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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시/최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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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웅
인디언인형(人形)
1.
서랍 속에는 쓴맛이 가득했다.
깊은 침묵 뒤에서
씁쓰레한 과거지사들이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빛줄기에
눈이 부신 듯 실눈을 뜨고 날 보았다.
서랍 구석에 엎드려 있던 인디언인형 하나
팔다리 겹쳐진 채 모로 누워서
원망 섞인 푹 패인 눈 속으로 날 끌어당긴다
20여년의 세월을 숨도 쉬지 못하고
어둠의 제물이 되어
무덤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떤 간절한 말들로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딸의 소중한 꿈 동무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인가
손이 닿자 그동안 쌓인 먼지를 털고 일어선다.
옛날의 주인은 이미 애어미가 되어 무심한데
인디언인형은 20년 전 모습 그대로 유폐된 채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쓴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해맑은 손녀딸의 밝은 세상으로 걸어나온다.
2.
인디언인형은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다.
한쪽 눈은 찌그러지고
실밥 터진 옆구리, 갈비뼈를 드러낸 채
우람한 로봇 인형의 기세에 눌리고
곰돌이, 꾀돌이의 젊은 활기에 휘둥그레진다.
헝클어진 머리 쓸어 담을 새도 없이
잊혀졌던 시간을 일시에 찾겠다는 듯
먼지 풀풀 날리며 목을 길게 뽑는다.
손녀딸 아이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스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안 가득 고이는 인형들의 즐거운 비명.
손녀딸의 영토에서 외면당한 인디언인형은
세월의 깊은 쓴맛을 결국 뛰어넘지 못한다
축제의 외곽으로 밀려나서
간절한 눈빛만 살아 움직이는데
손녀딸은 끝내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 않는다.
3.
형광등의 촉수가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인디언인형은 곰팡내 나는 서랍 속이 그립다.
깊은 침묵의 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똑똑
화장실 앞에서 노크를 한다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김.
갑자기 몸이 움츠러들기 시작한다
어둡고 긴 외길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종종걸음
그때 피아노 소나타를 밟고
문틈으로 달빛이 흘러들어 왔다
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타일바닥 위로
베토벤의 운명이 장엄하게 굴러간다
무심코 다리 밑으로 눈 돌렸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쪽 곧은 종아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아득히 먼 곳에서 바다가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알듯 말듯 미소가 번졌다
터져 나올 것 같은 욕구를
잠시 잊어버렸다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흔들고 지나간다
정말 못 참겠다는 듯
화장실 문이 찢어질 듯
둔탁한 소음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나는 또 작아지기 시작한다
내가 꿈꾸는 안락한 삶은
순간 벽에 갇힌다
벽 속에서
고흐의 해바라기가 활짝 폈다
그런데 왜
내 나이는 변기의 물소리에 코를 박고 있다.
최휘웅․
198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설화-사막의 도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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