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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시)/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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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시】
마음의 눈물
―윤제림의 「버드나무 아래」
(≪현대시학≫ 2004년 9월)
강경희(문학평론가)
대형트럭 하나가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서 있다. 고단한 모양이다. 그 옆에 늙은 버드나무도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늘 아래 웃통을 벗은 사내가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다. 아니, 늘어져 있다. 언뜻 보면 죽은 것 같다. 우리 할머니가 보셨으면 가서 흔들어보라고 하셨을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그늘뿐이다.
―윤제림 「버드나무 아래」
소월의 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한국인의 정서를 탁월하게 묘파했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한국인의 감성 밑바닥에는 언제나 공통적으로 애상과 비애감이 자리한다. 정(情)과 한(恨)으로 점철된 소월의 시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삶 근저에 자리한 고독하고 슬픈 존재의 자화상을 만나게 된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시인, 끊임없이 삶에 안주하지 못한 채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으로서의 소월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 비애감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눈물겹도록 형상화한 그의 시를 통해 존재의 슬픈 숙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서 오늘날 눈물이 난다./앞뒤 한길 포플러 잎들이 안다,/마음속에 마음의 비가 오는 줄을./갓난이야 갓놈아 나 바라보라./아직도 한길 위에 인기척 있나./무엇 이고 어머니 오시나보다./부뚜막 쥐도 이젠 달아났다.
―김소월 「마음의 눈물」 전문
소월의 후기시로 추측되는 이 시는 가난하고 비참한 삶의 슬픔과 설움이 녹아 있다. 슬픔을 슬픔이라 말할 수 있기에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눈물이 난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의 ‘눈물’의 의미는 그 혼자만의 외로운 눈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은 ‘포플러 잎들’은 그의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포플러 잎들’은 ‘한길 위에’ ‘무엇 이고’ 오시는 어머니의 고달픈 걸음마다 자식의 따뜻한 눈물을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서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견딜 수 있는 것을 소월은 결국 사랑을 통해 승화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새삼 이 지점에서 나는 슬픔을 슬픔으로, 눈물나는 현실을 눈물난다고 말하지 못하는 서늘한 오늘의 현실을 떠나간 소월은 무어라 이야기했을까 궁금해진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를 읽으면서 나는 새삼 윤제림의 「버드나무 아래」가 이러한 내 물음에 답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시인은 관찰자로써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세상의 모습은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고요하다. 그런데 그 고요함은 평화롭고 아늑한 세상이 아니라 고단하고 불안한 세계이다. 그는 지극히 일상적인 세상의 풍경을 통해 일상의 배후에 내재된 우리 삶의 비극성을 포착한다. 그것은 ‘정지’된 것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정지된 것이라 판단된 것’으로부터 ‘죽음’의 한 형식을 발견하는 시선이다.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서 있”는 “대형트럭”,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는” “늙은 버드나무”,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는 “사내”는 평화로운 휴식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것이라, 피곤과 “고단”함에 지쳐 “늘어져 있”는 것이다. 고단함으로 늘어진 한 사내의 육체에서 시인은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생존을 위한 고단한 노동은 철저히 우리의 삶을 현실에 종속시킨다. 인간의 육체가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바쳐질 때 그것은 인간을 절망하게 만든다. 윤제림은 한 사내의 늘어진 육체를 통해 그 육체가 거쳐 왔던 피곤하고 괴로운 생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 사내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소월의 “포플러 잎들”은 윤제림이 바라다본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은 버드나무”는 “잎파리 하나” 흔들 수 없을 만큼 지치고 고단한 모습으로 그렇게 괴롭게 서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죽은 듯 늘어져 있는 사내를 흔들어 보지 않는 무관심한 현실, 이 꼼짝 않는 부동의 현실이야말로 시인은 절망스러운 현실이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급속하게 변해 가는 현실의 풍경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은 고단하고 피곤한 생의 운명이 가로놓여 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냉혹하고 잔인한 삶의 중압감에 짓눌려 신음하는 것이다.
「버드나무 아래」는 오늘의 비루하고 척박한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빛의 세계는 ‘정지된 세계’이며 오로지 움직이는 세계는 “그늘”뿐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피곤한 노동과 가난한 현실에 종속되어 삶을 잠식시키는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오늘의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윤제림은 소월처럼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하지만 그 또한 마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단한 안식만을 허용하는 고통스러운 현실, 오직 삶의 그늘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전도된 현실에 대해 슬퍼하는 자의 눈물일 것이다.
강경희․
1963년 전남 광주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현재 숭실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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