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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정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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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서사의 빈곤과 문학의 윤리
―이응준의 「어둠에 갇혀 너를 생각하기」
(≪문학동네≫ 2004년 가을)
정문순(문학평론가)
소설에서 ‘서사의 위기’가 언급되기 시작한지도 10년을 넘는다. 위기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서사 얼개의 탄탄함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소설의 기본 문법을 거스른다는 인식을 가진 쪽의 표현이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소설에 딱히 언급할 만한 줄거리가 없거나 앞뒤 연결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배척할 일은 아니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맞은편의 위기가 이들에겐 새로운 모색이었다. 새로움은 유행처럼 일어났다. 유행에 민감한 신진 작가들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했다. 그러나 유행이란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이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출판사나 작가로서는 남들 다 할 만큼 한 것에 자꾸 손을 대면 돈이 되지 않는다. 그것처럼 90년대 이후 소설 형식의 변화는 어떤 내적 필연성(‘필연성’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근대서사적인 이름인가)에 의해 이끌린 것이 아니었다. 서사적 필연성은 지키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서사를 부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바람은 바깥에서 밀어닥쳤다. 세계사적 격변이라는 예상치 못한 환경이 소설이 ‘잘 빚은 항아리’ 같은 완미한 구조에 매달리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안일한 것으로 치부되는 한, 소설가들이 현실을 깨어진 항아리로 받아들이는 건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유행이 더 이상 큰돈이 되지 않고 세계 체제도 안정화의 길에 접어든 듯하자 전통서사에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 바람은 역사소설에서 뚜렷하게 불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만족할 만큼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서사의 필연성이 어떤 것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역사를 소재로 수용하긴 했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역사적 합법칙성 같은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작가의 과도한 주관이 흘러넘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거대 서사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그것과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작가들의 고집에서 어느 쪽에도 둥지를 틀기 난감한 이들의 갈등과 고민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최근 김훈, 성석제, 김영하 등의 역사소설이 안고 있는 고민에 비하자면 이응준의 단편 「어둠에 갇혀 너를 생각하기」는 작가가 서사의 전통을 존중하기로 분명히 마음을 굳힌 경우에 속한다.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설정된 듯 삶에 냉소적이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은 사진작가인 ‘나’에게서 드러나는 건, 문자가 위축된 시대에 소설가로서 자의식을 가다듬고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 작가의 모습이다. 소설가로서 서사라는 전통을 무조건 배격할 수 없다는 난감함, 또는 영상문화가 승한 시대에 문학이 자리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다.
소설에서 ‘나’는 스스로도 인정하길 “비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이고 미와 감각에 치우친”(322쪽) 사람이다. 과거를 이해하거나 지나간 일을 입에 담는 건 ‘나’한테는 금기일 뿐이다. 물론 이 말은 현실에 직접 렌즈를 갖다대는, 순간을 포착하여 후세에 남기는 사진작가로서 할 말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대놓고 희화화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비역사적’이니 무엇에 ‘치우쳐’ 있다느니 하는 진술부터가 부정적인 의미를 깔고 있는 것이다.
술집을 운영할 때 ‘트로츠키’라는, 혁명을 고작 낭만으로 치부해버린 시대에 의해 소비된 인물을 간판으로 내걸었던 사람답게 ‘나’는 현실과 역사를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런 ‘나’한테도 나보다 ‘한 수 위’인 낭만주의자면서 히스테리 환자인 전처는 냉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전처더러 “욕망을 멋부리며 배설”할 뿐이라고 한 지적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들어맞을 것이다. 혼인 관계가 끝난 전처를 기억한다는 것부터 우스꽝스럽게도 옛일은 입에 담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와 어긋난다. 이렇듯 ‘나’의 좌충우돌 모순은 오래 지탱하기 힘든 것이다.
물론 ‘나’의 태도는 무조건 배격되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역사를 입맛에 맞게 재구성하거나 가공하는 자들의 존재는 현실에 비웃음을 날리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정당화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무언가에 홀리다시피 이끌려 들르게 된 한산섬의 충무공 유적들은 독재자 “박정희가 순전히 지 콤플렉스 땜에 골치 아파 지어놓은 것들”(321쪽)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를 ‘말라비틀어진’ 허구로 본다면 엉성한 염세주의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속에 침잠하고 있다는 믿는 어둠조차 현실의 손길을 벗어난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밤이 어떤 색깔이게요?” (……) “그야, 까맣지.” (……) “땡.”/“아냐?”/“괴색(壞色)이죠.”/“괴색?”/“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을 뒤섞으면 괴색을 띠어요. 스님들이 입는 가사가 그 색이죠.”/“에이, 어찌됐건 어둠이 그냥 캄캄한 거지.”/“그건 뭔가가 덜 들어간 어둠이고 부실한 어둠.” (326~327쪽)
전처를 기다리고 있는 자리에 불쑥 나타난 현재의 여자 해경과 나눈 대화는 현실과 문을 닫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고 믿는 ‘나’의 허위의식을 말해준다. 밤은, 어둠은, 그 자체의 빛깔로 존재하지 않고 ‘청황적백흑’이라는 현실의 갖가지 색이 혼합된 것이다. ‘내’가 아무리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몽상 속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나의 현실 도피 행각은 사실 며칠 동안 시달린 악몽이었으며, 그 악몽의 진원지는 자신이 암 선고를 받았고, 비슷한 시기에 전처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있음이 밝혀진다. 이처럼 나의 허위의식은 극히 현실적인 기반 위에 있다. “노래는 진짜고 이야기는 가짜야.”(321쪽)를 입에 달고 산 것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인생에 관한 한 소설가인지라 늘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전개 과정을 구상한다.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한 암초와 맞닥뜨린 ‘나’는 그것을 수용해낼 엄두가 나지 않아 이야기(story)를, 역사(hi-story)를 거부해버린 것이다. ‘나’는 불합리하게만 보이는 현실을 배겨낼 수 없어 도피한 “매맞은 개”(334쪽)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를 소설가 이응준이 작가로서 감당하기 힘든 서사적 현실이라도 외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좀더 밑바닥까지 솔직해지자. 서사의 빈곤을 말할 때 흔히 90년대 이후 시대 상황이 단골로 호명되지만, 정작 빈곤한 것은 풍부한 서사를 가능하게 할 현실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촘촘히 짜내는 작가들의 자질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작가의 서사 능력이 의심받을 만한 소설은 무수히 쏟아졌다. 이 소설 역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구성면에서 엉성하고 구멍이 많다. 인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알고 보니 정신 착란이었다는 것이나, 여자들이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거나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 등도 모두 익숙한 소설의 관습에 속한다. 이응준은, 소설의 위기가 소설가로서 서사의 밀도를 구축하는 재능의 결핍에 있음을 자신의 텍스트로 보여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텍스트의 주인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작가적 자질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이 실린 계간지에는 ‘문학을 사유하는 윤리’라는 이름의 특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윤리라고 하여 긴장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서영채의 글(「사이렌의 침묵:문학적 사유와 역설의 힘」, 374~396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문학 행위는 그 자체로 윤리적이라는 결론이 전부일 뿐인데, 그러한 자기 폐쇄적인 문학주의적 논리로는 이응준 소설과 같은 부류에서 윤리성을 짚어내기란 기대하기 힘들다. 문학의 윤리는 문학가의 윤리와 무관한 것인가.
정문순․
1969년생
․인터넷신문 ‘대자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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