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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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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시】
시적 현실로서의 ‘일상’의 의미
―장성혜의 「물구나무서 있는 두 개의 풍경」
(≪리토피아≫ 2004년 가을)
백인덕(시인)
화장실 거울 앞에
밀크로션 병이 거꾸로 서 있다
훤히 바닥이 보이는데도
아직은 끝내고 싶지 않다며
짧은 목으로 버티고 있다.
거울에 거꾸로 비쳐지는
낯익은 싸구려 상표가
문신처럼 깊고 징그럽다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가
세수하는 동안
한 번만 더 써달라고
머리를 처박고 전신으로
진한 눈물을 짜내고 있다
막막한 입을 열고
손바닥에 내리치면
목구멍까지 올라와 고여 있던
외마디 희망이 흘러나온다
마지막 한 방울이 남기 전
저 위태로운 병은
바닥에 눕지 않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목이 덜렁덜렁한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있다
발이 허공을 향하고 있다
―장성혜 「물구나무서 있는 두 개의 풍경」
현대의 특성이 덧없음, 순간, 우연에 있다고 말한 건 보들레르이다.(라고 쓴 건 이승훈이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화를 인식하며 우연에 의해 빚어지는 사건들을 경이로움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시인들을 통해 만나게 되는 ‘시적 현실’이 그런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시적 현실은 시안에 놓여진 사물들과 시적 언술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시적 현실은 시안에서 시적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 맺기 방식에서 드러난다. 이때 시적 현실이라는 명제는 소재주의적 명제가 아니라 방법론적 명제가 된다. 그러기에 시적 현실은 시인에 의해 창조된다. 시적 현실은 누구에게서나 다르게 정의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시적 현실은 존재의 의의가 있다. 시적 현실 속에 내재한 규칙은 본질은 아니지만 실존한다. 아울러 시적 현실은 현실이라고 명명되고 규정된 하나의 구조물이며, 시의 존재태이다. 시적 현실은 또한 한 시인에 의해서 창조되는 다양한 의미 구조일 수도 있고, 다수의 시인들에 의해 창조된 유사한 의미 구조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시적 현실은 그 시대가 창조한 일종의 신화이기도 하고, 그 시대 시인들이 살아낸 시적 삶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문학사란 다름 아닌 이러한 시적 현실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추구했던 낭만주의나, 계급적 현실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천착한 리얼리즘 그리고 현대사회의 지리멸렬함을 파편화 된 세계를 통해 보여준 모더니즘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공통분모는 그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문학이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점, 인간이 처한 상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궁극적으로 언어의 재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 등 문학에 대해 합의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문학이 현실과 실재를 떠나 존재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적 현실이 다수의 시인들에 의해 창조된 유사한 의미 구조일 수도 있다는 점은 우리가 시를 이른바 ‘시대정신’과 관련하여 언급하게 되는 이유를 밝혀준다. 시인 각자는 개별적인 작품을 통하여 그 순간의 시적 현실을 창조하게 되지만, 그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가령 김수영의 잘 알려진 시, 「풀」을 생각해 보자.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작품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풀’과 ‘바람’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를 소재로 하여 시인은 보 잘 것 없는 듯이 보이는 생명과 그것을 억누르는 강한 힘과의 싸움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의미는 들판의 수많은 풀처럼 이 땅에 무수히 있어왔던 민중들에게로 상징적으로 연결되면, 민중들이야말로 끊임없는 시련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강한 생명력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역사적 비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시적 현실이란 개인으로부터 시대로 움직여나가는 것이다.
장성혜의 이번 작품은 크게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바닥이 훤히 보이는’ ‘밀크로션 병’과 ‘목이 덜렁덜렁한 남자’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시대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작게는 ‘밀크로션 병’은 다 쓰고 나면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유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이제 여생을 보다 자유롭고 편하게 보내라는 사회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물구나무서’서라도 ‘폐기’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통해서 이 작품은 일상의 위협과 폭력을 비유적으로 그려낸다. 내면 풍경의 비사실적 진술들이 너무 횡행하는 시대에 이렇게 잔잔하면서도 끔직한 작품을 만나는 것도 오히려 신선한 충격이어서 좋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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