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4호/신작시/권이화/사과를 깎는 습관 외 1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88회 작성일 20-01-06 17:44

본문

74호/신작시/권이화/사과를 깎는 습관 외 1편


권이화


사과를 깎는 습관



저녁에 사과를 깎는다
깎이는 사과, 사라진 껍질에 붙들린 축축한 생각이 사과의 눈과 입술을 지운다
떠돌다가 사과를 바라보듯 사과꽃으로 피어나듯
눈물로 흘러내리며 깎여지는 하얀 피, 사과즙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얼룩지는 감정에 붙들리지 않으려는 손가락 사이로 여름이 가고
깎이고 깎여 간이 콩알만 한 사과가 점점 쌓여가는 사과껍질을 보고 있는 동안
귀 없는 새가 입도 없이 절벽을 기어간다


칼이 사과를 더듬어가듯 웅크린 자세로 사과를 깎는다 정성스럽게
절벽을 기어가는 새가 어디쯤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빛을 깎는다
흔들리며 바닥으로 빨간 껍질이 무너져 내리는데


멍울을 숨기듯이 습관처럼 사과와 칼을 집는 손이 있다





눈발처럼 흩어진 양들의 저녁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아픈 양을 데리고 물가로 나와 꽃의 발소리 듣는다
어쩌다 고요히 마을에 흘러와 양을 기르다 가볍게 물을 건너갔나
꽃과 양의 아침이 양떼구름 가득 저녁으로 온다


양은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다


나는 어렸고 시간은 많았으나
나의 전 생애로 내리는 가는 비 오는 소리
이 물가에 세워둔 꽃노래 멈추지 않고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면*
어느 양치기가 양떼를 몰고 물을 건너 마을로 오는 소리
한 아이가 TV 앞에서 양의 행렬을 지켜보는 창밖으로
허공을 후벼대듯 눈발이 날린다
그 창밖에선 오월의 흰 꽃이 피고 한 늙은 사나이는 휘파람 불며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직 일이 많고, 양은 몸을 추스르지 못한다


한줌씩 뼈를 늘려가던 초롱불빛이 눈발처럼 흩어진 양들의 저녁
우리는 팔십이었고 당신은 마흔이었다
 한때 흰 꽃이 핀 창문들 일제히 문을 닫았다
 
 아픈 양을 데리고 물가로 나와 꽃의 발소리 듣는다


   *보들레르 「창문들」





*권이화 2014년 《미네르바》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