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6호 문화산책/최영희
페이지 정보

본문
‘역사’와 ‘일상’의 경계 짓기와 허물기
―이만희 작, 최용훈 연출의 <불 좀 꺼주세요>―
최영희
1. <불 좀 꺼주세요>, 2004년에 다시 공연되다.
얼마 전 문화특화지역으로 지정된 대학로에는, 수십 편의 연극 포스터가 매일 다양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떼었다 붙여지는 낯선 포스터들 속에, 그러나 늘 찾아볼 수 있는 한 장의 익숙한 포스터가 있다. ‘6년째’ 장기 공연을 하고 있는 <용띠 위에 개띠>(원작 <용띠 개띠>)이다. 이제 2,000회라는 공연 횟수를 넘어서고 있는 이 작품의 작가는,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이름의 이만희이다. 그는 이제 대중에게 어필되는 작가, 롱런(long-run)하는 작가로 자리매김된 듯하다.
이만희는 <문디>,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돼지와 오토바이>, <피고지고 피고지고>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특한 작품색으로 연극계에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게 일찌감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불 좀 꺼주세요>일 것이다.
<불 좀 꺼주세요>는 1992년 초연 당시 ‘장기흥행’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불황의 연극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연극을 잘 보러오지 않는다는 중년들의 줄 이은 발걸음은,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이끌어냈다. 본능적인 사랑과 행동력에 대한 작가의 긍정적인 시선, 솔직함을 강조하기 위한 독특한 분신기법이라는 것과, 여배우의 앞가슴 노출 등 볼거리를 강조한 공연이었다는 평가 등이 그것이다. 이후 이 작품은 1993년과 1996년의 재공연에서도 흥행하며 장기 공연되었다. 그리고 2004년, 다시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 소극장(2004년 7월 30일~9월 26일) 무대에 오른 것이다.
(주)동숭아트센터의 <연극열전 시리즈> 중 하나로 기획된 이번 작품의 연출은, 원년의 멤버 그대로 공연한다는 기획 취지와는 달리,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 최용훈에게 맡겨졌다. 배우들 역시 새롭게 구성되었다. 최용훈은 초기 극단 작은신화에서 공동 창작을 통한 일련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는 ‘극사실주의’로 대변되었던, <길 위의 가족>(장성희 작)과 <돐날>(김명화 작) 등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제, 여러 번의 흥행기록으로 친숙해진 작가 이만희와 실험성으로 요약되는 연출가 최용훈이 만나 다시 무대에 올린, 2004년 <불 좀 꺼주세요> 공연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자.
2. 진부한 소재, 식상한 기법
혼자 살고 있는 정숙의 아파트에 밤늦게 창영이 찾아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창영은 현직 국회의원으로 전날 의원직을 사퇴한 상태이다. 정숙은 미술 교사이며 무릎이 아파서 현재는 휴직 중이다. 두 사람은 과거에 시골 학교에서 만났으나, 창영이 말도 없이 떠나가는 탓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 창영은 자신을 쫓아다니던 부잣집 딸과 결혼하였고, 정숙은 창영을 만나러 그의 친구인 달호를 찾아갔다가 겁탈당한 후 달호와 결혼하였다. 여러 가지 화제를 가지고 대화하던 중, 창영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과 뇌성마비인 창영의 아들이 사실은 그의 동생이었음이 밝혀지고,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원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야기 전개의 여러 측면에서 진부함을 노출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정숙의 행복을 위해 말없이 떠나가는 창영, 창영을 찾아갔다가 그의 친구에게 강간당한 후 결혼한 정숙, 살인한 친구를 위해 대신 죄를 덮어쓰려는 병철, 살인까지 했고 아들까지 있는 폐병환자를 사랑해서 결혼까지 하게 되는 부잣집 딸, 친구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을 뜯어내는 달호 등 이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유형화된 인물들로서 그 유형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재웅이가 창영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최근 ‘출생의 비밀’을 다각도로 다룬 여러 TV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신선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소재가 되었다. 게다가 어쩌면 초연 당시에는 놀라운 기법이었을 수도 있는 ‘분신 모티프’ 역시 마찬가지다. ‘분신’을 통하여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얘기하게 한다는 발상은 새롭기는커녕,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위험마저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뻔한 이야기와 낡은 기법을 극복하고 있는 이 작품의 긍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3. 다양한 극적 구성 전략
<불 좀 꺼주세요>에서 가장 긍정적인 측면을 확보하고 있는 부분은 역시 언어적 측면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탁월한 언어 감각은 이미 다양한 글들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언어 형상화 능력이 분신기법과 맞물리면서 기법적 측면에서 오는 식상함에서 벗어나고 있다.
본신(本身)과 분신(分身)이 같은 상황을 두고 각기 다르게 뱉어내는 대사는, 인물이 가진 이중적인 속성, 즉 겉과 속의 양면성을 효율적으로 표출할 뿐만 아니라 언어유희까지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병철의 무덤을 찾아가겠다고 말하는 창영에게 분신처럼 “나도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지만 “혼자 가게요?”라고 묻는 장면이나, 재웅이 자살을 기도(企圖)했다는 말을 듣고 본신과 분신이 각각 “어떻게 됐어요?”, “죽었어?”라고 묻는 장면 등이다. 본신과 분신은 ‘제도’와 ‘본능’을 대변하기도 하면서, ‘에둘러 말하기’와 ‘직설적으로 말하기’라는 화법의 재미까지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언어는 인물들의 대사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언어 구현이 탁월했다는 것은 곧 인물의 형상화에도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사의 신축성은 극의 구성 전략과 맞물리면서 연극 감상의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 전형성과 진부함을 극복하고 있는 가장 긍정적인 요소는 바로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연출은 별다른 플롯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희곡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희곡은 현재가 주 장면으로 진행되면서 과거의 사건이 하나씩 삽입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현재는 순행 방식으로, 과거는 역행 방식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정숙이 상상하는 연상 장면이 사이사이에 추가되어, 극은 현재-과거-상상이라는 세 차원을 오가며 펼쳐진다. 과거의 장면이 하나씩 보여질수록 두 인물의 관계와 상황이 베일 벗겨지듯 조금씩 이해되고, 두 사람의 부유(浮游)하는 현재의 대사도 의미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 배치 방식이 비록 새로운 방식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잘게 나누어진 삽화적 구성으로 자칫 극이 지루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차단하고 있으며, 아울러 극적인 재미도 한층 배가시켜 주고 있다. 전반부에 달호가 창영에게 떳떳하게 돈을 요구했던 이유가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고, 왜 정숙이 달호와 같은 남자와 결혼했는지, 첫 장면에서 창영의 아내가 왜 그토록 그에게 표독스럽게 대들었는지 등등이 드러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극 중반 부분에는 어머니가 나타나 창영에게 “재웅이를 내삐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자기 자식을 내버리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생뚱맞게 생각된다. 그러나 후반에 가서 그 아이가 어머니의 아이였음이 밝혀지면서 그 대사의 의미도 비로소 가치를 획득한다. 그래서 ‘동생’을 ‘아들’로 데리고 살아야 하는 창영의 운명이 더욱 버겁게 느껴지고, 창영이 재웅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개연성도 마련되면서 부성애를 운운할 수 있는 차원도 넘어선다. 희곡의 이러한 극적 전략은 말 그대로 흔한 이야기를 새롭게 보여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작가가 이와 같은 방식을 채택한 궁극적인 까닭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추적하기 위해서이다. 이 작품은 국회의원인 한 남자가 갑자기 사표를 낸 이유를 밝혀가는 일종의 추리극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표 제출의 이유 이면에는, 대화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기까지의 심리의 추이가 숨어 있는 것이다.
‘현재’로 전개되는 주 장면에서 창영과 정숙은, 말과 용기에 관한 대화에서 시작하여 달호와 병철에 대한 얘기를 거쳐 인간의 다양한 측면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화들은 그저 서먹서먹한, 그야말로 ‘뭔가 초점이 맞지 않아서 자꾸 미끄러지는’ 얘기에 불과하다. 두 사람이 이처럼 겉도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제도’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제도’라는 틀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겉모습은 본신으로, 전해지지 않는 속마음은 분신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므로 서로의 본심을 알기 전까지, 두 사람은 어긋나는 대화를 반복하면서 매우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창영은 정숙에게 ‘사명감-동정심-달호와의 의리-미안함’ 등을 느끼고, 정숙은 창영을 통해 ‘애정-질투-거리감-미안함’ 등을 느낀다.
서로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던 과거 시골학교에서의 추억을 동시에 떠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이를 기점으로 정숙은 창영과의 결혼생활을 꿈꾸며 지었던 시를 읊조리고, 창영은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를 조금씩 털어놓게 된다. 자식들에게 희생적이었으나 업보를 물려주고 갈 수밖에 없었던 박복한 어머니와 충동적으로 살인을 하던 순간, 그리고 불구 아들이 자살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과, 그 아들이 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창영이 고백하고 정숙이 이를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본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창영과 정숙 사이에 가로놓인 ‘제도’라는 장애물을 놓고, 그 벽을 허물고 진실을 찾아가는 분신들의 사투, 즉 작가가 창영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본능의 ‘자정작용’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본능’은 곧 ‘진실’과 상통한다는 얘기가 된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갈등 양상은, ‘제도’와 ‘본능’이라는 저울 사이에서 그 무게를 달리하며 전개되고 있다. 특히 극의 시작과 끝을 여며주는 3원 구조의 기능은 ‘제도’와 ‘본능’의 두 측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하겠다.
창영이 정숙을 찾아온 현재의 장면과 동시에 두 개의 과거 장면이 재현된다. 정숙이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 선생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는 장면과, 창영의 아내가 창영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다. 과거인 두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현재 장면은 멈추어진다. 연극을 보면서 관객은 홍 선생이 진심으로 정숙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혼자 사는 여자이기에 한번 추근거려 보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창영의 아내가 화를 내는 까닭은 창영이 늘 뭔가를 감추려 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녀는 ‘순수한’ 재웅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작 부분에서 전개되는 3원 구조는 이들이 덧쓰고 있는 제도적인 모습, 즉 겉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때문에 창영이 정숙의 육체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정숙을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놓아주고 싶은 사명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극 후반부에서 이러한 3원 구조는 다시 한번 재현되는데, 이때는 현재의 정숙이 낭송하는 시 구절 사이사이로 과거의 두 상황이 서로 교차되면서 보여진다. 정숙이 달호에게 강간을 당한 직후 창영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장면과, 가진 것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창영에게 제도적으로라도 좋으니 결혼해달라고 아내가 매달리는 장면이다. 즉 정숙과 창영이 각자의 제도 속으로 편입되던 최초의 순간을 거슬러 가서 보여주고, 두 사람의 내면을 이때의 순간으로 되돌린 후 모든 허울을 털어내고 속마음을 얘기하게 해주는 극적 장치인 것이다. 이전까지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이 같은 속도감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이 장면에 와서는 정숙이 시 구절을 낭송하는 속도는 매우 느리게, 과거의 두 장면은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특히 여기서 보여주는 과거는 이야기의 가장 초반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대과거)이면서 모든 사건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원인이다. 또한 많은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는 서사적 측면에서도 이 장면은 무게감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강창영과 박정숙이 진심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클라이맥스로의 진입 순간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극 종반 부분에서의 분신끼리의 대화와 포옹(그들은 극 중 내내 대화를 할 수 없었다)은 그들의 진심이 비로소 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3원 구조는 무대화 작업에도 반영된다. 연출은 언어와 극적 구성뿐만 아니라 무대 메커니즘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작가의 연극적 상상력에 크게 의존한 듯 보인다.
무대는 크게 삼등분으로 나뉘어 활용되는데, 중앙무대는 약간 뒤쪽에 놓여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 무대는 약간 앞쪽에 놓여 있다. 왼쪽에는 소파와 낮은 테이블을 놓아 아파트의 일반적인 거실 분위기를 내고, 오른쪽에는 더블침대를 설치하였다. 중앙 무대에는 높은 테이블과 길쭉한 의자가 놓여 있다. 소파가 놓인 왼쪽 무대는 정숙 아파트의 거실과 창영의 집으로 사용된다. 오른쪽 침대가 놓인 공간은 정숙 아파트의 침실로, 정숙이 달호에게 겁탈을 당하던 장소로, 달호가 창녀와 함께 등장하는 미국의 한 모텔로, 그리고 정숙이 창영에게 꽃을 전해주던 과거 시골학교의 창영의 집이 된다. 중앙무대는 정숙 아파트의 부엌으로 사용되면서 여비서를 훔쳐보던 창영의 사무실과 정숙이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실로, 홍 선생을 만나던 카페로도 활용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면, 연출은 세 개의 공간 이외에도 남은 빈 공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왼쪽 무대 뒤로는 투명한 유리문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창영의 의식 속의 공간을 상징한다. 유리문 뒤로는 창영의 어머니와 재웅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유리문을 통해서만 보여질 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창영에게 ‘짐’을 지워준 인물들이다. 즉 창영이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 속의 인물이자, 창영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현재 속의 인물인 것이다. 유리로 된 문은 있기는 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문이다. 연출은 유리문 뒤쪽으로 두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창영이 가리고 싶어 하지만, 결코 가려질 수 없는 과거를 형상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앙 무대 양쪽 뒤로는 보이지 않는 복도가 각각 상정되어 있다. 왼쪽은 아파트의 현관으로 창영과 이웃집의 떡집 남자가 등퇴장하는 곳이다. 오른쪽은 아파트의 다른 방과 연결시켜주는 공간으로써 정숙은 이 곳을 통해 지리부도를 찾으러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소주를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이 두 공간은 다 보이지 않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밖으로 확장되는 또 다른 공간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실내 공간이라는 폐쇄성이 줄 수 있는 답답함을 차단한다.
또한 텅 비어 있는 중앙 무대 앞쪽은 실외 공간으로 상징된다. 창영이 살인한 직후 달호와 병철, 세 사람이 도피하여 알리바이를 모의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하며 시체를 묻은 야산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양쪽 복도의 입구, 즉 왼쪽 무대와 중앙 무대, 중앙 무대와 오른쪽 무대 사이 공간은 각각 떡집 남자의 아파트와 아내가 창영에게 구애를 하던 공간으로 설정된다.
연출은 좁은 소극장 무대를 세분화하여 사용하면서도, 분신들에게 여러 통로를 통해서 등퇴장할 수 있는 다양한 동선을 줌으로써 자칫 파편화된 느낌을 줄 수 있는 우려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세련된 무대 장치도 한 몫을 했다고 보인다. 약간 어두운 톤의 색감, 원과 사각형의 조형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무대는 아늑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를 창출하면서 극 전체 분위기에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때문에 별다른 무대변환과 장치 없이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출이 가능하였다.
4. ‘분신’의 형상화와 인물의 성격 구축
앞부분에서 밝혔듯이 2004년에 공연된 <불 좀 꺼주세요>는 연출을 비롯한 스텝과 배우 모두 새로운 멤버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 작가가 특정 연출가와 배우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특성에 맞추어 극작을 하였다는 점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새롭게 구성된 연출과 배우들은 <불 좀 꺼주세요>를 어떻게 보여주었을까?
역시 앞서 지적된 작가의 입체적인 언어 감각은, 일단 연극 전체를 끌고 가는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 또한 이번 공연의 성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한 인물의 본신과 분신이 등장하는 연극이므로, 각각의 차별성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런 측면에서 본신 역의 조원희와 고수민, 분신 역의 김은석과 박유밀이 보여준 개성적인 연기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분신 역을 맡은 배우들은 한 인물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야 하면서 많은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과거 속 본신들도 연기해야 하는 부담감을 함께 안고 가야 한다.
고수민이 보여준 정숙은 순진한 듯한 숙맥처럼 보였고, 박유밀이 보여준 여자 분신은 희곡의 대사와 똑같이 정말로 ‘섹시하고 발랄하고 싱싱’했다. 고수민은 차분한 톤과 연기로 ‘시간이 가는 대로 그저 내버려 두는 듯’하면서도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정숙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였다. 박유밀은 목소리도 좋았고, 대사 전달에 있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호흡을 놓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강창영을 연기한 조원희는, 말 그대로 원숙한 연기를 보여주면서 극 전체의 구심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창영의 분신 역을 맡은 김은석 역시 창영의 복잡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보여준 연기는, 내면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쪽보다는 고뇌에 차 있는 인물을 표출하는 쪽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주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언뜻 보기에 두 분신은 각각의 인물, 즉 창영과 정숙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측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창영의 분신과 정숙의 분신은 각기 다른 차원으로 그려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연극에서 정숙은 파스텔 톤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은 보통의 평범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반면 여자 분신은 속옷을 연상하게 하는 짧은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다. 연출이 설정한 의상의 차이는 두 사람의 연기가 더욱 생동감 있게 나타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정숙의 본신과 분신의 생동감은 처음부터 작가가 설정한 성격의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연극이라고 해서 한 인물이 반드시 한 성격만을 부각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정숙의 본신과 분신이 각기 다른 성격을 소유하고 있음을 표현함으로써, 입체적인 인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신과 분신의 개성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정숙과 여자 분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창영과 그 분신의 형상화가 뒤떨어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것은 한 인물이 지닌 성격의 상이함을 표현한 정숙과는 달리, 창영은 말 그대로 겉과 속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남자가 가지고 있을 만한 속내와 본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용훈도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따라가서 두 분신의 간극을 더욱 벌여놓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바로 이 점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신의 형상화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은 고스란히 본신의 구현에도 반영된다. 공연 팸플릿을 보면,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동등한 시각과 입장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남자’에 관한 극이다. 이것은 성(性)이 다른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당연한 지적이겠지만, 창영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자연히 창영의 시각에서 보여진다. 출세를 위해서 국회의원인 창영에게 육체를 허락하는 여기자와 정숙의 구부린 육체를 통해 떠올려지는 비서는 보통 남자의 시각에서 그려질 만한 일반적인 모습들이다.
그러나 정숙을 축으로 하여 주변에 놓이는 남성 인물들, 즉 떡집 남자와 교장 선생, 홍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은 정숙에게서 출발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모두 혼자 사는 여자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남자의 시선을 대변한다. 창영이 주체적 입장에서 여기자와 비서를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정숙은 세 남자의 시선을 통해 대상화된다. 그러므로 여기자와 비서는 평면적으로 그려지지만, 떡집 남자와 교장 선생, 그리고 홍 선생은 따로 분신이 등장하지 않아도 인간이 가진 양면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관객들은, 세 남자가 자신의 내면을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여성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매일 걸려온 것으로 짐작되는 ‘장난전화’ 역시 객체화된 정숙을 보여주는 데 일조한다. 장난전화는 일상의 한 면모를 반영하기도 하면서 여성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각을 대변하기도 한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전화’라는 사실과 ‘장난’인 그 행위에 정숙이 진지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대상화된 여성이라는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정숙은 주변의 남성 인물들과 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남성들이 요구하는 일련의 행동에 그저 반응할 뿐이다. 결혼한 지 칠 개월 만에 출산을 했다고 권고사직을 당하는 김 선생의 사표를 철회하고자 정숙의 분신은 대담하게 교장 선생을 유혹하지만, 그것은 정숙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현실 속의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작가도 연출가도 남성이라는 사실에 근원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정숙이 지닌 성격에도 일관성의 문제가 지적된다. 과거에 정숙은 창영의 집으로 찾아가서 꽃을 선물하고, 그것이 자기의 마음이라고 말할 만큼, 그리고 창영이 말없이 떠났을 때도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그를 찾아다닐 만큼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교사회에서 회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는 어떤 모습인가? 그녀는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과 이혼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남편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다. 또한 창영의 물질적인 도움도 순순히 받고 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놓아버린 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방치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가 이렇게 변한 까닭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점을 결혼이라는 제도에 예속된 여성의 보편적인 삶이라고 설정한 듯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현재에서 상이하게 드러나는 성격의 격차를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창영이 한 ‘남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다양한 채널이 열려 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고민과 갈등을 표출하는데 근접했다면, 정숙의 시선은 오직 창영에게만 향해 있으며, 상대 남성들이 보내오는 사인에 반응하기에 급급한 차원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온전한 남자와 여자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 ‘남자’와 ‘그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있는 작품이다. 분신 기법은 내면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효율적인 한 방법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화된 시각과 입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2004년의 <불 좀 꺼주세요> 공연에 더욱 재미를 더해주는 배역은 역시 ‘남녀 다역’일 것이다. 다역을 맡은 남녀 두 배우, 서현철과 백은경의 연기는 다양한 역할로 전환되어야 하는 신축성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연기로 극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특히 서현철의 연기가 두드러졌다. 물론 뇌성마비인 제웅을 제외하고 그가 맡은 역의 대부분은 희극적이지만 무리 없이 다역의 연기를 잘 소화해냈다. 이에 비해, 심각하고 복잡한 감정을 가진 창영의 아내, 자신의 업보를 자식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하는 가난하고 한 많은 어머니, 출세하고 싶어 몸까지 허락하며 유혹하는 여기자, 사무적인 비서, 그리고 미국인 매춘부까지, 백은경이 맡은 역할은 하나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다양한 역할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녀도 꽤 연기를 잘한 셈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물과 밀착되지 못하고 약간 떠있다는 느낌을 준다.
5. 역사와 일상, 그리고 그 너머.
작가는 일상이 사건이 되면 역사가 된다고 했다. 이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상과 역사는 양분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은, 일상과 역사의 구분에 머무는 대신 그것들을 구획 지어주는 ‘사건’에 고정된다. 정숙을 찾아온 떡집 남자는 말한다. 떡집에 찾아와 한 시간 동안 사적인 통화를 하는 경찰관 때문에 치미는 화를 참아낸 자신을 두고, 당당하게 “사내들은 큰 일은 다 참는다.”고 말이다. 창영의 분신도 말한다.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꼬랑내와 입냄새와 코 고는 것과 할딱할딱 숨쉬는 것과 밥 씹는’ 모습인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소한 일들이 얼마든지 ‘사건화’될 소지를 안고 있으며, 그러므로 ‘일상’의 점철이 곧 역사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와 일상이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묘함’을 지니고 있듯이, 역사와 일상을 만들어내는 인간 역시 ‘묘하기만’ 하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 그토록 희생적이었던 창영의 어머니가 사생아를 출산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바람을 피울 수 있고, 절도범이면서도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독실한 신자일 수 있”고, “이 여자를 열심히 사랑하다가 저 여자를 열심히 사랑할 수 있고 둘을 똑같이 열심히 사랑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극 중 내내 작가는 인간의 이중성을 낱낱이 파헤친 뒤, 그 허위를 깨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비록 인간이란, ‘제도’라는 껍질 속에 본능을 감추고 살아가긴 하지만, 그 본능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하고 있다. 본능이 도달하는 그곳이 그저 진실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도, 모성성과 바람기를 동시에 발산할 수도, 범죄자이면서 독실한 종교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불 좀 꺼주세요>는 ‘흥행기록’이라는 ‘사건’으로 이미 ‘한국연극사’에 기록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매일매일 공연되었다가 사그라지는, 그래서 기록되지 않는 수십 편의 연극이 있기에 우리의 연극이 발전하고 있음을, 이들의 노력이 누적되어 <불 좀 꺼주세요>와 같은 공연도 관람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2004년에 공연된 또 한 번의 <불 좀 꺼주세요> 공연 역시 기존 공연의 역사에 그 무게를 실었을 것이다.
최영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 이전글16호 문화산책/차우진 08.02.23
- 다음글16호 문화산책/김서영 08.02.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