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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신작시/안민/운동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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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23회 작성일 20-01-0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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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신작시/안민/운동장 외 1편


안민


운동장



1.
열세 살까지 개미가 보이기만 하면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운동장 밖에선 화려한 아파트들이 스멀스멀 자라고 있었다 그것들을 훔쳐보며 자위하다 사춘기를 가늠했다 최소한 그 구간까진 아름다웠다


운동장 밖은 금지되었고 키가 더는 자라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너도 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쉼 없이 돌아야만 했다 아버지는 다리를 질질 끌고 돌았는데 나는 생각이 자주 골절되었다 아버지가 도는 걸 멈추던 날, 주머니를 뒤지니 마른 풀꽃밖에 없었다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 유골을 운동장 귀퉁이에 뿌렸다
 
2.
내일을 달려야 한다는 우상에 귀의했던 어머니 발바닥은 언제나 어제라는 지대에 머물렀다 멀미와 멀미 사이에서 푸른빛 나비가 날았고 나비의 울음은 뜨거웠다 몸이 무거워 발목을 버리려 했지만 족저근막염이 심장까지 번졌다 돌지 않아도 되는 족속들이 운동장 안을 관람하곤 했다
 
3.
어지러운 햇살들이 운동장을 기어 다닌다 생이 울렁거린다 바닥은 점점 더 기울어져 가고 나도 아버지처럼 다리를 질질 끌며 바닥을 돌고 또 돈다 한마디만 하지, 설리반 …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첫째가 되거나 영리해지거나 사기를 쳐야 해* 금이 깊은 누나와 동생의 발이 운동장 경계에서 쨍그랑 깨어지려 하고 있다


  * Margin Call, 조작된 진실.





공상



몸을 잃었는지 발을 잃었는지 좀체 분간되지 않는다


허공이 뿌옇게 출렁인다
허공 밖의 허공에선 송이눈이 내리고
나는 허공에서 건져져 누운 채
푸른 칼날을 기다린다


대추와 양파와 생강과 친숙한 식물들이
트랙을 달린다
몸을 잃은 발足들도 달린다


그녀가 사라진다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분주하다


쫄깃함에 대해 오랫동안 공상했지요 나의 공상엔 계피, 마늘, 양파, 생강, 소주, 물엿, 간장, 커피, 대파가 필요합니다


콜라겐 없는 얼굴은 건기다
그녀는 나를 닦고 그릇을 닦다가 후- 하고
건조한 바람을 일으킨다 밖엔 계속 눈이 내리고


지나간 날들의 잡내를 잡기 위해
그녀는 다시 공상에 빠져든다

이제 한 시간 이상 센 불로 삶아주는 공상이 필요합니다 소주가 없으면 바질을 넣어도 좋습니다 커피를 넣어도 괜찮지만 카페인이 공상을 방해하기도 하죠


부도난 남편은 오래된 부도附圖에 생을 뿌렸을 것이다


그녀는 공상에 빠져서도
바닥을 닦고 눈을 닦고
눈송이와 공상 간의 거리를 더듬는다


한 번 삶아낸 공상은 뜨거운 물에 헹궈내야 합니다 너저분한 미래는 모두 제거해 주세요


큰아이도 공상을 하고 있을 거고

작은 아이는 졸고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두어 시간 더 졸여주는 공상을 하면 됩니다 허브나 월계수 잎을 넣어주면 과거로 회귀할 수 있을까요 쫀득쫀득한 과거가 그리워요


몸에 안 맞는 몇 가지 공상은 넣지 않는 게 좋은 방법입니다

기름이 생각처럼 응고된다
식지 않은 콜라겐이 부스러진다 그녀가 지나온 시간처럼


나의 몸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그녀는 공상을 일정한 두께로 썬다





*안민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게헨나』. 부산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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