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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좌담 ◎매체의 문화운동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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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4주년기념 특집
좌담∙매체의 문화운동 절실히 필요하다
이은봉 시와사람주간
구모룡 신생편집위원
이도흠 문학과경계주간
고명철 본지편집위원
기록:조미숙|정리:황희순
∙때 : 2005년 1월 25일 오후 3시
∙곳 : 인사동 다시올
자리를 어떤 식으로 마련할 것인가로 고민했었다. 지상 좌담 형식을 취할까 생각도 하였으나 본래 취지를 퇴색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어려운 자리를 마련하였다. 특히 한국 문예시장에서 매체들이 어떤 식으로 활로를 찾아야 하고 담론 생산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었다. 전화 통화로 이미 흔쾌히 참석을 수락해주신 세 분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에 맞추어 약속 장소에 나와 주셨다. 감사드린다.―편집자
1. 문학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고명철 안녕하십니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90년대 이후 널리 회자된 문학의 위기를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많은 문예지에서 이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정작 문학 현장에 있는 사람들, 특히 창작자와 비평가가 체감하는 문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들은 서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추상화된 담론 일변도이다보니, 논의 자체가 상투화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나눠야 할 이야기는 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자는 것인데요. 매체, 작가, 비평가의 관계를 고려한 문학장 혹은 문학제도 속에서의 문학의 위기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들은 활발하지 않았던 게 문학 현장에 종사하는 문학인들의 지적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잡지 편집을 직접 하시는 분들을 모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문학장 속에서의 매체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합니다. 이은봉 선생께서 먼저 말문을 열어주시지요.
이은봉 문학의 위기라는 말 전에 민족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고종석 씨가 민족문학의 위기와 관련한 기사를 써서 민족문학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고나 할까요, 약간 불쾌감을 유발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제는 문학의 위기가 이야기되고 있군요. 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결국 1980년대와 관련시켜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말하자면 문학의 대중성 결여, 운동성의 약화, 이런 면에서 문학의 위기를 얘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대중적 호소력이라고 할까, 대중을 변혁시키고 대중을 바꿔나가는 데 문학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1980년대처럼 문학이 운동의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문학 매체가 1990년대 이후 굉장히 활성화되지 않았습니까? 문예지들이 계속해서 발간되고 시인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죠. 이런 상황과 관련해 볼 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문학의 위기라는 말에 대해 나는 반문이 좀 있어요. 대중적 영향이라든지, 운동성이라든지, 운동적 기능이라든지, 하는 면에서는 다소 약화된 감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문학을 담당하는 세력들의 인적 자원이 크게 확대된 면에서는 문학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요. 물론 예술 전체에서 문학이 예전과 같은 중심을 갖고 있지 못한 사실이죠. 특히 영화나 티브이 등 영상매체에 그 중심을 내주었다고 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진짜 문학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을 해요. 언어나 문학 일반에 대해 재능이 있는 작가와 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정말 심리적으로, 예술적으로 펼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아닌가, 말하자면 문학이 정치나 사회에 상대적으로 억압을 덜 받는, 이른바 문학의 자율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을 해요. 그런 면에서 나는 문학에 참여하고 있는, 문학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명철 오히려 매채가 활성화되고 인적 자원이 확대되는 측면으로 봐서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상당히 흥미 있는 지적입니다. 문학이 위기라는 점을 상투적인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냉정하게 이야기를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구모룡 선생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구모룡 이은봉 선생의 의견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우선 80년대에 가졌던 문학의 역할이나 위상이 90년대 지형의 변화에 따라서 상당히이은봉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신과 우주까지도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줄어들었고, 그러면서 90년대 와서 문학주의라는 것이 하나의 중심 문학논리로 자리잡게 되는데, 저는 80년대적인 것도 90년대에 위기를 맞았지만, 90년대 문학주의라는 것도 결국에는 위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문학의 위기는 문학주의의 위기이지 문학의 위기는 아니거든요. 문학의 개념을 달리 보아야 된다는 겁니다. 문학이 문화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문학도 문화라는 큰 맥락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인데, 문학 스스로가 그런 위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문학의 위기를 통해 오히려 문학이 새롭게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도흠 저도 대동소이합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위기는 위기이지만 새로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인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디지털 영상시대를 맞았다는 것이죠. 영화는 천만 관중이 동원되는데 소설은 괜찮은 작가가 써도 만 권이 나가기 힘들죠. 이미 지금 세대들이 이성에서 감성으로, 문자적인 인식에서 이미지적인 인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문학의 관건은, 그들 세대들한테 어떻게 문자적 상상력, 아니면 최소한 영상과 문자를 결합한 최소한의 상상력을 제공하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학의 돌파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80년대는 문학이 억압적 상황에서도 꽃을구모룡
창비와 문지가 폐간되니까 지역의 무크지들이 살아난 겁니다. 이건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죠. 그러니까 중심부를 해체하면 지역이 살아난다는 이야기죠.
피웠던 것은, 저는 문학이 근본적으로 부정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80년대는 리얼리즘적인 저항과 부정의 형식으로서 문학과 예술이 꽃을 피웠고, 또 그것이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저항성, 운동성을 가질 수 있었지요.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이 억압이라는 것이 내면화되고 일상화되어 버렸어요. 전에는 전두환, 5공화국, 군사독재정권, 이런 식으로 억압이 대중들의 눈에도 보였고, 그걸 작가들이 구현해내면 대중들도 거기에 공감을 하면서 그 문학을 통해서 어떤 구체성이나 진정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내면화되고 일상화되어 있는데 그것을 문학이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의 예에서 보듯 오히려 영상에서는 어느 정도 포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는 전혀 포착을 못 하고 대중들도 포착을 못하다보니까 그 부정의 형식들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거죠. 그런 면에서 실패고 위기라고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대안으로는 내면화된 억압들을 부정할 수 있는 문학의 형식이나 내용을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학은 계속 영상에 밀려 주변화하는 예술장르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안 되니까, 지나치게 자아의 실존 문제로 가거나 아니면 욕망의 문제로 경도되어 문학이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고명철 서로 동의를 하고 계시는데 기존의 문학의 위기라는 것과는 좀이도흠
모더니즘은 형식의 실험을 모색해서 낯설게 하기를 이루고 창의성과 독창성을 획득하고, 리얼리즘은 삶과 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지요.
다른 각도에서 검토를 해봐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문학의 위기를 오히려 비평가들이 조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도흠 그렇죠. 정리한다면 ‘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답습한 문학은 분명 위기다. 그러나 새로운 문학은 이제 새로운 시작, 새로운 지평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2. 문화운동으로서 매체의
편집 방향
고명철 말씀하신 대로 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와서 여러 매체들이 많이 창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신생 매체들은 문학적 이념과 선명성보다는 다양한 성향의 문학을 소개함으로써 문학의 지평을 확산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썩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매체의 편집 방향이 모호한 경우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구모룡 선생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신생≫인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편집 방향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계신지요.
구모룡 매체가 활성화되는 데에는 제도적인 도움도 있겠습니다. 요즘은 잡지 등록이 예전처럼 까다롭지 않아서 지역의 욕구들이 매체를 통해 나타나는 게 일차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나름대로 어떤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문학운동이 문화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지역문화운동을 해보자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이제 21세기에 와서 문학이 과학기술문명에고명철
기초예술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끌어낼 것이냐에 대해서 이제는 국가가 예술가 개개인의 몫으로 돌리지 말고 함께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줘야
추종하고 거기에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문학이 가지고 있는 수공업적이고 생태지향적인 것들을 더 확대시킬 것이냐, 물론 그 두 가지를 이분법적 대립으로 파악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문학이 21세기에 해야 될 역할은 있다는 거죠. 잘못 가고 있는 과학기술문명에 대해 견제와 그에 대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역할을, 특히 소설보다는 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신생≫을 만든 것입니다. ≪신생≫은 단순히 시인들이 시 쓰는 매체가 아니고, 시적인 세계관을 현실 속에 확대시키는, 시적인 문화운동을 지향하려고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지역 잡지라기보다는 시와 시론과 생태적인 삶, 이 세 가지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실현하자는 것이 이 잡지의 모토지요.
고명철 ≪시와사람≫도 광주의 유일한 시전문지라 볼 수 있는데요. 이은봉 선생님 ≪시와사람≫의 편집 의도도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이은봉 이도흠 선생 말씀을 받아 그 연장선상에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 알다시피 1980년대는 억압이 민족문제나 계급문제로 구체화되어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이들 억압이 좀더 내면화되고 있지요. 어쨌든 오늘의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서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이고, 그 모순의 핵심축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과 생태모순이라고 요약하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는 개인의식을 토대로 하여 성장하는 사회이므로 개인의식 속에는 이들 세 가지의 모순 외에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는 많은 억압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그런 것들도 지금 우리 문학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욕망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든 심리적인 불균형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든 간에 말이죠. 그런 면에서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초기에 얘기했던 억압의 축을 계급의 축과 민족의 축과 생태, 생명의 축으로 나누는 데서 더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다양한 억압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느끼고 그에 저항하고, 그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는 데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런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문화운동의 하나로서 매체운동은 근본적으로 탈근대 운동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와사람≫은 광주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근대극복과 탈근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 상존하고 있는 다양한 억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특집도 그런 내용들로 채워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상존하고 있는 다양한 억압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또 그것의 극복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 ≪시와사람≫의 정신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와사람≫의 편집 방향은 ‘서정이 있는 생태정신’, ‘생태정신과 함께 하는 서정’이라고 압축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적인 면에서든 외적인 면에서든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개인적인 작업에서든 문화운동 차원에서든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리토피아≫나 ≪문학과경계≫나 ≪신생≫이나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도흠 리토피아란 제호도 그렇고, 예술이란 것은 간단히 말해 꿈꾸는 거잖아요? 꿈꾼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해 부정한다는 것이죠. 그 부정이 모더니즘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리얼리즘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죠. 근본적으로 문학이든 예술이든 부정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문학과경계≫도 ≪시와사람≫과 비슷합니다. 하나를 더 보탠다면 억압에 대한 부정을 하자,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에서 꽃을 피우자, 그 두 가지입니다. 80년대까지는 거시적인 억압에 너무 매몰되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거시적인 억압들에 대해 부정하지 못하고 미시적인 억압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두 지향 모두 극복되어야 하죠.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두 가지를 다 부정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모더니즘이건 리얼리즘이건, 아니면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건 탈근대적인 패러다임이건, 이것의 경계를 허물고 비판하고 부정하고, 그래서 비전이든 유토피아든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희는 특집에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진정성을 가진 대안을 모색하자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다만 오히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보다 카프카의 변신이 더 자본주의에 공격적이었던 것처럼,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아니면 이념적인 의도를 드러낸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에서 더 부정의 형식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문학 쪽에는 진보적 지향을 강요하지 말고 난장판을 펼쳐주자. 해서 시 소설에서는 자유스러운 글쓰기를 원했고, 특집에서는 그때그때마다 좀더 진보적이고 선명한 쪽으로 담론들을 설정해서 진행해 왔습니다.
3. 매체의 근대극복과 탈근대
고명철 매체가 그냥 시인과 소설가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문화운동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색깔 입히기가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 매체에서 주안점을 두고 있는 점에 대한 얘기를 좀더 나누었으면 하는데요. 잡지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연 잡지라는 형식을 통해서 근대를 넘어서는 게 어디까지 가능하겠는가. 인터넷 잡지를 웹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웹진이 실험적으로 가동된 이유가 활자 매체가 갖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죠. 전반적으로 매체 문화운동이 과연 근대극복과 탈근대라는 점과 결합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그런 가운데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만.
이은봉 탈근대나 근대극복을 지금 관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1980년대는 명시적인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더라도 대안세계가 있었거든요. 말하자면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현실 사회주의가 하나의 대안일 수 있었고, 또 북한 같은 경우도, 일부 주사파라고 할까요, 이런 세력들에게는 하나의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생각되었는데 1990년대로 들어오면서 현실 사회주의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모두가 다 자각하게 되었잖아요.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되어버렸고, 카스트로나 김정일의 경우도 시장의 기능과 관련해 자신들의 이상을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근대 형식인 활자를 매개로 하는 잡지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겠느냐, 명실공히 탈근대를 이룰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듯해요. 우리는 지금 탈근대 사회 징후를 열어놓은 채로, 이것이 탈근대의 징후다,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이다, 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월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자본주의를 벗어났다, 그렇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각기 자신의 형식으로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지요. 아직 살아보지 않은 유토피아, 이것을 과거의 잃어버린 낙원, 즉 파라다이스를 통해 유추해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죠. 말하자면 자기 처지에서 모두들 각개전투를 하는 것이지요. 중심이 어떤 혁명을 통해 뒤집어엎어질 수 있다는 관점으로는 근대 이후의 세상이 도래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형편에서 나는 개인들이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집단이나 계급 주체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의식이 성장하지 않고 미래는 건설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생≫, ≪문학과경계≫, ≪시와사람≫, ≪리토피아≫가 개별적으로 나름대로의 노력 속에서 좀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요.
구모룡 그것은 분명 지향해야 할 가치들입니다. 그럼에도 90년대 이후 맹위를 떨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든지, 그 뒤 해체론 탈근대론 이런 것들이 결국은 자본주의가 전지구화는 데 매개가 된 게 아닌가 한번쯤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이야말로 자본주의 절정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말 우리가 지향하는 자본주의 극복이나 탈근대를 생각한다면 과거의 자본 극복 논리와는 다른 대안 논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는 아직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나마 하나의 힘을 얻고 있는 게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라든지 또는 생태적인 세계관이라든지 이런 것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차원의 문학운동이 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생≫이 생태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이것을 단순히 탈근대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지역을 통해서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전 지구적으로 보면 미국 중심 시스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되겠고, 국내로 보면 서울 중심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적으로도 다양한 가치나 문화들이 그대로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다면 국내에서도 지역의 가치들이 살아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또 문화적인 다양성과 생명의 다양성과 같이 볼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런 차원에서 탈근대를 이야기한다면 신생도 탈근대를 지향한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섣불리 우리가 탈근대 포스트모던 해체를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거기에 말려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은봉 탈근대나 근대극복의 개념에 대해 잠깐 점검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문화상품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여기에서 얘기하는 근대극복이나 탈근대는 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의 음흉한 의도, 이런 것들과 맞서 싸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정신이나 운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역에 기반을 둔 문화의 종다양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참다운 인간의 자유, 참다운 인간해방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탈근대나 근대극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상품이나 세계 지배 전략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비켜서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도흠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한국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 때 그 논객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한국 사회에 후기산업사회적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노동3권조차 보장되지 못할 정도로 아직 근대성조차 보편화하지 못하였다. 비유하자면 한국이라는 환자는 폐병으로 죽어가는데 너희들은 신종 부스럼이 있다고 호들갑을 떠는 꼴이다.”라고. 지금 한국 사회는 산업적, 근대적, 자본주의적 모순이 첨예한 상황에서 미국 중심의 세계화로 인하여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상의 모순 문제가 더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해체란 이름으로 역사를 소거하고 사회 모순에 대한 부정의 행위를 기표의 미끄러짐 운운하며 미궁으로 몰아넣는다면 역사적으로 단죄될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여기서 성찰하고 반성하고 비판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모순에 대한 극복 방향으로서의 탈근대적 지향이라는 데에는 우리가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아직까지도 억압과 소외가 더욱 강화되고 내면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극복으로서의 민중해방․계급해방 문제라든지, 전 지구적 환경 모순을 낳은 것에 대한 생태적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라든지, 이런 모순을 극복하는데 근대를 넘어선 패러다임으로 대안을 세우는 쪽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인식과 대안이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 지금 이은봉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다양성이라든지 지역화라든지, 그 다음에 근본적인 구체성에 입각한 정황과 유토피아의 제시들은 굉장히 유용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매체와 연결해서 말씀드리면 간단히 샤먼 ‘무(巫)’자에 있다고 봐요. 무라는 것이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것이고, 사람 인(人)자 둘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있지요. 그렇듯이 이 시대의 현실을 첨예하게 분석한 바탕에서 비전이나 유토피아들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주고, 사람과 사람에게는 예술, 자연을 비롯한 내 앞의 타자들과 소통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나 지혜의 말들을 전하고 또 공감하는 그런 매체 역할을 우리 문학잡지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명철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부분은, 프레드릭 제임슨도 명확히 지적한 바 있듯이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과 근대의 파행을 극복하는 탈근대와는 엄연히 구분해야 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근대를 극복하고자 했을 때는 근대의 동일자 논리에 의해 억압되고 훼손된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고 복원하는 것이지, 그 타자의 가치들을 문화상품의 논리로 포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지적들을 매체의 문화운동 차원에서 어떻게 소화를 해내느냐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역의 가치를 어떻게 자리매김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데요. 아까 구모룡 선생님 말씀 중에 서울 중심축이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만 더 부연 설명을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4. 서울중심주의 비판, 비판적 지역주의 문화
구모룡 그동안의 근대화라는 것은 국가주의적 근대화로서 그런 근대의 효율성 때문에 서울 중심주의라는 게 비대해졌는데, 남한만이 아니고 북한도 마찬가지겠지요. 분단체제가 그런 것들을 더 강화시킨 측면도 있구요.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국가나 중심부가 지역의 활력들을 굉장히 많이 활용했습니다. 활용하는 과정에서 중심주의가 형성된 것인데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지역의 문화예술적인 활력들을 서울에서 자꾸 흡수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태로 계속 간다면 지역도 불행하고 중심도 불행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문화적인 다양성이 떨어지고 지역간 활력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역이 서울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터전을 만들지 않으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문학 좌담을 서울에서 하면 지역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한국문학이 전부고 한국문학이 서울문학이고 그런 형식이었는데 이즈음은 지역문학을 많이 거론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본에 종속된 서울중심의 문화들이 생산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다시 지역을 흡수하지 않으면 재생산할 수 없는 측면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서울의 문화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술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화와,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서울에서 문화산업으로 만들어내는 것 두 가지인데, 그런 것에 한계는 분명 있거든요. 말씀드린 대로 지역의 문화적인 활력을 수렴하고 이를 동질화시키는 현상을 두고 서울중심주의라 하는 것이지, 단지 서울이 권력과 자본과 제도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적대감으로 서울중심주의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은봉 사실 문화나 지식이나 권력이 서울로 집중된 것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근대의 산물이고, 자본주의의 산물이죠.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호남에는 호남의 철학, 기호에는 기호의 철학, 영남에는 영남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기론과 관련해서 기론이냐 이론이냐 하는 철학을 기반으로 지역에는 각기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화되고 자본주의화되면서 서울로 다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와 근대를 극복한다는 것은 문화나 권력이나 지식이 각 지역으로 분산되어 문화나 권력이나 지식을 생산하는 일이 각 지역에서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방자치가 강화되면 자본과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지 않겠습니까. 무산되었지만 행정수도를 지방에 건설하려고 하는 것도 저는 근본적으로 근대를 극복하려고 하는 운동의 하나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권력의 지역적 중심을 이동시키려고 하는 작업의 하나라는 말이지요. 아직도 중앙정부가 권력을 강하게 장악하고 지방에 나눠주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문학도 사실은 근대문학으로 넘어오면서 서울 중심으로 바뀌었단 말입니다. 지역의 문화적인 주체를 건설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구조를 깨자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사실은 지방과 중앙 개념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중앙이라고 할 때의 중앙이 서울이 아니라 새롭고 바람직하고 세련된 문화가 생산되는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충청지방은 충청지방대로 영남지방은 영남지방대로 상당히 고급스런 문화와 문학을 생산해 냈단 말이죠. 그 사람들에겐 그곳이 바로 중심이고 중앙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작업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지식, 새로운 철학을 지방에서 생산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문화를 자치화하는, 그리고 문화의 중심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노력이고, 근대극복을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문예운동 차원에서 경우를 보면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산의 ≪신생≫의 경우는 정말 놀랍거든요. ≪신생≫은 문학작품뿐 아니라 철학논문의 연재도 하고 있습니다. 부산 지역의 지식인들이 생산해내는 글들이 한몫에 수렴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대구의 경우도 그렇고요, 학회를 봐도 그렇습니다. 부산이나 대구에 기반을 둔 학회, 충청이나 광주에 기반을 둔 학회들도, 서울에서 생산해내는 지식이나 사상이나 철학에 못지않은 것들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학뿐만이 아니라 지식이나 사상의 중심도 다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서울이 빨아들이고 있긴 하죠. 지방에 괜찮은 작가나 예술가가 생산되면 거기서 활동을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지 않습니까. 원래 문화의 중심에서는, 꼭지점에서는 새로운 문화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겁니다. 지방의 문화가 중심의 문화를 구축하거나 하위의 문화가 상위의 문화를 구축해 가는 것이고, 따라서 서울 지역이 문학이나 문화의 중심을 생산하는 체제는 오래지 않아 깨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구모룡 서울과 지방을 이분법으로 인식하면 그건 밑도 끝도 없어요. 서울에서 필요하면 지방을 흡수하라 이거죠. 우리는 우리대로 나가겠다 이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중심주의라든지 지역주의는 아니라 이거죠. 소위 비판적 지역주의라고 할까, 지역이 놓인 위치의 한계를 우리 스스로 인식하면서 전체의 틀 속에서 적극 발전시키겠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은봉 선생 말씀대로 이건 단 시일 내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지역의 문화논리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서울과 싸워보겠다 하는 아주 선동적인 지역중심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아직도 지역이 순수하다는 논리죠. 하지만 둘 다 종속된 논리입니다. 서울에 대한 왜곡된 열등의식이 오히려 지역의 선정성을 부추깁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지역문제를 풀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역의 가치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는 나라들이 21세기에 훨씬 더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 인식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지역을 위해서도 한국문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은봉 한마디만 덧붙인다면, 중앙이나 지방의 개념으로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분법적이고 근대의 산물이지요.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이라는 말예요. 그것은 일단 극복되어야 될 것 같아요. 김지하 선생이 주장하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의 개념이나 카오스모스의 개념,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이(不二)의 개념, 이것이면서 저것, 저것이면서 이것, 말하자면 서울이면서 지역, 지역이면서 중앙, 그런 동시적인 개념들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역에서의 문화운동도 그런 맥락에서 이뤄져야 될 것 같아요
고명철 지역의 가치를 복원하자는 부분들이 근대를 극복하는 일환인 것 같습니다. 특히 ≪문학과경계≫도 그렇고 ≪리토피아≫도 그렇습니다만 서울에서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지역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데 실제 행정단위별로 서울에서 내는 매체의 경우에는 지역의 그런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서울 중심에 대한 비판, 비판적 지역주의, 또는 다중심성,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공간적으로 서울에서 내는 매체들이 갖는 딜레마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에 관해 말씀해주시지요.
이도흠 : 저희들도 그런 취지에서 맨 처음부터 지방의 목소리를 그대로 싣자는 기획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시대 자체가 탈근대적 패러다임인지는 몰라도, 중심과 주변, 구분과 전체 구분이 무너지는 시대라고 봐요. 지역문제를 따질 때에는 근대의 흐름이 두 가지였다고 봅니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적 근대화를 통해서 중앙집권화 된 것, 또 하나는 공간의 문제를 위상의 문제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호남선을 깔 때 일부러 나주를 비켜갔어요. 그러면 조선조 내내 호남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나주, 나주를 중심으로 한 민족 자본과 권력이 자연히 주변화하지요. 그런 식으로 공간의 위상이 편재됨으로써 모든 산물과 권력을 재배치시키는 것, 즉 중앙의 편재대로 지역을 하나의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 근대화의 과정이었다고 봐요. 그렇다면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중앙이 만든 위상을 지역의 다른 위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된다고 봐요. 단순히 지역에서 우리가 이런 것을 하자 저런 것을 하자가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위상을 지역의 다문화적이고 다산성을 살리는 쪽에서의 위상으로 바꿔야 되는데, 그 길은 이념적으로나 몇몇 지역 운동가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봐요. 지역의 전통 역사, 그리고 지역의 문인이건, 지식인이건, 대중이건 지역의 사람들과 자연을 바탕에 둬야 가능한 것이지 중앙을 그냥 따라가 닮기라든지, 아니면 적대적인 방향으로 지역이 중앙에서 한번 싸워보자는 식은 모두 소모전으로 끝나지 않겠나 싶어요. 문화사란 거시적 틀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중심이 결국 주변이 되고 주변이 중심이 되는 거란 말예요. 중심이 주변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그 중심은 썩고 도태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중심성이라기보다는 주변성을 포용하려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구모룡 서울 중심의 문화논리들이 주변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주변과 중심의 단순 이분법으로 되어 있지 않고 굉장히 중층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수도권이라 해도 공간정치학이라고나 할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권도 중심과 주변이 다층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부산도 마산 창원이 있고 또 그 주변의 농촌 지역들이 마치 프랙털 구조처럼 얽혀 있거든요. 그 얽혀 있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오히려 한국사회의 주변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중심성과 주변성이 단순화되어 있어서 주변성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인식들을 해낼 수 있는 문화제도적인, 또는 정치적인 고려가 그동안 없었거든요. 그런 제도가 뒷받침이 될 때 주변성은 살아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이도흠 조선조엔 지역마다 가단이 있었습니다. 가단이 단순히 그 지역의 몇몇 사람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라 그 인근의 문화예술인이나 지식인들이 다 모여서 시가를 향유하는, 주변 지역들을 포괄하면서 문화권을 형성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는 지금 자연스럽게 대안까지 넘어가는 건데 그것이 네트워킹을 통한 문화권 형성, 그리고 또 하나는 들뢰즈 개념을 빌리자면, 리좀적 연대를 형셩해야 한다고 봅니다. 뿌리줄기는 하나의 중심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권력이 완전히 분산되어 있고 출구도 무한대로 열려있고, 그러다 보니까 몇몇 뿌리를 잘라낸다고 해서 절대 죽을 수가 없죠. 그런 식의 리좀적인 개념의 네트워킹이 지역을 살리고, 중심도 계속 부패하지 않고 활력과 창조성을 갖게 하는 길인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은봉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부산에 가면 ≪신생≫도 있고, ≪시와 사상≫도 있고, 대구에 가면 ≪녹색평론≫도 있어요. ≪녹색평론≫은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생태에 관한 이론이나 사상을 가장 선진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거든요. 김종철 선생 같은 분의 역량과도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녹색평론≫에는 순수하면서도 생태적 사유와 발상을 가진 시들이 실리고 있고, 또 대구에서는 ≪시와반시≫도 나오고, ≪사람의 문학≫도 나오고, 광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최근에는 강릉에서도 ≪시와세계≫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또 대전에서도 최근에 좋은 매체들이 나오고 있어요. 대전에서도 ≪시와정신≫, ≪애지≫, ≪문학마당≫이 나오고 있는데, 아직 명확한 자기 색깔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매체의 지향성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보면 빠르게 문화나 문학에 중심의 다각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또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의 권력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구모룡 저는 우리 지역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어요. 근대화 과정에서 경부개발의 축이 한국의 수구세력인 보수 세력인데, 부산이 제2의 도시여야 한다는 세력들은 실질적인 분권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저는 부산이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산이 오히려 부산보다 발전했어요. 그리고 일제시대까지는 부산보다 인천이 더 발전했었는데 냉전체제로 분단국이 되면서 인천이 내려앉았거든요. 대륙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부산이 비대화된 것인데 냉전체제가 와해되면서 부산의 역할은 전보다 나아질 게 없어요. 인천이 훨씬 더 발전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왜냐하면 인천이 자기 지역에 대한 인식을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해문화≫도 그렇고 인천의 지식인들이나 문화인들이 지역성과 세계성의 비전을 결합시켜서 인천을 활력 있는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서울 옆에 있는 인천이 죽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아나고 있어요. 이건 굉장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자기 지역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통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왜 드리느냐 하면, 자꾸 서울 중심주의를 비판하다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은 분명히 지역 스스로 혁신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서울 중심주의가 모든 원인이 아니고, 지역 스스로 혁신하지 않는 것도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5. 서울 중심의 매체의 문제점
고명철 다시 문학 본래 쪽으로 들어오면 서울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전국 단위로 내고 있는 매체들이 작가의 독점화 현상이라든지, 주요 시인들의 작품을 흡수하는 영향력이 상당히 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담론들은 지역에서 만들어내는 담론과 담론의 경쟁력 면에서 봤을 때 월등하게 낫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서울 지역 매체에 대해서 작가와 시인들이 선호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내는 매체들에게 이것만큼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 이런 것들이 있으면 꼭 집어서 이야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도흠 저도 주간을 하면서 발행인에게도 우리 ≪문학과경계≫의 독자는 7천만이 될 수는 없다. 만 명만 잡아도 성공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했습니다. 만 명에 맞춰서 이념과 편집 방향을 분명히 하여 그들이 원하는 잡지를 만들자는 거죠. 지금 중앙에 있는 잡지들이 7천만까지는 과장이라 하더라도 몇십만 몇백만 명을 독자로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 같아요. 잡지마다 창간 이념이 있고 모토가 있는데 그걸로 아우를 수 있는 독자와 필자층만 유지를 하라 이거죠. 그런데 여기도 넘보고 저기도 넘보고, 그래서 필자도 독점하고 다수 대중까지도 영합하려다 보니 상업화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최소한 지양해야 되지 않겠느냐, 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구모룡 제가 보기에는 서울에서 나오는 잡지들, 특히 계간지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지식 사회의 담론 생산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 담론을 주도하고 이끌어나가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측면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매체가 나오는 출판사와의 문제인데, 상업적 연계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점이 있거든요. 잡지를 통해서 출판자본을 확대하고 계열화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지요. 90년대 들어와 문학도 문화산업의 형태가 된 것 같아요. 서울의 경우는 그래서 매체가 자본의 간섭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담론을 리드하는 매체의 경우도 왜 저런 시집을 냈을까, 왜 저런 소설을 왜 냈을까, 의구심을 줄 정도로 자본논리를 거부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중심부의 한계는 매체는 매채대로 가고 출판은 출판대로 가야 되는데 그게 자기 식구 챙기기식으로 가는 것 같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문단이나 문학 생산에서 많은 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 관계에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 데에 선을 긋고 깨뜨리지 않으면 매체의 선명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이은봉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는 매체들이 지난 시대 중심적으로 담론을 생산해 왔다는 것에 일단 동의를 합니다만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지금도 서울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매체들이 일반 대중들이라든지 또는 지식인이라든지 하는 정작의 독서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말하자면 197,80년대 후 1990년대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담론들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지금은 상당히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울의 매체들이 출판자본에 의해 완전히 잠식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정당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최근에 들어서는 담론 생산에서도 과연 서울의 매체들이 선진적으로 일하고 있느냐 하는 면에서 의심이 가요. 가령, 저로서는 ≪시와사람≫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이라든지 ≪신생≫이라든지 ≪녹색평론≫의 매체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서울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비해 결코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현실적으로 더 선진적이지 않느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 ≪창비≫에서 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담론 생산의 노력일까요. 생산적인 논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에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섣부른 추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창비≫가 카운터 파트너를 ≪문학과사회≫에서 ≪문학동네≫로 잡았고, 그 둘이 협력하여 문학의 헤게모니를 나누어 가지려는 의도된 작업으로도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굳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소리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지요. 시끄러워야 쳐다보지요. 오늘의 예술이나 문화, 특히 문학의 경우 영상매체의 힘이 너무도 커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그 소리가 문학 바깥으로 나가질 않거든요. 그렇게 해서라도 문학의 목소리를 문학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를 하지만, 어떤 현상이든지 단일한 의미만 갖고 있지는 않잖아요. ≪창비≫와 ≪문학동네≫를 중심으로 벌이고 있는 최근의 논쟁에는 다양하고 중층적인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 한 의미는 문화의 중심을 지속적으로 나누려는 속셈과 결부되어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는 거지요.
고명철 매체의 경쟁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는 점도 중요한 부분 같습니다.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진가요. 왜 저널에서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문학권력 논쟁 말씀입니다. 그런 특이한 현상은 비판자들은 메이저 매체를 향해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해 나갔습니다만, 그 메이저 매체에서는 이렇다할 생산적 대응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일축을 해버렸다는 점입니다. 그 안에는 여러 선생님께서 얘기하신 그런 문제들이 복합적인 다층구조처럼 되어 있다는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아까 말씀하신 ≪창비≫라든가 ≪문학동네≫에서 특정 작가를 대상으로 한 논쟁의 경우는 출판자본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그 작품성을 놓고 양쪽의 미학적인 지점들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출판시장에서 매체가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논쟁 속에서 매체의 경쟁력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하는 부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도흠 문제의 핵심은 결국 문학잡지라는 것은 기존의 권위에 저항하는 양식이어야 되고, 문화산업과 거리를 두고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스스로 문화산업이 되어버렸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형식도 내용도 문화산업을 닮게 되었고, 또 출판에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시스템 자체도 문화산업에 포섭되어버린 겁니다. 이른바 배수아 논쟁도 그것의 연장선이라고 봐요. 문화산업에 포섭된 문학매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면, 예전의 문학이 영상보다 월등한 시대에는 그나마 대중성이나 상업성을 갖고 버틸 수 있었지만, 영상이 오히려 소설이나 문학보다도 더 대중성을 갖고 있는 지금은 힘을 잃어갈 것이라는 것이죠.
이은봉 문제는 영상과 문학을 비교할 때 문학 쪽의 지식인들이 영상 쪽의 지식인보다 별로 월등하지 않다는 것이죠. 세계를 보는 시각라든지, 철학적 배경이라든지,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는 능력이 과거에는 문학 쪽 지식인들이 훨씬 뛰어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소설가들보다 영화감독들이 현실을 훨씬 더 정확하게 본단 말예요. 그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훨씬 더 정확하게 영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우리 문학으로서는 정말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배수아 논쟁의 경우도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끌기 위한 문학 쪽의 안간힘으로 보이거든요. 어떻게든 문학 쪽으로 중심으로 이끌어내려는 힘든 노력의 하나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나는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인데, 문예창작과가 전체적으로 다 위기에 처해 있어요. 지방에 있는 대학 문예창작과에는 학생들이 지망하지를 않아요.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문학 지망생들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죠. 요컨대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문학 쪽으로 오지 않고 영상 쪽으로 간다는 말이에요. 문학을 담당하는 지식인들이나 정책을 맡은 사람들로서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하겠지요. 중심을 다시 탈환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정밀하게 인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위대한 소설가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는 못하다는 거죠.
6. 문예진흥법 개정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
고명철 영상세대의 급부상으로 인해 문학 쪽에 좋은 인적자원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승인할 수만은 없는 게 문학이 오늘날 처해 있는 곤혹스러운 모습입니다. 이것과 지난 해 연말에 문예진흥법이 개정 통과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요. 통과된 개정법을 보면, 이제 문학, 미술, 음악, 전통예술 등 이런 기초예술에 대한 문화예술정책을 문화산업의 논리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물을 얻는 데 비중을 두는 게 아니라 기초예술의 대사회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문화적 관점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문학인들 개개인 몫으로 돌리기에는 한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에 대한 예술정책이랄까요, 문학정책 그 부분에 대한 지혜를 모으고 있는데요. 어떻습니까? 문예진흥법 개정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이은봉 영상산업이 부가가치가 있고, 그래서 이른바 일본의 욘사마 열풍이나, 아시아 전체에서 <겨울연가> 등 거대한 한류 열풍의 흐름도 만들어냈지만, 잘 알다시피 그 근본에는 문학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식들을 못 하고 있는 거죠. 좋은 시는 시 한 편만 갖고도 아주 뛰어난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이런 점만으로도 문학 쪽에 많은 인적 자원이 들어와야 되는데, 그런 인식이 안 되었기 때문에 안 들어오는 것이지요. 나로서는 기초예술에 대해 늦게나마 정부 쪽에서 적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게 봅니다. 올해 6월이면 문예진흥원은 문화예술위원회로 역할과 기능, 그리고 명칭이 바뀝니다. 중앙정부의 문예진흥원뿐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에도 문화예술위원회가 만들어지지요. 그러면 좀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구모룡 저는 국어국문학과나 문창과 소속이 아닙니다. 지난 10년 동안 문학을 가르치지 않고 동아시아학과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그 동안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웃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문학을 문화의 큰 틀에서 가르쳐야 되고 그런 맥락에서 문학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는데 그 동안에 사실은 분업화되어 예술도 경계를 넘나들지 못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을 말하지만 시나 소설도 서로 넘나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이나 티브이나 대중문화 쪽에 인력을 많이 빼앗기고 있는 게 사실인데 문화산업의 기초 영역에 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런 큰 틀 속에서 문학의 위상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가르쳐야 하고 문학을 다른 영역에 접목시키고 반영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과들이 문학과 문화를 함께 아우르는 개념으로 갈 때 문학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은봉 문예창작과에서 그런 교과과목을 운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방송문학론이라든지, 카피문학론, 시나리오작법, 사이버문학론 등 문학과 관계된 인접 예술에 대해 많이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에게 그런 마인드가 되어 있지를 않아요. 문예창작과에 가면 시나 소설만 써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 졸업생을 보면 시나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방송작가나 시나리오작가, 신문사나 출판사, 논술학원 등에서 많이 일을 합니다. 심지어는 게임시나리오작가나 만화시나리오작가로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도흠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투항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죠. 소설이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잡설, 패설로 문학 범주에도 못 들어갔지만 100년 만에 왕좌 자리를 차지했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영상을 무시하더라도 영상의 시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인데 저는 중요한 것이 영상이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달한다 하더라도 모든 영상 텍스트는 언어로 전환되어야만 의미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영상시대가 100년 1000년 계속된다 하더라도 결국 문자적 인식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문자적 인식과 상상력을 문학이 다음 세대에게 전승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영화를 즐겨 보지만 또 다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단 말예요. 그럴 수 있는 문학의 고유한 영역을 어떻게 지켜내고 특성화시키는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명철 지난해 4월 기초예술범문화예술인연대가 출범을 해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언론에서 상당히 반응을 보였고 또 실제로 국회에서 문예진흥법 개정이 입법화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도 하였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게 문자로 할 수 있는 고유한 인식을 최정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문학정책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문학정책은 개별 문학하는 사람들의 창작활동에 대한 기금 지원, 심하게 말씀드리면 불우문인 돕기의 차원이지, 장기적인 비전에 의해서 창작하는 사람들이 세계적 시야를 확대하여, 정말 세계 예술가다운 인물을 배양해내내기 위한 정책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 전반적으로 문학하면 굶어 죽지 앞으로 성공하겠느냐 하는 인식은 기초예술이 사회의 발전에 무형의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사회가 합의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기초예술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끌어낼 것이냐에 대해서 이제는 국가가 예술가 개개인의 몫으로 돌리지 말고 함께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기본 문제였거든요. 물론 이러한 과제 해결을 위해서는 상당한 진통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문학에 종사는 문학인들에게 이러한 정책 방향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이고, 국민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모룡 저는 이런 문제를 접하면서 뭔가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와 영상이미지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라는 세대들의 경우에 기술 이데올로기에 중독이 되어 있다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결국 영상이나 대중문화예술 쪽으로 자꾸 가게 되는데, 그 기술 이데올로기 뒤에는 사실 자본이 있는 것이죠. 이런 문제 인식을 기초예술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논리에 포함해야 되는 거거든요. 국가는 계속 기술 우위 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기초예술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야 안 됩니다. 삶을 기술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전제를 깨뜨려주는 것도 해야 되고, 두 번째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2의 문맹퇴치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70년대 제1의 문맹퇴치운동에서 읽고 쓰고 말하는 네 가지 능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지금은 문학과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이런 것들을 제대로 읽어내는 능력을 목표로 삼는 거지요. 그런 것을 재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문맹이라는 설정이 필요합니다. 교육적인 목표도 국가적인 목표도 그렇게 설정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국민 대다수가 문맹인 것이죠. 그래서 다시 국민 모두가 문학을 제대로 읽어내야 하고 드라마나 영화도 제대로 읽어내야 됩니다. 그런 운동을 벌이자면 교과 과정이 바뀌어야 됩니다. 중고등학교에 지금 문화교육이 없습니다. 대학에서도 새로운 교육목표를 설정해서 전반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교육부와 문광부는 생각이 다를 겁니다. 입시 시스템을 허물어야 하니까 안 받아들이려 할 겁니다.
고명철 작년에 이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선교사가 기초예술연대의 논의 중에 문제 하나를 제기했습니다. 지금 일선 학교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학교교육부터 문화에 대한 비평교육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했는데, 이 분은 가급적이면 교육해방 인간해방 차원에서 과목을 많이 만들지 않고 되도록이면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많이 부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술교과목이 더 들어옴으로써 본의 아니게 아이들이 진학 공부의 바쁜 와중에 다시 짬을 내서 그 활동을 하게 하면 학교교육이 또다시 파행이 우려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것이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문화예술을 담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점 차이인 것 같습니다.
이도흠 저도 구모룡 선생 말씀대로 문맹퇴치운동 내지는 텍스트 읽기 교육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활성화되고, 대안교육도 되고, 나중에 제도 속에 들어가서 교과과정에도 들어가도록 실천을 해야 합니다. 포르노를 못 보게 한다고 아이들이 안보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를 보면서도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매체 내지는 텍스트에 대한 비평교육이 활성화되어야 됩니다. 다른 장에서 몇 년을 한번 실험해보았어요. 대학에 와서는 오히려 못했는데 초등학생들에게 「토끼와 거북이」를 읽고 주제가 뭐냐 하면 모두 대답합니다. 그 다음에 토기와 거북이에 분명히 잘못된 걸 찾아보라고 하면 다 찾아서 발표해요. 그 다음에 다시 쓰라고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거북이가 가다가 토끼를 깨우고 이에 토끼가 감동해서 어깨동무하고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결말구조만 바꾸어도 아이들이 보는 세계관은 굉장히 달라진단 말예요. 그런 식으로 매체 비평과 다시 쓰기 교육이 상당히 중요한 교육이고 또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은봉 결국 제대로 문화를 읽어내는 능력을 길러야 하고, 그런 능력을 기르는데 문학 내지 문학교육이 일정한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늘 해왔던 이야기지만 이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겁니다. 우선 교사들이 이것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부터 문제가 됩니다.
구모룡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1인칭 관찰자 시점인데 그 소설을 설명하면서 영화를 보여준단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면서 이해를 하라 이건데, 영화는 관찰자 시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 변별성을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소설과 영화가 가지는 매체적 특성이라든지 관점이라든지 이걸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면 문학을 위해 도움이 되는데 오히려 아이들은 영화가 쉬우니까 영화를 보려고 하는 거지요. 멀티미디어 교육을 잘못하면 오히려 문학을 죽이는 겁니다.
이도흠 긍정적인 것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영상 내지는 대중문화 매체 읽기를 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는 7차 교육과정에 반영이 되고요. 그런데 그게 단시일 내에는 이루어지기가 힘들다고 봐요. 우리나라 교육부가 부처 중 가장 보수적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은봉 이런 작업은 사실 문학이 그 안에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문학의 정신은 일종의 부정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계몽의 정신이거든요. 국민들의 의식수준이라든가 문화적인 안목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런 작업을 학교교육을 통해서만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하는 매체운동은 본래 학교 밖에서 하는 것이지요. 이젠 실질적으로 대중하고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 즉 시낭송회나 소설낭송회 등의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될 것 같아요.
구모룡 기초예술교육 문제에 있어서 소위 예술전문가들이 교육현장에서 교과를 맡을 수 있는 부분과, 그 다음 학교 밖에서 지역단위의 장을 만들어 실제 현장 교육과 연계시키는 방안도 있을 수 있거든요. 각 지역에도 훌륭한 예술가들은 많습니다. 이들의 역량을 아이들 교육에 활용하면, 이상적인 형태는 학교에서 해야겠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런 속에 문학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역할이 되면 문창과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은봉 지금 민족문학작가회의 쪽에서는 객원문예교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요. 지난번엔 농촌에서 하는 농활 프로그램도 진행한 적이 있고요. 어쨌든 학교에서는 국어선생님들이 문학교육을 담당하고 있잖아요? 문학교육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국어 선생님들의 문학적 능력이 높아져야 되는데, 지금 중고등학교의 한문이나 고전, 문법 등을 가르치는 국어선생님들의 경우 문학교육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 해요. 연극영화과 같은 경우는 연극교사 자격증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문학에는 고등학교에 문학과목이 따로 있고,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따로 있는 데도, 문학교사 자격증은 따로 없어요. 문예창작과 출신들한테 일정한 재교육과정이나 시험 등을 거치도록 해서 문학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증을 준다든지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학교에 전문적인 문학교사 한 사람만 있어도 국어교사와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 국어교사 전체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거든요. 문화와 문학을 재대로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 자체가 국민들의 의식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고, 결국은 근대를 극복해 나가는 운동의 하나가 아닐까요.
고명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은봉 선생님 같은 경우 현장에서 창작 선후배 동료 문인들을 많이 접하실 거 아닙니까? 그러면 문학 현장에서 애로사항도 많을 거란 말이죠. 그런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문예진흥법도 개정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켜야 하는데 현재 지금 한국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이 문학제도적인 측면과 창작인의 입장에서 가장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제도적인 사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셨을 텐데요.
이은봉 한국의 문학 현장에서 작가들이 처해 있는 가장 큰 고통은 그것이 직업이 못 된다는 것이죠. 소설가들 중에는 더러 소수의 전업 작가들이 있기는 한데 시인들 중에는 거의 없거든요. 시를 쓰는 것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프로가 된다는 것인데, 나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프로의식을 가진 시인들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개는 다 아마추어예요. 이유는 시로서는 먹고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시는 실질적으로 부업일 수밖에 없어요. 1980년대에 작품 활동을 같이 했던 제 친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수로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들보다 약간 다음 세대들은 아직도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시간강사를 하는 시인들도 있지만 그것조차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시인들이 많은데, 그들 시인들이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화장실에서도, 버스를 타고서도, 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기초예술가들 중에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우수한 자질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들의 생계를 보전해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곧 2만 불 시대에 돌입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도 부분적으로는 문예진흥원에서 그 일을 하고 있지요. 올해에는 창작기금을 시집의 경우 800만원을 지원하고, 소설집의 경우 1000만원을 지원하는데, 이 돈이 발간 비용으로 다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문예진흥원에서도 실제로는 발간기금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문인의 생계를 보전해주는 기금으로 지원해주는 성격이 강하거든요. 엄정한 기준을 통해 돌아가면서라도 3년 단위로 지원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계를 보전해주면 그들이 프로정신을 갖고 작품을 생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그들이 생산한 문학작품을 중심으로의 스토리뱅크를 만들어 산업화할 수도 있고요.
구모룡 창의한국과 새 예술정책을 작년에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크리에이티브 어메리카라는 것을 한 십 년 뒤에 모방한 작품인데, 모방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 사회가 이런 정책을 내놓았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문제는 창의한국과 새 예술정책에 대해서 대중들이 잘 모른다는 겁니다. 교육계도 잘 모르고 문화예술 부문에 종사하는 지방공무원들도 잘 모릅니다. 문광부에서 그런 엄청난 정책을 만들어놓고 왜 홍보를 제대로 안 하느냐 이거죠. 분명히 그대로는 못 하죠. 경제기획원하고 상의를 하면 그만한 예산도 안 줄 테니까. 그렇더라도 대단히 좋은 이 정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해요. 아마 예산이 안 나올 거니까 힘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국민의 여론을 조성할 수 있거든요.
고명철 오늘 매체운동을 문화운동적 관점에서 어떻게 잘 해나가야 되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 지혜를 모았고 근대극복이라는 부분과 탈근대라는 부분을 종다양성과 지역의 가치를 복원하는 문제로 초점을 모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매체들을 직접 하시면서 한국문학 또는 한국문화가 앞으로 지평이 어떻게 확장되어야하며 외형적인 확대보다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편집이라든가 전반적으로 매체의 문화운동적 관점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로 정리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7.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위해
이도흠 이제 21세기가 됐으면 양자들이 종합되어야 합니다. 전에 무슨 문학 심포지엄에 갔다가 보니까 아직까지도 우리가 참여 순수 논쟁을 되풀이하고 있더라고요. 서로 장단점이 있잖아요? 모더니즘은 형식의 실험을 모색해서 낯설게 하기를 이루고 창의성과 독창성을 획득하고, 리얼리즘은 삶과 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지요. 한쪽만 있으면 절름발이니 이제 종합이 되어야지요. 또 하나는 한국예술이 보수건 진보건 떠나서 미약했던 것은 형식의 면이라고 봐요.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수상한 작품을 보고 느꼈던 것은, 이 정도의 주제와 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충분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형식의 소설은 처음 보았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시에서는 좀 있지만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고 그 형식 자체가 내용을 말해줄 수 있어야 될 것 같구요. 또 하나는 역사적인 자아와 실존적 자아도 종합되어야지 않겠는가 하는 거예요. 리얼리즘이나 진보적 진영에서는 역사적 자아는 강했는데 실존적 자아는 약했고, 모더니즘 쪽이나 해체 쪽으로 가면 실존적 자아는 있었으나 역사적 자아는 없었단 말예요. 그 두 가지가 결부가 되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문자적인 것과 영상적인 것도 이제 결합하는 쪽으로 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이미지는 문자로 사유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으로 가져다주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고, 문자는 이미지로 볼 수 없는 명료한 세계의 현실을 의미로 밝혀준단 말예요. 이렇게 종합적으로 가야 한국문학도 또 다른 지평을 열 수가 있고, 세계성도 확보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노벨문학상도 받을 수가 있고, 지역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하는데 늘,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진지하고도 구체적인 분석과 총체적인 통찰이 바탕이 되어야지요. 요즘 소설 보면 현실이 없는 공허한 관념이나 환상을 펼치거나 지엽말단적인 욕망에 휩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모룡 지역매체의 관점을 말씀을 드리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 80년대 벌어졌는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심부 핵심 매체들을 폐간시켰습니다. 그런데 창비와 문지가 폐간되니까 지역의 무크지들이 살아난 겁니다. 이건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죠. 그러니까 중심부를 해체하면 지역이 살아난다는 이야기죠. 독재정권이 그런 역설을 만들어낸 것이니 참 아이러니하죠. 지금은 새로운 형태로 민주 정부가 그런 걸 육성해야 할 단계가 되었다고 봅니다. 과거의 무크 시대를 돌아보면, 저는 ≪지평≫이라는 문예지에 관여했는데, 당시에 서울이든 광주든 부산이든 대구든 마산이든 무크지끼리는 서로 연결이 되고 소통이 되었습니다. 대등한 가치와 이상을 서로 인정하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런데 민주화되고 매체등록을 복간하면서 다시 서울이 흡수해 가는 과정을 보았는데, 이제 강제력이 일어나지 않고도 지역이 자신을 얻는 단계에 와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고, 두 번째는 지금 한국문학의 문제점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자본 기술에 의존하는 작품들이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타지라든지 엽기라든지 신기성 즉 새로운 걸 추구하는 시 소설들이 중심부에서, 소위 독자들의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자꾸 베스트셀러화되는 현상은 자본과 기술에 문학이 종속되는 현상인데 이건 반성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단계에 와서 어떻게 보면 시는 지역 우위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점이지요, 지금 한국시단을 보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시인들보다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이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그게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나타난 문학 지형 변화의 큰 모습인데 과거에는 서울의 중요한 매체에서 시집을 내는 지역시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90년대 넘어서서는 엄청나게 많거든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바로 시야말로 자본과 가장 거리가 먼 장르라는 거지요. 그래서 이제 시적인 역량이라는 것은 지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에는 시는 계속 지역적 가능성과 결부될 수 있다고 보는 거구요. 두 번째 소설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소설은 어차피 그동안 상업논리에 빠져 있어서 소설이야말로 대단한 문화산업 속에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즘 와서 소설 베스트셀러도 만 부가 안 팔리죠. 예전 십만 부 작가의 소설이 삼천 부도 안 팔린다는 이야기도 들리던데요, 저는 소설 작가들에게 새로운 전체성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그동안에는 인간과 사회, 인간의 전체성으로 소설을 써왔는데 이제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넣어서 새로운 전체성을 추구하는 소설이 나온다면, 좀 전 이도흠 선생 말씀대로, 한국이 세계 중심부도 아니고 주변부도 아닌 중간에 끼인 이런 지역에서 새로운 전체성을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작가가 나올 수 있는 건데 자꾸 그런 작가들을 문화산업적인 출판자본을 끌어들여서 그걸 후퇴시키고 있다는 거지요. 그런 노력들을 비평가들이 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비평가들이 출판자본에 소속되어서 자본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좀 줄이고 새로운 문학논리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왜 시는 지역으로 가고 있는가, 이런 점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중심부에 있는 비평가들이 문화의 거리를 개발하고 이끌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중심부의 미적 기준과 척도가 주변부와 다른 것이 아닌가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너무 위악적인 중심이 형성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그런 것들이 결국 한국문학을 후퇴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은봉 한국문학을 후퇴시키는 근거라고 할까요, 원인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와 관련시켜 얘기를 하면 한국문학이 지금 시든 소설이든 너무 끝에 취해 있다는 겁니다. 지엽적인 말단에 취해 있다는 거죠. 걸작을 생산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태여 총체성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종합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신과 우주까지도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인류의 출발지점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까지도 함께 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나와야 할 것이고, 비평이나 매체 쪽에서도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키워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적 자아나 역사적 자아의 통합뿐만 아니지요. 물론 통합적인 인식 능력을 갖는 철학들이 나오고 있는 과정이기는 하죠. 김지하 선생이 최근에 낸 책을 보면 하나의 상징코드로,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든지 들뢰즈의 카오스모스 등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끝과 처음을 같이 보자는 이야기이고, 미래와 과거를 함께 보자는 이야기죠.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를, 또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보자는 그런 이야긴데, 그런 것을 함께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문학 지식인들이 생산되어야 훌륭한 작품들도 생산될 것이고, 세계문학 및 세계예술과도 경쟁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지적 기반이 마련되어 가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명철 아주 오랜 시간 매체문화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아주 생산적인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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