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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 본지출신시인들 신작시/장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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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혜
푸른 껌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씹는다.
개 짖는 소리 들리는 초가집
벽에 붙여두었던 풍선껌을
초록크레용 넣으면 초록 잎이 되고
붉은 크레용 넣어 씹으면 붉은 꽃이 되는
한 덩어리 우울, 뱉고 싶어도 뱉지 못하고
우편함 지나 비둘기 떼 지나
자전거 타고 도서관 가면서 씹는다.
빨래 널다 잘못 걸려오는 전화 받으며
가격 파괴된 옷 입고 커피믹스 마시며 씹는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고개 내밀고 길 물으며
초등학교 동창 만나러 팔당댐 지나 찾아간
양평 보리밥집 황토벽에 기대
얼굴이 그대로네 말하며 씹는다.
낮잠 자다가 씹던 껌이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자르던 기억을
가방에서 너도 씹으라고 꺼내주는
무설탕 자일리톨껌을
산성비 넣어 씹는다.
씹을수록 푸른 산 푸른 들판뿐인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은 곳까지 와
전망 좋은 창가에 앉아 씹는다.
한그루 나무 둘레에 쳐진 세 개의 버팀목
떠도는 구름 셋 만난다.
셋 다 머리카락이 없다.
흐르는 세월이 뜯어 먹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구름 셋
밥을 먹으러 간다.
푸른 밥그릇 하나에
세 개의 숟가락이 놓인다.
셋 다 팔이 없다.
팔이 없는 구름 셋
지루한 영화를 보러 간다.
셋 다 눈이 없다.
눈이 없는 구름 셋
슬픈 노래를 들으러 간다.
셋 다 귀도 없다.
그저 그런 날들이 흘러가며
하나씩 잘라 갔다.
뿌리 없는 몸뚱어리 셋
변두리 정거장으로 굴러온다.
길이 생기면 살아야 한다고
스치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가로수를
제 목숨처럼 붙잡고 일어섰던
구름 셋 다시 사라진다.
장성혜․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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