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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2004년 겨울호) 산문/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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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20회 작성일 08-02-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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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흐르는 세월 속에서

채수경(수필가)



운전을 한 지 5년이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불편한 지리적인 이유가 첫 번째이긴 했지만, 작은 아이의 등교를 책임지며 운전을 시작한 이후부터 차에 시동을 켤 때면 부르르 소리 내며 떠는 엔진처럼 항상 가슴이 떨리고 울렁거린다.
정릉에서 북악산 길을 타고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혜화 로터리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양팔에 힘이 주어진다. 로터리를 회오리바람에 휘감기듯 빠져나가 등교 시간을 확인해 가며 신호등이 바뀌기 전 미꾸라지처럼 운행하는 일은 내 하루의 가장 힘든 일과다. 두 번의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을 때도, 복잡한 그곳 사정 때문에 보상받기를 포기하며 재빨리 통과하고 말았던 나에게 가장 큰 적은 역시 급차선 변경 차량이다. 숨 가쁘게 눈을 돌리며 대학로에 들어서면 마치 큰일이라도 해낸 듯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온다. 신호가 바뀌고 개인택시 봉사자의 수신호에 따라 진행하는 순간 차선을 변경하며 끼어드는 차량 때문에 황급히 정지 페달을 밟으면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쿵쾅거리곤 한다. 나도 모르게 험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러나 찡그린 내 얼굴을 채 펴기도 전에 다음 순간 그 밉살스러운 차량은 신호대기로 바로 내 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작 여기에 있을 것을 매너 없이 그렇게 운전을 하느냐며 나의 그에 대한 비난은 계속된다.
학교에 도착해서 아이를 내려줄 무렵 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건낸다. “엄마 화났어?” “아니 기분이 나빠서.” “근데 엄마, 그 아저씨는 엄마가 한 말 하나도 못 듣잖아? 옆에 있는 나만 듣잖아. 그러니까 이제 기분 나빠도 좀 참아. 그건 다 우리한테 하는 말이 되잖아.” “그래, 알았어. 미안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혜화 로터리를 지나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좋은 생각을 심어 주어야 할, 스펀지처럼 세상을 받아들이는 착한 아이 앞에서 내가 뿌려버린 흙탕물이 고민스럽다.
아이들은 부모가 뿌린 언어의 씨앗을 먹고 자란다는데. 그날 이후 나는 운전석에 앉으면 기도를 한다. 한 박자를 쉬고 들어가는 노래를 따라 부르듯 순간순간 쉬어가는 운전을 하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기 위해 출발시간을 5분 앞당겼다. 뒤에서 급하게 신호위반을 종용해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운전석에 앉기만 하면 생겼던 울렁 증세도 사라지고, 양보 운전도 가능한 한 당당한 모범 운전자가 되었다. 남편에게 안전운전 365일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답답해하던 내게 어느 날 아이는 훈장을 주듯이 말했다. “아빠, 이젠 엄마도 아빠처럼 운전 잘해.” 예배시간이 촉박했던 나는 웃음으로 고마움을 답장했다.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오랜만에 갖는 혼자의 시간이 낯설다. 거실을 할 일 없이 오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일까. 수화기를 들자 뜻밖에도 엄마의 전화다. 군산에 계시는 친정 엄마는 새벽에도 이따금 전화를 하시는 분이다. 안부를 묻기도 전에 버럭 불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왜?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엄마는 딴전이다. “덕환이 조금만 더 이뻐해 줘라. 이쁨 받고 싶어서 그래. 너도 착하고 아비도 더 없는 사람인데, 누굴 닮겠냐? 양파랑 마늘이랑 부쳤다.” 대답도 하기 전에 툭 전화는 끊어진다. 식탁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암으로 투병하던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사 남매를 거느린 가장이 되셨다. 선생 사모님에서 비행장 청소부로, 식당 직원으로, 화장품 외판원으로, 신분을 바꿔가며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아버지가 남기신 집을 세 번씩이나 옮기며 결국 우리 사 남매를 잘 길러내셨다. 특히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빠듯한 형편에도 나를 대학에 보내며 흘리신 눈물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철없던 나는 핸드백도 없이 청바지만 입고 보낸 대학생활이 얼마나 부끄럽고 짜증스러웠던가. 달랑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들고 군산에서 전주까지 통학할 때는 얼마나 신경질을 부렸던가.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집안일을 돕지 못했으며, 하나밖에 없는 딸로서의 역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렵게 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의 직장 생활 끝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도망치듯 서울로 튀어버린 나에게, 변변히 못해준 혼수 얘기만 꺼내면 요즘도 오히려 미안해하신다. 결혼생활 17년, 어느새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사춘기에 들어서자 그 아이가 돌출 행동을 시작했다. 막무가내인 아이를 다독이며 인내하는 것도 차츰 힘겨워지고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안타까웠던지 엄마는 불쑥 전화를 하신 것이다.
사실 나는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육아 관련 서적을 열심히 읽으며 부모의 역할을 익혔고, 아이와의 대화법도 배워가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힘썼다. 그런 나의 노력과 정성이 헛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조차 들었다. 부모인 내가 말을 더 아껴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처럼 고약하지도 비뚤어진 마음도 없으니 더 예뻐해 주는 것이 나의 할 일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항상 조건화된 기대를 가지고 그 아이의 헝클어진 마음을 뒤적여대기만 하던 나는 문득 예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는 얼마나 더 혼란스럽고 힘들었을까. 머슴애들처럼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났을 때에도, 어디선가 치렁치렁 긴 치마를 빌려 입고 나타났을 때에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온종일 울어대기만 하여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믿고 기다려주셨다.
인내심이 부족한 내 모습을 하나둘 꺼내다보니, 어두운 예배당에 앉아 아침을 맞으실 엄마의 기도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손마디처럼 거칠고 투박한 그 사랑이 내 가슴을 뜨겁게 두드려댄다. 이제야 딸이 되어가는 듯한 나는, 다시 긴 기다림을 위해 시간을 저만치 밀어두어야 할 것만 같다.


아직 미혼인 손아래 시누이에게, 명절 아침 집으로 와 아침 들라며 인심 쓰듯 전화했다. 결혼 초, 그러니까 벌써 18년 전이지만 꽃다운 스물다섯 새색시인 내게 시누이는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업을 한다며 남편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놓고도 미안한 표정 한번 짓지 않았던 뻔뻔함이 나는 싫었다. 그러나 나는 싫은 내색도 못하는 소심한 여자로 시집살이를 살았다. 20년 전만 해도 여자이기에 며느리이기에 감수해야만 했던 운명의 무게는 내게 너무 버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사랑을 얻은 대가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견딜 만했다. 그저 좋기만 했던 남편을 쏙 빼닮은 아들을 둘이나 낳아 기른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업적임을 자부하는 나로서는, 힘들게 느껴졌던 홀시어머니의 부당함이나 시누이의 오만불손도 그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눈처럼 녹여버리곤 했다. 또한 두 아이에게 끔찍한 애정을 쏟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언제부턴가 차츰 가족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이 느껴질 즈음 시어머니는 뇌졸중과 치매로 앓아누우시더니 급기야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남은 가족은 남편과 시누이뿐이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생각과 생활습관은 아직도 제각각이다.
서로의 생활이 바빠서 자주 왕래하지는 못해도 명절이나 생일 등, 특별한 날에는 시누이가 집으로 찾아오곤 한다. 요즘엔 사십이 넘어 혼자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챙겨주고 싶다. 명절날 아침 늦은 아침상에서 시누이는 어머니 얘기를 꺼낸다. 듣다보니 30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투 속에 서운함이 배어 있다.
무더운 여름 냉장고에 채워놓은 딸기를 오빠 거라며 손대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나보다. 맛있는 불고기를 배고픈 그녀에게 몇 점만 꺼내 주고 다시 한양푼 재어놓은 일도 있었나보다. 자신과는 대우가 너무 달랐던 오빠에 대한 막연한 미움조차 있었던 모양이다. 가사 일까지 일정 부분 맡아해야 했던 시누이로서는 참기 어려운 서러움이었으리라.
어머니는 그러셨다. 여름엔 풀을 빳빳하게 먹인 깨끗한 삼베 이부자리에 아들이 시원하게 잠들기 원하셨고, 여름휴가엔 아들이 해주는 도배가 가장 맘에 든다며 벽지를 사놓고 기다리기도 하셨다. 깨진 기왓장을 바꾸는 일도 그의 몫이었고, 사용하던 공기에 밥을 담을라치면 기겁을 하시며 싱크대 맨 위 선반에 올려놓으신 반상기에 아들의 밥을 담으셨다. 누워 잠이 든 아들을 이리 저리 뜯어보시다가 거꾸로 보니 내 아들이 더 이뻐 보인다고 좋아하셨다. 한복을 30년 넘게 재셨지만 당신 아들보다 다리가 긴 사람은 보지 못하셨단다. 이런 얘기들은 어머니 돌아가시기까지 백 번은 족히 들은 이야기이다.
어머니 떠나신 지 10년이 되어가는 이즈음 시누이의 마음에 남겨진 얼룩보다 더 진한 서운함이 내게도 남아 있다. 영화의 필름처럼 그때의 그 상황에서 아프고 시렸던 나의 외로움을 만나고 또 만났다. 삼 일을 헤아려도 다할 수 없는 시누이의 웃음 뒤에 가려진 쓸쓸함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극한 사랑을 받은 그 아들은 받은 만큼 이상으로 아내인 나와 두 아들, 동생에게 사랑을 전하며 살고 있다. 그는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여 뜨겁게 솟아오르도록 격려하고 감싸준다. 아이들은 때로 찬 바람이 부는 나보다는 항상 따스한 양털 같은 아빠를 더 좋아한다. 어머니께서 뿌려놓은 사랑의 열매를 먹으며 우리 가족이 행복할 때 어머니를 떠올린다. 일찍 혼자되셔서 두 남매를 키우신 어머니께 아들은 세상을 지탱할 힘이셨을 것이다. 결혼 후 떠나버린 아들 때문에 얼마나 아프셨을까. 속으로 삭이시다 끝내 병이 나셨던 것은 아닐까.
10년 동안 남편과 나는 건강한 가정을 회복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우리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보살피고 양육하고 떠나 보내야함을 안다. 나 또한 자식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지독한 사랑으로 또 다른 나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내 사랑이 비록 세련된 것이라 해도, 내 몸에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이 사랑은 유전임이 틀림없어 두려울 때가 있다. 자식에 대한 각별한 사랑, 그것은 신이 주신 아름다운 형벌이다.



채수경
․2003년 ≪크리스찬문학≫으로 등단
․지구촌가정훈련원 상담자, 극동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추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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