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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단편/서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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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소설|
그 남자의 116번째 비디오테이프
서성란
1.
5층에 걸린 엘리베이터가 23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은재는 소리 내서 천천히 숫자를 헤아려본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은재는 23이라고 중얼거리던 숫자를 입안으로 삼킨다. 엘리베이터는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한번도 멈추지 않는다. 학원 가방을 멘 학생들이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주부들이나 퇴근해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은재의 외출을 위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서 현관문을 굳게 닫아버린 것 같다. 은재가 외출하는 시간은 늘 일정하다. 될 수 있는 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시간이 돼 영화마을이 문을 닫기 전이라야 한다. 은재의 외출을 아파트 경비조차 눈치 채지 못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외투 주머니 속에는 어제 빌려온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다. 영화마을 남자는 출시된 지 몇 년은 지났을 비디오테이프를 가져다주면서 비디오 케이스에 적혀 있는 제목을 몇 번씩이나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은재가 비디오테이프를 외투 주머니 속에 넣고 가게를 나갈 때까지 영화마을 남자는 시험 문제를 외우는 학생처럼 발음을 분명히 하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제목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깊다. 은재가 계단을 내려가서 출입문 앞에 서자 계산대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선다. 은재가 문을 여는 것과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은재는 주머니 속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계산대 위에 놓는다. 컴퓨터와 꽃병과 사탕바구니가 놓인 계산대는 이제 막 행주질을 한 듯 정갈하다. 은재는 계산대 위에 반납된 비디오테이프가 쌓여 있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손님이 비디오테이프를 놓고 가면 남자는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을 때조차 테이프를 케이스에 담아 제자리에 꽂은 뒤에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는 바코드에 적힌 숫자들을 일일이 헤아려가며 신중하게 핸드스캐너를 들이댄다. 은재는 영화마을 남자처럼 공들여 바코드를 찍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컴퓨터를 열고 목록을 확인한 남자가 36,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비디오테이프가 꽂혀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남자는 은재가 반납한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꽂혀 있던 빈 케이스에 담은 뒤 구석진 곳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내 케이스를 벗기고 거꾸로 꽂아 놓는다. 은재는 계산대 위 바구니 안에 수북이 쌓인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고 남자가 핸드스캐너를 쥐고 새로 꺼내온 비디오테이프의 바코드를 찍는 모습을 바라본다. 남자가 비디오테이프를 은재에게 건네준다. 은재는 비디오테이프를 외투 주머니 속에 넣고 백 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하오의 정사’,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국어책을 읽듯 한 음절씩 끊어 발음하는 남자의 입을 통해서 은재는 비로소 자신이 빌린 비디오테이프의 제목을 알 수 있다.
전조등을 켠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뿐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불빛이 사라진 뒤 띄엄띄엄 가로등이 서 있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가던 은재는 갑자기 뒤를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움찔 멈춰 선다.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앞질러 가는 사내에게서 술 냄새가 풍긴다. 은재의 머릿속에는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푸르스름한 식탁 등 불빛이 두 대의 검은색 피아노가 놓인 거실을 깊은 바다 속처럼 밝히고 있다. 작은방 문을 열고 잠든 딸을 들여다보고 나온 은재는 외투를 벗어 소파 위에 걸쳐놓고 방으로 들어가 비디오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볼륨은 완전히 죽인다. 화면에 광고가 나오는 동안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에서 캔맥주와 땅콩을 꺼내 쟁반에 담는다. 불을 끄자 집은 소리를 잃은 검은색 피아노처럼 깊은 어둠과 침묵 속에 빠진다.
은재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양말을 벗고 바지를 벗는다. 셔츠를 벗자 은재의 마른 상체가 부르르 진저리 친다. 검은색 팬티와 검은색 브래지어만 걸치고 은재는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불은 껐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빛 때문에 은재는 제 몸에 있는 숨구멍까지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소리를 죽인 화면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은재를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가랑이를 벌린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자신의 커다란 젖가슴을 모아 쥔다. 남자가 여자의 젖을 빤다. 남자의 몸 위로 올라온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손으로 움켜쥔 채 입에 문다. 남자의 입이 조금씩 벌어지고 여자의 입술 사이로 희멀건 액체가 새어나온다. 은재는 빈 맥주캔을 침대 아래로 던지고 비디오를 끈다. 캔맥주를 사려면 내일은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은재는 이불을 끌어당긴다.
2.
영화마을 남자가 37번째 비디오테이프를 찾는 동안 은재는 계산대 위에 놓인 바구니 속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껍질을 벗긴다. 은재의 입 안으로 사탕이 들어가는 순간 출입문이 열리고 트레이닝 바지 위에 오리털파카를 걸친 사내가 들어온다. 오리털파카를 입은 사내는 새로 출시된 비디오테이프가 진열된 쪽으로 걸어간다. 은재의 37번째 비디오테이프를 찾은 영화마을 남자가 오리털파카를 입은 사내에게 다가간다. 851에 6780. 영화마을 남자가 오리털파카를 입은 사내를 향해 암호를 대듯 숫자를 중얼거린다.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는 영화마을 남자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신간 프로를 뒤지고 있는 오리털파카를 입은 사내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851에 6780? 제길, 간첩 접선하나? 순 또라이 같은 새끼.
오리털파카를 입은 사내가 큰소리로 욕을 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마을 남자는 은재의 비디오테이프를 계산대 위에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올려놓고 핸드스캐너를 손에 쥔다. ‘우울한 이혼녀’. 은재는 영화마을 남자의 손바닥 위에 백 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올려놓고 비디오테이프를 받는다. 오리 털 파카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들고 은재를 쳐다본다. ‘우울한 이혼녀’. 영화마을 남자는 오리 털 파카를 입은 사내와 은재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고 시선을 벽에 고정시킨 채 다시 중얼거린다. 외투주머니 속에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은재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간다. 은재가 영화마을을 나온 뒤 몇 초 뒤 다시 출입문이 열린다. 빠른 발자국 소리가 은재의 뒤를 따라온다. 은재는 시선을 땅에 박고 걷는다. 발자국 소리는 은재가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사라진다. 빨간색 신호등이 켜져 있지만 은재는 재빨리 길을 건넌다.
영화마을 남자는 은재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한다. 영화마을 남자가 알고 있는 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번호이거나 이제 다른 사람이 쓰는 번호일 것이다. 전화번호를 자주 바꾸는 탓에 은재 자신조차 집 전화번호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다. 전화벨이 울리는 일은 거의 없다. 간혹 잘못 걸려온 전화가 대부분이다. 은재는 이따금 울리는 전화벨 소리마저 신경이 쓰여 전화코드를 빼놓고 며칠을 지낼 때도 있다.
딸의 방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은재는 비디오테이프와 캔맥주를 챙겨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근다. 비디오 전원 스위치를 누르려는 순간 비명처럼 전화벨이 울린다. 은재는 수화기를 들지 않고 전화코드를 뽑아버린다. 전화벨이 울려 수화기를 집어 들면 아무 말도 없이 끊겨 버리는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짜증을 내고 전화코드를 뽑아 버린 사람은 은재가 아니라 남편 성주였다. 이삼 일에 한번 걸려오던 이상한 전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른 아침이나 저녁, 한밤중을 가리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하루 종일 울리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은재는 식은땀을 흘렸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 그냥 끊어 버리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초간 있다가 끊는 전화 때문에 은재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전화는 그 전에도 이따금 걸려왔다. 수술을 받은 뒤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진 은재의 탓도 있었다. 은재의 휴대전화기로 걸려왔던 이상한 전화는 모두 한 사람의 것이었다. 은재가 전화를 받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끊어 버리는 사람은 치밀하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감추기까지 했다. 은재의 휴대전화기 액정화면에는 발신번호 대신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는 글자가 떴다. 장난전화라고 하기에는 주도면밀하고 끈질겼다. 잠시 뜸하던 전화가 다시 걸려오고 침묵 대신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은재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불쾌했다. 여자는 은재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여자는 은재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라고 은재가 말하자 여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수술 날짜가 잡히자 은재는 집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오는 수강생들에게 당분간 쉰다는 안내장을 들려 보냈다. 아파트 주변 상가 이층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인수하려던 계획도 유보시켰다. 수술을 받은 뒤 다시 레슨을 시작하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담당의사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은재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 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다른 피아노학원으로 옮겨 버린 수강생도 있었고 주스 병을 들고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도 있었고 전화를 걸어 은재에게 무책임하다고 질책하는 학생의 어머니도 있었지만 육 개월쯤 지나자 은재에게 전화를 걸거나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졌다.
검은색 피아노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은재는 딸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치지 않았다. 딸은 피아노 대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을 했다. 은재는 피아노 레슨실로 쓰던 방을 치우고 일인용 침대를 들여놓았다. 날이 더웠지만 속옷이 비치는 게 신경 쓰여 소매가 긴 겨울잠옷을 입었다. 샤워를 하고 나올 때는 욕실에서 미리 옷을 챙겨 입었고 속옷을 갈아입을 때는 방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은재가 레슨실로 쓰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자 성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참 동안 방문 앞에 서있는 듯했다. 전등을 껐지만 은재는 눈이 부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이렇게 사는 게 널 편하게 하는 거라면 원하는 대로 해줄게. 성주는 화를 내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함께 저녁을 먹은 뒤에 성주와 은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성주가 늦게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은재는 먼저 잠들거나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열면 성주의 방 역시 단단하게 잠겨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대의 피아노 때문에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과 오디오는 방으로 옮겨놓았지만 웬일인지 성주의 방에서는 텔레비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3.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답답할 정도로 작고 불분명한 목소리는 성대 수술을 받은 것처럼 탁하고 심하게 잠겨 있었다. 은재는 휴대전화기를 손에 들고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아내라면, 최소한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은재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여자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성주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은재는 성주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열두 시가 지나서야 성주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 회사 그만둔 거야? 은재의 물음에 성주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난데없이 웬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을 하려다가 은재는 입은 다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니? 뒤따라오던 성주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은재는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 앉아 고개를 돌렸다. 내가 버러지처럼 보이니? 성주가 은재의 어깨를 쥐고 사납게 흔들어댔다. 아니라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 당신 옆에서 잘 수가 없어. 그뿐이야. 그럼 나는 어쩌라는 건데?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니가 날 고문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니? 성주가 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밤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넌 아마 모를 거야. 너도 힘들다는 거 알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성주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오전 여덟시에 집을 나갔고 귀가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은재가 성주의 와이셔츠를 세탁하는 동안 세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탁실에서 나와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드는 순간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은재는 창문을 열어 놓고 침대 커버를 벗겼다. 흰색 침대 커버는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침대 커버를 새 걸로 바꾸고 은재는 방안을 꼼꼼히 걸레질했다. 이 년 넘게 성주 혼자 쓰고 있는 방은 전과 똑같은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남의 방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불편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더 이상 항암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지는 않았지만 은재는 자신의 몸의 일부가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불능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은재는 걸레질을 멈추고 침대 옆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사진이 보이지 않게 거꾸로 넣어놓은 액자를 꺼내 걸레로 닦았다. 사진 속 은재의 몸은 성주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한쪽 팔을 은재의 어깨 위에 두른 성주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액자를 테이블 위에 세워 놓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져다 대며 은재가 말했다. 누구세요?
성주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은재는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식탁 의자로 가서 앉았다. 전화벨이 울리자 수화기를 든 사람은 성주였다. 성주 역시 여보세요라고 말하고 나서 곧장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오늘 그 전화 열 통도 넘게 걸려왔어. 은재가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그며 말했다. 내일 전화번호 바꾸자. 성주는 몹시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랑 함께 자고 싶어. 오늘만이라도. 성주가 개수대 앞에 서있는 은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방문을 잠그고 스탠드 불을 켜고 성주는 바지를 벗었다. 잠옷을 입은 은재는 넓은 침대 한쪽에 갓난아기처럼 몸을 움츠리고 누웠다. 성주가 잠옷을 벗길 때 은재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성주의 손이 브래지어의 호크에 닿자 은재는 애원하듯 소리쳤다. 제발…… 그건 싫어. 성주의 손이 멈추고 뜨거운 입술이 은재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얼마나 너를 원하는지 아니? 너는 전과 다르지 않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성주도 은재도 몸이 굳었다. 전화벨이 세 번 울렸을 때 성주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어 수화기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코드가 뽑혔다. 단단하던 성주의 몸은 순식간에 헐거워졌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거실에 있는 전화기가 열 번을 울리고 제풀에 조용해질 때까지 성주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4.
영화마을 남자는 세모 모양으로 자른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은 뒤 유리잔에 담긴 흰 우유를 한 모금 마신다. 샌드위치를 먹을 때는 우유가 담긴 컵은 쟁반 위에 내려놓고 우유를 마실 때는 샌드위치 조각을 접시 위에 놓는다. 컵 주위로 우유가 흘러내리지도 않는데도 남자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휴지를 들고 컵과 테이블을 닦는다. 남자가 먹고 있는 건 샌드위치와 우유가 아니라 마치 몹시 신경이 쓰이는 불편한 존재처럼 보인다. 남자가 불편을 느끼는 것은 샌드위치나 컵만이 아니다. 온종일 닦아댔을 테이블과 수시로 빼고 넣어야 하는 비디오테이프와 스무 평 남짓한 영화마을과 은재의 존재 역시 그렇게 보인다.
은재가 비디오테이프를 건네자 영화마을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샌드위치와 컵을 바라본다. 은재는 남아 있는 샌드위치와 우유 때문에 평정을 잃은 영화마을 남자가 불편하다. 남자는 결국 샌드위치와 우유를 결정했다. 앞에 서 있는 은재를 신경 쓰면서도 남자는 천천히 샌드위치를 입 속에 밀어 넣고 우유를 마신다. 영화마을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은재는 이따금 현관 벨을 누르는 영업사원들과는 달리 어눌한 목소리로 암호 같은 숫자만을 중얼거리는 남자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재차 현관 벨을 눌렀고 은재는 현관 밖에 있는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받으면 아무 말 없이 끊어버리는 전화가 걸려올 때처럼 진땀을 흘렸다. 남자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영화마을’ 이라는 이야기 한 것은 열 번쯤 벨을 누르고 나서였다. 신도시라서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 건물이 세워지고 새로운 가게가 개업하는 일이 흔했지만 은재는 영화마을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수술을 받기 전 피아노학원을 인수하기 위해 부동산 사무실을 들락거릴 때까지만 해도 영화마을은 없었다. 집 근처에 비디오 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은재는 한번도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보지 않았다. 남자는 일곱 개의 숫자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면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은재는 한참 뒤에야 그 전화번호가 바꾸기 전에 쓰던 자신의 집 전화번호라는 걸 알았다. 현관문을 열자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몹시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은재에게 비디오테이프를 달라고 했다. 은재는 빌려간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다시 전화번호를 외우며 반납기한이 오래 지나서 연체료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은재는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와 비디오테이프를 달라는 남자가 황당하고 언짢았지만 불안정한 눈빛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성주의 이름을 듣고 더 이상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찾아볼게요. 남자를 돌려보내고 은재는 성주가 쓰던 방을 뒤졌다. 서랍을 열고 수북이 쌓인 명함과 낡은 수첩들을 꺼냈다. 장롱 속 서랍과 이불 사이도 찾아보았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뒤도 찾아보고 심지어 부엌 싱크대 찬장 속도 뒤져보았지만 비디오테이프는 없었다. 집안을 잔뜩 어질러 놓고 은재는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성주가 떠난 뒤 은재를 찾아온 사람은 영화마을 남자가 처음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대던 집 전화와 은재의 휴대전화기도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성주가 떠났지만 은재는 편안해지지 않았다.
주인이 사라진 성주의 방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영화마을 남자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은재는 영원히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은재는 몸을 일으켰다. 창을 열고 침대 커버를 벗겼다. 먼지와 얼룩으로 더러워진 커버를 세탁조에 넣고 진공청소기를 가져다 청소를 시작했다. 창틀과 텔레비전 위의 뿌연 먼지는 물걸레로 닦아냈다. 창을 열었지만 좀처럼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은재는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웠다. 냄새는 좀처럼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은재는 벽 쪽에 붙어 있는 침대를 창가 쪽으로 옮겼다. 혼자 들 수 없어서 방바닥이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힘껏 밀었다. 머리카락과 먼지가 눈덩어리처럼 쌓여 있는 침대 밑에서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먼지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검은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단단하고 각진 것이 손에 잡혔다. 비닐 속에 든 건 비디오테이프 하나와 시디 두 개였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영화마을 전화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은재는 도대체 왜 이것이 성주의 방 침대 밑에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했다.
영화마을 간판이 걸린 상가 안에 영화마을은 없었다. 상가 일층은 팬시점과 빵집과 부동산 사무실이, 이층은 태권도장과 미용실이 삼층은 교회였다. 은재는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쥐고 상가 건물을 몇 번씩이나 올라갔다가 내려왔지만 영화마을은 찾지 못했다. 은재는 상가 건물에 붙어 있는 영화마을 간판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바탕이 노란색인 간판 아래쪽에 상가 뒤편이라고 적힌 검은색 글자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없던 글자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 같아 은재는 당혹스러웠다. 상가 뒤쪽은 빌라촌이었다. 도로변에 있던 가게와는 달리 상가 뒤편에 있는 가게는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영화마을 옆에는 임대문의라고 적힌 종이가 유리문이 붙어 있었다. 빌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과연 그 곳에 영화마을이 있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은재가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주자 영화마을 남자는 116이라고 중얼거렸다. 곧장 밖으로 나가려던 은재는 116이 무어냐고 물었다. 남자가 컴퓨터를 열고 다시 숫자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숫자에 몹시 집착하는 남자였다. 남자의 입에서 전화번호가 튀어 나왔을 때 은재는 그건 이미 바뀐 지 오래된 번호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성주가 떠나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영화마을 남자가 은재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가리켰다. 116이라는 숫자는 성주가 빌려간 비디오테이프 개수였다. 은재는 성주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성주의 방에서는 비디오 소리는커녕 텔레비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노트북 컴퓨터조차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주는 늘 잠이 모자라 보였고 취해서 돌아오는 날이 잦았다. 성주가 늦는다고 전화를 하면 은재는 제 방으로 들어가 먼저 잠들었다. 열쇠는 늘 성주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은재는 불을 켠 채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여자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은재가 물었다. 전화는 끊지 않았지만 대꾸도 없었다. 그냥 끊어 버릴 거면 전화 걸지 말아요. 은재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데, 잠깐만요, 잔뜩 잠겨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 수백 년 동안 동굴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밖으로 풀려 나온,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탁하고 음울한 목소리는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무척이나 도전적이었다. 글쎄요. 댁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 은재는 전화 수화기를 든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컥컥. 비웃음인지 울음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은재 씨를 잘 알고 있어요.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 사람…… 그만 힘들게 해요. 전화는 끊어졌다. 은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을 열었다. 누군가 낯선 시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은재는 방에서 나와 성주의 방문을 열었다. 성주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은재는 성주의 침대에 앉았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성주는 새벽 세시가 지나서 돌아왔다. 성주는 말없이 양복을 벗어 장롱 속에 넣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은재가 성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내 말 끝까지 다 들어준다고 약속해. 성주는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전화한 여자랑 함께 있었어. 미안하다. 나도 일이 이렇게 꼬이고 엉망이 될지 몰랐어. 우연히 알게 된 여자야. 가끔 만나 술 한잔 마시고 그랬어. 그게 다야. 니가 상상하는 것처럼 이상한 사이는 아냐. 좀 힘들고 우울할 때 그 여자 만나 술 마시고 그러면 기분이 나아지고 그랬어. 그 이상은 절대 아니야. 근데 이상하게 그 여자는 점점 나를 자기 남자처럼 소유하고 싶어해. 하지만 난 한순간도 너한테 부끄러운 짓은 안 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니까.
성주는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루 종일 입고 있었던 와이셔츠는 소매와 깃에 때가 묻고 구깃구깃 주름이 잡혀 있었다. 성주는 와이셔츠와 양말과 속옷을 벗고 은재가 꺼내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피곤하겠다, 그만 자. 성주가 부르는 소리에 대꾸하지 않고 은재는 세탁실로 갔다. 대야에 물을 받아 표백제를 풀고 와이셔츠를 담갔다. 양말과 속옷을 빨아 물기를 짜고 와이셔츠 깃과 소매는 솔로 문질러 빨았다. 와이셔츠와 양말과 속옷을 빨아 건조대에 널고 은재는 소파에 앉았다. 방문이 열리고 성주가 거실로 나왔다. 불이 켜졌다. 날 때리고 싶지? 욕을 해도 좋으니까 무슨 말이든 해봐. 충혈된 성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냐. 당신 잘못이 아냐. 책임이 있다면 내게도 있겠지. 당신을 욕하지 않아. 난 괜찮으니까 어서 자. 은재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성주는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고 찍힌 전화는 받지 말라고 부탁했다. 두 번 다시 여자를 만나지 않겠지만 집으로, 은재의 휴대전화기로 걸려오는 전화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은재는 집 전화번호를 바꾸고 자신의 휴대전화기 번호도 바꿨다. 전화번호를 바꿨지만 성주는 여전히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은재 씨가 놓아주세요. 그 사람이 사랑하는 건 바로 나예요. 은재의 휴대전화기로 문자메시지가 떴다. 은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성주와 딸의 방을 뒤져 세탁물을 가져다 손으로 빨았다. 빨래가 끝나면 찬장을 뒤져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그릇들을 꺼내 설거지를 하고 마른 행주로 닦았다. 표백제를 넣어 삶은 걸레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닦고 김치를 담았다. 은재가 김칫거리를 사들고 오는 동안에도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는 글자가 떴다. 열무를 다듬어 굵은 소금을 뿌렸다. 전화벨 소리가 들렸지만 은재는 양파를 까고 쪽파를 다듬고 마늘 껍질을 벗겼다. 매운 냄새 때문에 은재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열무의 숨이 죽는 동안 은재는 식탁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뚜뚜. 휴대전화기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음성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은재 씨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요. 만나 주지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까 이런 방법밖에 없네요. 우리 두 사람…… 은재 씨가 상상하는 이상이라는 거 알려주고 싶어요. 우리는 새벽에도 늘 함께 있었어요. 그 사람, 밤마다 혼자 잠들기 힘들다며 내게 전화했어요. 나는 그 사람이 왜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차라리 은재 씨가 그 사람 곁을 떠나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무 주제 넘는 말을 하는 건가요?
5.
영화마을은 이틀째 문이 닫혀 있다. 전날보다 한 시간 빨리 집에서 나왔지만 유리문 대신 푸른색 셔터가 내려져 있다. 은재는 끝까지 보지 않은 비디오테이프를 반납기 속에 밀어 넣는다. 은재가 알고 있는 성주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영화관에 갈 때도 성주는 은재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함께 보는 게 고작이었다. 성주는 다큐멘터리나 시사교양 프로그램 외에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고 주말이나 휴일에 별식을 먹으러 가족과 자동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는 타입도 아니었다. 며칠째 똑같은 국이 상에 올라도 싫은 내색 없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남자였다. 섹스를 할 때 은재는 의도적인 괴성을 지르지 않았고 성주는 테크닉에 몰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섹스는 밋밋하면서도 편안했다.
영화마을 남자의 전화번호를 안다면 은재는 당장이라도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고 싶다.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은재도 그의 집으로 찾아가 성주가 보았던 45번째 비디오테이프를 내놓으라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다.
침대에 앉아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 모니터를 바라보던 은재의 시선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노트북에 머문다. 성주가 은재의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처럼 은재 역시 성주가 불 꺼진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은재는 노트북을 침대로 가져와 전원 코드를 꽂는다. 사이드 테이블 서랍을 열고 침대 밑에서 찾아낸 시디를 꺼낸다. 그 사람, 나를 안을 때마다 은재 씨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과 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게 숨이 막힌다고, 내 가슴에 엎드려 울었어요. 은재는 침대에 휴대전화기를 던지면서 고함을 쳤다. 대체 내가 얼마나 비참해져야 하는 거지? 내가 무슨 까닭으로 이 여자한테 이따위 모욕을 당해야 하는 건지 말해 줘! 당신이 날 떠나겠다면 보내줄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날 조롱하는 건 참을 수 없어. 성주는 지치고 괴로운 얼굴이었지만 침착했다. 그 여자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은재야, 나를 한번만 믿어줄 수 없겠니? 내가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한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야. 성주의 목소리는 마른짚단처럼 건조하고 힘이 없었다. 그럼, 그 여자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그건, 아마 집착일 거야.
모니터 속의 남자와 여자의 행위는 단순히 섹스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학적이어서 굴욕감을 느끼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는 성행위를 하는 두 사람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타인의 성행위는 은재에게 쾌락 대신 모욕을 느끼게 한다. 발신번호를 속이는 여자가 낮고 탁한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의 섹스는 더 이상 두 사람만의 은밀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고. 은재와 성주의 침대 한 가운데 자리에 낯선 여자가 누워 있다. 우리 함께 떠나기로 약속했는데…… 그 사람, 마음이 약해졌어요. 직장까지 그만 두고 비자 신청했는데…… 부탁이에요. 그 사람 행복하게 할 자신 없으면 나한테 보내줘요.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요. 은재 씨한테 미안한 생각도 들었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거의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6.
자정 무렵, 은재는 딸의 방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현관문을 연다. 발자국 소리가 계단 아래쪽으로 황급히 사라져진다. 1층에 걸린 엘리베이터는 더디게 한층 한층 위로 올라와 23층에 선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22층에 선다. 낯선 남자의 손에 비디오테이프가 들려 있다. 아래층에는 퇴직 공무원 부부와 돌이 지난 아이 하나가 있는 젊은 부부가 살았다. 은재가 모르는 사이 두 집 중 한 곳이 이사를 갔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먼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간다. 횡단보도 앞에서 은재는 녹색 신호등이 세 번 바뀔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든 남자는 영화마을이 아니라 비디오 일번지 쪽으로 걸어간다. 녹색 신호등이 켜지자 은재는 머뭇거리지 않고 길을 건넌다.
영화마을 남자는 좀 야윈 듯 보인다. 얼굴은 핏기 없이 해쓱하고 왼손에는 붕대를 감겨 있다. 대형 텔레비전에는 새로 출시된 영화가 혼자서 돌아가고 있는데 남자는 의자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 졸았는지 남자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다. 851에 6352. 남자가 희미하게 웃는다. 은재는 반납할 비디오테이프가 없다. 남자가 컴퓨터를 열고 은재가 빌려갈 비디오 목록을 띄운다. 은재는 남자에게 새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 생각이다. 남자가 테이프를 찾는 동안 은재는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생각해본다. 머리에 떠오르는 숫자들은 이미 지나간, 의미 없는 숫자들뿐이다. 남자는 구석진 곳에 있는 진열대에서 은재에게 줄 45번째 테이프를 찾고 있다. 은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 속에서 껍질에 쌓여 있는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든다. 선천적으로 성대가 약한 나를 위해 그 사람은 담배를 끊었어요. 그 사람을 위해 저는 날마다 박하사탕을 사죠. 담배 대신 박하사탕을 먹는 건 그 사람과 저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요. 성주의 양복을 세탁소에 맡기려고 주머니 속을 뒤질 때면 박하사탕이나 껌이 한두 개쯤 나올 때가 있었다. 껌이나 사탕을 직접 사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성주는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부터 입에 물었다. 내가 이러는 거…… 비겁하다고 생각하나요? 은재 씨한테는 나쁜 여자이겠지만…… 난 그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거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내 목소리라도 팔 수 있다구요. 은재 씨는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겨우 가슴 한쪽 때문에 남편을 외면한 사람 아닌가요?
은재는 성주의 가방을 꾸려 놓았다. 당장에 입을 옷은 여행가방에 넣고 나머지 옷과 신발 따위는 박스에 넣고 포장을 했다. 딸에게는 아빠가 멀리 오랫동안 출장을 떠난다고 말해두었다. 날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니? 내가 정말 이 집에서 떠나야 하는 거야? 직장 그만둔 거 너한테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나도 힘들었어. 구체적으로 내가 할 일이 정해지면 너한테 말하려고 그랬어. 지금은 나도 혼돈 상태야. 정리가 안 됐다고. 니가 원한다면 잠시 집을 떠나 있을게.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성주는 없었다. 여행가방과 박스는 그대로 있었다. 휴대전화기 액정화면에 성주의 전화번호가 찍혔지만 은재는 받지 않았다. 여자에게서는 더 이상 문자나 음성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그 여자 죽었어. 은재의 휴대전화기로 문자가 떴다. 외국으로 떠나기에는 힘든 몸이었어. 그 여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 여자 사랑한 거 아냐. 우연히 알게 된 여자였어. 좋은 감정으로 몇 번 만나 술을 마셨는데 자신이 말기 암환자라고 고백하더군. 목부터 가슴까지 전부 암이 퍼져 버려서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어. 네 얘길 했어. 내 아내도 가슴을 한쪽 떼어냈다고 말이야. 너한테 미안해.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그 여자가 너에 대해 물었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지. 나는 너한테 말하지 못했던 내 속내를 그 여자한테 힘들이지 않고 털어놓곤 했다. 아무 부담이 없으니까. 하지만 일이 이 지경까지 올 줄은 몰랐어.
은재는 성주의 메시지가 들어 올 때마다 차례로 지워나갔다. 은재야, 나 언제까지 이렇게 문 밖에 서있어야 하는 거니? 은재는 휴대전화기의 배터리를 빼놓고 이동통신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 휴대전화 해지를 신청했다.
남자가 비디오테이프를 내밀며 뭐라 중얼거리고 은재는 박하사탕을 빨며 남자의 붕대 감긴 한쪽 손을 바라본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은재가 먼저 속삭이듯 말한다.
“전화번호 바꿨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나네요. 내일 올 때 가르쳐 드릴게요.”
은재는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들고 영화마을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은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벽에 붙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저, 이 영화 같이 볼래요?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말예요.”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머물러 있지만 마치 은재의 질문에 답을 하듯 닫혔던 입을 벙긋거리며 환하게 웃는다.
|신작단편소설|
더미의 변명
나여경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제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벽을 친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눈물나게 아깝다. 군인 담요 위에 여기저기 널린 만 원권 지폐가 눈에 삼삼하다. 범털 하면 손 크기로 유명한데 어제 그 판만 뒤집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범털 형님한테 적어도 두 장은 받아 챙길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다리가 쑤신다. 순전히 내 실수다. 문방의 임무가 뭔가? 안심하고 게임을 즐길 수 있게 안보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평상시의 나답지 않았다. 나는 이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일에 뛰어든 지 삼일 만에 범털 형님이, 니 체질이다 체질, 했을 때 나는 이미 결심했다. 내 목숨을 걸어보자고. 그랬던 내가 어제와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런 일이 자주 생기다 보면 문방으로써의 수명이 짧아진다. 무엇보다 범털 형님의 기대에 어긋난 것이 못내 아쉽다. 어렵게 범털 형님의 신임을 얻었는데 그런 불상사가 생기다니. 처음부터 범털 형님이 나를 신임했던 건 아니다. 크고 작은 일에 몸을 사리지 않는 나를 눈여겨보던 형님이 결정적으로 신임하게 된 건 어느 날 게임도중 벌어진 싸움에서 날아오던 칼을 내 몸으로 막고 나서부터였다. 그때 입은 상처가 지금도 허벅지에 남아 있다.
삼 개월 정도 지나면 창고를 옮겨야 하는데 벌써 사 개월째 한자리에 있었으니 그런 일이 터질 법도 하다. 포커를 하는 놈들은 도박장을 고상하게 하우스라고 한다지만 우리는 창고라고 부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실수는 그 젖냄새, 백조 때문이었다. 그 젖냄새가 내 인생에 있어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젖냄새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그녀가 우리 창고의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건 삼 개월쯤 되었다. 게임을 즐기다 목이 마르거나 출출하면 그녀를 호출한다. 그녀는 창고 옆의 두 평짜리 공간에서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매점을 운영한다. 수입이 괜찮아서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자리인데 범털 형님이 추천했다고 들었다.
살결이 그야말로 백옥 같았다. 희고 목이 긴 그녀를 처음 본 보살들이 백조라고 부르게 되면서 그녀는 자연히 백조가 되었다. 처음에 나는 창고에 온 손님을 보살이라 부르는 걸 들으며 웃었지만 생각해 보면 일리 있는 말이다. 절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곳에 시주하러 오는 것 아닌가. 그녀를 만지면 차고 매끄러운 감촉의 대리석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이 세계가 그렇듯 그녀 역시 나이나 이름 따윈 모른다. 그저 처음 본 느낌을 그대로 붙이면 그게 보살의 이름으로 통한다. 그녀도 그랬다. 처음 본 느낌, 백조. 굵게 퍼머한 머리는 항상 촉촉이 젖어 있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붉은 입술은 내 거기에 피를 몰리게 했다. 나뿐 아니라 그녀를 본 사내들은 모두가 다 그랬다.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가끔 주방 유리창으로 보이는 그녀가 항상 책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내용의 책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모습의 그녀가 좋았다. 어쩌다 이런 도박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레스토랑으로 있기에는 아까운 여자다. 새벽에는 대형 쇼핑몰에서 숙녀복을 판다고 했다. 한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이곳에 들어온 그녀도 나처럼 돈을 무지하게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보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곳의 룰이긴 하지만.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나는 수상한 그림자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담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가녀린 실루엣이 나타났다. 숨을 죽이고 실루엣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였다. 나를 보자 그녀가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 위로 삼각형의 입술을 만들어 웃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웃는 흰 얼굴에 달빛으로 물든 나뭇잎 그림자가 문신처럼 어룽졌다. 내게 다가온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또다시 그녀에게서 비릿한 젖냄새가 났다. 환장할 그 젖냄새. 익스프레스라고 적힌 트럭 뒤로 내 손을 이끈 그녀가 옆이 트인 치마 사이로 다리를 들어 내 사타구니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내 바지 지퍼 위로 손을 얹었다. 나는 애써 몸을 뺐지만 손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의 대리석 같은 살결은 따뜻했다. 손바닥에 와 닿는 그녀의 팔딱이는 심장소리를 느끼자 노곤한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내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곰이 뜬 건 그때였다. 멀리서 헤드라이트 빛이 보였다. 곰이다,라고 외치는 함성과 급히 뛰는 구둣발 소리, 냄새를 맡은 우리 애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나는 집 뒤로 달렸다. 예상대로 비상문이 열리고 범털 형님이 호위를 받으며 뛰어나왔다. 우선 범털 형님을 차에 태워 보낸 후 다른 보살들을 위해 비상문을 열었다. 이미 마당으로 진입한 두 명의 곰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자 순간 멈칫하던 한 명의 곰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급히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발을 올려 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짧은 신음과 함께 중심을 잃은 곰을 발로 차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뛰려는 내 등으로 불구덩이 쏟아진 듯 통증이 느껴졌다. 곰이 내 등을 향해 내려친 각목이 반 토막 나며 멀리 튀어 달아났다. 몸을 낮췄다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곰의 복부를 구둣발로 찍었으나 헛발질이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내게 곰이 다가왔다. 급한 대로 돌을 주워 던졌다. 이마를 움켜진 곰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보였다. 내가 몸을 급히 일으켜 비상구 쪽으로 뛴 것과 대문 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다른 곰들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이곳에서 나는 일명 ‘문빵’으로 불린다. 창고로 불리는 도박장을 물색하고 게임 도중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아내는 것이 내 일이다. 때로는 목숨이 위태롭고 몸을 다치는 일이 많지만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다른 일보다 수입이 많기 때문이다. 인격적으로 존경하지는 않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주지 않는 일을 내게 맡긴 범털 형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범털 형님만큼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특히 교묘하게 경찰의 단속망을 피하는 데에는 신출귀몰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범털로 통하는 형님의 본명이나 다른 인적사항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경찰들도 형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일년에 몇 번씩 범털이란 인물이 경찰에 잡히고는 있지만 형님과는 무관한 일로 마무리된다. 그야말로 곰처럼 미련한 치들이다. 어쨌든 이왕 일을 할 바에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 밑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다.
모두들 날더러 다혈질이라고 하는데 나의 다혈질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씨도둑은 못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 요즘은 야구나 농구가 스포츠의 전부인 양 떠들어대지만 내가 어렸을 땐 레슬링이야말로 최고의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아버지는 레슬링의 박치기왕 김일을 좋아했다. 김일의 레슬링 경기가 중계되는 날이면 아버지는 만사를 제쳐놓고 보아야 했다. 그날은 김일이 일본선수와 싸우던 날이었다. 초반에 김일의 박치기 세례를 받은 일본 선수가 비틀거리자 아버지는 그렇지 그거야, 하며 곁에 있던 주전자를 연신 박치기로 들이받았다. 그러다 일본선수 헤드락에 걸려든 김일 선수가 빠져나오지 못하자 흥분한 아버지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보다 아버지가 박치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더 듣기 싫고 창피했다.
먼지 낀 유리창에 뿌옇게 새벽이 번져 온다. 다리가 욱신거린다. 곰들이 들이쳤을 때 도망치다 삐꺽한 다리의 통증이 여전하다. 허리와 다리에 붙인 파스를 한 번 더 눌러 붙이고 벽을 의지하여 일어났다. 벽거울에 잔뜩 찌푸린 얼굴의 내가 들어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향해 눈가에 대일 밴드를 붙인 거울 속의 사내가 하루의 안녕을 빈다. 나는 애써 표정을 바꾸며 못에 걸린 점퍼를 내려 입는다.
새벽시장이 이렇게 활기를 띠고 있는 걸 한창 깊은 잠에 빠진 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나도 한때는 이곳에서 일했다. 지게꾼이었다. 지금은 새로 지은 대형 쇼핑몰에 모두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공장에서 마무리까지 마친 옷이 건물 입구에 부려지면 그걸 지고 사․오층까지 계단을 타고 올라가 각 상점에 배달을 하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하는 막노동이라 수입이 괜찮았다. 이렇게 새벽시장을 뒤지고 다니는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다. 창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녀를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계단에 커다란 옷이 든 검정 봉투가 곳곳에 쌓여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들은 커다란 옷 보따리를 들고 다니기 힘든 탓인지 발로 밀고 다닌다.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커다란 검정비닐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다. 상점의 종업원 얼굴을 보며 걷느라 발밑을 보지 못한 탓이다.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찾던 내 눈에, 코너에서 손님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고개를 돌리던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손짓한다. 대일 밴드를 붙인 얼굴과 절뚝거리는 내 다리를 본 그녀가 말한다.
“꼭 더미 같군.”
순간 나는 ‘덤’ 같군이라고 듣는다. 나는 뭐, 덤? 하고 되묻지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나 만나러 왔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바지하나 사러 왔는데 안 보이네, 딴청을 부린다. 그녀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엉덩이를 내밀며 수그리고 있는 상체 없는 마네킹이 보인다. 얼굴과 가슴 없는 마네킹의 허리를 만지는 커다란 내 손을 그녀가 바라본다. 커다랗고 흠집 많은 손이 남 앞에서 부끄럽긴 처음이다. 나는 손을 바지주머니 속으로 감춘다. 내 손이 태어날 때부터 컸는지는 모르겠다. 이 손으로 안 해본 일이 별로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나를 외할머니 댁에 맡기고 먹고 자는 조건으로 부잣집에 식모를 살러 갔다. 어머니는 돈을 많이 벌면 오겠다고 어린 내게 말했다. 외사촌들이 외숙모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매를 맞고 욕을 먹었지만 어머니가 곁에 없는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장대로 지붕의 기왓장을 건드려 떨어뜨려도 외숙모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그들 속에 섞일 수 없었던 나는 빨리 자라고 싶었다. 그리고 내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백조, 그녀를 만나는 순간 이 여자라면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린다. 범털 형님이다.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니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내일은 원정을 간단다. 대부분의 창고, 즉 게임을 할 수 있는 장소는 문방이 제공한다. 집은 백 프로 월세다. 보증금을 주지 않고 얻기 때문에 대부분 허술하다. 더욱이 단독주택이니 노후한 시설이다. 어제와 같은 일이 터지면 그 집은 그 걸로 끝이다. 창고를 제공한 사람이 문방 일을 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자기 집에 온 손님, 아니 보살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놀다 갈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내 창고가 그렇게 됐으니 다른 창고를 구할 때까지는 원정을 간다. 내일은 문방으로서가 아니라 형님 돈가방만 들고 다니면 된다. 현찰이 가득 찬 가방 두 개를 지키는 일이 내 임무다.
머리 위로 정오의 작열하는 태양 빛이 뜨겁다. 그녀가 일을 마칠 시간이다. 발목을 덮는 눈부신 흰색 치마 위에 시폰 소재의 볼레로를 입은 그녀가 내게 걸어온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볼레로 밑으로 그녀의 허리선이 언뜻언뜻 보인다. 길 가던 이들이 내 옆에서 걷는 그녀를 흘깃거린다. 기분이 좋다. 그녀에게서 또 그 냄새가 난다. 젖냄새…… 하여간 난 이 젖냄새에 왜 그런지 사족을 못 쓴다. 언제부턴가 여자를 안을 때마다 냄새부터 맡는다. 향수를 진하게 뿌린 여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냄새가 없어서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다. 처음으로 친구 누나에게 동정을 묻은 후 여자에게서 젖냄새가 난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며 느끼던 온몸의 신경을 당기고 조이는 쾌감보다 오래 남은 건 그 냄새였다. 하지만 여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백조를 처음 보던 날 그녀에게서 젖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의 백조는 특별하다.
그녀의 지하방에는 가방들이 많다. 벽에 걸린 여러 종류의 핸드백말고도 두 짝짜리 장롱 위에 크고 작은 가방들이 누워 있거나 세워져 있다. 거울이 붙은 화장대 위에 늘어놓고 치장하는 여자들과는 달리 화장품 가방 안에 로션과 루즈 등이 들어 있다. 화장품 가방의 열린 뚜껑에 붙은 거울 속으로 벽에 걸린 가방이 보인다.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그녀를 닮은 방을 연상했던 나는 서성거린다. 금방 떠나야 할 역처럼 자리를 잡고 앉기가 부담스럽다. 그녀는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란 생각이 든다.
그녀가 검정 봉투를 들고 들어온다. 봉투 안에는 커다란 초와 카스 캔맥주 네 개가 들어 있다. 초에 불을 붙인 그녀가 전등을 껐다. 그때까지 방안에 전등이 켜진 걸 몰랐던 나는 멈칫한다. 그녀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녀와 내가 길게 뻗은 발아래 빈 캔 두 개가 우리를 마주보며 나란히 서 있다.
“너에게서 젖냄새가 나.”
“젖냄새?”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깔깔 소리 내어 웃는다. 그녀의 입김에 촛농을 밟고 서 있던 촛불이 휘청 허리를 꺾고 뒤로 넘어졌다 일어난다. 마치 그녀를 따라 웃는 듯하다.
“혹시 어렸을 때 어머니와 많이 떨어져 지냈어?”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던 나는 사래가 걸린 듯 다 삼키지 못하고 쿨룩거리고 만다. 그녀가 화장지 두 장을 뽑아 내 입가를 닦아주며 조용히 말한다.
“내게서 젖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아마, 네 기억 속에서 나는 걸 거야.”
“기억 속?”
나는 몸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본다.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머리를 올린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그걸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대.”
“프루스트 현상?”
나는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그녀를 따라 말해 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작가 이름이 프루스트야.”
나는 그녀가 프루스트라고 발음할 때 동그랗게 오므려지는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책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과자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는데 작가 이름을 따서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 내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대.”
역시 나의 백조는 뭔가 특별하다. 그녀의 말처럼 나도 기억 속 젖냄새를 떠올리며 젖을 빨던 어린 시절과 어머니를 그리는 것일까? 그녀가 내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그녀의 젖을 빤다. 내 발에 치여 서 있던 빈 캔이 넘어진다.
초등학교 육학년이 되고 얼마 후 어머니와 나는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서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간직할 추억의 시간들을 놓쳐버린 대가였다. 어머니는 고사리, 취나물, 호박오가리 따위를 경동시장에서 받아다 시장좌판에 늘어놓고 팔았다. 아침부터 데치고 삶은 나물을 손질하여 저녁 늦게까지 장사하는 어머니와 마주앉아 식사를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항상 내가 먼저 자리에 누워 잠이 든 척, 눈만 감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며 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낮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다가 잠든 어머니 품에 살짝 안겨 보았다. 마른나물 냄새와 섞인 비릿한 젖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금세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몸을 뒤척이면 얼른 몸을 빼고 돌아누워 잠든 척했다. 결국 어머니와 나는 같이 산지 육 개월 만에 속내를 드러낸 깊은 정 한번 나누어 보지 못하고 영원히 헤어지고 말았다.
그날은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나는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배가 고파서이기도 했지만 마음이 들떴기 때문이었다. 고추잠자리가 학교 화단에 떼지어 나타나면 어김없이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친구들은 소풍 가는 날을 가장 좋아했지만 나는 운동회 날을 제일 기다렸다. 시험성적이 좋지 않고 수업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가지 않아 선생님께 매를 맞은 적이 많았지만 운동회 날 만큼은 선생님과 친구들 뿐 아니라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초등학교 육 년 동안 나는 줄곧 달리기 선수로 뽑혔다. 항상 마지막 주자였던 나는 아무리 차이가 많이 나는 거리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가을바람의 장단에 맞추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을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릴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대로 길이 이어진다면 끝간데 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들어온 어머니가 학교에 갈 시간이 지나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혼자 해결했던 나는 배가 몹시 고팠지만 곤히 잠든 어머니를 깨우지 못하고 그대로 등교를 했다.
학교는 햇볕이 들지 않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운동장 여기저기 모인 학부모들로 복잡했다. 국민의례로 시작된 운동회는 국민체조, 일학년의 꼭두각시, 삼학년의 탈춤, 오학년 여학생의 부채춤, 사학년의 오자미 박 터뜨리기를 끝으로 1부가 끝났다. 1부가 끝나자 학생들이 제각기 부모를 찾아 흩어졌다. 어머니를 만나 김밥을 맛있게 먹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나는 학교 뒷동산으로 향했다. 잔디에 누워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어서 점심시간이 끝나고 운동회 2부가 시작되길 빌고 있을 때 저만치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어머니가 허리에 전대를 두른 채 내 곁으로 오고 있었다. 어머니를 보자 반갑기도 하고 밉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곁에 가까이 온 어머니가 숨을 헉헉거리며 분홍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삶은 계란 몇 개와 칠성사이다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계란껍질을 벗겨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후 계란을 입에 넣었다. 급하게 반을 베어 입에 넣었지만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세 개째 계란을 입에 넣고 우걱거리며 먹는 내 등을 어머니가 체하겠다며 두들긴 후 사이다를 건네주었다. 사이다를 절반쯤 마신 내 눈에 한 개 남은 계란이 보였다. 어머니가 껍데기를 벗기기 위해 계란을 들자 식사를 거르고 장수를 하다 내게 뛰어왔을 어머니 생각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배불러요.
사학년에서 육학년까지 각반 대표로 뽑힌 선수들이 정렬을 하고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열심히 운동장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달리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청군인 우리 팀이 세 번째 주자까지 앞서다 네 번째 선수가 바통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뒤쳐지고 있었다. 내 앞의 선수가 달려 나갈 때까지 내 눈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운동장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끝내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리 청팀은 운동장 반 바퀴 정도의 차이로 뒤쳐져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주자인 내 차례가 되었다. 바통을 넘겨받은 나는 날개를 단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초반부터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나를 보자 학부모와 학생들 모두 운동장 트랙 주위로 몰려들며 ‘와아’ 함성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디선가 나를 보며 어머니가 활짝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달리던 선수의 뒤를 바짝 따르는 순간 사람들이 운동장이 흔들리도록 박수를 쳤다. 함성과 박수소리는 내가 상대편 선수를 앞지르기 시작하자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커졌다. 드디어 테이프를 끊고 결승점에 도착하자 우리 팀이 이겼음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탕, 총소리를 듣는 순간 웬일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두 나를 향해 박수와 함성을 드높이고 있는데 고개 숙인 내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날 어머니는 시장으로 급히 가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뒤 어머니 생각을 할 때면 미처 먹지 못한 채 짓뭉개져 어머니의 손안에 있던 계란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새벽 장사를 하는 장군네 문방은 구레나룻이다. 구레나룻이 귀 앞에서 얼굴 옆을 거의 덮고 있다. 만화에 나오는 장군 같은 모습이다. 봉을 가운데 두고 보살들이 양옆으로 길게 나누어 앉아 있다. 게임판인 봉은 군인담요 세 네 장을 길게 연결시켜 만든다.
진홍빛이 도발적이다. 한몸이 된 마흔여덟 장의 화투는 딜러인 밀대의 왼손 안에 입속의 혀처럼 감겨 있다. 오른손 검지가 화투 위를 지그시 누르는 사이 엄지와 허리를 꺾은 중지가 화투의 절반을 살점 베듯 떼어낸다. 착착 착착, 착착 착착, 양손이 합쳐지며 섞이는 화투 음은 정확하게 네 박자다. 허공으로 퍼져 나가는 화투 음이 느리게 유영하는 담배 연기와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져 차곡차곡 쌓이는 듯하다. 밀대와 마주보고 앉은 오늘의 전주(錢主)인 달봉이 감았던 눈을 뜬다. 경상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아도사키를 서울에 퍼뜨린 장본인이다. 손 크기로 말하자면 범털 형님 버금가는 사람이다. 밀대가 군인담요 서너 장을 연결시켜 만든 봉 위에 화투를 내린다. 범털 형님이 맨 위에서 한 장을 뽑아 기리를 마친다. 밀대가 다시 화투를 모아 그러쥔다. 기리를 마친 화투는 절대 뒤섞이거나 떨어뜨려선 안 된다. 감춰진 세 장이 먼저 앞방에 놓여진다. 얼굴마담격인 마지막 화투를 밀대가 손에 쥐고 있다. 벌겋게 충혈된 보살들의 눈에 핏줄 꽃이 더해진다. 여기저기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린다. 말없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넓은 홀 안에 가득하다. 안개에 휩싸인 혼돈의 세상 같다. 더 이상 분해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던 연기가 구석 벽을 의지해 기댄 채 보초를 서고 있다.
감춰진 세 장의 화투 위에 얼굴마담이 다부지게 내려앉는다. 장이다. 장, 동, 비는 제로다. 얼굴마담이 제로일 경우 숨겨진 새끼마담은 사건 칠 큰 수일 경우가 많다. 뒷방에 놓기 전에 허공으로 낮게 날린 화투가 줄을 지어 가볍게 내려앉는다. 이 네 장은 필요 없는 허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었다가 날려지는 네 장의 화투가 울긋불긋 분칠한 나비처럼 봉 위에 떨어진다. 다시 네 장을 털어내는 밀대의 손이 날렵하다. 세 장의 화투가 뒷방에 놓인다. 겹쳐진 화투는 한 장처럼 보인다. 마지막 오픈될 한 장이 밀대의 손안에 있다. 보살들 입이 마르는 순간이다. 난초 오 자다. 보살들이 앞방으로 몰린다. 예상 외로 달봉은 뒷방에 제법 많은 액수를 싣는다. 그래도 오돌오돌 실린 앞방에 비할 바는 아닌 액수다. 창고장인 범털 형님은 자연 보살들이 적게 몰린 쪽을 아도 쳐야 한다. 이럴 때 쓰린 속은 아무도 모른다. 제로인 얼굴마담 밑에 깔린 웃고 있는 새끼마담이 보이는 이런 때 말이다. ‘그래 됐다 들어봐라.’ 하고 범털 형님이 말하자 감춰진 화투가 오픈 된다. 얼굴마담을 제외한 칠, 이, 팔의 앞방 새끼마담들이 얼굴을 공개한다. 도합 십칠, 끝 수 칠이다. 꽤 높은 수다. 항상 상황이 나쁠 때의 예감은 적중한다. 뒷방은 일 두 장, 사피 한 장, 오픈된 난초 오, 도합 십일 끗수 일로 마무리된다. 수를 합해 높은 끗수가 먹는다. 뒷방에 실린 달봉의 돈과 합해 앞방에 배당될 액수를 범털 형님이 앞쪽으로 밀자 순식간에 계산이 끝난다. 게임 시작하고 일분도 안 되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속전속결, 보살들이 제일로 꼽는 아도사키의 매력이다.
새벽 두시에서 대여섯시까지 이어지는 새벽 장사는 거의 백오십 판 내지 많게는 이백 판이 계속된다. 게임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다시 밀대의 손에 의해 현란한 쇼가 펼쳐진다. 바닥에 깔린 화투가 푸득푸득 소리를 내며 뒤섞인다. 밀대의 엄지에 의해 한 장이 뒤집어진다. 이 열 끗, 님을 본다는 패다. 뒤집힌 한 장의 패를 제일 먼저 본 사람은 그 패에 의해 운세가 점쳐지곤 한다. 왠지 그 패를 내가 제일 먼저 보았을 것 같다. 범털 형님의 가방 한 개가 비워져 시커멓게 탔던 내 속이 그 패 한 장으로 조금 풀어진다.
이거 구라치는 거 아니야?
게임이 중반을 넘어서자 범털 형님이 말한다. 기계 조작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한마디 던져보는 것이다. 돈 잃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는 말이다. 가방 두 개째가 거의 바닥을 보이자 내 속이 까만 연기로 가득 차는 것 같다. 잃은 돈 건지고 그 몇 배를 채우려면 며칠 간 바쁠 것 같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창고를 물색해야 할 것 같다. 초췌한 모습의 보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일순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온다.
웅웅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어제의 원정으로 몸이 피곤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늦은 저녁식사를 하려던 내 눈에 텔레비전 화면이 들어온다.
‘더미의 생.’
표제가 화면 가득 떴다. 쇼윈도의 마네킹, 사격장의 표적판, 영화에서 쓰이는 트릭용의 사람 모형 더미. 화면은 먼저 더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신차 충격 시험에 쓰이는 더미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앉는다. 반질반질한 외관의 차가 나타난다. 그 속에 사람 모형을 한 더미가 앉아 있다. 합성고무로 만든 피부가 마치 사람 같다. 신차가 출고되면 백오십 차례의 충격 실험을 합니다. 그때 사람 대신 인형, 즉 더미가 사용됩니다. 내레이터의 해설이 화면에 맞춰 흘러나온다. 운전자의 안전을 지키는 첨병, 충격에 약한 얼굴과 무릎에 파란색 칠이 되어 있다. 저속 충돌 시험이 시작되자 신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카메라는 점점 더미에게 다가가고 전면에 서 있는 높은 벽을 향해 차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 같다. 카메라가 점점 더미를 클로즈업시킨다. 더미가 벽에 부딪치는 순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앞뒤로 몇 번 반동을 거듭한 뒤 멈춘 더미는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화면이 빠르게 바뀌며 고속 주행 시험을 시작한다.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내뱉은 담배 연기가 텔레비전 수상기 위로 퍼지며 더미를 실은 신차를 따라간다. 빠른 차의 속력으로 화면에 비친 더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가속도가 붙어 달리던 차가 벽에 부딪친 건 잠깐 사이다. 화면은 쿠킹호일 말린 듯 찌그러진 차 앞면을 지나 안전띠도 하지 않은 채 만신창이가 된 더미에게서 멈춘다.
재생 불가능으로 판정된 더미, 이것으로 더미의 생이 마감됐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더미를 비추는 화면 위로 내레이터의 마지막 해설이 깔린다. 나는 언젠가 새벽시장에서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비로소 무엇인지를 알아차린다. 범털 형님을 대피시키고 온몸에 부상을 입은 나를 보며 그녀가 했던 말은 ‘더미 같군’이었다.
드디어 내일은 게임이 있는 날이다. 내일 게임은 다른 날과 다르다. 범털 형님이 잃은 돈을 찾기 위해 이른바 구라를 친다. 기계작업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기도박이다. 아도사키 도박만으로도 법망에 걸리면 쉽게 풀려나기 힘들지만 사기도박은 더욱 큰 죄가 된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둘러봐야 한다. 나는 점퍼를 걸치고 창고로 향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도박판의 창고는 도피가 쉬운 단독주택을 택한다. 아파트나 빌라는 곰들이 덮치기 쉽기 때문이다. 간혹 돈 잃고 속 좋은 놈 없다고, 앙심을 품어 신고하는 놈들이 있다. 아파트나 빌라는 무슨 동․호수만 대면 바로 곰들 독 안에 든 쥐다. 이번 창고는 내가 봐도 잘 골랐다. 누가 이곳을 도박장이라고 보겠는가? 이번 일만 잘되면 그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작정이다. 문뜩 올려다본 밤하늘에 달을 에워싸고 별들이 무리 지어 있다. 만약 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다면 별자리 이름을 가르쳐 주며 별점을 쳐줄지도 모른다. 둥근 달이 나를 계속 따라온다.
창고 앞에 범털 형님 차가 서 있다. 달빛을 받은 검정세단이 반질거린다. 형님도 아마 내일이 걱정되어서 둘러보러 나온 모양이다. 뒷거울이 뿌옇다. 점퍼 속에 입은 하얀 티셔츠로 뒷거울을 닦는다. 금세 거울이 맑아진다. 맑아진 거울 등을 손가락으로 퉁기자 ‘땡’ 하는 소리가 난다. 마치 거울이 ‘땡큐’라고 말하는 듯하다.
현관에 반짝이를 단 여자 슬리퍼와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다. 범털 형님이 여자를 데리고 온 모양이다. 현관을 올라서자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와 뒤섞인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신음소리를 듣자 아랫도리가 딱딱하게 일어난다. 안방 쪽이다. 숨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놓자 거실 바닥에 누운 내 그림자가 좌우로 흔들린다. 안방 문이 검지 굵기만큼 열려져 있다. 손가락으로 열려진 문을 살짝 밀며 넓어진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본다. 검은 막이 쳐진 듯하다. 신음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내 눈에 서서히 방안의 형체가 드러난다. 달빛이 스며들고 있는 창문이 보인다. 창문에 비치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달이 그려놓은 수묵화 같다. 수묵화 밑으로 희뿌윰한 살결을 드러낸 남녀가 보인다. 여자는 벽에 기대어 서 있고 범털 형님이 벽 쪽으로 마주서서 연신 몸을 들썩이고 있다. 여자가 형님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뻗치며 신음소리를 더한다. 형님의 어깨 위로 여자의 감긴 눈이 보인다. 형님이 안아 올리려는 순간, 여자가 눈을 뜬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백조다. 심장이 살갗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방망이질 친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두 눈이 더욱 커지며 겨드랑이 사이로 맞잡은 손을 힘없이 내린다. 몸을 돌리자 구둣발에 눌린 나무 복도에서 찌그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대문 밖으로 나온 나는 담배를 찾기 위해 몸을 더듬거린다. 손이 떨려 라이터가 잘 켜지지 않는다. 파팍거리며 짧은 섬광만 튈 뿐 불길이 일지 않는다. 멀리 라이터를 던져버린다. 시팔, 담배를 물고 있던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떨어진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겨 동강낸다. 나의 백조를…… 그럴 순 없다. 갖가지 생각이 영사기 필름 돌듯 스쳐간다. 머리를 감싸쥐고 올려다본 나무에 달이 걸려 있다. 잎사귀에 가려 한쪽이 움푹 파였다. 나뭇잎에 살점을 베어 물린 달이 고통스런 신음을 뱉어내는 듯 일그러져 보인다. 나는 터지는 한숨을 주먹으로 막으며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아침부터 분주하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에 사전에 모의게임을 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몸에 신호를 받기 위한 장치를 두른 범털 형님 옆에 바짓단 바로 밑으로 렌즈를 숨긴 보살 하나가 앉는다. 물론 우리 식구 중 하나다. 사면에 약물 처리를 한 모화투를 비추기 위해서는 화투를 나누는 밀대 바로 앞에 앉아야 한다. 렌즈에서 보내온 화면을 받아 몸의 수신 장치로 보내는 기계를 정비하고 있는 바로 옆방도 사전 점검에 바쁘다. 이방은 막상 본게임이 진행되면 빈방으로 가장 하기 위해 밖에서 자물쇠를 채운다. 렌즈로 모화투의 옆면을 찍으면 숫자를 재빨리 읽어 범털 형님의 몸에 숨긴 기계에 신호를 보낸다. 앞방은 진동 한 번, 뒷방은 두 번. 몇 번의 게임을 진행시키던 범털 형님이 됐다, 한마디 던지자 모두들 휴, 한숨소리를 낸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보살들까지 오늘의 게임 인원이 다른 날보다 상당하다. 게임이 몇 판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대문 밖으로 나온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멀리 낯선 차 한 대가 눈에 뛴다. 그 차는 보살들이 창고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게임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그들의 차는 더 늘어날 것이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나는 주방 쪽을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주방에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때까지 숙인 그녀의 고개가 들리질 않는다. 커피 한잔만 달라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든다. 잠깐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눈길을 거둔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그녀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진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조금 있으면 곰들이 뜰 거야.”
불쑥 내뱉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
의외로 담담한 얼굴의 그녀 눈길이 내가 입은 양복에 머물러 있다.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번지는 듯도 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침에 범털 형님에게서 받아 입은 양복을 한번 쳐다본 후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는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서성거리며 중얼거린다.
“도대체, 왜…….”
그녀는 읽던 책의 모서리를 손으로 구기며 한마디 성의 없이 던진다.
“너 때문이야.”
내 말에 그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힘없이 말한다.
“나 때문?”
책으로 눈길을 돌리던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짧게 피식 웃는다.
“넌 나만의 백조여야 해.”
“백조?”
내 말에 그녀가 소리 내어 한참을 웃더니 말한다.
“내가 네 마누라라도 된다는 거야?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 사람은 감옥에 안 가. 안 간다구.”
그녀가 범털 형님을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매섭게 쏘아보는 눈을 피하자 그녀가 세차게 내 몸을 치며 지나간다. 그녀와 부딪힌 내 몸이 옆으로 밀리며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휘청한다. 주방문을 벗어나 급히 뛰는 그녀의 집시치마가 보인다.
뭔가 공기가 심상치 않다. 낡은 복도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거실로 뛰어가자 기계조작을 위해 잠갔던 방문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담배 연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방안, 여기저기 던져진 화투들과 거실에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슬리퍼가 급박한 상황을 말해 주는 듯하다. 비상구 쪽으로 급히 뛴다. 여러 개의 비상구가 모두 열린 상태다. 앞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난다. 곰들인 듯 보이는 두 명의 사내가 범털 형님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백구두를 양쪽에서 맞잡고 내게 걸어온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도망가려 하지만 못 박힌 듯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곰들과 함께 내게 가까이 다가온 백구두가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말한다.
“형님, 죄송합니다. 지켜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죽고만 싶습니다, 형님.”
‘형님이라니, 이 작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갑자기 머릿속이 먹물로 채워지는 듯하다. 아침에 느닷없이 나를 찾아와 오늘 입으라고 양복을 건넨 범털 형님, 신고했다는 내 말에도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던 백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내가 급히 몸을 돌려 다른 비상구 쪽으로 뜀과 동시에 꽝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합세를 한 곰들이 들이닥치는 모양이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여러 개의 화살이 박히듯 내 눈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앞을 분간할 수 없다. 손을 들어 빛을 가리자 자동차가 그대로 내게 달려든다. 나는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붙인다. 턱하고 숨이 막히며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뒤돌아서서 반대편으로 달린다. 네거리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차문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차에서 내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내 발자국 소리를 덮는다. 길게 이어진 골목 끝으로 막다른 길이 보인다. 검은 혀를 내밀고 있는 어둠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차츰 공기가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내 몸이 땅으로 자꾸 꺼지려 한다. 누군가의 검은 손이 내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무릎이 꺾이며 쿵, 땅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시멘트 바닥 위에 몸을 웅크린 그림자가 나를 보며 떨고 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변명하듯 그림자에게 중얼거린다.
“난 더미가 아니야, 아니라구.”
나와 마주 앉은 그림자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 뿐 말이 없다. 모두 다 잠든 새벽, 말이 되지 못한 웅얼거림은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구둣발자국 소리에 묻혀 밤공기를 타고 흩어진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녀의 젖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나여경․
1966년 서울 출생
․200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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