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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시/정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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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열
단풍․44
산중턱쯤에선가
소년은 숨이 턱에 차서 발을 멈추고
“이만큼 올라 왔으면 됐잖아요?” 물었습니다.
발 아래로 골짜기가 길게 이어지고
그 끝에는 절이 아주 작게 보였습니다.
아직 철이 일러 산꼭대기에만 단풍이 들었다기에
그를 빌미로 애써 오른 산길입니다.
“단풍이 어디 있는고?”
스님이 물었습니다.
“저기 산봉우리를 보면 어렴프시 붉은 색이 보이잖아요.”
“그건 아직 단풍이 아니다.”
“왜요?”
“여기는 꼭대기가 아니거든.”
“꼭대기에서 보나 여기서 보나 마찬가지 아녀요?
꼭대기에 뭐가 있다고.”
“사실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지, 하늘밖에는.”
“그렇다면 더구나…….”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떼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어렴풋한 단풍이 아닌
진짜 단풍을 만날 수가 있지.”
단풍․45.
스님은 망연히 단풍든 골짜기를 바라봅니다.
나는 의기양양해서 빚 독촉하듯이 스님을 몰아쳤습니다.
“도대체 부처님의 자비란 막연하기 짝이 없잖습니까.
자비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생겼어요?”
말이 없는 스님에게 나는 빈정거리는 목소리까지 더했습니다.
스님은 한참을 뜸을 들이다
“시주님은 인사할 줄 아세요?”
하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할 줄 알지요.”
“그럼 저에게 인사 한번 해보시겠어요?”
참으로 어이 없어하며 나는
“스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이번엔 겉치레로 말고 진심으로 ‘안녕하십니까.’ 해보겠어요?”
“진심으로요?”
“그래요 정말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시키는 대로 인사를 다시 했습니다만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럼 이번엔 저기 강아지에게도 진심으로 인사를 해보시겠어요?”
“강아지에게요?”
“강아지뿐 아니라 여기 있는 이 단풍나무에게도 해보시지요, 진심이 우러나는 마음으로.”
나는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벌개졌습니다.
“그것이 부처님 마음이지요. 자비란 그런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것이 보살행이지요.”
정승열․
인천 출생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단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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