대형주택 십여 채가 모여 있는 동네로 올라가는 길 중턱 정도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치어줄 자동차를 기다린다. 하지만 맨 처음 그들 앞에 나타난 차는 보안회사의 순찰차이다.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보안회사 직원으로부터 “암튼,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돼요.”라는 경고를 듣는다. 얼마 후, 달려오는 차를 보고 도로로 뛰어들지만 보도블록에 걸리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차에 치이지 못하고 만다.
이 와중에 시봉과 진만은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사기를 치려는 자들이 사기를 당하는 것,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소녀의 연기에 깜빡 속아 불량소년들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고 전 재산 4,300원을 빼앗기는 장면쯤에 이르면, 이들의 작전이 결코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게 된다. 시봉은 망가진 몸을 아예 망가뜨리자며 자신의 발목을 벽돌로 내려치려 한다. 돈을 더 많이 뜯어내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한심한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학이었을 것이다. 벽돌로 내리치려는 시봉과, 말리는 진만이 실갱이하는 사이에 또 한대의 자동차가 지나가고…… “택시든 트럭이든 쓰레기차든” 반드시 치이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이제는 불편한 다리 때문에 차도에 뛰어드는 게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 고로 이 소설은 실패담이다. 자해공갈로라도 생활고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청년들, 그러나 너무도 미숙해서 끝끝내 차에 부딪혀 보지도 못한 두 청년이 밤사이에 벌이는 웃기는 이야기이다.
제목 「당신이 잠든 후에」에 주목해 보자. 누가 ‘당신’인 걸까? 새벽이 되도록 눈 한번 붙여보지 못했으므로, 시봉과 진만은 ‘당신’에서 제외된다. 시봉과 진만의 돈을 갈취하던 소녀와 그 일당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시봉과 진만에게 경찰티를 내던 보안회사 직원이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봉과 진만에게 우유를 집어던지는 우유 배달부 아주머니 역시 수면부족상태이므로 ‘당신’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은 소설의 문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형주택에 사는 사람들, “유연하게 곡선도로를 주행하”여 도시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밤 동안 숙면을 취했던 ‘당신’에 해당되지 않을까. ‘당신’은 ‘당신’이 잠든 후에 길 위에서 벌어지는 공갈과 사기와 갈취를 결코 알지 못한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간밤에 내린 비의 양에 대해 얼마나 알까? 촉촉이 내리는 안개비를 보며 뒤숭숭하던 간밤의 천둥소리를 단지 꿈으로만 치부해 버리지 않을까?”라는 서술자의 말처럼.
‘당신’과 달리 시봉이나 진만, 소녀에게는 집이 없다. 시봉이나 진만은 ‘고시원’을, 소녀와 그 일당은 ‘버려진 임시 주차장’을 용도 변경해서 거기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곳은 집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봉이나 진만, 소녀는 ‘우리’라는 범주로 묶일 만하다.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잉여물이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대형주택 십여 채가 모여 있는 동네”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시봉이나 진만, 소녀는 이질적인 존재로 도드라져 보인다(그래서 그들은 불심검문의 대상이 된다). 그들에게선 “어쩔 수 없는 가난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급주택가 아래에 위치한 ‘도시’ 공간의 주인 역시 ‘당신’이다. 도시는 ‘당신’의 욕망과 소비를 위한 공간이고, 고급주택은 그들의 쉼을 위한 공간이며, 도시와 집을 연결해주는 곡선도로마저 그들의 것인 셈이다. 차도로 뛰어들려는 시봉의 시도가 끝내 실패하고 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뛰어들어야 하는 ‘날렵한 곡선도로’ 그 자체가 시봉이나 진만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봉과 진만의 눈앞에 펼쳐진 날렵한 곡선도로는 오직 그 동네 사람들만을 위한, 그 동네 사람들의 도로”이지 않은가.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차라리 컴컴한 뒷골목쯤을 범행 장소로 선택했어야 했다. 도시에서도 집에서도 소외된 ‘우리’는 길 위를 서성일 수밖에 없다. 도시공간의 잉여인 ‘우리’의 존재가 껄끄럽고 눈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의 삶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도로를 향해 달려가던 시봉은 “빗물에 헐거워져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큰절하듯 엎어진다. 그래서 결국은 ‘당신’을 해롭게 하는데 실패한다. 독자가 시봉의 좌절을 보면서 웃는 데 그치지 않고 페이소스를 느끼게 되는 것은, “차는 유연하게 곡선도로를 주행, 도심 쪽으로 빠져나갔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무엇을 하다가 넘어지고, 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운전사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라는 차후의 상황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뛰어들었던 시봉의 행동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도로나 도로 위를 주행하던 자동차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동차 운전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가 ‘당신’보다 시봉의 무리에게 어떤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작가는 ‘당신’에 대한 비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시봉의 무리에 대해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알고 있다. 시봉과 진만이 도로에 뛰어들더라도 그것이 도로의 흐름을 정지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매끈한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인도 턱에 넘어져 있는 그들 곁에서 잠시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제 속도를 내며 도심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는 사실, 그 냉혹한 진실을 알고 있다. 비천한 자들의 행렬이 거대한 흐름을 끊을 수 있었던 시대, ‘모세의 출애굽’의 기적이 가능했던 시대가 지나갔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고 유쾌한 이기호의 소설을 읽고 난 후, 다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이 작가는 이상자의자도 아니고, 낭만주의자도 아니다. 현실주의자라고 불러야 적절할 듯하다. 그는 현실의 위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두 청년이 무단횡단을 하든 말든 차들은 곧 다시 달려가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의 횡단이 잠시 잠깐이긴 하지만 “도로 위에 거센 파랑”을 일으킨다는 사실 역시 잊지 않고 있다. 어쨌든, ‘우리’가 거리에서 완벽히 사라지지 않는 한, ‘당신’의 무한질주 역시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정재림․
1973년 출생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극동대 강사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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