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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최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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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시】
생명의 구멍, 죽음의 구멍
―최춘희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시와사상≫ 2004년 가을)
최서림(시인)
수술 받을 부위를 간호사가 미리 면도해 놓고 있다
균에 감염되면 큰일이라며 솜털 하나까지도 하얗게 밀어놓는다
땀구멍 가득 소름이 돋고 벌목된 몸 숲에서
날아오르는 검은 새떼, 깃털 떨어진 자리마다
핏방울 고인 살비듬이 아프다
(그 여자의 몸속에 물이 차올라 솟구치다가
강으로 섞여드네 강에 사는 물고기 그 여자의
양수에서 자라는 눈먼 자식들이네
세상의 빛 보지 못한 채 어둠의 자궁 속에서
긁혀 나간 꽃 피우지 못한 살덩이의 무게 기억하는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가나
물병자리 지나 물고기자리로 숨어든 물길 길 잃고 헤매는데
잡히지 않는 기억의 통로를 따라 화들짝, 날아오르는
새가 된 수만 마리 물고기의 환영 뿌리치며
두 손에 쥐어진 건 빈 허공 한 점뿐이네)
수술대 위에 누워 쳐다본 천장은 철지난 바다 같았다
혈관을 타고 마취주사액이 꽂힐 때까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절대 절명의 순간 시간의 바퀴 헛돌았다
―최춘희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최춘희의 위의 시는 동일한 제목의 일본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에서 영감을 얻어 쓰여진 작품으로 보인다. 시작품 속에서 서정적 자아는 지금 수술을 받고 있다. 수술 받을 자리를 간호사가 미리 정결하게 면도해 놓고 있다. 균에 감염되면 안 되니까 솜털 하나까지 하얗게 밀어 놓는다. 털이 밀려 나간 땀구멍 가득히 소름이 돋고, 벌목된 몸 숲에서 검은 새떼가 날아오른다. 그 새들은 서정적 자아의 은밀한 숲, 털 속에서 자라고 있던 생명체다. 이젠 털, 숲이 밀렸으니 그 새들이 서식할 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숲, 털로 뒤덮인 여성의 몸은 다름 아닌 자궁이다. 지금 서정적 자아는 자궁으로부터 자신의 분신을 수술로 덜어내고 있다. 그 분신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어둠의 자궁 속에서 긁혀 나가고 있다. 채 꽃 피지 못한 살덩이로. 이때 수술 받는 몸의 하체, 다리는 피로 얼룩져 붉다. 그 아래로 따뜻한 물, 피가 흘러내린다. 이 장면이 영화제목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과 오버랩 된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주기적으로 몸에 물이 차오르는 특이체질을 갖고 있다. 물이 자긍에서 시작해서 목까지 차오르면 하초 아래로 흘러내리게 된다. 도벽도 생기고 강한 성적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럴 때마다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야만 물이 빠져나가서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남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가 없으면 치료되지 않는 증상이다. 생의 환희 속에서 치료되는 것이다. 이 물은 자궁을 가진 여성의 생명력과 관계있다. 이 물이 왕성하게 차오르고 솟구치면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강한 성적 에너지, 생명력을 갖게 된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실제 붉은 색 다리 옆에 있는, 일년 내내 꽃이 피는 아름다운 집에 산다. 일년 내내 꽃이 핀다는 것은 일년 내내 사랑을 하고 사랑을 기다리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 붉은 다리 아래에는 항상 물이 흐르고 노인들이 낚시를 한다. 그녀가 성관계 시에 물을 분수처럼 뿜어내면, 다리 아래로 따뜻한 물이 흘러내리고, 그 따뜻한 물 때문에 큰 고기들이 몰려들고, 그 물고기 떼를 따라 갈매기 떼도 날아든다. 이 고기들을 남자노인들이 낚시로 낚아 잡아먹고 산다. 이처럼 영화 속의 여주인공 몸속에서 솟구쳐 올라 흘러넘치는 물은 성적 에너지와 관계있고, 폐수로 오염된 자연을 소생시키고, 만물을 살려내는 우주적 어머니의 몸에서 솟아 나오는 생명수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작품 속에서 서정적 자아는 수술 받기 위해 누워 있다. 이것은 성관계를 맺기 위해 누워 있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생명력을 분출하고 만끽하고 우주 만물을 살려내는 존재인데 비해, 시작품 속의 서정적 자아는 그 반대로 생명력을 잃어버리거나 소진하게 되는 체험을 하고 있다. 수술 받는 서정적 자아의 다리 아래로 흐르는 따뜻한 물, 곧 피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되지 못하고 그냥 헤매고 다닐 뿐이다. 물병자리 지나 물고기자리로 숨어든 그 물길, 길을 잃고 헤매는데,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기억의 통로를 따라 화들짝, 수만 마리의 새가 날아오른다. 물론 그 새는 물고기가 변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갓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서정적 자아의 쥐어진 두 손엔 허공뿐이다. 서정적 자아의 피, 따뜻한 물은 물고기를 기르지 못하고 그냥 하수구로 흘러들 뿐이다. 생명이 되지 못하는 그 피가 흐르는 자리마다 검은 새떼의 깃털이 떨어지고 살비듬만 아플 뿐이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어촌에 살고 있다. 그녀의 몸속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물은 붉은 다리를 거쳐 넓은 대양 속으로 들어간다. 그 대양 속에는 크고 싱싱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젊은 어부들은 그녀 몸속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물 때문에 살진 많은 고기를 잡으며 먹고살지만, 그 은공을 모르고 그 여주인공더러 요괴라 부른다. 사랑을 모르는 철부지인 셈이다. 그러나 다리 아래서 낚시하는 남자 노인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나이 때문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보면, 서정적 자아는 아기를 유산하고 수술 받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영화 속의 여주인공과 비교하고 있는 것 같다. 수술대 위에 누워 쳐다본 병원 천장은 철지난 바다 같았다고 고백한다. 즉 쓸쓸하고 황량한 바다, 물고기들이 살지 못하는 죽은 바다를 보는 것 같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취 주사액이 몸에 꽂힐 때까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절대 절명의 순간, 시간의 바퀴, 곧 생명의 흐름이 헛돌았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피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바다로 흘러들 뿐이다. 그냥 자신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간 살덩이가 새로 변화하여 날아가는 환각에 사로잡힐 뿐이다. 덧없이 빈손으로 허공을 움켜쥘 뿐이다.
이것은 남자들이 알 수 없는 여성들만의 은밀한 세계이다. 자신의 자궁 속에다 생명을 기르고 싶은 욕망, 그 생명을 자궁 바깥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은 욕망, 자신의 몸속에 가득 찬 양수로 물고기도 새도 기르고 싶은 욕망, 넓은 대양 속의 온갖 것들을 키우고 싶은 욕망, 우주 만물을 키우고 살려내고 싶은 욕망, 이것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생태 페미니즘의 주요한 내용이다.
최서림․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등
․저서 말의 혀 서정시의 이데올로기와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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