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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산문/이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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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또 하나의 섬을 위하여
이상아(시인)
가끔은 섬을 찾는다. 바쁜 일상의 틈새에서 그래도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섬 같지도 않은 월미도다. 그 월미도에서 배를 타면 갈 수 있는 섬이 몇 군데 있다. 작약도와 석모도, 그리고 무의도다.
월미도에서 그 중 어떤 섬을 가기 위해 배를 탄다. 섬에서 섬으로 가는 배. 언제나 그렇지만 섬에서 섬으로 가기 위해 탄 배에서의 느낌은 물결만큼이나 착잡하다. 마치 배가 밟고 지난 바닷물의 신음과도 같이 끓어오르는 하얀 포말처럼. 아니 배에서 던져지는 먹이를 따라오는 그 많고 많은 갈매기처럼. 갈매기의 날갯짓처럼.
갈매기.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던져지는 먹이, 그리고 작고 짧게 깍,하는 소리.
먹이를 따라 일순 달려들다가 어디선가 깍, 하는 소리가 나면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되던 순간의 장면. 그것은, 순간적으로 뭔가 신속하게 정리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소리가 마치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달려들던 갈매기들의 그 현란한 날갯짓이 일순 정리되고 있다는 그 느낌. 그 때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해서 나만 듣고 느끼고 보는 실상인 줄만 알았었다. 아니 과거형을 쓸 게 아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느끼고 있는지, 보고 있는지 나는 모르니까.
지금, 되살아난다. 그 소리. 바다에서 들을 수 있는 평소의 갈매기 소리보다 훨씬 작고 단음인 그 소리. 깍. 나는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섬에서 섬을 잇는 바다 한가운데서 이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이 광경을 보았으면 좋겠고 이 실제적이고도 범상치 않은 갈매기 세상의 질서를 감지하고 느끼고 지각하기를 바란다. 아니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알게 되기를, 체득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생각난다. 아주 옛날, 나 사춘기 적, 군산에서 배를 타고 갔던 무녀도. 그 무녀도에서 배를 타고 갔던 장자도. 또 선유도. 섬마다 앞장불엔 하얀 뼈와 비늘이 물결을 닮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말라가던 멸치와 얼굴에 쥐가 기어다니는 꼬마들의 꿈이 그물처럼 널려 있었다. 군데군데 금이 간 흙담 모퉁이를 돌다보면 담 너머로 보이는 조촐한 마당. 너른 평상 옆에는 언제나 몇 마리의 닭이 마치 내가 그렸던 그림처럼 있었다. 굴뚝 옆엔 포플러 나무. 정말 내가 그려 상 받은 그림처럼.
모두 동네를 그려왔었다. 집을 그려야 했던 숙제였는데. 그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었다. 11살에 그린 내 그림이 왜 장원을 했었는지. 어린 시절, 당시 인천에 있던 외할머니 댁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었지만 시골 어딜 가도 찾을 수 없었던 초가에 낮은 담, 담장 안에 닭이 모이를 먹고 굴뚝 뒤엔 포플러 나무 몇 그루, 내 그림이 그대로 거기 그 섬에 있었던 것이다.
닭이 모이를 먹을 때, 생각 속에서는 조용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다. 마당에 저희들 앞에 주욱 펼쳐진 게 널린 게 모이였는데도 어쩜 그렇게 싸움질을 해대는지, 정말 시끄럽고 싫었던 기억. 그러다 보니 다시 갈매기에게로 돌아간다. 생각에도 귀소본능이 있어서 성정에 맞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하고 소꿉친구 안부가 궁금한 것처럼.
어디선가 깍, 소리가 나고 언제 누구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뭔가 정리가 되면 언제나 나타나는 건 그, 깍, 하는 소리의 주인이었다. 그 갈매기가 하나뿐인 그 먹이를 낚아채면서 공중으로 휙 날아오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신비로운 장면은 갈매기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해야 들을 수 있으리라.
평소보다 작고 짧은 외마디 신호. 그 소리에 의해 그들의 공간에 던져진 그 하나밖에 없는 먹이의 주인이 결정된다. 단 하나뿐인 먹이는 이렇게 삶을 대하는 갈매기의 자세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닭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많은 모이가 주어져도 언제나 머리를 들이받고 몸싸움을 하는, 그것도 질서라면 질서일 텐데. 그럼 나는 뭔가. 또 당신은.
이상아(본명 이경아)․
1962년 서울 출생
․1990년 계간 ≪우리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무로 된 집 등 ․산문집 내가 밤보다 새벽을 더 사랑함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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