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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 본지출신시인들 신작시/허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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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청미
바람이 있는 풍경
식탁 밑, 빈 소주병들 속에 웅크린
바람이 꽈배기처럼 뒤트는 걸 보니
오늘이 재활용품 수거날인 거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진,
암내나서 집 나갔던 네발짐승
저 바람 뭉치 앞에
앞집 문이 벽처럼 서있다
며칠 전, 위층 집을 팽창시키던 바람에
거실 깨진 유리창 파편이
1층 밖, 화단으로 꽂혔고
오늘은 그 집 할머니 굽은 등에 아이를 태우고
밖에서 서성댄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미궁의 집들
옵션으로 개구녘 하나 있으면
나는 바람 드는 날도 있지 않겠나
재활용 수거함 속으로 뛰어든 빈 병들이
딸그락 떨그럭 제 음절을 찾는다
식탁 밑 어둠을 털어내며 들숨 날숨
길게 목을 빼는 빠삐옹들
바람은 왜 밖으로 부는가
생텍쥐페리를 만나다
오후의 햇볕이 방안 가득, 에테르처럼 퍼지는
나, 그 속에 갇히다
완강한 유리창을 뚫고 꾸역꾸역 침투한
햇빛이 코끼리만큼 부풀고
나를 누르는 저 거대한 힘
내 속에 가시들을 쭉쭉 밀어내더니
코끼리는 그 속으로 제 몸을 구겨 넣는다
오! 황홀한 혼수(昏睡)여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똬리를 튼다
어디서 틈입했을까
유리벽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저 개미는
창 너머 귀가를 서두르는 듯하다
유리창은 완강하게 개미를 거부한다
가만히 궁리를 해봐
이 방안에는 빛을 삼킨
보아뱀 한 마리가 있을 거야
그것을 찾아서 삼켜봐
그것이 다 삭혀질 때쯤이면
네가 들어온 틈새가 보일지도 몰라
벽은 완벽하지 않지
보아뱀 등을 타고 오르는 개미의 더듬이가
유리창만큼 완강하다
앗! 일침의 긴 파장
저 미물의 독침 같은 입아귀가
기다림의 미학을 갈파하는가
오수(午睡) 속에서 만난 생텍쥐페리는
중절모자가 아닌
보아뱀을 쓰고 다녔다
그 속에 코끼리도 있는, 우화를
허청미․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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