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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특집/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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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79회 작성일 08-02-2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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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말 한국문학의 비판적 반성․3

생태(환경)문학의 허와 실


소설의 소멸인가, 소설의 재생인가
―생태소설의 대두와 그 전망―

임영봉(문학평론가)


1. 도전과 실험으로서의 생태소설
우리 시대에 문학의 미래는 과연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문학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선언한 바 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재 문학이 처해있는 상황과 그 미래의 불투명성에 대해서라면 누구든지 깊고 어두운 늪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쓰고 읽어 왔던 문학은 정말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소멸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의 생명을 어떻게 되살려내어 미래를 보전할 것인가. 최근 생태문학의 대두는 이런 물음에 대응하는 한 가지 대답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접어들어 급격하게 확장된 생태담론은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생태담론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생태학은 생물학, 환경공학, 미래학이 종합된 복합 이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90년대 이후 생태문학의 대두는 이러한 생태담론의 전개과정과 나란히 놓이는데 이에 따르자면 생태문학(Eco-Literature)이란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생태학적 대안을 모색하는 문학’으로 정의된다. 김욱동의 ‘생태문학론’, 이남호의 ‘녹색문학론’, 김지하의 ‘생명문학론’이 바로 그것이다.
장르를 놓고 볼 때, 그동안 이루어진 생태문학 논의는 대체로 ‘시’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에 대하여 소설 쪽의 논의는 부피가 얇은 느낌을 주고 있다. 생태문학론이 소설보다 시 장르에 치중되어 있는 이유는, 시 장르의 본질이 생태의식의 표현에 적합한 성격, 즉 자연친화적이면서 타자와의 공존을 꿈꾸는 초월정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태학적 세계관의 근거에 해당하는 유기체적 우주론, 이타주의적 정신과 쉽게 교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주인공과 세계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그 배경에 해당하는 ‘사회’라는 공간은 어디까지나 ‘인간화된 자연’-문명이라는 경계에 한정된 것이다. 이런 근대적 소설형식의 근본적 성격에 의거하자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태문학이 추구하는 에코토피아(Ecotopia)의 건설이 실현될 수 없는, 가망 없는 꿈임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현재 소설형식 자체가 ‘해체’의 단계에 놓여있다는 점이고, 이를 수긍할 때 소설의 앞길에는 이제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된다. 이 과제에 대하여 생태소설(Ecological Novel)은 하나의 도전이자 실험일 수 있다. 생태소설은 근대문학의 틀을 넘어서서, 새로운 서사양식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이 글은 그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 다름 아니다.


2. 생태소설의 개념과 전통
생태문학에 대한 논의 자체가 출발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생태소설의 개념과 범주를 규정하는 문제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생태문학 담론에 따르자면, 생태소설이란 과학기술 문명에 중심을 둔 근대 산업사회의 결과로써 초래된 생태위기를 생태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소설의 형식으로 ‘인식’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개념 정의는 서구의 생태담론과 이에 근거한 생태문학론의 시각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물론 고도 산업사회 단계에 생태문제의 핵심이 놓여있다는 서구 생태담론의 문제의식 자체는 인정할 수 있지만, 생태 혹은 생명의 문제를 그런 서구인의 시각과 담론틀 내부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생태 혹은 환경에 대한 체험과 인식에 있어 서구와 우리의 경우는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생태담론의 문제틀과 주요 인식소들을 우리의 시각 속에서 재배치하는 일이다. 생태주의는 과학기술문명으로 대변되는 산업사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시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인류사 전체를 문제 삼는 비판적 의식이라야 할 것이다. 이 차원에 설 때 생태주의는 우주적인 차원의 ‘생명’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동양의 사유와 우리의 전통사상과도 연결될 수 있다. 김지하의 생명에 대한 탐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의 생태소설에 대한 논의 또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전통과 계보를 확인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현재 생태문학 논의과정에서 생태소설로 거론되는 작품들의 연대는 대개 70년대 ‘이후’, 90년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기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생태적 문제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소설 작품들이 생산되지 않은 것인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식민지 근대와 전쟁이야말로 생태계를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면서 우리 자신을 생명의 위기에 몰아넣은 사건이 아닐까. 이 시기의 소설들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근대의 폭력과 억압의 체험을 생태적 시각에서 내면화하고 있는 양상들-생태 파괴의 현실 고발, 우주적인 생명의 추구, 자연으로의 회귀 등의 측면은 전혀 검토되고 있지 않다. 예컨대 식민지 시기의 이효석과 김유정, 전후의 오영수 같은 작가가 남긴 작품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상과 김동리, 황순원 같은 작가 또한 생태문학의 시각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작업들은 생태소설의 전통뿐만 아니라 우리 소설사의 의미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나갈 것이다.
생태소설의 전통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생태소설의 개화기인 70년대 이후의 양상을 거론할 수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생태소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은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다. 1970년대는 경제개발계획으로 대변되는 ‘조국 근대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입안 관철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이런 근대화, 산업화의 과정에는 대규모의 자연 훼손과 파괴가 뒤따랐다. 땅과 바다와 공기는 폐수와 유독가스, 분진 등에 의해 오염되어 갔다. 이런 현실은 삶의 터전의 파괴를 의미했고 작가들은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하는데 김용성의 「사해 위에서」(1976)는 그 출발점에 놓여있다.
「사해 위에서」는 대규모 공단의 조성으로 폐촌이 되어버린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을씨년스런 폐촌 풍경의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죽어버린 바다이다.

바다는 짙은 잿빛을 띠며 죽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선사시대의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소리 없이 누워 있었다. 구름은 태양을 가렸고 수면 위에는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았다. 길게 육지를 파고들어 물굽이를 이루는 곳에 강물이 흘러들어오고 있었으나 유심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것도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다만 움직이는 것은 하구에 우뚝 솟은 공장굴뚝들을 통해 솟아오르고 있는 여러 개의 불기둥뿐이었다. 불기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기 바닷물 위에 붉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용암이 솟아오르듯 바닷물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바다가 살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붉은 그림자들은 바다를 서서히 죽이고, 드디어는 죽어버린 죽음의 사신이었다. 그 흔한 갈매기조차 잿빛 바다 위에 너울거리는 붉은 그림자들을 두려워하고 날아오지 않았다.(김용성, 「사해 위에서」, 󰡔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 실천문학사, 1999, 229쪽)

죽어버린 바다, 그것은 이제 ‘독을 품고 있는’ 바다로 변해 인간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생태의식은 주인공 ‘나’와 돌이할아버지의 위기의식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자연의 파괴는 항상 삶의 황폐화를 불러온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돌이할아버지는 그런 삶의 황폐화가 자연의 회복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막연한 희망 사항으로 남을 뿐이다. 김용성의 「사해 위에서」는 산업화에 따른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객관적 묘사를 통해 폭로하고 고발하는 성격이 강하다.
70년대 소설사의 기념비를 이루고 있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 또한 환경오염의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경우이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도시이다. 산업화가 만들어낸 거대 도시가 생태 파괴의 또 다른 현장임을 이 작품은 고발하고 있다. 「기계도시」(1977)의 주인공 윤호는 난쟁이 가족을 통해 그가 몰랐던 진실의 세계, 은강시의 어두운 모습에 차츰 다가선다.

시내는 많은 구릉이 기복을 이루며, 동서로 뻗은 중앙부의 구릉에 의하여 시가지는 남북으로 나뉜다. 공장지대는 북쪽이다. 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죽은 난쟁이의 아들딸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가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다. 모든 공장이 제품 생산량에 비례하는 흑갈색․황갈색의 폐수․폐유를 하천으로 토해낸다. 상류에서 나온 공장 폐수는 다른 공장 용수로 다시 쓰이고, 다시 토해져 흘러 내려가다 바다로 들어간다. 은강 내항은 썩은 바다로 괴어 있다.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조세희 「기계도시」(󰡔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00, 185-186쪽)

「기계도시」의 공간적 배경인 은강시는 각종 유독가스와 매연, 분진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공장에서 배출하는 폐수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주인공 윤호의 눈에 비친 은강시는 ‘검은 기계’라는 괴물의 형상을 띠고 있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난쟁이 가족은 이렇게 오염된 환경에 노출되어 병들어간다. “어머니는 은강에 온 후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호홉 장애․기침․구토 증상도 자주 일으켰다. 영희는 청력장애를 일으켰다. 직포와 작업현장의 소음이 영희를 괴롭혔다.”(218쪽)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은 환경 파괴의 현실을 폭로 고발하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 그려진 환경 파괴라는 현실의 너머에는 제도와 의식의 부패라는 사회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생태문학론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기계도시」와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는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과 위계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이 인간 본연의 삶을 왜곡시킨다는 사회생태론적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1979)은 생태학적 문제의식과 소설적 형상화의 차원에서 70년대 생태소설을 대표할 만한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 작품의 무대는 바다에 인접한 동진강 하구,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다. 긴급조치위반으로 대학에서 제적된 주인공 병국은 동진강 하구의 고향 마을로 내려와 지내던 중 동진강에 찾아드는 철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진강 하구에 공단이 조성된 이후로 철새들은 차츰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공장 폐수로 인한 수질오염 때문이었다. 여기서 주인공 병국은 직접 동진강 연안의 수질조사에 나서게 된다.

나는 시험관꽂이를 들고 자갈밭으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석교천은 살아있는 물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석교천 물은 이미 죽어버렸다. 아니, 악마의 혼으로 살아있다. 이 폐유가 결국 동진강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강폭이 팔십 미터에 가까운 동진강은 몰라도 이 석교천에는 분명 인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만큼의 크롬산이나 수은을 함량하고 있을 것이다. 또 석교천 주민 중 십 년이나 이십 년 뒤 육가크롬화로 앓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자갈밭에 앉아 양말을 신었다. “두고 봐라. 내가 기필코 석교천은 물론 동진강까지 예전의 자연수 상태로 만들고 말테니.” 누가 들으란 듯 내가 말했다. 나 자신도 수천 번을 반복하여 이미 자기 최면에 걸린 말이었다. 누가 이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헛된 집념이라고 나를 비웃을는지도 몰랐다. 아니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절반을 한 해에 두 번씩이나 건너다니는 그 작은 도요새의 고통보다는 그 일이 내게 결코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김원일 「도요새에 관한 명상」(󰡔연󰡕, 도서출판 나남, 1987, 221쪽)

70년대에 씌어진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도요새에 관한 명상」이 가지고 있는 생태소설로서의 진전된 면모는 이와 같은 주인공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주인공은 환경문제 대한 기본 인식과 함께 그와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물의 중요성과 개발, 공해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은 노트는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그 자신의 뚜렷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환경오염으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심각한 결과들, 예컨대 ‘미나마타’와 ‘육가크롬화’라는 공해병의 실체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은 독자들에게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주인공 병석은 자신이 조사한 오염물질 배출업소에 대해 시정조치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관련기관에 제출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공장 직원들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군 통제구역 출입으로 군부대에 억류되는 등 고초를 겪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도요새에 관한 명상」에서 위기에 처한 환경의 문제는 주인공의 가족사-황폐해진 삶의 이야기와 나란히 전개되는데 이러한 병렬적 이야기 구성은 각각의 등장인물에 의해 시점이 교대되는 독특한 서사형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비상하는 도요새의 존재, 그것은 자유와 해방된 삶의 상징으로써 두 개의 이야기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염두에 둘 때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90년대 이후의 생태문학담론에서 제기되는 표층적 인식(환경의식)과 심층적 인식(생태의식)의 문제를 선취한 차원에서 이 두 개의 인식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점에서 선구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작품이다.

3. 생태담론의 제기와 생태소설의 약진
70년대 우리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를 배경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생태소설 창작은 80년대에 접어들어 소강상태를 보인다. 광주민중항쟁에서 출발한 80년대의 정치적 격동이 작가들에게 환경문제와 생태계의 현실을 돌아볼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국민의 힘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고 사회가 안정을 되찾아가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경과 생태문제는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고 생태소설 또한 활발하게 씌어지기 시작한다.
90년대 생태소설 창작 열기는 최성각의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1989)에서 시작되어 이정창의 장편 󰡔불꽃바다󰡕(1990)와 이남희의 장편 󰡔바다로부터의 긴 이별󰡕(1991)로 이어졌다. 이후 서정인의 「붕어」(1994), 정찬의 「별들의 냄새」(1994)와 「산다화」(1994), 최인석의 「지리산에 저 바다」(1997),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1997), 한수산의 「침묵」(1997), 이문구의 「장천리 소태나무」(1998), 조헌용의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소고」(1998), 한창훈의 「돗 낚는 어부」(1999) 등의 작품이 차례로 발표되었다. 이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소재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90년대 생태소설은 해양․대기․토양 등에 걸쳐 오염으로 위기에 처한 환경 현실을 폭로 고발하는 차원에서부터, 우주의 유기체적 본질과 생명의 평등성에 대한 의식을 표현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대에 비교해 볼 때 이들 작품의 공통적 특징은 환경과 생태문제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전 국면은 환경과 생태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생태담론의 활성화와 생태문학론의 대두에 힘입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생태소설에 대한 높은 관심과 창작 활동은 최근 들어 여러 편의 장편 발표로 이어지고 있는데 김원일의 󰡔히로시마의 불꽃󰡕(문학과 지성사, 2000), 이윤기의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1999), 김영래의 󰡔숲의 왕󰡕(문학동네, 2000)이 바로 그것이다. 양과 질의 측면에서도 본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이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생태소설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그 미래적 가능성에 대한 물음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김원일의 󰡔히로시마의 불꽃󰡕을 보자. 이 작품은 제목이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피폭 체험을 다루고 있다. 다루고 있는 소재의 측면에서 󰡔히로시마의 불꽃󰡕이 제기하고 있는 생태학적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한 성질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원자탄 피폭 체험은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극단의 환경 파괴에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출발점에는 묘산과 정동칠이라는 두 명의 인물이 놓여있다. 묘산이라는 성공한 동양화가의 집에 어느 날 정동칠 일가가 방문한다. 오래전에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고향 마을을 떠나온 묘산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사람 좋은 정씨 아저씨는 허물없는 동네 형님으로 남아있다. 정씨가 어렵게 묘산을 찾아온 이유는 원자탄 피폭자인 자신의 병 치료 때문이었다. 정씨의 아들 순욱은 피폭으로 인한 고통스런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아버지가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서울행을 독려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정씨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순욱과 딸 수임 또한 그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육체적 질병과 그 고통 속에서 그동안 살아 왔다.
어렵게 묘산의 집에서 숙식을 허락받은 순욱은 그동안 자신이 간절하게 생각해 왔던 바를 행동으로 옮긴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찾아가 병원 진료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한 뒤, 여러 병원을 전전한다. 그러나 그런 정씨 일가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는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묘산의 막내딸 정혜만이 그들의 처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순욱은 국내 관련기관과 일본대사관에 원폭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하지만, 그의 소망은 공권력과 사람들의 무관심 앞에서 무참하게 좌절되고 만다. 결국 순욱이 원자탄 피폭자의 존재와 그 고통을 알리기 위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은 분신자살의 길이었다. 인파와 차량으로 넘치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순욱은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불을 당긴다.
󰡔히로시마의 불꽃󰡕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비극적 결말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본원적 환경-생태계의 종말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끔찍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이 제기하고 있는 생태학적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방사능 오염과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무서운 결과이다. 순욱은 원폭피해자협회의 이사를 앞에 두고 이렇게 항변하고 있다.

“이사님,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발행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란 책자를 보셨겠지요? 한국 원폭 피해자 2세의 실태를 박수옥 씨가 취재한 󰡔핵의 아이들󰡕도요. 이사님께서는 거기에 실린 피폭자 2세대의 건강 실태 조사보고서 결과도 믿지 않으시겠군요? 2세의 35프로 정도가 분명 그 후유증으로 심각하게 앓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김원일 󰡔히로시마의 불꽃󰡕(문학과 지성사, 2000, 78쪽)

“피폭자였던 제 어머니가 자식을 낳은 게 기적일는지 모르나 부모가 다 피폭자인 경우, 우리 오누이야말로 피폭 2세 희생자로서 살아 있는 증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누가 뭐래도, 만약 증거를 대라고 우기면 제가 할복을 해서라도, 저는 제 모든 장기를 그 규명의 실험 대상물로 제공하겠다는 각서를 쓸 각오가 돼 있습니다.”
―김원일 󰡔히로시마의 불꽃󰡕(문학과 지성사, 2000, 79쪽)

피폭의 상처는 당사자인 정씨의 삶을 파탄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과 딸에게까지 연장되어 그들 모두를 불구의 삶 속으로 인도하고 있다. 작가는 「도요새에 관한 명상」의 병석이 그러했던 것처럼 피폭으로 인한 방사능 오염 실태를 각종 자료의 제시를 통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묘사해 나가고 있으며,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정씨 일가의 고통스런 삶은 그 사안이 너무 중대하기에 타성이 되어버린 방사능 오염의 중대성을 독자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방사능 오염의 중대함을 경고하는 차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히로시마의 불꽃󰡕이 드러내고 있는 또 다른 주제는 생명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비판이다. 예컨대 묘산의 아내가 정씨 일가에 대해 보여주는 극단적인 거부감이 그러하다. 그녀는 정씨 일가를 도와주자는 딸을 향해 “이 험한 세상에 우리 가정은 우리가 지켜야 돼”라고 소리치고 있다. 철저한 이기주의로 무장한 그녀 앞에서 삶과 세계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이기주의에 대해 작가는 자성을 촉구하고 있지만, 아내와 딸 사이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묘산의 고민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쉽게 버리거나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문제를 냉엄한 현실 속에서 바라보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대안을 미래에서 구하고 있는 안목이다. 묘산 같은 구세대가 결코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희망은 순욱이나 정혜 같은 세대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삶이라는 생태계의 윤리를 다시 재건하는 일은 그래서 미래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끝으로 순욱의 분신자살이 그것을 드러내고 있듯이 작가가 고수하고 있는 자리가 휴머니즘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 작가의 입장에 설 때 생태학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만물의 평등이란 여전히 하나의 관념을 의미할 뿐이다.
이윤기의 󰡔나무가 기도하는 집󰡕은 ‘우야 아저씨’와 ‘자야 아가씨’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대구 팔공산 자락의 어느 마을에 사십 살이 가까워지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우야 아저씨가 살고 있다. 홀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지키고 있던 그의 집에 어느 날 한 여자가 찾아든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이렇다.

「기도원 오느라고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그런데 귀룽나무 꽃이 하도 좋아서…….」
「저 아래 국도변 삼거리의 귀룽나무 꽃?」
「네.」
「좋기야 하지요. 좋아서?」
「……버스에서…….」
「내렸다? 제대로 내렸는데, 뭐?」
「……내렸더니 마침…….」
「기도원 오르는 길이더라, 이 말이군? 제대로 올라오기는 했어요. 그래……기도원에는 왜 왔어요.」
―이윤기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1999, 33쪽)

이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이 보통 사람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야 아저씨와 이 낯선 여자는 다른 사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이야기는 마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자연스럽게 풀려 나간다. 낯선 여자는 어떤 사연을 안고 기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오던 중, 마을 삼거리의 귀룽나무 꽃이 너무 좋아 그만 내리고 말았다는 것. 다행히 거기에 기도원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올라오던 중에 ‘귀룽집’이라고 불리는 우야 아저씨 집을 기도원으로 착각하고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우야 아저씨를 처음 대면하자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따로 갈 데가 없기에 이 집에 그대로 머물게 해달라는 낯선 여자의 요구를 사람 좋은 우야 아저씨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집에 살게 되고 차츰 가까워지게 된다. 단어를 거꾸로 발음하고 때때로 실어증을 보이기도 하는 그 여자의 이름은 김송자, 하지만 우야 아저씨는 그녀를 ‘자야 아가씨’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야 아저씨는 어떤 사람인가.

우야 아저씨는 자타가 두루 인정하는 <나무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중략)
그는  나무를 식물로 보지 않는다. 조금 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동물과 식물이 어떻게 다르게 정의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게 동물과 식물의 임계점 같은 것, 동물과 식물을 가르는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나무는 여느 사람들이 아는 나무가 아니다.
―이윤기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1999, 62-63쪽)

우야 아저씨의 남다름이란 바로 그가 ‘나무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 천여 평의 숲을 자신의 힘으로 가꾸어 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일군 숲은 정원수 따위를 키우는 보통의 수목원이 아니라 ‘나무고아원’이다. 그 숲의 나무들을 모두 주워다 심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야 아저씨에게 있어 그 숲은 ‘나무가 기도하는 데’이기에 ‘나무 기도원’이기도 하다. 그의 나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상식의 차원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각별함을 가지고 있다.

우야 아저씨에게 나무는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무가 아니다. 그는, 어떤 쓸모를 전제로 나무가 잘려나가는 것은 볼 수 있어도 나무가 뿌리 뽑힌 채로 말라가는 것, 매몰되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에게 도로 공사장에서 자주 일어나는, 공사의 효율을 높인답시고 나무를 흙으로 파묻어버리는 사태는 동물의 목숨도 끊지 않고 그 껍질을 벗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잔혹행위다. 그에게, 뿌리 뽑힌 채 말라 죽어가는 나무는, 들판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동물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을 방치하는 것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잔혹 행위이다. 그의 이른바 <나무 기도원>은 도로 공사장에서 운반해 온 나무 고아원이다.
―이윤기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1999, 65쪽)

우야 아저씨는 그 많은 고아 나무들을 정성껏 키워낸 것처럼 자야 아가씨를 대하고, 그 숲이 짙어갈수록 자야 아가씨의 표정은 밝아지고 말수는 늘어간다. 그리고 그동안 그들의 사랑은 마치 나무처럼 조용히 조금씩 자라나 마침내 행복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나무가 기도하는 집󰡕에 등장하는 우야 아저씨와 자야 아가씨의 사랑은 식물적 온유함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삶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생태적 삶이 무엇인가를 인간의 나무되기를 통해 보여주는 우씨 아저씨라는 캐릭터는 인상적이지 아닐 수 없다. 그는 분명 작가에 의해 생명공동체 이념의 담지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적 상상력이 그려낸 이미지로서의 에코토피아일 뿐이다. 우야 아저씨의 에코토피아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에코토피아를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인 힘의 존재나 거기에 이르는 수단과 방법의 탐구, 갈등과 투쟁 등의 산문적 현실성이 지워져 있다. 그러니까 󰡔나무가 기도하는 집󰡕은 산문으로 쓴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다.

4. 여로의 끝, 󰡔숲의 왕󰡕을 찾아서
김영래의 장편 󰡔숲의 왕󰡕은 70년대 이후 생태소설이 걸어왔던 여로의 종점이자 가장 높은 고지이다. 이 작품은 생태학적 문제의식의 소설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숲의 왕󰡕은 일단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 ‘본격적’이라고 할 만한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생태소설과 성격을 달리한다. 생태소설이란 용어가 소재의 측면이 아니라 질적인 규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생태소설 고유의 ‘내적 형식’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생태소설이란 생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언어-기성의 소설문법을 통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의 형식이라는 시학적 측면을 강조할 때 소재나 주제가 다를 뿐 거기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말처럼 생태소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기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자신의 육체이다. 여기서 󰡔숲의 왕󰡕은 생태소설의 독자성 확보에 필요한 미학적 요청과 이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숲의 왕󰡕은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들로 넘친다. 전체 이야기는 ‘에피쿠로스의 정원’, ‘숲의 형제단’, ‘숲의 왕’, ‘신성한 숲’이라는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장들은 다시 내부의 ‘절’을 가지고 있다. 구성뿐만 아니라 서사 기법에 있어서도 작가의 의도가 섬세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3인칭 화자가 이끌어 가는 이야기 속의 초점 인물은 박성우(1), 성준하(2), 박성우(3), 신재문과 박성우(4)로 교체 반복되는데 이러한 서사 기법은 하나의 진술 속에서 객관성(관찰자로서의 화자)과 주관성(초점 인물의 내면)을 종합함으로써 입체적 서술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야기 구성과 서사 기법은 미스터리한 사건 전개라는 또 다른 소설적 장치와 결합하여 전편을 관류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
󰡔숲의 왕󰡕의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평창의 어느 숲 속이다. 이 숲 언저리에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있고 여기에 조그만 공동체가 하나 깃들어 있는데 ‘숲의 형제단’이 그들이다. 이 숲 속 형제들은 서로를 가리켜 가문비, 오르페, 닥터 그린, 깡통, 누룩소, 성치(聖痴)라고 부르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이들이 모여 사는 정원의 입구에는 글귀 하나가 걸려있다. “누구나 들어와도 되나 아무나 들어와선 안 되나니/이곳은 침묵과 가난과 겸양과 기도의 자리/한 잔의 물 한 웅큼의 낟알로 하루를 나나/사랑은 한 두레박 감사는 한 가마니인 곳/모두의 것이자 누구의 것도 아닌 정원(REX NEMORENSIS)”이라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 그 조건은 ‘자연’을 신으로 섬기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렉스 네모렌시스, 즉 ‘숲의 왕’의 이름으로 이런 규칙을 정한 자는 닥터 그린 정지운이다. 그는 이 정원을 만든 장본인이자 숲속 형제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정지운은 성준하를 자신의 정원으로 처음 인도하던 날,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세상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선생이 벌이려던 반환청구 소송은 승산이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에요.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에 사로잡힌 채 치닫고 있는 이 불경스런 문명에서 붕괴는 대대적이고 파상적이며 무제한한 것입니다. 아무도, 어떤 사물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산속 깊숙이 파고든 산판장의 전기톱날에 엄청난 소나무숲이 잘려나가고, 흙더미에 묻힌 씨앗은 덤프트럭에 실려 멀고도 험한 여행길에 오르지요. 고향숲, 아버지들의 숲이 사라진 지상에서 떠도는 운명에 맡겨진 한 알의 씨앗. 바로 그거예요. 그것이 선생의 운명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운명인 것입니다.”
―김영래, 󰡔숲의 왕󰡕(문학동네, 2000, 34-35쪽)

결코 멈추지 않는 인간의 위협으로부터 자연을 지켜내기 위해 정지운은 숲속 정원을 손수 가꾸고 믿음을 같이하는 형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전직 토목기사 성준하를 비롯하여 전직 목수 가문비 신재문, 전직 사업가 깡통 조규호, 오르페, 성치와 수퇘지 다루, 당나귀 플라테로가 바로 그와 믿음을 같이하는 숲 속 형제들이다.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숲과 사람과 짐승이 한데 어우러져 아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축복받은 정원’에 위기가 찾아드는 데서 비롯된다. 숲 속 정원 일대의 개발사업이 결정되고 리조트 건설공사가 착공되자 숲 속 형제들은 위협을 느끼고 대책을 숙의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닥터 그린과 리조트 사장이 차례로 죽게 되고 그 결과 리조트 개발계획은 백지화되지만 숲 속 형제들의 공동체 또한 붕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 이런 비극적 결말부에서 작가는 유일한 생존자 산지기 노인의 존재를 통하여 숲의 재생과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물론 󰡔숲의 왕󰡕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사건들은 그렇게 손쉽게 요약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 위기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생태의식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숲의 왕󰡕은 앞서 거론한 󰡔히로시마의 불꽃󰡕과 󰡔나무가 기도하는 집󰡕이 가진 각각의 한계를 넘어선 차원에 놓여 있다. 󰡔숲의 왕󰡕은 환경의식과 생태의식이 융합된 세계를 하나의 소설적 형상 속에 담아냄으로써 그 깊이와 넓이의 측면에서 생태소설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숲의 왕󰡕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 또한 깊이 음미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거두고 있는 성과는 근본적으로 ‘생태학적 상상력’의 발현에서 비롯되고 있다. 󰡔숲의 왕󰡕에서 묵시론적 분위기를 거느린 에코토피아의 존재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휘황하게 타오른다. 문제는 인간의 숭고한 자기희생을 요청하고 있는 이 에코토피아의 이념이 강력한 비교성(秘敎性)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완결성을 갖춘 한편의 소설에서 상상력, 즉 미학으로서의 강력한 이념성은 각각의 차원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외부를 이루는 세계와 소통한다. 그렇다면 󰡔숲의 왕󰡕은 과연 어떻게 현실과 만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소설형식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리얼리티의 확보 문제와도 관련된다. 예컨대 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숲의 형제단이라는 공동체의 삶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자주 환상성, 신비주의 따위와 결합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의 소모임처럼 너무 비밀스럽고,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반지원정대의 이야기처럼 멀리 있는 ‘가상’으로 점점 대두된다. 스토리의 중간에 느닷없이 뛰어들고 있는 ‘늑대 청년’이라는 인물의 성격은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늑대 소녀보다 훨씬 환상스럽다.
일정한 깊이에 도달한 생태문학은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강력한 이념성으로 말미암아 현실초월적인 신비주의나 종교의 성격을 띠게 될 가능성이 풍부하다. 󰡔숲의 왕󰡕은 이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인 박성우는 늑대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 일기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숲의 왕󰡕이 놓인 지점은 어디쯤이고, 생태문학의 현재적 좌표와 그 미래는 무엇인지를 떠올릴 때, 이 구절은 음미를 요구한다.

이것이 전부이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구전되어오던 전설마저 채집된 표본으로밖엔 접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직은 신비와 시대착오적인 꿈이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위안을 받게 된다.
나는 앞에서 ‘위안’이라고 말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부족은 우정의 띠를 튼튼하게 해주는 일이 생겼을 때 우정을 맺은 사람들이 무지개의 그림자 속을 함께 걸었다고 말한다. 늑대와 함께 무지개의 그림자 속을 걷는 그 청년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그것이 전설이든 우화든 무슨 상관이랴.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닌 다른 생물종과의 우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신들의 아성을 위해 성곽 주위에 파놓은 해자(垓字) 위로 무지개의 다리를 놓아준다. 나는 이 이미지를 통해서라도 아직은 희망의 손을 들고 싶다.
――김영래, 󰡔숲의 왕󰡕(문학동네, 2000, 107쪽)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학술서 󰡔한국 현대 문학비평사론󰡕, 평론집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현재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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