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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특집/남송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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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말 한국문학의 비판적 반성․3
생태(환경)문학의 허와 실
1990년대 생태시 담론의 전개 양상
남송우(문학평론가)
1.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우리의 문학 담론은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그 모색의 결과로 모습을 내비치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생태문학론이다. 생태 위기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데 모든 문학 담론이 그러하듯 새로운 담론이 제기되는 초기 단계에는 개념상의 혼란 혹은 제자리 잡기를 위한 다양한 논의가 제기된다. 환경과 생태 파괴로 인한 나타난 생태문학론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우리 문학 담론도 이러한 과정을 겪는다. 생태문학론, 녹색문학론, 환경문학론 등 소위 생태문학론에 대한 총칭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시에서 더욱 다양하게 그 갈래 명칭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1990년대 생태문학론 논의 중 시에 국한해서 그 논의가 장르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논의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르적 접근이란 장르의 큰 갈래적 차원이 아니라, 하위 장르의 작은 갈래 차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장르의 생성과 소멸은 그 생성의 토대가 있는데, 생태문학이란 새로운 장르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가 그 원인이란 점에서 장르사회학적인 접근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즉 시의 내용상 생태환경 문제를 다루는 시편들을 대상으로 한 주제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
1990년대에 나타난 환경오염을 고발하는 시나 생태 파괴와 관련된 시들을 두고, 이런 유형의 시들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동승의 「독일의 생태시」(외국문학, 1990, 겨울)를 다루면서 나타났다. 그는 현금의 손상된 세계에 대한 시인들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생태학적인 언표들을 <생태시>로 간주해야 할 것으로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독일의 생태시를 중심으로 논의된 갈래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의미가 덜했다. 이어 김용민의 「생태학-환경운동-환경․생태시」(이론, 1991, 겨울)에서도 이런 연장선에서 문제는 제기된다. 그는 여기에서 환경문제를 고발하는 데 그치는 계몽의식이 강한 작품들을 환경시로, 생태학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진정한 생태시로 구분하는 갈래를 내보인다. 이러한 환경시와 생태시의 구분은 뒤에 「생태사회를 위한 문학」(현대문학, 2000, 7)에서는 환경시를 생태시로 포괄하는 새로운 정리가 이루어지지만, 생태문학론의 전개에 있어, 환경시와 생태시의 명명은 다양한 논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서 시를 명명하기도 하지만, 박상배는 「생태환경시와 녹색운동」(현대시,1992,6)에서 생태환경시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1990년대 초에는 환경시, 생태시, 생태환경시란 용어가 혼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몇 논자들의 문학 담론을 통해 살펴본다. 장석주는 「시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향하여」(현대시학, 1992, 8)에서, 환경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는 현대 문명의 위기라는 인식에서 생태학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상상력은 강력하게 문제 제기적이어야 하고, 생태계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형태의 문명과 생활양식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기에 당시에 출간된 생태환경시집인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1991)나 고형렬의 환경시 서울은 안녕한가(1991) 그리고 정현종과 최승호의 일련의 시편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시집과 시편들이 한 시대의 가장 민감한 상상력이 포착한 환경과 주체의 위기에 대한 진언들을 들려주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장석주는 당시의 후기산업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주체의 위기와 이에 대한 문학적 대응인 도시시 혹은 도시문학으로 명명되는 시들에 대해서도 환경문학 혹은 생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범주를 넓힐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개념설정은 생태학적 상상력이란 토대 위에서 창출되는 작품을 환경문학 혹은 생태문학이란 범주 속에 묶어보는 포괄성을 보이나, 환경과 생태의 범주 속에서 변별 혹은 공통되는 요소가 정리되지 못한 갈래로 제시된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개념적 차이를 환경 혹은 생태로 포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건청은 「시적 현실로서의 환경오염과 생태파괴」(현대시학, 1992, 8)에서 박상배가 제안한 생태환경시의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특별히 생태환경시의 설정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나, 시인들이 보여주는 시의 내용에 따라 세 가지 정도의 시적 흐름을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이형기의 「전전후 산성비」,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승호의 「공장지대」가 지닌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직접 노래하는 시들, 둘째는 김광규의 「서울꿩」, 이승하의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등에 나타난 생태파괴나 환경오염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로 인해 당면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형상화하는 시들, 셋째는 이수익의 「새」, 정현종의 「환합니다」 등이 보이는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함으로써 생명보존의 필요성을 노래해 보여주고 있는 시들로 나누어 생태환경시를 범주화하고 있다. 이러한 범주화는 앞서 장석주의 생태시 혹은 환경시의 논의 대상이 되었던 시편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범주의 시편들을 환경시, 생태시, 생태환경시로 갈래 지워 논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논의 가운데서 필자는 「환경시의 현황과 과제」(현대시,1993, 5)에서 환경시란 범주설정을 통해 생태시와 생태환경시를 포괄하려고 했다. 그러나 환경이란 개념이 인간중심의 사고에 바탕을 둔 명명이라는 점, 생태계 문제에 대한 인식이 초기에는 단순히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과 보호의 차원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환경이란 용어가 지니는 함의가 현실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환경 파괴로 생태계의 문제가 일반화되고, 생태담론이 활성화되면서, 환경보다는 생태라는 용어로 생태시를 범주화하려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환경파괴와 생태계 위기로 나타나는 현실을 담아내는 시를 생태시로 규정하고자 하는 흐름이 주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환경시든 생태시든 환경생태시든 모든 시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점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 생명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환경파괴나 생태계 파괴의 위기를 근원적으로 넘어서기 위한 대안적 의지가 구체화되는 시가 생명시라는 것이다. 필자의 「생명시학을 위하여」(열린시, 1995, 12)는 환경시나 생태시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생명시학의 전개 방향은 우리의 삶 즉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비생명적 요소들에 대한 극복의지의 표출이나 생명자체의 의미추구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았고, 그 구체적인 시편들을 생명 자체를 다루는 시, 식물성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 의식을 노래하는 시편, 신생의 꿈을 통해 생명 의식을 고양시키는 시편들을 통해 그 가능성을 확인해 보았다. 사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관심과 그 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1987년경에 환경운동 차원에서 생명운동이 등장하여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더욱 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환경 파괴와 생태 파괴의 위기 속에서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대상은 생명이라는 것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구중서의 「문학과 생명운동」(자연과 리얼리즘, 1993, 6)이다. 문학과 환경과의 관련 속에서 생명운동을 논하고 있는데, 김지하의 생명운동과 김종철의 ≪녹색평론≫을 통한 생명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생명운동은 단순히 기계문명의 폐해 자체를 거부하는 소박주의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시각은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는 초월주의를 넘어서는 제3세계 리얼리즘문학의 시각을 돈독히 가져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래서 우주 ․자연 ․ 생명을 조화롭게 통어하는 문학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환경 혹은 생태와 관련해서 논의되는 문학 담론들이 생명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생태시의 범주에 드는 많은 시들은 생명과 관련된 화두를 배제하기가 힘들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생명의식을 우주적 공간으로 확대한 논의가 정효구의 「우주공동체와 문학」(현대시학, 1993, 9-10)이다.
정효구는 유기체의 이상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균형과 조화의 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었을 때, 유기체는 회복의 힘을 잃고 마침내 죽음의 상태로 치닫고 만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와 같은 조화와 균형의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파괴된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주적인 차원의 유기체가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그는 중용의 도와 여성성의 회복을 통해 문학이 지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최승호, 정현종, 김지하, 박용하, 정진규, 이성선 등의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이를 구체화해 본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시와 시학사, 1994)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중용의 사상이 생명의 모든 본질을 다 드러내 줄 수는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또한 우주공동체라는 세계관에 기초한 문학을 장르 의식으로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생태시 논의에서, 생명에 대한 논의들을 홍용희의 문학 담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홍용희는 「신생의 꿈과 언어」(시와 사상, 1995, 겨울)에서 문학의 본령은 결핍의 현실 원칙 안에서 충일한 생명의 세계의 복원을 꿈꾸고 갈망하는 일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런 문학을 신생의 문학으로 명명하고, 그 가능성을 김기택, 정현종, 김지하의 시에서 찾고 있다. 김기택의 「얼굴」, 「밥 생각」, 「틈」 등의 작품을 통해 거대한 빌딩의 정글에서도 틈을 내는 내부 세계의 부력의 힘에 대한 발견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본질을 깊이 있게 환기시키는 것으로 평가한다. 정현종의 경우는 「꽃을 잠그면」, 「숲에서」, 「설렁설렁」 등에서 생명의 꿈과 숨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상징적 질서체계를 설렁설렁하고 물렁물렁하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김지하의 경우는 「살림」, 「그날」 등을 통해 생명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 모든 질서가치의 기준을 두는 생명적 세계관을 정립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낡은 근대의 패러다임에 근본적 성찰과 충격을 가하면서 차원 높게 비판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세 시인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중심 관점은 생명이다. 생명의 추구와 실현이 현재 문학이 짊어진 본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홍용희는 김기택, 정현종, 김지하의 시들이 지닌 생명본질에 대한 통찰을 왜 신생의 문학이라고 명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장르의식은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단지 문학의 가장 중요한 본령은 생명원상의 세계의 복원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신생문학의 범주를 추상적으로 내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홍용희는 「생명주의와 한국문학」(한국문학평론, 1999, 여름)에서는 생명주의문학이란 용어를 제안한다. 환경이란 용어는 근대 패러다임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인식의 산물이며, 환경이란 수식어에는 자연과 우주생명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주변적, 종속적인 객체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생태문학이란 용어는 생태란 수식어를 통해 개체 생명의 상호연관성, 유기체의 자연적인 관련구조와 사슬체계에 대한 의미가 적절하게 구현되고 있으나, 개체 생명의 독자성, 개별성에 해당하는 고유한 내생적인 속성이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녹색문학은 용어 자체가 이미 상징적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개념어로서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따라서 홍용희는 우주 생명이 지니는 영성, 다양성, 관계성, 순환성의 속성을 종합적으로 구현한 명칭으로 생명주의 문학이 가장 적절하다는 입장을 내보인다. 물론 자신도 생명주의란 용어가 지나치게 광의적이란 점으로 인해 구체적인 개념으로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소재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명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론적 차원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우주의 모든 대상을 생명주의 문학의 범주에 포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생명주의 문학의 범주를 설정하고 있기에, 그는 생명주의 문학의 대상 선정이 특정한 소재와 시기에 지나치게 구속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여러 논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기된 논의 대상들이 산업문명의 반생태적 폐해가 출현한 이후의 시기에 발표된 작품으로 국한해 온 점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소재 역시 생태계 파괴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신과 세계의 본성과 존재 원리에 대한 인식, 개인과 개인, 남성과 여성의 상호 관계성, 생산과 소비 양식의 문제, 생태학적 윤리 체계, 삶의 다양성과 지역 자치, 인간의 몸과 욕망의 문제 등으로 다채롭게 확산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홍용희의 생명주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소재의 유연성은 생명 자체의 다양성에 비추어볼 때, 충분한 타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러나 시기 문제에 있어서는 무제한으로 그 시기를 확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결국 생태문학 담론을 창출했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역사적 장르로서 존재해야 하는 필연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생명주의 문학이 불변하는 문학 장르로서 존재해 왔고 또 현재에도 존재한다고 하면, 문제는 다르지만, 엄연한 역사적 장르로서 논의될 수밖에 없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 생명주의 문학의 추구는 계속되어야 하는 현실적 과제이기는 하나, 어느 시기까지 끝없이 거슬러 오른다면, 현재적 성격의 생명주의 문학과는 다른 성격의 문학을 논해야 하는 선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1996년으로 넘어서면, 생태시를 다루면서도 생명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되어 가는 현상을 보인다. 그것이 송희복의 「푸르른 울음, 생생한 초록의 광휘」(현대시, 1996, 5)와 이숭원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우리시의 방향」(실천문학, 1996, 가을)이다. 송희복은 생태시를 생태학적 문명비판시와 생태학적 서정시로 대별한다. 생태학적 문명비판시는 이형기의 「전천후 산성비」,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승호의 「공장지대」 등의 시를 통해 그 성격을 해명하고 있다. 이 시들은 자연의 순환적 질서가 파괴되고 있는 기형적인 문명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확인시켜주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생태학적 서정시는 생명의 조화와 환희를, 인간과 자연, 생물과 환경 사이의 조응과 교감을 노래하는 시로 식물적 이미지, 동양적 융합의 세계관, 삶의 순환적 질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유형의 시로 김지하의 「목련」, 정현종의 「나의 자연으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송희복이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데, 이는 생태시에 있어서 궁극적 지향점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인식하고 있는 생태학적 서정시에서 바라보는 낙관적 전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논구는 더욱 많은 사유를 필요로 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이숭원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우리시의 방향」 역시 생태시를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1)생태환경의 오염실태를 제시하면서 고발과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를 담은 시편, 2)훼손된 삶의 공간에서 우리는 어떠한 정신의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가를 모색한 시편이다. 전자가 왜곡된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의 세계를 모색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전자의 시로 최승호의 「공장지대」, 정일근의 「취재수첩 18-죽은 시인의 사회」, 김지하의 「해창에서」,고재종의 「풍경에 대하여」, 엄원태의 「소읍에 대한 보고」, 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 등을 분석하고 있으며, 후자의 시로 김지하의 「결핍」, 고재종의 「날랜 사랑」, 나희덕의 「배추의 마음」 등을 분석하고 있다. 이 시들 중 후자의 시들은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시인의 직관과 그것을 서로 형상화하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크게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한다. 자연을 단순히 관조의 대상이나 이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적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생태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을 새롭게 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바로 생명의 특성을 보여주는 시각을 시들이 내보인다는 말이다. 즉 전자의 시들보다는 후자의 시들에 더 의미를 둠으로써 생태시의 흐름이 단순히 생태 파괴 자체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에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숭원은 논의되는 시의 대상은 다르나 유형 분류에서 송희복이 나눈 두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 분류 기준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숭원은 이러한 생태시의 장르 문제를 「생태시의 현황과 전망」(동강문학, 2001)에서 제기한다. 생명과 환경의 유관성과 상의성을 탐색하는 것이 생태학이고, 그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상상력을 생태학적 상상력이라고 하며, 그것에 의거해 쓰여진 시를 그는 생태시라고 명명하기에 이 명칭이 가장 온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생명 자체를 노래한 시를 생명시로 명명하면서, 이 둘을 포괄하는 용어로 무엇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이 둘을 포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내보인다. 모든 시는 표현 방식과 의식의 수준에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생명을 탐구하고 생명의 가치를 옹호한다고 본다. 생태시가 문제 삼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전지구적으로 발생한 생태계 파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생태학적으로 모색하는 단계의 시를 논의하기 위함이기에 그전부터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쓰여져 온 작품과 문명사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시작품을 굳이 하나로 묶어 유형화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밝힌다. 이렇게 이숭원의 경우는 생명시라는 용어 자체를 인정하는 듯하나 생태시와의 관계설정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음으로써 생명시 자체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어떤 시에 담긴 생명에 대한 관심이 생태학적 문제의식에 의해 촉발된 경우라면 그것은 그냥 생태시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생태시를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생태시의 요체는 생명과 환경, 생명과 생명 사이의 관계인식에 있다는 생명 중심의 논리를 견지한다. 이는 생명시의 개념을 생태시 속에 포괄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장르의식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숭원의 생태시에 대한 장르적 입장은 생명시 개념을 생명 자체를 노래한 시라는 좁은 범주 속에서 생명시를 바라본 결과이기도 하고, 임도한의 「생태문학론의 전개와 한국현대 생태시」(한국시학연구, 1998)의 논리에 기대고 있는 부분도 있다.
임도한은 「생태문학론의 전개와 한국현대 생태시」에서 1990년대 이후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다양한 생태문학론들의 개념 전개 상황을 꼼꼼하게 정리한다. 그 정리의 결과 그가 내린 생태문학과 관련된 개념은 환경 위기의 극복을 추구하면서 현대 생태학의 인식을 기반으로 한 문학으로서 생태문학이란 용어가 타당하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개념 규정은 서구의 생태문학의 흐름과 국내의 생태문학론을 종합하여 그 나름의 생태문학의 범주와 생태시의 유형을 정리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많은 논자들에 의해 그 개념이 제기된 바 있는 생명문학(생명시)에 대한 입장정리였다. 그는 생명문학과 관련해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토대를 둔 생명문학을 논하고 있는데, 이 생명문학 논의는 생태학의 기본 인식 중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와의 관계성과 생명성을 강조하고 심화시키는데 강점이 있다고 평가하고, 기존의 논리에 대한 반론과 그 대안적 방향을 주장하고는 있으나, 그 내용에 공감하는 것이 동학의 종교적 신념을 수용하는 것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그래서 이 사실이 개인의 생태학적 실천을 이끌어내는 측면에 긍정적으로 기여할지에 대한 여부에 회의를 표한다. 이후에 임도한은 앞선 논의들을 바탕으로 「한국현대 생태시 연구」(고려대학 박사학위논문, 1999)를 펴내는데, 여기서도 생태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는 생태시 중심으로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생태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지점을 생태학적 대안의 제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그 대안은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그 대안으로 여러 가지 항목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가장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가 ‘생명’으로 명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면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관련된 생명시의 부류에 드는 시편들을 생태시에 포괄해서 그 중심에 두는 관계 정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을 떨칠 수가 없다. 생명시라는 개념으로 생태시와 같은 장르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사상에 토대를 둔 생태시가 그 중심에 놓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생태시에 대한 장르의식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그 분류를 시도한 경우는 최동호의 「21세기를 향한 에코토피아의 시학」(21세기와 한국문화, 1996)과 고현철의 「생태주의 시의 지형과 과제」(현대시의 쟁점과 시각, 1998)이다. 최동호는 「21세기를 향한 에코토피아의 시학」에서, 환경․생태시가 이미 문학사적 의미망 안에 포섭되어 있다고 보고, 그 유형을 세 가지로 가름하고 있다. 그것은 민중적 생태지향시, 전통적 생태지향시, 모더니즘적 생태지향시인데, 이러한 갈래 구분은 당시의 생태시들을 유형화할 수 있는 하나의 틀로서는 유용한 점이 있으나, 이는 당시의 시적 경향을 서술하기 위한 편의적 발상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의 분류작업이 중간단계로서의 분류임을 밝히고 있기에, 이런 분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그는 「에코토피아의 시학과 신인간의 역사적 방향」(시와 사람, 1999, 겨울)에서 이를 변론하고 있다. 지속과 변화라는 문학사적 관점에서 시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온당하다면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시적 경향으로 그러한 분류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논리이다. 그의 논지를 두 편의 글을 통해 읽어보면, 충분히 현실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후자의 글에서 기대했던 생태시에 대한 장르적 의식은 찾을 수 없다. 대신 그는 에코토피아의 시학을 위해서 필요한, 자유와 함께 책임을 다 하는 신인간상을, 김지하의 신인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이는 생태시가 지향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기에 그의 문제제기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과제로서 부각된다.
고현철은 「생태주의 시의 지형과 과제」에서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환경시, 생태환경시, 생태시, 생명시 등의 용어를 생태주의시라는 개념을 설정해서 이를 다 포괄하고자 한다. 즉 생태주의 시를 상위 개념으로 잡고, 그 하위 유형으로 생명시, 환경시, 생태시의 세 유형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태환경시는 생태와 환경에 내포된 의미의 차이점을 중시하여 이 둘을 분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시에 대한 유형 분류는 혼란스러운 개념을 정리해 볼 수 있는 명료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숭원이 「생태시의 현황과 전망」에서 지적한 것처럼 ‘-주의’라는 명명이 시 장르의 유형을 분류하는 명칭으로 적절한지에 대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운 정도로 다양한 명칭들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장르의식을 가지고 생태시의 갈래를 정리해 보려는 작업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1990년대 생태시 논의에서 생명시 개념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그 범주를 새롭게 해온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 신덕룡이다. 그는 생태문학론 논의가 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될 때, 「생명시 논의의 흐름과 갈래」(시와 사람, 1997, 봄)를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생태문학론 논의에서 환경시나 생태시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생태계 파괴로 인한 삶의 위기가 인간의 위기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생명의 존폐문제라는 점에서 생명시란 명칭을 사용한다고 밝힌다. 이는 사실 명확하고 뚜렷한 개념 정립에 의한 명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그는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논자들이 사용하는 다른 명칭들을 별다른 논란 없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생태시 논의의 사적인 전개를 펼쳐내고 있다. 그러나 생태학적 논의들이 갈수록 활발해지고, 다양한 영역에서 생태라는 개념이 폭넓게 수용되면서, 문학 영역에서도 생태문학 나아가 생태시 개념이 자리를 더욱 확실하게 잡게 됨으로써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생명시 개념은 생태시 개념에 의해 밀려나는 형국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신덕룡에게 생명시 개념을 확실하게 규정할 필요성을 안겨주었다. 그가 「생명시의 성격과 시적 상상력」(시와 사람, 1999, 겨울)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연유이다.
신덕룡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생명시의 개념을 다른 논자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생명시란 용어가 생명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시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생명시란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한 남송우의 「생명시학을 위하여」(열린시, 1995, 12)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당시에 발표된 시들 중 생명 시학이란 범주에 들 수 있는 시편들을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해서 생명 자체를 노래하고 있는 시, 식물성 이미지를 통해 생명의식을 고양하고 있는 시, 신생의 꿈을 통해 생명의식을 고양하는 시 등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를 신덕룡은 생명에 대한 협의의 해석의 결과로 본다. 이는 맞는 지적이다. 생명과 관련된 사항이 어찌 세 가지 정도로 국한될 수 있으랴. 이는 당시의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상들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시 중심의 논의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생명시에 대한 논의는 이를 출발점으로 다양하게 논의될 성질의 것이지 완결된 담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덕룡이 이 글에서 생명시의 개념을 심화 확대시키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생명시의 토대로 삼고 있는 김지하의 생명성이란 용어에 주목하고,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에는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계 맺음을 향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들 사이의 관계가 우리 삶의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생명시란 용어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즉 생명시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명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시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시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 하는 시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또 다른 영역으로 그 관심을 넓혀가야 하는 것이 생명시가 지닌 본질이란 생각이 든다. 생명 자체는 부단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생명세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명은 새롭게 적응하고 생명을 확산시켜나가는 생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
지금까지 1990년대 생태시문학론의 논의 전개 과정을 역사적 장르의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그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 생태시, 환경시, 생태환경시, 생명시 라는 이름으로 논의되었던 시를 중심한 생태시문학론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태시라는 용어로 정리되어 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태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 생명시에 대한 논의도 부단히 지속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논의의 수준이 개념, 용어 등의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기에 장르적 차원의 의식을 제대로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이는 어떤 문학 담론이든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연스런 흐름으로 보인다.
그런데 생태시에 대한 이러한 활발한 논의의 흐름은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 결과로 최동호의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이은봉의 시와 생태적 상상력(소명, 2000), 장정렬의 생태주의 시학(한국문화사, 2000), 신덕룡의 생명시학의 전제(소명, 2002), 김용민의 생태문학(책세상, 2003), 김욱동의 생태학적 상상력(나무심는 사람, 2003) 등의 저술을 만날 수가 있다. 이런 저술들의 출현은 생태문학에 대한 앞으로의 논의가 더욱 다양하게 지속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이런 예단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1990년대 뿌려진 생태시문학에 대한 다양한 씨앗들이 그래도 조금은 풍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송우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전환기의 삶과 비평 생명과 정신의시학 등
․현재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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