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7호 본지 출신 시인들 신작시 작품론/백인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08회 작성일 08-02-23 17:16

본문

|본지 출신 시인들 신작시 작품론|


걷힌 막연함과 짙어진 막막함

백인덕(시인)


시를 파고 들어가는 자는 모든 우상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한다. 진리를 지평선으로 삼지도 말 것이며, 미래를 그가 머무를 곳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희망을 가질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절망해야 한다. 시를 파고 들어가는 죽은 자이다. 심연과 같은 자신의 죽음과 해후하는 자이다.(M. 블랑쇼, ≪문학의 공간≫)


1.
의도의 순수함이 결과의 미약함을 보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과정의 충실함이 결과의 부실함을 결코 대신하지도 못한다. 입장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하겠지만, 앞의 두 문장은 우리 시의 현장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의 시문학사를 되돌아볼 때마다 필자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흘러왔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한때는 어느 문예지 출신이냐, 어느 문예지에 작품을 게재했느냐 등이 그 시인의 품격과 작품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가장 손쉬운 접근 방식이었고, 뒤이어 어느 동인에 속했느냐가 같은 역할을 행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멀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와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관점의 문제가 그 역할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의 내적 모순에 의한 내파가 아니라 감당하기 벅찬 외적 충격으로 인한 균열의 시대가 뒤따랐다. 이 때는 시인들은 개개인의 개성과 시적 특이성을 주장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의 시대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필자의 지나친 우려일지는 모르지만 그때보다 지금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 이유를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한 가지만 알아보자면, “지난 시절 시인들에게는 미학을 찾지 않아도 미학이 먼저 와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만으로 미학이었고, 독재시절에는 민주만으로도 미학이었다. 절대 곤궁이 휩쓰는 세상에서 시인은 가난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미학을 구현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시인들이 지난날 시인들을 행복하고 부러운 존재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궁핍은 시대와 사회가 주는 타율적 궁핍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갈구하는 자율적 궁핍이어야 한다.”(고운기, 「시인인가 죄인인가」. ≪작가≫ 1999년 여름)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글의 필자는 당시의 시적 빈곤을 타율적 미학에 젖어 자율적 미학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시인들 모두의 타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목적은 ≪리토피아≫ 창간 4주년을 기념하여, 본지 출신 시인들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선보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시가 현재 도달한 지점과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점검해 보는 것이다. 변명하자면 본격적인 작품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제기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한 기성 시단이 말 그대로 신인들에게 충고나 격려 따위의 언사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적어도 필자는 그만한 배포가 없다. 이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동시에 우리 시의 현장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수준에서 이 글을 가름하고자 한다.

2.
시인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길든 짧든 습작기간을 통과해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는 것은 생각만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된다는 것은 이 시대가 용인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제도’, ‘시라는 제도’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의 구성원에게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부여된 권위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대략적으로 그 제도를 발전시키거나 와해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나 ‘강한 시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막연함이 해소되면, 강한 시인이 되어야 하는 막막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남태식은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담배는 있는데 불이 없어서 길은 있는데 끝이 없어서 안은 있는데
밖이 없어서
한 사내가
운다
―「오도마니」부분

이 작품은 서로를 가능케 하는 존재들의 대비를 통해서 시적 화자의 내밀한 욕망을 그려낸다. 담배, 길, 안과 같은 가능한 것들의 상징과 불, 끝, 밖이라는 부재의 상징이 결국 한 사내를 울게 한다. 그 울음의 연원은 위의 상징들의 상보성을 확실하게 확보하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영섭은 남태식이 보여준 서정성을 훼손하면서 ‘강한 시인’에의 의지를 보다 분명하게 피력하고 있다.

나를 먹어라 나는 너의 아버지다. 그는 몇 번이고 나를 다그쳤다. 그의 분개는 또 다른 자기모멸로 다가왔다. 도저히 개관 같았던 섹스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배설로 얼룩진 페이지를 찢는다.
티켓을 팔고 간 미스 김이 너의 어머니다. 네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지껄인다. 죽이고 싶었다.
순간 그가 내 뺨을 후려갈긴다. 그가 국물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다. 그를 느낀 뒤에 더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면……
―「관계․1-김수영을 읽다가」 부분

이 작품은 김수영의 「性」이라는 작품, 또는 작품 읽기가 모티프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시사에서 김수영만큼 ‘강한 시인’도 드물 것이다. 해롤드 블룸의 ‘영향에의 불안’은 문학사에서 강한 후배시인은 늘 선배시인을 오독함으로써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후배시인는 선배와는 전혀 다른 작품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쓰는데, 그 작품을 자세히 보면 선배의 흔적이 꿈틀거린다. 후배시인은 무의식중에 선배의 작품을 억압했고 그 억압된 부분이 자신의 작품 속에 흔적으로 눌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독서가 오독이라는 해체론적 읽기를 문학사에 적용한 것이다. 김영섭의 경우, ‘자기 모멸’을 통해 김수영을 억압하고자 했지만, 김수영의 흔적이 그의 작품에 깊게 눌려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는 「性」의 인식 그 이상을 그의 작품이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직접적 ‘인용’이 아니라 ‘흔적’인 것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관계’의 설정을 새롭게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세요, 이리로 오세요.
발리의 대낮에만 빠져 있지 마시고요.
두려움은 판도라의 상자 속으로 던져 넣으세요.
이곳에선 사랑이
수돗물처럼 나온답니다.
틀기만 하면 쏴쏴 쏟아진답니다.

이 가을 산자락에 펼쳐둔 나의 치마 속으로
오세요.
―「단풍의 속삭임」 전문

이선임의 위 작품은 시적 인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왜 강한 선배시인들에 대한 오독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 같은 행과 연 처리, 시다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의미는 큰 울림을 획득하지 못한다. 발리/가을 산자락의 대비와 두려움/사랑의 대비가 구체적으로 우리들 삶의 무엇, 또는 어떤 의미를 포획하거나 방사하고자 하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하나로 ‘오독’을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 시인의 소박함이나 타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평판의 문제를 넘어서서 시인으로서 ‘강한 후배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정신’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시를 씀에 있어 시정신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결과물을 생성해내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세계의 본질이나 절대성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과 인식의 발현이나 혹은 언어화의 근원적 시초나 발생지가 시정신인 셈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정신은 시인은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시정신을 시인의 삶과 연관짓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시가 궁극적으로 의미와 정서를 만드는데 있다. 의미는 시인의 사물과 세계의 인식 또는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이는 시인의 삶에 따라서 해석과 판단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박주택, 「문제는 다시 시정신이다」, ≪현대시≫, 2005년 1월)는 지적이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시정신의 문제와 관련하여 몇 편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김승기의 경우는 이른바 ‘사물(세계)의 본질이나 절대성’에의 접근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2.
한번도, 남의 트랙이 되어 보지 못한, 남의 트랙만 쫒다 배배 꼬인, 토종 소나무. 어쩌다 다가오는 한 조각 햇살을 현기증에 섞어서 허겁지겁 쪼아 먹고 있다

3.
종국엔 모든 잎들이 입이 되어도, 줄기까지 뿌리까지 빈 햇살을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믐밤 한 스푼. 먹을수록 나무는 지워지고, 여전히 숲은 거기 있다
―「평화주의자는 숲 속에 가리라」 부분

시에서 사물의 본질이나 절대성에 접근하고자 하는 태도는 말 그대로의 의미로 철학적 탐구를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는 의미와 정서를 환기하는 데 제 본분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적 의미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동시대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정위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위의 인용 작품은 그런 면에서 ‘트랙’, ‘토종 소나무’, ‘숲’ 등의 개인적 상징을 통해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다만 ‘나무와 숲’의 비유가 정확하게 인용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서동인의 경우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발견한 시정신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시인의 의미와 정서를 표출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주름치마 너울거리는 바다
속곳을 벗어던지면
개펄 더듬어 고막 잡는 울엄마
정글 속 남쪽나라 지도 같은 발자국
군사우편 소인처럼 푹푹 눌러 찍었지
백일해 앓던 누이 두 눈 감은
솔숲에서 꺾은 청솔가지로 군불 지펴도
곱사등으로 웅크린 서까래
잔기침만 뱉어내는 외딴집,
속절없이 ‘전선야곡’ 들려주는
라디오는 찌그러지고
석양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월남 간 아부지 기다리며
심지를 태우는 울엄마,

광화문 네거리,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타오르는 촛불 속에서 만났다
―「어떤 재회」 전문

이 작품은 광화문 네거리의 ‘촛불’ 시위에서 ‘재회’하게 되는 유년의 ‘울엄마’의 모습을 통해 어떤 비극적 심경을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어쩌면 역사(개인사라 해도 무방하지만)의 어리석은 순환을 노래하는 듯싶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란 결국 기억의 저장고에서 건져내는 새로 가공된 보물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 중에서도 인간의 생애 중 가장 친밀한 사건들, 일회적이고 특수한 사건들을 개인적 인식의 단위로 단순화하고 구성하는 ‘개인적 기억’을 ‘회상(回想)’이라고 한다. 이 회상은 ‘나-다움’을 표출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하지만 ‘비공유성(非共有性)’을 본질로 한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만의 이야기로 끝나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회상의 작용은 상처받은 ‘자기의 회복’을 도모한다. 현재의 절박한 요구가 회상을 통해 표출됨으로써 오늘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감싸안는다는 것이다. 서동인의 시와 삶이 보다 희망적으로 표현되는 날을 기대한다.

바람에 너풀거리는 진분홍 스카프
목이 간지럽다
방긋 웃어주고 다시 걷는다
앞을 가로막는다
계집의 얼굴을 쳐다본다
박꽃같이 하얗다
당황해서 비켜선다
걷다 잠시 벤치에 앉았다
어느새 계집은 발아래서 올려다보고 있다
깊게 패인 옷깃 사이로 꽃잎 같은 유두 보인다
확 피어나는 두 개의 젖무덤
담홍색이다
무안해 벌떡 일어나 피하듯 걸어 내려간다
다 내려왔다 싶었는데
계집, 눈앞에서 아예 길게 누워버린다
빨갛다
―「철쭉제」 부분

유정임 시인의 이 작품은 알레고리로서 한 가지 약점을 갖는다. 시 전반부에서 “환하게 피어있는 철쭉꽃 속에서/계집 하나 나와 앞을 막고 분홍빛으로 웃는다”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 ‘계집’에 관한 묘사로 일관된다. 묘사로만 보자면 봄날 만나게 되는 ‘철쭉’에 대한 시가 된다. 물론 그것이 환기하는 정서는 ‘새 생명의 약동’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제목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철쭉’이 아니라 ‘봄날의 생명감’이라는 관념을 알레고리의 기법으로 다루고자 했다면 ‘철쭉꽃 속에서’를 삭제하거나 제목을 바꾸어야 한다. 같은 시각으로 허청미 시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어디서 틈입했을까
유리벽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저 개미는
창 너머 귀가를 서두르는 듯하다
유리창은 완강하게 개미를 거부한다
가만히 궁리를 해봐
이 방안에는 빛을 삼킨
보아뱀 한 마리가 있을 거야
그것을 찾아서 삼켜봐
그것이 다 삭혀질 때쯤이면
네가 들어온 틈새가 보일지도 몰라
벽은 완벽하지 않지
보아뱀 등을 타고 오르는 개미의 더듬이가
유리창만큼 완강하다
앗! 일침의 긴 파장
저 미물의 독침 같은 입아귀가
기다림의 미학을 갈파하는가
―「생텍쥐페리를 만나다」 부분

이 작품은 시인 자신이 마지막 행에서 ‘우화(寓話)’라고 언급했듯이 한 편의 알레고리다. 알레고리가 설화성을 내포하며 어떤 진술이나 이야기가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말한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인용 작품은 훌륭한 알레고리의 전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혼수(昏睡)’, ‘오수(午睡)’와 같은 용어가 시의 전면에 노출됨으로써 알레고리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고, 이야기 너머의 무엇이 ‘기다림의 미학’처럼 친절하게 제시됨으로써 그만큼 재미를 없애고 말았다. 햇살이 코끼리가 되고, 코끼리를 보아뱀이 먹고,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을 개미가 먹는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가? 이런 일이 가능할까? 기다려보면 된다는 이야기인데 필자로서는 아쉽다.
‘현대’와 ‘현재’, ‘현재’와 ‘현실’, ‘현실’과 ‘실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간혹 혼동하는 게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실제로는 매우 큰 문제 자체이고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

꿈속에서라도 맑은 눈빛 포근한 가슴으로 안아주던 숨소리. 네가 피어나던 곳에서 아름다운 추억 뿌리며 더 이상 덜 수 없는 짐이 되어 하루를 먹고 또 하루를 삼키며 네 갈비뼈 사이에서 움막을 짓는다. 한낮에 반짝이는 별님에게서 만남과 이별을 배우고 늪에서 피어나는 너를 보면서 잘 익은 자화상 하나 그린다.
―「너에게」부분

새벽길 열고 오는 가을비
밤새 빗장 붙잡고 씨름하다가
시린 무릎 결리는 어깨
억울하다
잎새마다 전문 달고 떠나는
창가의 은행나무
그도 밤사이 무척 야위었다
―「새벽 은행나무」전문

박정규, 이성률 두 시인의 작품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두 분의 좋은 심성과 시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독자가 그럴 리 만무하다. 달리 보면 두 작품은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재현의 위기’를 그대로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표면의 ‘현재’는 있는데 ‘현실’이 없다. 절대로 시는 ‘실재’를 포획할 수 없다. 시라는 텍스트는 언어라는 매개로 짜여지므로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적 현실’이라는 용어가 굳이 필요한 것이다. 시적 현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문제는 이 ‘시적 현실’이 어떤 속성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씹는다.
개 짖는 소리 들리는 초가집
벽에 붙여두었던 풍선껌을
초록크레용 넣으면 초록 잎이 되고
붉은 크레용 넣어 씹으면 붉은 꽃이 되는
한 덩어리 우울, 뱉고 싶어도 뱉지 못하고
―「푸른 껌」 부분

가라앉힐 상처를 껴안고 슬그머니
잠을 뒤척이다 일어나 창문을 서성인다
창문 너머 낯익은 모습하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 꽃불 성화처럼
타오르고 있는 전구알
내가 의자에 앉는다
그녀 의자에 앉아 있다.
―「늦은 저녁이면 그녀를 볼 수 있다」 부분

장성혜, 김지연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현대 도시인의 현실의 초상을 그려볼 수 있다. 나는 그 특성을 ‘일상성(日常性)에의 함몰’이라고 정의한다. 장성혜 시인의 작품은 ‘껌’이라는 매개를 통해 회상의 공간 저쪽과 꿈을 잃고 무심히 살아가는 현재의 이쪽을 연결함으로써 시적 화자의 ‘우울’이 단분히 추상적인 무엇이 아님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김지연 시인의 작품은 ‘꽃불 성화’라는 계기를 통해 이상을 추구하고 싶은 나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나의 분열을 결코 분열적이지 않은 시어로 그려내고 있다. 문제는 두 시인 다 작품이 소박해지거나 사소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퍼머
통증을 이기기 위해 더 지독한 통증을 만든다. 상처와 통증의 불협화음. 소리를 내면서 몸 안과 밖을 미친 듯이 긁어댄다. 상처에 앉는 딱지들은 통증을 밀어내면서 가려움을 낳는다. 긁어댈수록 희열을 느낀다. 언제나 통증은 외부로 통하는 문을 가지고 있다. 빗장을 열 때마다 녹슨 비명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바늘 끝의 시간」 부분

끝으로 김효선 시인은 인용시에서 드러나듯 관습적인 시문법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현대적, 그러니까 동시대적이다. 더욱이 앞으로 그 지평이 더욱 확대되리라 기대되는 에코-페미니즘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남성인데다 죽음에 매혹된 필자로서는 언급이 불가능하다.(다른 이유는 절대로 없다.) 그저 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3.
우리가 시의 사원(寺院)을 짓는다면-별로 신도야 없겠지만-든든한 주춧돌이 되거나 웅장한 기둥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늘진 구석에 박히는 쐐기돌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해도 그 운명을 마다하지 않는 자세와 용기가 지금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