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엄경희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계절작품읽기【시】
우리를 푸르게 일으켜 세우는 힘
―이안의 「아버지의 손바닥」
(≪리토피아≫ 2004년 가을)
엄경희(문학평론가)
손바닥으로 아들놈 등 쓸어주는데
손톱을 세우란다
손바닥이 얼마나 시원한데
손톱은 금세 더 가려워진단다
해도 대구 보채쌓는다
마지못해 손톱을 세워 살살 긁으면
나 어릴 적 썩썩 등 쓸어주시던
아버지 손바닥 생각
한가득 보풀이 일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밭고랑 억센 바랭이들 순하게 눕고
벼논의 모들은 귀 총총 세우고
푸르게 일어섰지
아버지 손바닥 따라
나는 참 순순히 잠이 들었다
손톱을 세워 아들놈 등 긁어주며
자랄 새 없이 닳아져서
당최 내세울 바 없던
아버지 무딘 손톱과
잠결에서도 내 등 마당에
댑싸리빗자루처럼 쓸리던
손바닥 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손바닥」
이 시대의 시의 미학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 보편미가 아니라 개성미라 할 수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개성미가 현대미학의 중요한 가치로 정립된 것은 비단 ‘개체’ 혹은 ‘자아’의 발견 때문만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진단대로 새로 형성된 모든 관계가 그것이 고정되기도 전에 이미 낡아버리는 운명 속에 놓이는 것이 이 시대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생산과 소비 시스템이 장악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구조와 연관된다. 끊임없는 상품 교체와 그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쾌락 추구적 소비심리는 새로움에 대한 충동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것, 정확히 말해 기이한 것, 인공적인 것, 나아가서는 역겨운 것에 대한 흥미와 추종이 생활 세계만이 아니라 예술 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가속화되는 현대의 패러다임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권태에 빠지는 현상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인지도 모른다, 새로움에 대한 압박이 젊은 시인들에게 일종의 강박증으로 나타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90년대 이후의 시들에서 잔혹함과 기이함, 그로테스크함, 혐오감 등을 일으키는 감각적 이미지가 무차별하게 난사되고 있음은 이와 같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과 무관하지 않다. 시가 부질없이 난해해지는 것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성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안의 「아버지의 손바닥」은 전통적 문법을 고수하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특히 가족사와 관련된 시적 모티브야말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시의 제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시는 보편적이고도 친숙한 시의 문법과 제재가 시대의 분열과 강박과 권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떻게 생생한 맛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이 시가 근원적 위안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첨단의 인공물로도 가능하지 않은 것, 무수한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아직 남아있음을 이 시는 말해준다. 자식의 등을 긁어주는 ‘아버지’의 손과 그것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는 기계문명이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위안 가운데 하나이다. ‘한가득 보풀이 일어’있는 따뜻하고도 껄껄한 이 아날로그의 세계는 삶을 순하게 눕히고, 때로 푸르게 일으켜 세우는 우리네 삶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의 묘미는 이처럼 보편적 정감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만 있지 않다. 시인은 “손바닥이 얼마나 시원한데/손톱은 금세 더 가려워진단다”라고 말한다. 이 시 구절에 의해 「아버지의 손바닥」은 깊고 깊은 삶의 체험을 담아낸다. 무디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날카로운 손톱보다 삶의 간지러운 부분을 더 잘 가라앉힐 수 있다는 혜안은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로 기발하고 신기한 인공적 이미지의 조합보다 이와 같은 혜안이 훨씬 진실한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체험이 풍겨내는 인간적인 무엇을 이로부터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획기적인 진보와 발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사람 냄새가 절실한 것이 아닐까.
소박하지만 정감어린 세계가 지극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정감의 울타리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날카로워진 우리의 신경, 지나치게 복잡해진 우리의 입맛, 현란한 이미지에 지나치게 시달리는 우리의 시각을 개운하게 헹구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쫓기고 찢기며 추워하는 우리 각자의 존재를 위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때로 순순함에 소박함에 자기의 시간을 풀어놓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손바닥」은, 고향으로 따뜻함으로 유대감으로 마음이 텅 빈 우리를 데리고 간다.
엄경희․
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등
․현재 숭실대 및 이화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 이전글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최서림 08.02.23
- 다음글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백인덕 08.02.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