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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 본지출신시인들 신작시/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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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가을 탄주(彈奏)
때로 창문 너머 새파란 하늘이 걸음을 재촉한다.
나무들은 터진 솔기처럼 벌어진 가랑이 아래로
서둘러 옷을 벗는다.
여기저기 쑤신 어깨를 들이밀며,
손이 무겁다.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손가락들이 저 혼자
무겁게 무겁게 건반을 누르는 시월,
구릿빛 아이들이 하늘에 빠알간 밑줄을 그으며 골목으로 사라진다.
생을 지나치는 수많은 시간들도 저렇게 담벼락을 긁고 가는지,
서른을 넘어서면서 죽음 앞에서 한번쯤 흔들리는 동안
저렇듯 불안하게 생을 끌어안아야 하는 걸까.
바지랑대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
시간에 할퀸 내 등허리에 붉은 밑줄을 긋고 사라진다.
바늘 끝의 시간
그녀의 퍼머
통증을 이기기 위해 더 지독한 통증을 만든다. 상처와 통증의 불협화음. 소리를 내면서 몸 안과 밖을 미친 듯이 긁어댄다. 상처에 앉은 딱지들은 통증을 밀어내면서 가려움을 낳는다. 긁어댈수록 희열을 느낀다. 언제나 통증은 외부로 통하는 문을 가지고 있다. 빗장을 열 때마다 녹슨 비명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그녀의 쌍꺼풀
기차의 무게를 견디는 철로의 힘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철로의 무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 울림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철로 위를 뛰어다닌다. 날카로운 것을 숭배하는 아이들은 그저 칼끝에 묻은 핏자국만을 볼 뿐, 피 묻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 철로의 울림을 들으려면 길게 울어대는 짐승의 피를 먹어야 한다. 그리고 가끔 그 짐승의 울음소리도 먹어야 철로는 단단해진다. 기차가 그녀의 눈 위에 길을 내며 지나간다. 아이들은 그저 철로 위를 뛰어다닐 뿐이다.
그녀의 콧날
나는 그녀의 능선에 눈을 떼지 못한다. 굴곡은 언제나 심한 어지럼증으로 누워 있고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모를 기억. 능선을 넘을 때마다 하나씩 지워지는 기억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에게나, 발길에 채이는 가로수 넓은 잎사귀. 그 아래로만 내리는 빗줄기.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녀의 능선을 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입술
문을 열고 돌아설 때마다 세상은 짧은 신호음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질척한 어둠 속에 빛나는 눈동자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고양이 한 마리. 종일 기다렸다는 듯 그 눈동자와 발톱이 달려들어 내 심장부터 꺼내 먹는다. 어둠은 육식성, 먹은 뒤의 포만감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츄리닝처럼 퍼져 있다. 서서히 길들여진 어둠 속에서 가늘게 찢겨진 살코기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내부는 언제나 연하고 부드러운 분홍빛에 가깝다. 나는 그 연한 살갗 속에 바늘 하나 숨겨 놓는다.
김효선․2004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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