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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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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시】
틈새에 충만한 우주
―복효근의 「틈, 사이」
(시작 2004년 겨울)
정우영(시인)
잘 빚어진 찻잔을 들여다본다
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
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
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으리라
얽히고설킨 그 틈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
비로소 찻잔은 그 숨결로 살아 있어
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게다
틈 사이가 고울수록 깨어져도 찻잔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
생겨나면서 미리 제 몸에 새겨놓은 돌아갈 길,
그 보이지 않는 작은 틈, 사이가
찻물을 새지 않게 한단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벽도
양생되면서 제 몸에 수없는 실핏줄을 긋는다
그 미세한 틈, 사이가
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고 한다
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이 거기서 나온단다
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
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
그 틈, 사이까지 하나였음을 알겠구나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 내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틈, 사이」 전문
“잘 빚어진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 다음엔 눈을 감고 그 실금을 가만히 떠올려보라. 무엇이 느껴지는가. 무엇이 확장되는가. 틈새이다.
그리고 그 틈새를 따라 마음을 늘여가다 보면 찻잔이 나타난다. 틈새들이 구축하는 찻잔 하나의 세계이다.
이처럼 찻잔을 찻잔이게 하는 것은 틈새이다. 틈새가 없으면 찻잔은 찻잔일 수가 없다. 틈새의 힘이 찻잔을 들어올린다.
내가 찻잔에 찻물을 부을 때 찻물을 떠받치는 것은 찻잔이 아니라, 틈새이다. 틈새의 우주이다.
잘 빚은 찻잔의 ‘틈’과 ‘사이’, 틈새에 펼쳐진 우주의 힘으로 나는 차를 마신다. 그러므로 내가 마시는 한 잔의 차는 그저 한 잔의 차가 아니다. 우주적 기(氣)의 순환이다.
오래 전에 나는 도자기 명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매일 아침 도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다. 잘 빚은 도자기에서는 쩡쩡 울리는 청아한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교감으로 알아들었다.
빚는 자와 빚어진 자의 교감. 그 교감 앞에서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이라는 틈새는 무의미하다. 둘은 물(物)의 경계를 넘어 소통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주적 질서인지도 모른다. 우주적 질서는 이렇듯 만물이 서로 교감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나는 요즈음 인간이 찾아내는 과학과 인간이 만들어 낸 이성(理性)이라는 것에 퍽 예민해져 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실체일까 싶은 것이다.
과학 너머, 혹은 이성 너머 저편이 오히려 우주적 질서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직관적 세계라 부르는 그것 말이다.
무엇이라 이름하든, 나는 요즈음 그 그늘 아래서 자유롭게 숨쉬고 싶다. 시인은 그런 나를 ‘틈, 사이’로 이끈다. “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 주는 “그 미세한 틈, 사이”에서 나는 한없이 평온하다.
이때의 그 ‘틈, 사이’는 사실 사물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것과 저것 혹은 나와 너 사이의 경계. 교감이 머무는 곳.
나는 문득 백무산의 시 「경계」를 떠올린다. 백 시인이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라고 할 때, 그 경계가 ‘틈, 사이’와 겹쳐진다. 그가 말하는 경계는 무한히 열린 세계로서의 경계인데, 복 시인도 그렇다. ‘틈새’에서 경계를 그린다. 눈을 감고 실금을 따라가다 보면 무한히 확장된 경계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깨닫는다.
“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 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 그 틈, 사이까지 하나였음을.”
무한히 확장된 그곳은 그러나 일치의 세계가 아니다.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통과 교감이 이토록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이쯤에 이르면 ‘틈, 사이’야말로 직관의 생명체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시인은 보고 있다. “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 내리는” ‘틈, 사이’를. 이제 ‘틈, 사이’는 공간이 아니라, 우주적 기가 실린 실체이다.
이쯤해서 눈을 뜨고 다시 잘 빚어진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무엇이 찻잔 하나의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가.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지 않는가. 틈새의 생동감이 눈부시지 않는가.
나는 ‘틈, 사이’가 들어올리는 찻잔을 입에 대고 찻물을 들이켠다. 우주의 기가 충만한 아침이 몸을 순환한다. 나의 삶도 분명 우주적 기로 충만해질 것이다.
정우영․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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