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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신작시/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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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34회 작성일 08-02-2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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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까따리나는 없다


까따리나가 없다 러시아 갔다
우리는 비 오는 날 술집 구석에서 레닌 흉상을 가지고 놀거나 바카디 알코올에 기대어 백만 송이 장미를 틔워 올리는 장난을 했다 女, 23세, 모스크바 출생, 가족 부양의 이국(異國) 여자는 만료된 비자 갱신하러 러시아 갔다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까따리나는 긴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녀의 마지막 귀향은 이번이 몇 번째일까 레닌 이즈 마이 히어로; 내 서투른 영어가 그녀의 조국을 흔들 때마다 까따리나는 어머니 선물로 시계가 필요하다며 브래지어 끈을 풀곤 했다 그녀는 확실히 유물론자(唯物論者)였다

내가 한 번은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책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녀는 한국어판 레닌의 저서가 다다른 도시(都市)의 피로를 어루만진다 레미 마르땡과 보드카와 로얄 살루트 사이에서 출렁이는 그녀의 한국 밤, 어메리카, 어메리카를 연발하는 스물세 살 러시아 여자에게서 나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까따리나는 없다 러시아 갔다

가난한 까따리나의 의자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는 밤, 클럽 러시아 지붕으로 슬라브, 슬라브 백동전처럼 빗방울은 부서지는데, 새로 온 나타샤가 레닌의 흉상을 잡아 채 가는 거였다



약발이 받지 않는 날


도대체가 약발이 들지 않는 날이에요 신경을 안정시키지 못한 알약이 속을 우려내고 액체로 뒹구네요 새벽이구요 나는 공터로 나가는데요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설 수도 없는 새벽이에요 그럼, 물구나무로 있을까요? 세상에, 나무들은 그래서 물구자세로 버티는군요

새벽이구요, 약발이 받지 않는 새벽에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나무의 결을 만지작거리는데, 차라리 나무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데 꿀떡꿀떡 지하(地下)에서 수액을 잘도 밀어올리는 느티나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였습니다

목숨 하나 지탱하기 위해 서로 부둥켜안은 나무의 실핏줄, 그것이 튕겨져 나와 나뭇결을 만드는 거였습니다 나뭇결의 상처를 쓰다듬다 쓰다듬다 내가 미쳐서 느티의 속엣것도 만지게 되는구나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설 수도 없어서 물구나무가 되어서 느티를 지키는데 새벽 빛다발이 나무와 엉긴 몸을 마구 용접하는 거였습니다


박진성․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1년 ≪현대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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