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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초점/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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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19회 작성일 08-02-2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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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친일예술 담론의 현재


친일시의 세 갈래

박수연(문학평론가)

1.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일제말 전 시기는 이른바 민족 말살의 암흑기라는 규정하에, 특히 근대문학 연구의 영역에서는 거의 외면되다시피 해왔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전반적 위기 속에서 일본 군벌 및 독점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천황제 파시즘을 기반으로 한 전쟁 동원을 식민 본국 및 피식민지 통치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던 때이다. 요컨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해방된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을 명분으로 하여 일본 독점자본주의를 보호, 유지하려는 목적이 천황제 파시즘과 태평양전쟁을 통해 추구되었던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결국 이 시기의 이념과 사회 체제는 일종의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적 무의식에 의해 일본을 동양의 서구화된 표본으로 지속시키려 했던 근대주의를 기본 동력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문학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역사적 과정의 한 결과라는 점이 부정될 수 없다면, 한국근대문학의 전체적인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제의 진출과 후퇴가 조선의 문학계에 어떤 흔적을 남겨놓았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일제의 진출과 후퇴가 전개되는 과정은,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다시 파시즘 권력의 부상으로 변이되는 과정과 맥락을 함께하는데, 이는 또한 세계사적 차원의 정치정세와 맞물리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말 전 시기에 서구에서는 반파시즘 인민 전선이 무너지고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의 파시스트 권력이 대두했으며, 일본은 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를 지나서 쇼와 파시즘으로의 이행을 완료하고 독점 자본의 이윤율 확보를 위해 대륙 진출을 꾀했다. 한국 근대문학은 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프로문학운동을 출발시켰으나, 쇼와 파시즘 시기에 이르러 그 활동을 중지당하고 이른바 순수문학이 문학적 본류로 부상하였다. 그 이후의 친일문학은, 한편으로는 천황제 파시즘의 명분이었던 반서구 동양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문인들이 동의했던 결과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근대문학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었던 후진 근대사회의 문학적 열등감을 천황제 파시즘의 공고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가져온 결과였다. 친일문인들이 이러한 선택을 감행한 것은 중일전쟁 이후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를 20세기의 역사적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패배의식이 그 근원에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렇다면 조선이 민족적 명맥을 유지하는 길은 승리자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제2의 패권자 노릇을 하는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친일문학은 한국근대문학이 이식된 근대성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근대주의가 왜곡된 형태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학계와 문단에서는 당시의 친일문학을 일제에 의해 강요된 문학으로 이해해 온 경향이 강했다. 이는 당시의 친일문인들이 해방 이후에 자신들의 행적을 변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가 이후의 한국문학사에서 그대로 통용되어 온 결과이다. 가령 백철은 해방 직후에 출판한 󰡔조선신문학사조사-현대편󰡕(백양당, 1949)에서 이 시기를 일제에 의한 민족 말살의 암흑기로 규정하고, 이 시기에 발표된 대부분의 문학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써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고 규정했다. 이 책의 5장이 ‘제2차세계대전의 열풍과 조선현대문학사상의 암흑기’이고 5장의 1절이 ‘일제 일색의 민족말살시대’이다. 그의 구체적인 시기 구분에 따르면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고 ≪국민문학≫이 발간되는 때부터 1945년까지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암흑기’라는 말에는 그러나 그 자신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저간의 정황을, 그의 표현을 빈다면, “백지로 돌려야 할 부랑크의 시대”로 묻어두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로 이 시기는 문인들 개인의 개별성이 이전과 같이 자유롭게 보장되었던 시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개별성으로부터의 전환이 또 다른 자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 즉 서구적 개인주의의 극복과 동양적 공동체 정신으로의 ‘귀환’, 그리고 그에 따른 ‘신체제-신윤리’의 수립이 문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 시대가 반드시 “부랑크”의 시대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귀환’을 하나의 근대적 ‘반동’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파시즘문학의 가능성’이 설문으로 응답되고 있는 당시의 정황 속에서는 분명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그 시대는 새로운 근대의 모색기, 정확히 말하면 ‘왜곡된 모색기’였다.
결국 이 시기를 민족 말살의 암흑기라고 규정하는 저간의 관행은 백철의 이 글로부터 비롯된 셈인데, 정작 백철은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세계사의 주인으로써의 일본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는 ‘사실수리론’을 주장하고, 이후 친일문인들의 대대적 출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당시의 정황 속에서 백철의 사실수리론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백철 자신이 자발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랬던 백철이 당시의 문학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로 평가하는 것은 그 시기를 문학적 백지 상태로 돌려놓음으로써 자신의 행적을 묻어두려 했던 의도적 주장인 셈이다.
이후의 한국문학사가 백철의 그 주장을 고스란히 반복하면서 일제말 파시즘기에 진행된 문학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것은, 그러므로 문학적 선배 세대의 주장에 기대어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복무했던 문학의 내재적 미학 원리를 탐구하는 일에 소홀했었음을 뜻한다. 문학사 연구의 이러한 결여 부분을 보충하고, 당시의 친일시인들이 뚜렷하게 자각된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밝히는 일이 따라서 필요해진다. 이 연구를 통해 ‘친일시-친일문학’의 내적 근거가 역사철학적 근대성의 구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근대성의 구도 속에서 시인들이 택했던 미학적 입장이 그들의 친일시에 투영되는 모습을 계보화시킴으로써 시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2.
1)국민문학파와 국민주의
친일시 연구는 첫째, 선행 친일문제 연구가 항용 빠지기 쉬웠던 맹목적 ‘국민주의’의 관점을 일종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유산으로 보아 비판하며, 둘째, ‘문학의 내재성’에 대한 논리적 정리를 시도하고, 셋째, 친일시의 계보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각 계파의 특이한 내재적 논리를 분석한 후, 마지막으로 이 논리들이 일제에 봉사하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문학이 억압적 국가 권력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필요한 작업은 친일시의 계보를 나누고 그것들의 특이성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친일시의 계보를 ‘국민문학파와 국민주의-이광수, 주요한, 김동환, 김억 등’ ‘순수시학파와 미학주의-서정주, 김종한 등’ ‘프로문학 및 납월북 문인-김용제, 이찬, 임학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인들 중 대표적인 문인을 중심으로 계파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국민문학파와 국민주의’를 하나의 계보로 살펴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속하는 문인들이 대부분 중일전쟁 직후에 친일로 전향한 민족 자치론자들로서, 상실한 국가 대신에 민족적 에스니시티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민족 미학적 국가를 상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속하는 문인들이 민족 미학으로 탐색했던 시조나 민요에 대해 이들이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식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민요 시인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민요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개념은 에스니시티(ethnicity)이다. 에스니시티란 권력 배분에 있어서 소수파를 점한 사람들의 사회적․문화적 특징을 일컫는 말로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출된 다수파의 국민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소수파의 집단적 귀속 의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월러스틴은 이 에스니시티의 기능을 세계체제를 존속시키는 역할로 규정한다. 하나의 에스니시티에 속한 존재는 그 그룹에 가장 적절한 사회적 위치를 인정하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그룹이 자본의 운동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에스니시티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의 주관적 계급 위치를 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말기의 역사적 경험은 민족적 에스니시티가 미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인종주의로 전화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일제가 침략자들에 의해 유린되는 장소로 동양을 설정하고, 스스로에게 소수파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박해받는 인종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동양인이라는 에스니시티를 창출한 결과였다. 이때 조선심에 주목했던 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을까?
일제말 인종주의 담론의 ‘동양’과 ‘황국정신’에 대응하는 것은 ‘조선’과 ‘조선심’이다. 그것은 조선민족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근대문학 형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인으로 상상하고, 그로써 조선 민족의 정신을 더욱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는, 허구적이었지만 신념에 찬 실천의 매개물이었다. 국민이 국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면 에스니시티는 자기 귀속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적인데, 조선심의 문제가 에스니시티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조와 민요시는 이때 그 집단적 자기 귀속의 문제로 연결된다.
김억의 경우 민족적 정서의 강조는 그의 문학적 초기시절부터 있었다. 「시형의 음률과 호흡」(<태서문예신보>, 1919. 1. 13)은 자유시의 호흡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나름대로 논리화해서 보여준 최초의 글에 해당한다. 실로 김억이 조선 시단에 기여한 점은 근대시의 내적 논리, 요컨대 자유시의 호흡률과 같은 형식에 대한 미적 탐구를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미적 탐구가 나아간 지점은 개성론이다. 김억은 이 예술 개성론을, 개인들이 각각 다른 것처럼 각 민족도 다르다는 논리를 전제하면서 민족 개성론으로 비약시킨다. 결국 예술은 민족 정신․정서를 민족의 육체와도 같은 삶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논의는, 아직까지는 민요시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 즈음의 김억 또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소개에 주력하면서 자신의 창작 방향을 그쪽에 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훗날 민요시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그 민족 정서가 “현대의 조선심”으로 환언되고 그 삶이 “현대의 조선심의 고민과 어쩔 수 없는 고뇌”(「조선심을 배경삼아」, <동아일보>, 1924. 1. 1)로 이해되는 곳에서, 그리고 “조선 사람의 사상과 감정 또는 호흡에 가장 가까운 시조와 민요”(「밟아질 조선 시단의 길」, <동아일보>, 1927. 1.3)가 조선 시가의 시형으로 이야기되는 곳에서 그의 민요시론의 직접적 계기를 볼 수 있지만 그것의 잠재성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이때 ‘조선심의 고민과 고뇌’라는 말로써 지시하는 것은 피식민지 상태의 조선 현실에 대한 고민과 고뇌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억은 그 현실의 고통을 미적 관념으로 돌파하려 한 경우였다. 삶의 고통은 “예술로 인하여 시화(詩化)되고 미화(美化)되어 모든 고뇌를 달게”(「조선심을 배경삼아」) 함으로써 잊혀질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조선심’이 현실의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 미학을 위해 논리적으로 요청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다는 것은 그의 조선심이 상실된 국가에 대한 상상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문학적 매개물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그가 조선심으로써의 민요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1924년인데 비해 민요를 절실한 감정으로 체험한 것이 1927~8년경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보면 이런 판단은 더욱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개인의 미적 매개물로 조선심과 민요가 추구되었다는 점 때문에 김억의 시를 개인적 취향의 그것으로만 놓아둘 수는 없는 문제가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는 개인의 시적 개성을 민족적 개성으로 직접 확장시킴으로써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맺어지는 방식을 암시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개인들의 예술적 충동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광의로의 한민족의 공통되는 충동은 같을 것”(「시형의 음률과 호흡」)이라는 진술에 미루어 판단할 때, 개인의 개성은 민족 정서의 일개 구성물로 환원되는 것이 된다. 더구나 김억의 문학적 과제가 조선심을 육체화하는 전형적 호흡률이었고 보면, 시적 개성 자체가 고려될 여지는 별로 없는 셈이다. 개인이 집단 속에서 집단의 공통성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실로 개인에게 실현되는 민족적 현실의 구체는 사라지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이때 남는 것은 오직 관념에 있는 민족적 고통이 될 것이니, 이 관념형으로써의 고통이 개인에게 구체화될 여지는 없어져 버리게 된다. 김억의 시가 개인적 서정의 관념적 애상으로 그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요컨대 개인이 집단에 의해 소멸되고 집단은 다시 관념형으로 제기되어 현실적 구체를 소멸시킨 것이다. 문제는 그 관념성이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소멸시킨 논리적 과정의 결과라는 점이다.
이 논리를 알게 될 때 김억이 일제말에 이르러 「국가와 개인」(<매일신보>, 1940. 11. 30)을 쓰고 신체제하의 개인의 윤리에 대해 멸사봉공으로써의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참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개인 정서의 집합인) 민족의 공통되는 충동은 같은 것”이라는 말을 친일의 시기에 국가와 개인의 관계로 바꿀 때, 그것이 언어만 바뀐 것일 뿐 실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그의 국가관은 일찍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문학적, 사상적 경향이 당대의 문단에서 국민문학파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고 보면, 그가 상상하는 국가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적할 필요가 없겠다. 그것은 실제 현실을 미적 관념으로 묻어버리고 고통의 현실을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하기 위해 조선의 미적 형식을 탐구한 행위의 종착지였다. 이때 미적 형식의 근원인 조선심은 실제 현실을 외면한 자가 그 행위의 심리적 보상물로 찾아낸 의지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찾아낸 결과라는 점에서, 민족의 형식이 아니라 민족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한 상상에 불과했다. 그것을 국가에 대한 상상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은, 상실된 것이 민족이 아니라 국가였으며, 나아가 국권 상실의 현실을 조선심이라는 미적 매개물로 대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억을 미학적 국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프로문인의 경우
김용제의 경우를 살펴보면 당시의 프로문인들의 전향 논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귀국 후 조선문단에서 고독감을 느끼던 김용제가 백철과 함께 일본 나프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백철의 ‘사실수리론’에 대해 김용제가 가졌을 느낌을 짐작하게 해주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1938년 11월에는 프랑스의 인민전선이 무너짐으로써 인민전선을 이끌던 소련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기대가 한풀 꺾이고 파시즘의 공세가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이 세계적 정세와 관련한 자포자기적 패배감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김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북지전선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는 백철의 글이 그에게 전향의 명분을 세워주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를 사후적으로 증명하는 글은 김용제의 「전쟁문학의 전망(戰爭文學の展望)」 ≪동양지광≫, 1939, 3)과 「조선문화운동의 당면 임무(朝鮮文化運動の當面の任務)」(≪동양지광≫, 1939, 6), 「현실의 언어(現實の言葉)」(≪동양지광≫, 1942, 6)이다. 김용제는 「전쟁문학의 전망」에서 “현재는 적을지라도 위대한 문학의 공상보다 위대한 현실에 대한 문학자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갖추는 일이 문학자의 명예로운 이름에 요구되는 시대”라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중일전쟁으로 압축되는 동북아 정세로서의 그것인데, 전쟁은 “역사를 개혁하는 위대한 모멘트”이며 따라서 “현실을 반영하고 그 소리를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이 그 내용과 형태를 전쟁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는 이 전쟁문학을 통해 문학의 ‘국가적 역할’을 도모하는 동시에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일을 통일시킬 것을 요구한다. 문학의 국가적 역할이라는 문제 설정과 함께 그가 논의하는 작품은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의 󰡔보리와 병정(麥と兵隊󰡕이다. 당시에 천황제 파시즘의 이른바 성전의식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을 모범적 전쟁문학으로 예증하는 김용제의 의식 구조를 조명하기 위해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국가적 역할’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의 파시즘에 대한 긍정이다.
「조선 문화운동의 당면 임무」는 문화와 정치의 상호적 협력을 통해 “강력한 국가적 문화”를 건설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글이다. 국가적 이념과 애국적인 목적은 정치와 문화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으며, 그로써 형성되는 것이 국민문화의 운동과 실천인데, 그를 위해 국가적으로 올바른 정치 이념과 문화 사상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것이 문화 통제의 필요성이다. 국가적 통제가 새로운 사회와 역사의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믿음의 배경에 내선일체의 주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김용제는 내선일체 운동에 소극적인 조선의 문화인들을 비판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통제적 문화운동을 통한 국가 사상의 전파에 힘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의 실례로 김용제가 제시하는 것은 원고 검열과 언론 검열에의 적극적 동참인데, 이런 통제론은 백철의 “통제적 통일적인 경향”론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백철은 김용제가 편집한 잡지 ≪동양지광≫의 1939년 4월호에 「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時局と文化問題の行き方)」을 발표하고 통제를 위주로 하는 정치에 문화가 보다 긴밀히 연결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글의 선후관계로 본다면 김용제는 백철의 논의를 충실히 이어받아서 그것의 구체적 실례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김용제는 「현실의 언어」에서 백철이 정리한 ‘사실수리론’을 다시 제기한다. 발레리는 19세기적 지성의 한 모습으로 시와 음악에 열광한 정신을 묘사하고 20세기에는 그것이 부르주아의 가치관에 의해 몰락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백철은 그 예술적 정신의 가치가 통시대적으로 면면히 지속되는 것임을 주목했다. 이른바 생명의 기운으로 약동하는 힘이 거기에 있을 터인데, 동양의 운명이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는 논리적 근거가 그것과 관련된다. “이번 ‘사실’을 통하야 동양의 지식인은 하나의 정신적인 것과 봉착했다.”는 그의 말은 바로 그 논리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그것이 출발점인 것은 질서 있는 생명의 정신이 먼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다시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귀결점인 것은 모든 진리의 행로가 변모에 있듯이 ‘사실’의 시대 또한 자신의 종말에 이르러 모종의 정신을 생성하는 것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제는 그것을 좀더 압축해서 ‘사실의 세기=시의 세계’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그대로 ‘발레리→백철’의 논점을 따온 것인데, 여기에도 현실 자체의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개입되어 있다. 1942년 6월에 발표된 이 글이 더욱 가혹해진 전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김용제는 그 현실을 원리나 진리가 관통하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때 그 진리란 곧 서양의 패배와 동양의 부흥이라는 사실로서 이는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대동아공영과 팔굉일우라는 천황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래를 향한 이상주의의 공상으로부터 탈피하여 현실의 객관적 행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전쟁문학론」에서의 김용제의 주장이 일제 파시즘의 중국 정벌을 역사적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백철의 사실 수리론으로부터 직접 영향 받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3)전통서정의 순수미학
마지막으로 순수 미학파의 친일문학을 살펴보자. 일본 문부성은 1937년 󰡔국체의 본의󰡕를 출판하고 학교에 배포함으로써, 황국정신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공식화하고 국가에 의한 사상 통제 대상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으로까지 확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의 문단은 이 국체 보존과 천황귀일(天皇歸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표어 아래 거의 모두가 전향을 이루게 된다. 이 전향은 따라서 단순히 프롤레타리아문학에서 순수문학으로의 전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정신에서 ‘동양정신-일본정신’으로의 전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문학은 그 전반기의 좌파 문학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등의 모더니즘문학까지도 부정되는 황국정신의 문학이었다. 모든 서구적 모더니즘은 부정되고 소위 전통 서정파-순정 예술파에 의해 ≪사계≫(1933)나 ≪일본낭만파≫(1935~38)(‘일본낭만파’는 일본 파시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등의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서정성은 대부분 황국정신으로의 자발적 전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일본정신론은 조선에서는 30년대 후반에 조선문화론, 동양정신론, 고전론으로 이어진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로 요약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첩로에서 일본의 국체와 황국정신은 조선인들에게도 공히 숙지되고 권장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어서 ≪인문평론≫지가 동양문학, 일본문학, 지나문학, 조선문학을 특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혹시 조선의 문인들에게 그러한 경향의 내재화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그래서 제기된다. 일본인들에게 모든 서구적 정신을 버리고 황국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연적 경향이었다면 조선인들에게 그 경향의 자발적 내재화는 없었던 것일까? 이것은 근대적 국가나 민족관념을 일본을 통해 형성시켰던 조선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얼마든지 제기해 봄직한 질문이겠다. 특히 일본의 동양정신론이 조선에서 동일하게 전개되고 마찬가지로, 유사한 형식으로 문학적 전향이 진행되던 당시의 정세 속에서는 일본문단의 경향이 조선으로 직수입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항목은 동양정신과 서정성이다. 동양정신의 주장이 당시 일본의 근대 초극론으로 합리화되는 것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서구적 모더니즘의 흐름까지도 부정하고자 했던 서정성으로의 귀환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일본문단의 지배적 경향으로 자리잡고, 그들의 국체론으로 연결될 이 서정적 경향의 내재화가 조선 지식인들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친일문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으로 자각되었겠느냐라는 문제의식을 가져볼 수 있다. 이 문제를 고찰하기 이전에 미당의 문학적 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길에서 미당은, 친일문학의 최종 종착지가 그랬듯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공동체라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그것은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획득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미당의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매일신보>, 1942.7.13-17)는 당시 그가 생각했던 문학의 요체를 보여주는 글이다. 일본에서 펼쳐진 근대의 초극론에 강하게 영향 받고, 직접적으로는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국민시에 대하여」의 형식과 내용을 뒤따르고 있는 이 글이 씌어진 때는 1942년 7월이다. “황국의 전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거나 서구 제국의 문화와는 다른 동양의 정신문화를 논하면서 “동아공영권이란 또 좋은 술어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고 진술하는 것은 그대로 친일문학의 논리로 해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전통의 발견을 통해 영원성의 구체화라는 과제에 답한 미당의 심리적 조건을 탐사해보는 일이다.
미당의 친일문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미요시 다쓰지이다. 미요시 다쓰지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일본의 초현실주의 계간지 ≪시와 시론≫(1928~1931)에서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했고, 모더니즘을 표방하면서 반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거점 역할을 한 ≪작품≫(1930~1940)지의 성원이기도 했다. 그는 또 ≪사계≫(1933)를 편집하면서 전통적인 서정정신을 옹호했고, 드디어 파시즘과 연관된 ≪일본낭만파≫(1935~1938)에 가담함으로써 ‘일본적인 것’을 주장한 인물이다. 1942년 7월에 개최된 <지적 협력 회의-근대의 초극>에서 그가 발제한 내용은 ‘서구 합리주의에 기초한 과학주의로서의 근대를 일본 고전에 담긴 이념으로 초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중국에 파견된 문인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런 시인의 시에 영향을 받은 미당의 내면은 무엇이었을까? 유럽 모더니즘에서 순정 예술파를 거쳐 일본정신과 파시즘의 세계로 나아가고, 전후에는 일본 서정성의 세계를 탐구한 미요시 다쓰지, 그리고 니체와 보들레르의 세계에서 동양정신을 거쳐 󰡔삼국유사󰡕와 신라 불교의 세계로 나아간 미당의 거리가 그리 크게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긍정될 수 있다면, 이른바 서정적 내면과 친일 파시즘의 거리 또한 그리 멀지 않다고 할 수 있다.

3.
이상으로 대표적 문인들을 중심으로 거칠게 살펴본 친일문학의 세 경향은, 일제말 전 시기를 정세적 국면에 따라 나눈 소 시기에 상응하는데, 그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문학을 수행하는 논리, ②1940년 코노에 내각의 신체제론 이후에 친일문학을 수행하는 논리, ③근대초극론의 영향을 받으며 태평양전쟁 이후의 대동아공영론을 따라 친일문학을 수행하는 논리로 나뉜다. 첫 번째의 논리는 주로 국민문학파 시인들에게서 나타나고, 두 번째의 논리는 프로문인 및 월북 문인들에게서 나타나며, 세 번째 논리는 순수 미학파의 문인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한국문학의 근대성이라는 주제로 연결시키는 일은 한국문학사의 균형 잡힌 복원을 위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인데, 왜냐하면, 친일문학은 국가를 상실한 피식민지의 지식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일본제국주의의 논리로 투사하고 실천하면서 근대적 국가를 미학적으로 상상한 결과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일제말 파시즘기 친일시의 계보를 나누고, 각각의 계보는 어떤 미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파시즘 및 억압적 지배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미적 이념의 관계에 대해 실증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저간에 진행된 ‘시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시적 창조 논리 외부에 있는 세계관적, 철학적 기준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시를 시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 외부의 기준에 시를 종속시킨 논리의 결과였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일제말 파시즘 시기의 친일문학을 외부의 강요에 의한 수동적 결과로 이해하도록 하는 경향을 만들어낸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의 우선적이고 진정한 원인은 문학 내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접근법은 일정한 한계를 내포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접근법은 당시의 친일문인들이 왜 절필하지 않고 계속 문학작품을 창조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문학의 논리로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에도 문학작품이 끊이지 않고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문학 내부의 논리로 대상 작품에 접근해야 하는데, 이는 친일시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본 연구자의 생각이다. 가령 김동환이 친일잡지 ≪대동아≫에 발표한 친일시 「군복 집는 각시네」를 시집 󰡔해당화󰡕에 재수록하면서 더 좋은 시(?)로 개작을 감행하는 경우를 보더라도 문학은 문학 내부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을 내재적 논리로 살펴본다는 것은 나아가 친일문학 전체를 친일문학의 내재적 논리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 내재적 논리를 계보화할 때 우리는 한국문학의 다양한 층위가 어떤 문학적 내재성으로 권력과 타협하고 어떤 문학적 내재성으로 왜곡된 권력에 저항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실례를 갖게 될 것이다.


박수연․
1962년 충남 논산 출생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문학들󰡕 ․원광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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