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오양진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인간 혐오증에 걸린 소설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
(≪문학사상≫ 2004년 10월)
오양진(문학평론가)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는 우리 시대 사회문화적 병리학의 한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을 멸시하는 것’, 이것은 바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라이트모티프가 되어 있다.
일단 이 소설은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한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서도 요약되고 있는 것이지만,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 이야기는 서기 2천년대의 지구 메가로폴리스라는, 항성 간을 운행할 수 있는 은하철도의 출발점이자 기계의 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부유층만이 향유하는 어느 최첨단 기계화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풍요로운 기계화 도시에서 돈을 벌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그 메가로폴리스 주변으로 몰려들고, 자연스럽게 메가로폴리스 주변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슬럼 지역 또한 형성된다. 철이 또한 영원한 삶을 동경하여 엄마와 함께 메가로폴리스에 이르렀지만 기계 백작의 인간 사냥 때문에 그만 엄마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홀로 된 철이는 영원한 삶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대가 없이 준다는 안드로메다라는 별로 가기 위해 ‘은하철도 999호’의 승차권을 훔치게 된다. 경찰에 쫓기던 철이는 우연히 엄마를 닮은 신비한 여인 메텔을 만나 가까스로 ‘은하철도 999호’에 탑승하게 되고, 그녀와 더불어 마침내 안드로메다라는 별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게 된다.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에도 역시 엄마 없이 판자촌에 사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있다. 주인공 ‘나’는 입사 면접에서 40번을 미끄러져 이제 사회가 날 원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만큼 현실에 대한 환멸이 깊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갖고 있고 또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가파른 골목길을 기어 올라가 아침까지 멀쩡하던 자기 집이 갑자기 한 무더기의 건축 폐기물로 변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된다. 이미 예정된 것이었지만,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집마저 철거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모집에 널부러져 발바닥 각질이나 긁고 있던 아버지를 뒤로하고 ‘나’는 여자 친구 은주를 만나러 강남역으로 간다. 그러나 은주와 연락이 잘 되지 않던 ‘나’는 강남역 앞 “전통의 뉴욕제과 귀퉁이”에서 “신형 우주정거장 체류 희망자 모집”을 알리는 벽보를 보게 된다. 미 항공우주국 NASA에서 “다가올 우주 시대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년간 다른 동물들과 더불어 우주 정거장 생활을 할 사람을 지원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광고를 운명처럼 느낀 ‘나’는 이젠 은주가 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우주로 갈 결심을 한다. 그리고 강남역에서 느닷없이 벌어진 “백주의 식칼 테러”를 목격하게 된 ‘나’는 “인간이 과연 지구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도 한다. 마침내 ‘나’는 우주정거장 체류 희망자들을 면접하게 될 장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다가 스르르 잠에 빠진다. “꿈속에서 메텔과 만나기를 염원하면서.”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는 인간을 마치 외계 생명체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의 눈에 비친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같이 무언가 낯설고 이질적이며, 의심스러운 외계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갖는 어떤 냉정한 무관심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집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도 “집이 없어진다는 건, 경험해 본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분명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의 시선이 갖는 그러한 성격은 특히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냉정한 무관심의 시선에 포획되고 나포된 인간들은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빈민촌 철거를 담당한 폐허 속 ‘네 명의 인부들’, 강남역 부근에서 목도한 하품하는 정복 경찰관 두 명,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을 외치며 붉은 십자가를 들고 가던 ‘40대 남자’, “백주의 식칼 테러”를 벌인 ‘여드름투성이 씨름선수’와 ‘키 작은 고등학생’ 등을 비롯해서 휴거와 종말론에 심취해 집을 나간 고모의 남편 ‘커트 암스트롱’이라는 미군 중사, 남편을 돌아오게 해달라고 맥아더 신을 받았다는 무당에게 굿을 청한 이태원의 재즈 가수 ‘고모’, 모의고사 때문에 밤을 새야 한다고 말하며 실업자인 ‘나’에게 좀 진지해지라고 핀잔을 던지는 ‘은주’ 등은 그러한 낯설고 의심스럽고 새로운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모든 인간들은 ‘나’의 무능한 아버지의 형상으로 집약된다. 고모 집에 퍼질러 누워 집을 잃어버리고 갈 곳을 잃은 아들에게 발바닥의 각질이나 긁어대며 “고모한테 잘 말해 보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아버지. 이 소설에서 그는 야비하고 둔감하며, 어리석고 유치하며, 희귀하고 무기력한 어떤 외계의 것으로 드러난 형편없는 인간 족속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가 하면 영화 ‘프리윌리’의 주인공 범고래 ‘케이코’의 사망에 관한 기사를 보고서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내’가 인간에게 잡혀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웠다는 그 범고래를 “저능 고래”라 생각하고 “인간 따위와 교감하다니. 멀쩡한 고래들은 외계와 교신하고 있는데.”라고 읊조리는 대목에서 그 점은 더욱 뚜렷하게 예시된다. 이것은 “외계인들은 지구의 지배자를 돌고래를 비롯한 해양 포유류로 알고 있다.”고 적고 있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한 책의 인용문과 서로 조응하며 결국 인간을 해양 포유류만도 못한 ‘저능’한 존재로 규정짓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간의 반대편에 사실상의 외계인 우주는 품위 있고 고상하며, 영리하고 우아하며, 위엄과 숭고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온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영화 속 신비의 여인 ‘메텔’은 그러한 우주적 위엄과 숭고함을 대변하는 어떤 상징으로 나온다. 이렇게 보면,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라는 작품은 ‘메텔’과 견주어진 ‘아버지’ 류의 인간들을 전시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설에는 그것이 본래 저자의 장르라는 점에서 “인간 따위”가 등장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지만, 「은하철도 999」에 나타난 인간 혐오에는 ‘인간 따위’를 넘어선 어떤 신뢰할 만한 인간상을 연상할 수 없는 것이어서 무책임하고 그래서 또 위험하다. 무책임한 인간 혐오가 ‘메텔’(메텔 또한 기계 인간의 신원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에게서조차 알리바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영리한 작가가 인간 혐오증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그렇게 허술하게 노출하고 만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사실 문제적인 것이다.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는 어쨌든 인간이 왜 “인간 따위”가 되었는지 알기를 원하는 것 같지 않다. 그저 ‘인간 따위’가 혐오스러울 뿐인 것 같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없고 인간에 대한 혐오만이 두드러져 있다는 점에서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는 분명 인간 혐오증에 걸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양진․
1969년 인천 출생
․2000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현재 서울산업대 강사
- 이전글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임준서 08.02.23
- 다음글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임영봉 08.02.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