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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산문/이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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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12회 작성일 08-02-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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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시름을 꽃 피우는

이윤훈(시인)



―이 글은 캄보디아에 관한 르포가 아니다. 캄보디아의 슬픈 호수를 유영하던, 내 마음속 물고기의 편린들이다.

1.
처음 캄보디아 포첸통공항에 이르렀을 때, 남방의 어느 한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내 내면 한 구석에 불시착한 것 같았다. 통통하고 거뭇한 얼굴을 한 공항 경비원들이 크고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마치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 비를 내쏟았다. 한 차례의 스콜이 지나가고 다시 덥고 습한 공기가 내 살갗을 핥았다. 새삼 내 안의 풍경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달팽이의 도톰한 맨살이 내 혀를 간질였다. 생의 그 끈적거림에 묘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매료되었다.

*스콜(squall):열대 지방에서 대류에 의하여 나타나는 세찬 소나기.



2.
뚜올슬렝에 들어섰다. 정원 안 큰 나무 아래 야자열매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섰다. 눈을 깜박이자 갑자기 공포가 번쩍인다. 죽은 얼굴들이 암실에서 끝없이 인화되어 나타난다. 족쇄 찬 음성들이 거미줄을 치고, 잡힌 영혼들이 퍼덕인다. 지문들이 쩔그렁거리고, 상처들이 갈라지고, 뼈들이 부딪친다. 피가 피어나 무덤을 장식한다. 고통이 노래하고 슬픔이 웃는다. “벽아, 벽아 들어라!” 허공을 가위질하며 비틀린 손가락들이 중얼거린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원 안 야자수 아래 두개골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뚜올슬렝(Tuol Sleng): 고등학교 건물을 형무소로 개조해 폴 포트 정권(1975-1979)하에 크메르 혁명군이 약 20,000명을 고문한 곳으로,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1979년 베트남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이곳에는 단지 7명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다.

3.
나는 죽음에게 1달러를 주고 킬링필드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스투파로 안내했다. 스투파는 주홍빛 머리깃털을 한 커다란 흰 새 같았다. 햇빛 속에 눈부셨다. 그는 새가 품고 있는 8천개가 넘는 두개골을 내보였다. 순간, 뚜올슬렝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부글부글 거품처럼 들끓었다.
그는 내 귀에 속삭였다.
“내 옷을 피로 물들이지 마라. 나를 광란하게 하지 마라.”
그는 내게 입을 맞추고 작별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내 머리가 문간에 조등처럼 걸려 있었다. 폴 포트가 평온에 잠겨 베를렌느 시를 즐겨 읊조렸다니! 차 안에서 나는 허깨비처럼 흔들리며, 뉘엿뉘엿 지는 붉은 태양을 혀로 받아 삼켰다.

*킬링필드(killing fields):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약15km 떨어진 곳에 킬링필드가 있다. 그 외에도 캄보디아 전역에 여러 곳이 있다. 크메르 루즈군이 약 200만 명 (인구의 약30%)이상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매장한 곳이다.
*스투파(stupa): 원형, 각추형의 사리탑.
*폴 포트(Pol Pot:1928~1998): 캄보디아 공산혁명의 지도자. 본명은 살로쓰 사(Saloth Sar). 폴 포트라는 이름은 공산혁명 이후 1976년 ‘민주 캄푸치아’ 국 선포와 함께 만든 이름.

4.
이른 아침, 두 어린 스님이 누런 장삼을 걸치고 맨발로 문간에 서 있다. 나는 마음의 빗장을 열고 합장을 했다. 그들은 내게 한 아름의 미소를 주고 소리 없이 천천히 사라져갔다. 그들의 밝은 웃음에서 향긋한 꽃 냄새가 가득했다. 문득, 내란 때 태국과의 접경지대에서 크메르인인지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 <쉽볼렛>이 아니라 <고문>을 이용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유난히 잘 웃는 크메르인들, 고통스러울 때도 입가에 웃음을 피운다니. 이처럼 슬픈 역설이 또 있을까? 그제야 나는 캄보디아에서는 웃음도 고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쉽볼렛(shibboleth):국적이나 인종을 알아내기 위해 시험해 보는 말을 뜻한다. 에브라임 사람에게 [ʃ]를 발음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말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 사사기 12장 6절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길르앗군은 에브라임 지역의 요르단 강을 차지하고 에브라임 사람이 도망을 치다 건네 달라고 하면,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쉽볼렛>이라고 말해보라 하고 그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요르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다.”

5.
벵 살랑 호숫가를 따라 빈민들이 띠를 이루어 산다. 그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나를 보고 수줍은 듯이 씩 웃는다. 그들은 꽃 피는 나무 아래서 웃으며 아이를 키우고, 헛간 같은 집에서 암탉과 돼지들과 같이 자고 먹는다. 쫓겨나면 그들 몸에 씨앗들이 묻어간다. 그곳에서 다시 씨앗들은 싹트고 그들은 천국처럼 먹고 잠자고 아이들을 키운다. 사람들은 그곳을 더러운 소굴로 여긴다. 하지만 그들은 깨끗한 지옥을 원치 않는다.

*벵 살랑:벵은 호수라는 뜻이다. 이 호수는 프놈펜 시에 있으며 폴 포트 정권 이후에 도시로 온 빈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산다. 시는 판잣집을 철거하고 빈민들의 유입을 막으려 한다.

6.
거리에 싸구려 야외 이발소가 있다. 벽에 기대놓은 낡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거리의 이발사가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안에서 가위와 빗이 곡예사처럼 멋진 재주를 부렸다. 모토택시들이 휙-휙 지나가고, 구름은 두둥실 떠가고, 그는 웃자란 내 잡념을 다듬고, 나는 거울 속 나 자신과 대면하고. 홀연, 소리가 들려왔다. “머물지 마라. 그대 또한 잊혀질 얼굴 중의 하나일 뿐. 존재하는 것은 그대도 나도 아닌, 흐름일 뿐이다.” 나는 거울 밖으로 빠져나와 낯선 얼굴들과 섞이며 함께 흘러갔다.

*모토택시:캄보디아에서 주된 대중교통수단으로 이용되는 오토바이

7.
실버사원 가는 길에 시클로에 몸을 실었다. 늙은 운전사가 높은 안장에 앉아 삶과 죽음의 두 바퀴를 돌린다. 종아리에 도드라진 푸른 핏줄이 자벌레처럼 꼼지락거린다. 먹는 일은 숭고하다 숭고하다 꿈틀거린다. 지금껏 그는 얼마나 많은 짐을 실어 날랐을까? 하지만 그가 지금껏 실어 나른 것은 그 자신일지 모른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꽃이 떨어진다. 무겁고도 가볍다.

*시클로:짐이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종의 자전거 인력거로서 캄보디아의 대중교통 수단 중의 하나다.

8.
무척이나 아름다워 폴 포트의 마수도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는 실버 파고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만치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원한 시간에도 변하지 않을 그 아름다움은 왠지 내 눈에는 공허했다. 생기가 없었다. 도리어 저잣거리 사람들의 선한 눈빛 속에서 나는 명멸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망고 같은 사람들, 그 속에 부드러운 심성과 달곰한 감성이 숨어 있었다. 침을 삼키자 망고의 미끌미끌한 관능이 황홀하게 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실버 파고다(Silver Pagoda):1892년 노로돔 왕이 최초로 건립. 그 바닥에는 6톤 가량의 은판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바카라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17세기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 뒤로 9,50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90킬로그램의 금불상이 있다.

9.
크메르인들에게 슬픔은 대물림된다. 그들은 슬픔을 물리치지 않는다. 핏줄로 이어져 느리고 구슬픈 노래의 강이 된다. 덩이진 슬픔은 신의 눈물, 루비가 된다. 받아들이는 이에게 슬픔은 슬픔 너머의 그 무엇이다. 그들의 슬픔에선 알 수 없는 웃음이 발아한다.

플리앙, 플리앙
그 누구의 귀가 있어
빗소리를 이리 낭랑하게 담을 수 있을까
크메르 사람들은 성스러운 물이 몸에 차오르면
볍씨처럼 싹이 튼다네

프카, 프카
그 누구의 눈이 있어
이리 맑게 깨어날 수 있을까
크메르 사람들은 시름이 망울지면
꽃처럼 피어나 자신을 밝힌다네

*플리앙:비
*프까:꽃

10.
서너 달 만에 프놈펜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테라스에서 잠이 들었다. 문을 열자 아들딸들이 “아빠!” 하고 외치며 달려들어 나를 꼭 껴안았다. 깨어나 보니 나는 먼 나라 흔들의자에 누워 있었다. 새들은 즐겁게 지저귀고, 야자수 넓은 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구름은 멀리 떠가고.
포첸통 공항을 막 이륙한 비행기 내에서 어둑해지는 프놈펜 시가를 내려다보았다. 정든 이들과 스친 뭇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등불처럼 켜지기 시작했다.
“프놈펜이여. 크메르인의 어머니여. 돌풍에도 쓰러지지 않을 돛대를 높이 세우고, 영광스런 앙코르의 깃발을 나부끼며 메콩강을 항해하라. 리에 하으니! 나 그대를 잊지 않으리라.”

*프놈펜(Pnom Penh):현재 캄보디아 왕국의 수도다. 프놈은 ‘언덕’을 나타내며, 펜은 여성의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때 메콩강이 범람했을 때 떠내려 온 불상 4개를 펜이라는 여자가 언덕에 안치시켰다한다(지금 그 언덕은 왓 프놈이라 부른다). 그 때 이후로 이 지역을 프놈펜이라 불렀다한다.
*앙코르(Ankor):크메르 왕조(9C-13C)의 수도로서 석조물 유적지 앙코르 왓트(사원)로 유명하다. 캄보디아 북서쪽에 위치한다.
*리에 하으이:안녕!


이윤훈․
평택 출생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추천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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