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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단편/조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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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소설|
캠퍼스 괴담
조건상
1.
교수협의회 회장인 김민성 교수가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어제 오후였다. 인문관에 있는 대학원 세미나실에서 2시부터 시작된 대학원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돌아온 것이 5시 10분경이었고, 나는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패트병에 담긴 냉수부터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코앞에 둔 학기말 분위기가 언제나 그렇듯이, 늘어진 생고무줄처럼 마냥 질기고 길게만 느껴지는 강의시간 내내 터져 나오는 선하품과 함께 나른한 졸음이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 내리고, 등줄기에서 줄줄이 땀이 배어 나오는 바람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가 얼음판에 나자빠진 황소눈깔처럼 퀭한 눈으로 느리고 더딘 시계의 초침만 원망스럽게 흘낏거리게 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이같이 무료한 강의시간을 끝마쳤다는 사실이 마치 치열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지고 무사히 귀환한 병사의 심정 같은 것이어서 나는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시원한 냉수의 촉감을 꿀맛처럼 즐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김민성 교수의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박교수요? 나 김민성이요. 연구실에 몇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길래 출근을 안 했나 했지.”
“강의가 있어서……. 이제 방금 끝내고 나왔어. 그런데 무슨 일로?”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아래지만 같은 해에 함께 부임했던 인연에다가, 심심파적으로 이따금 대국을 벌이는 바둑 실력도 팽팽하고 주량도 만만찮게 엇비슷해서 서로 소속이 다른 학과인데도 학교 내에서는 오성과 한음으로 통하는 막역한 동료가 김민성 교수였다.
그런데 그가 작년에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뽑혀 이런저런 일로 교내를 들쑤시고 다니느라고 얼굴조차 마주치기 어렵더니 이렇게 불쑥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마윤기 교수에 관한 여학생회의 대자보 사건 알고 있나?”
김민성 교수는 통화자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뜸 아리송한 질문부터 던졌다. 나는 마시던 물을 마저 입안에 털어넣고 굼뜨게 입을 열었다.
“마윤기 교수에 관한 대자보라니?”
“아직 모르고 있단 말야?”
“차 몰고 다니는데 교정에 있는 대자보 읽을 기회가 있나?”
“그래도 그렇지…… 학교가 발칵 뒤집혔는데…….”
김민성 교수는 못내 섭섭하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섭섭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그와 나 사이에는 이처럼 사무적인 대화가 딱딱하게 오간 적은 없었다. 언제나 이기죽이기죽 농담 섞인 이야기로써 상대방의 약을 올리거나 선문답 같은 대화로써 서로를 골탕 먹이는 재미로 살아왔던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우리들에게 오성과 한음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수협의회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부터 김민성 교수는 유들유들한 유머도 사라졌고 느긋한 여유도 없어진 것 같았다. 재단이나 학교 당국에 대하여 항상 시비를 걸고 개선을 촉구하고 일반 교수들의 권익을 위해 총대를 메고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교수협의회 회장으로서의 직책상의 사명의식이 그의 학교 생활을 각박하게 만들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섭섭했다. 물론 이제까지의 삶 속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그가 국문학 전공인 나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하여 냉정한 비판의 눈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바둑 두고 술 마시고 시덥잖은 농담이라도 지껄이면서 어울리던 그의 면모가 그리워질 때마다 따지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투쟁하는 현재의 김민성 교수가 섭섭하고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는 김민성 교수의 힐책성 언사에 나는 내심 켕기는 구석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왈칵 오기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무슨 일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는 거요? 마윤기 교수가 뭘 어쨌길래?”
“걸려도 고약하게 걸렸어. 제자를 성희롱한 파렴치한 교수라고 말이야.”
“제자를 성희롱했다고?”
“그렇다니까.”
“설마…….”
“설마가 다 뭐야. 자칫하면 성추행 미수범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나는 그 순간 마윤기 교수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왕년에 극단 <새벽>의 미남 연기자였고, 지금은 잘 나가고 있는 TV탤런트이며 연극영화과 교수인 그는, 훤칠한 키에 귀공자처럼 희멀쑥한 용모, 그리고 격식을 무너뜨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나 교수들로부터 미묘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서 그에 대하여 미묘한 관심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다분히 질투와 비아냥거림이 뒤섞여 있는 의도적인 표현임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대학 교수라고 하면, 참기름 바른 듯이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물방개 같은 외모가 아니라 적당히 어수룩하고 헐렁한 모습에다가 침울한 듯한 시선을 안경 너머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창백한 인상의 소유자여야 하는데 마윤기 교수는 그게 아니었다. 데생용 석고상처럼 이목구비가 너무나 깎은 듯이 수려해서 빈틈없이 완벽한 용모인데다가, 리드미컬한 걸음걸이며 눈에 띄는 옷차림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위 고전주의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문사철(文史哲) 계열에 속해 있는 교수들의 엉뚱한 오기와 편견인지는 몰라도, 예체능 계열의 교수들에 대한 은근한 폄하의식까지 작용하여 마윤기 교수는 질투와 비아냥의 표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김민성 교수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한동안 마윤기 교수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서 창문 너머 짙푸른 고궁의 수목들을 무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연구실의 창문 너머로 건너다보이는 고궁의 숲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봄철, 거무죽죽한 나뭇가지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연록색 이파리들이 앞 다투어 피어날 때의 그 앙징스런 생명력의 아름다움도 그렇고, 바람을 잔뜩 품어 안은 돛폭처럼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여름철의 짙푸른 숲이며, 머릿속을 온통 환희로 들끓게 하는 현란한 가을철의 단풍, 그리고 나목의 가지 끝에 산새 한 마리 앉혀 놓고 정밀한 휴면 속에 빠져 있는 겨울 숲의 운치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비좁은 서가 밖까지 길길이 쌓아놓은 낡은 책더미 속에서 풍겨 나오는 퀴퀴한 종이 냄새와 구석구석 켜켜로 쌓인 먼지 냄새, 그리고 담배와 땀 냄새로 찌들어 있는 내 연구실과는 달리, 창문 너머 고궁의 숲은 언제나 생동하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신선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오늘 따라 인간 세상의 불쾌하고 번잡스런 삶이 자연의 신선한 아름다움에 상대적으로 대비되면서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창 밖에는 석양이 그려내고 있는 검붉은 어둠의 장막이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눌러 끄고 연구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스듬한 언덕길을 따라 타박타박 학생회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담한 먹물이 화선지에 번지듯 캠퍼스 구석구석을 휘감아 돌고 있는 엷은 어둠 너머로 학생회관의 어렴풋한 윤곽이 보이고, 민주광장으로 불리는 학생회관 앞 원형 광장의 스탠드에 삼삼오오 흩어져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교수의 비행을 성토하고 있는 대자보판 앞에서 어느 교수가 채신머리없게 학생들 틈에 끼어 그 대자보를 읽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맘에 걸려서 어둠을 이용하여 남몰래 대자보를 훔쳐보려는 속셈이었는데, 광장의 스탠드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이목이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은 망사 너울 같은 어둠이 대자보 앞에 서있는 내 표정을 적당히 감춰줄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위안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 학생회관 쪽으로 주춤주춤 내려가 대자보 앞에 섰다.
대자보는 격문(檄文)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자체(字体)로 “제자를 성희롱한 파렴치한 교수”라는 타이틀 밑에 ‘사건의 경위’ ‘학교당국의 태도’ ‘우리의 투쟁 방향’ 등의 중간 제목을 달고 촘촘하게 씌어진 글씨들이 게시판 전체를 도배하고 있었다.
나는 뒷부분의 ‘학교당국의 태도’나 ‘우리의 투쟁 방향’은 아예 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나비 떼들이 뒤엉켜 어지럽게 날고 있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밑에서 시간을 끌며 그걸 일일이 읽는다는 것도 무리였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사건의 경위였던 것이다.
김민성 교수의 말에 의하면, 마윤기 교수가 걸려도 고약하게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칫하면 성희롱이 아니라 성추행 미수범이라는 궁지에 몰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피해 학생이 마윤기 교수의 오피스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손목과 정강이에 타박상을 입었는데, 성추행을 피하려다가 실족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학생들은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풍설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자보판 앞에 다가서는 내 가슴이 물에 젖은 가죽 옷처럼 팽팽하게 조여옴을 느꼈다. 그러나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대자보판 앞에 서있는 어설픈 내 모습이 적당히 가려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역시 원색적인 말투를 동원한 대자보는 삼류 주간지를 방불케 하는 낯 뜨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처럼 꼴사나운 대자보가 대학의 교정에 버젓이 나붙을 수 있다는 현실이 서글퍼서 나는 목울대를 치며 솟구쳐 오르는 격한 감정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윤기 교수가 음험한 시선으로 식식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야릇한 몸짓으로 어깨에 손을 얹는 바람에 S양이 황급히 오피스텔을 빠져나와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굴러 골절상과 타박상을 입었다는 대자보의 한 구절이 서늘한 식은땀이 되어 내 등줄기를 징그러운 지렁이처럼 기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대자보판 앞을 벗어나서 어두운 나무 밑 벤치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모래라도 한 움큼 입안에 털어 넣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듯한 조갈증을 느끼며 한동안 병든 황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2.
그런데 다음날 설상가상으로 모든 교수들에게 여학생회로부터 해괴한 설문지 형식의 문건이 전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젯밤 어둠 속에 숨어서 남의 눈에 띌까 도둑질이라도 하듯이 몰래 읽은 대자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터여서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얻어맞은 뒤끝처럼 쿡쿡 쑤시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학생회로부터 전달된 설문지를 보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격분을 느끼며 설문지를 짝짝 찢어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그건 설문지라기보다는 성에 관한 충격적인 질문을 교수에게 던져서 한국판 킨제이 보고서라도 만들겠다는 의도인지 비속하고 낯 뜨거운 질문으로 가득 채워진 외설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여학생(혹은 남학생)들을 이성으로 느껴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 밑에 선택 항목으로 있다, 없다, 가끔 있다, 등이 나열되고 성희롱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라고 보느냐라는 질문에는 교수, 학생, 쌍방, 등이 제시되어 있는가 하면 성희롱의 충동은 상대방의 어떤 면에서 유발된다고 보느냐는 질문과 함께 옷차림, 언행, 외모, 등을 열거해 놓는 등 이건 마치 삼류 주간지에서 선정적인 내용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성보고서 수준의 외설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다가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하는 것은 설문지와는 별도의 용지에 “본인은 신성한 학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미스런 성희롱의 재발을 막고, 건전한 학문 풍토를 조성하는 운동에 솔선수범 앞장설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의 서약서까지 첨부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무기명 응답으로 되어 있는 설문지와는 달리 서약서는 기명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격분에 떨며 교수협의회 회장인 김민성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학생들이 이래도 되는 거야? 교수 모두를 파렴치범으로 취급하려는 이따위 버르장머리 없는 설문지와 서약서가 용납될 수 있는 문제냐 말이야. 이런 문건을 발송한 학생을 찾아내어 철저히 따지고 무슨 조처를 취해야지 이러다가는 우리 대학 교수들 모두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겠어.”
“마 교수 사건의 파문이 이렇게까지 번진 셈인데, 학생들이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다가 결국에는 다른 교수들에게까지 설문지와 서약서를 돌리는 바람에 자승자박의 꼴이 된 것이지. 교수협의회로 일반 교수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지금 난리도 아니라네.”
“이건 항의 전화로 끝낼 사항이 아니지. 그리고 당사자가 아닌 다른 교수들에게까지 설문지와 서약서를 돌리는 바람에 학생들이 자승자박이라고 했는데 그럼 구설수에 오른 마 교수 본인에게서는 서약서를 받아도 된다는 말인가? 설사 마 교수에게 어떤 의혹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외도한 아버지에게 딸이 서약서를 쓰라고 윽박지르는 꼴인데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는가?”
“가정사와 학교 일을 맞대놓고 비교할 수 없으니 그건 비유가 적절치 않네만, 어쨌든 학생들의 행동이 도를 넘어서서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켰단 말이지.”
“어쨌거나 이번 여학생회의 설문지와 서약서 배포 사건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전체 교수에 대한 모독 행위니까 교수협의회에서 단호한 대응조치가 있어야만 할 걸세.”
“교수협의회 일에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해 오던 당신이 이처럼 열을 올리는 걸 보니 사안이 중대한 것을 알기는 안 모양이지?”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라구. 그러나저러나 대자보에 있는 마 교수 이야기가 근거가 있기는 있는 거야?”
“학생들의 주장일 뿐이니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에도 마 교수 주변에는 항상 여학생들이 몰려다녔으니까 그런 속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
“당사자는 뭐라는 거야?”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로만 잠깐 통화를 했는데 연극영화과의 연극 공연 준비관계로 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신 후에 술에 취한 자기를 모셔다 준다는 여학생 두 명과 함께 오피스텔까지 간 것은 사실이라는 거야.”
“여학생이 두 명이라는데 성희롱이니 뭐니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난들 알 수 있나.”
“답답한 일이구먼. 그러나저러나 결자해지라구 당사자가 나서서 명쾌한 해명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엉뚱하게 다른 교수에게까지 파급되고 있는 이런 모욕을 본인은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겠다는 건가?”
“부덕한 탓으로 물의를 일으켜 면목이 없다며 조속한 시일 내에 어떤 방향으로든 결말을 낼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니 기다릴 수밖에…….”
“그 사람 정말로 무슨 일 저지른 것 아니야?”
“과실이 있다면 쌍방간에 있겠지…….”
“무슨 정황이라도 파악했단 말인가?”
“정황은 무슨……. 일반론적인 추단에 근거한 거지.”
“그러나저러나 이런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는 날에는 속치마 끝단만 보아도 고쟁이를 보았다고 부풀려 떠벌이기 좋아하는 신문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창피 막급이군.”
“그래서 학교 당국에서도 대자보를 떼어내고 자체 규명을 해보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지.”
“말을 듣지 않으면……. 학교의 명예고 무엇이고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요즘 학생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그야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심보로군.”
일찍 찾아온 무더위 탓으로 눈앞에 닥친 여름방학이 더없이 기다려지는 시기에 학생들에 의한 대자보와 설문지 배포 사건은 머리끝에서 훈김이 뿜어져 나올 지경으로 짜증스러워서 나는 김민성 교수와의 통화를 끝내고도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식식거리며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에 나름대로의 긍지 속에서 영위해 왔던 20여 년의 교직 생활이라는 것이 갑자기 비 맞은 잿더미처럼 후줄그레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활시위가 그만 툭 소리를 내며 끊어지듯 공허한 허탈감이 온몸을 훑어 내리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3.
며칠이 지났다. 캠퍼스에는 학기말 시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학기말 시험이 시작되자 양은 냄비에 죽 끓듯 술렁거리던 학생들의 입방아가 주춤해지면서 마 교수 사건은 표면상으로 어느 정도 열기가 식으며 진정되는 국면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또 어떤 바람을 타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변할지 모르는, 잿더미 속에 숨겨져 있는 불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 며칠 동안 마 교수 사건으로 인하여 뒤틀린 심사를 학생들을 상대로 괜한 심통을 부리거나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거는 것으로써 부질없는 허허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짜증이었고 괜한 몽니였다. 가령 교정을 걷고 있을 때 거침없이 내 앞을 가로질러 가는 학생이 있다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 나보다 한 발 앞서 타고 내리는 학생이 있을 때에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차거나 사납게 눈을 흘겨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고, 연구실 앞 복도에서 재잘거리는 학생들에게는 문을 벌컥 열고 고함을 질러 질책하는 따위의 어설픈 허세와 권위를 부렸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은 면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순종하는 척하지만 이내 내 뒤통수에 와 닿는 그들의 시선에는 별꼴 다 보겠다는 시큰둥한 비웃음이 담겨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학생을 다시 불러 세워 놓고 왜 비웃는 거냐고 다그치며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내 심기는 차바퀴에 깔린 깡통처럼 더욱 참혹하게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스승에 대한 존경이니 예의니 하는 말들이 실종된 지 오래인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새삼스럽게 무슨 대접을 받겠다는 생뚱스런 생각에서라기보다 최소한의 위계질서와 믿음만은 지켜져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송두리째 무너져 버린 현실이 삭막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며칠 전 김민성 교수와의 통화에서, 여학생회가 교수들에게 서약서를 배포한 사건을 두고, 그것은 외도한 아버지에게 딸이 아버지의 행실을 추궁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겠다고 윽박 지르는 꼴이 아니냐고 언성을 높였던 것도 따지고 보면 홧김에 억지를 부려 보았을 뿐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자책감이나 반성의 기미가 없으면서 상대방의 과실이나 허점에 대해서는 아프리카 초원의 하이에나처럼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서 앞뒤 가릴 것 없이 까발리고 깔아뭉개려는 듯한 학생들의 의식과 소행이 괘씸하고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한 교수에게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본의든 아니든 학생들이 끼어들 허점의 틈새를 보였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 의혹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평소에 마윤기 교수와 개인적인 교류가 없어서 그의 인간 됨됨이를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요즘 말로 내로라하는 얼짱과 몸짱의 여학생들이 즐비한 연극영화과라는 학과의 특성상 연기 실습이며 공연 연습 등으로 다른 학과와는 달리 사제지간에 직접 몸으로 부딪칠 기회가 빈번한 것이 사실이니까 아차 하는 순간에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겠고, 학생들 입장에서는 지도교수의 눈에 들어 좋은 배역을 맡고 칭찬도 받고 싶은 것이 사실일 테니까 당연히 지도 교수에게 알랑방귀라도 뀌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질 테고, 또 학생들 간의 경쟁심리도 발동하여 서로 간에 시기와 질투와 갈등과 알력 등도 개입될 수 있을 테니 사제지간의 관계에 의혹과 잡음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잡음의 가능성이 실제로 성폭력이니 뭐니 하는 낯 뜨거운 사건으로 표면화되어 대자보까지 교정에 나붙게 되었다는 사실은 비록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뒤통수에 가래침이라도 붙은 것처럼 기분이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학기말 시험이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 마윤기 교수 사건에 얽힌 새로운 대자보가 또다시 교정에 나붙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학생회의 대자보에 대한 반박 형태의 대자보여서 사건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날 마윤기 교수의 오피스텔에 함께 있었다는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내용으로 써 내려간 대자보는 객관성을 잃은 채 어느 일방의 제보만을 토대로 근거 없는 폭로성 대자보를 내붙인 여학생회의 처사를 성토함과 동시에 문제의 사건을 폭로한 S양의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자보의 내용에 의하면 연극 공연 연습을 마치고 마윤기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신 것도 사실이고 자신과 S양이 마윤기 교수의 오피스텔에 함께 간 것도 사실인데, 이번 공연의 배역에 서운한 마음을 품은 S양이 술김에 눈물을 보이면서 불만을 토로하자 마윤기 교수가 S양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연극의 주인공만 훌륭한 배역인 줄 아느냐고, 조연도 훌륭한 연기력으로 작품을 빛낼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S양은 격앙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방에서 뛰쳐나가다가 층계에서 발을 헛디뎌 골절상과 타박상을 입었는데 병원에 실려 간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마윤기 교수가 평소에도 앞에서 애교나 부리고 알랑거리는 계집애만 편애하여 좋은 배역만 맡긴다는 둥 듣기 거북한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마윤기 교수가 화를 벌컥 내며, 너는 이제부터 내 제자도 아니고 사회에 나가도 연기 생활 못 하도록 할 테니 각오하라고 고함을 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후 S양은 마윤기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취중에 폭언을 한 점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으나 마윤기 교수가 계속해서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S양이 여학생회를 찾아가 허위로 사실을 폭로했다는 것이 대자보의 요지였다.
그러나 이 대자보는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그리고 뜯겨 나간 대자보 자리에 이번에는 다시 여학생회 명의의 대자보가 “마각을 드러낸 마 교수의 만행”이라는 충격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나붙었다.
대자보의 내용은 마윤기 교수가 사건 당일 S양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다른 제자를 회유하고 협박하여 성희롱 사실을 폭로한 S양의 증언을 반박토록 했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S양은 가출을 단행하고 마 교수의 강요에 의해 반박문을 붙였던 학생도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내용이었다.
진흙탕 속의 개싸움 같은 대자보의 공방에 캠퍼스는 완전히 망연자실 넋을 잃은 듯했다. 교수들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고 학생들은 홉뜬 눈을 감을 줄 몰랐다. 그러나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허위인지 사실이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침 먹은 지네처럼 비실거리고만 있었다.
뒤늦게나마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학교 당국은 연일 학장과 처장들을 중심으로 교무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혀 누구의 잘잘못인가를 가리는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까 봐 그것이 더욱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해괴한 흥밋거리에 민감한 언론사의 기자들이 잠잠할 리가 없었다. 학교 홍보를 담당하는 대외홍보처 사무실에는 취재를 위해 찾아온 언론사의 기자들이 득실거렸고 학생회관 앞 대자보판 앞에도 새로운 소식을 찾아 눈을 희번득거리는 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신문지상에는 별의별 억측이 난무하는 마윤기 교수의 기사가 실리고 세인의 입방아에 대학의 명예는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사람들은 체념의 한숨소리를 길게 뿜으며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신문지상에는 마윤기 교수에 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그것은 학교의 명예를 최우선으로 생각한 대외홍보처에서 필사적으로 기자들을 구워삶았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떠돌았고, 마윤기 교수가 거액의 로비 자금을 살포하여 기자들의 입을 틀어막았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그런데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어느 한쪽이 상대 쪽을 고소한 것도 아닌 폭로성 대자보에 불과한 이번 사건에 언론이 개입하여 진위를 따질 수도 없는 것이어서 학교 출입기자단에서 기사화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도 바람결에 실려 들려왔다.
그러자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서로 간에 시선조차 마주치기를 꺼려하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난데없이 쏟아진 소나기처럼 한동안 후줄근하게 캠퍼스를 난타했던 마윤기 교수 사건은 캠퍼스의 괴담 한 토막처럼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하게 잊혀져 갔다.
그리고 그동안 마윤기 교수에 대한 기사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대자보판에는 농촌 활동에 다같이 참여하여 대학인의 역량을 드높이자는 총학생회의 대자보와 달동네 극빈자를 위한 자선 바자회에 많은 학우들의 참여를 기다린다는 여학생회의 대자보가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 있었다.
조건상․
1941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1972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창작집 증발된 여자 등
․저서 한국현대골계소설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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