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 본지출신시인들 신작시/서동인
페이지 정보

본문
서동인
설거지論
설거지를 한다
아내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그릇들은
이제는 내게도 몸을 허락한다
집 나간 아내의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행방을 수소문하듯 식기들을 수세미로 문지르자,
신혼시절 아내처럼 간지럽다고 야단이다
살갗 터진 빈 접시로 밤거리를 맴돌
세제 거품보다 더 부풀어 오른 아내의 소문을
수돗물로 헹궈내자 성한 밥공기 하나,
금이 간 밥공기를 껴안고 있다
서로를 감싸는 저들에게 흠이 무슨 소용이랴
꿈쩍 않고 포개진 한 쌍의 밥공기에
떨어지는 눈물이 밥알로 으깨진다
결혼사진 속 둥글게 오려진 아내 같은
파리한 숟가락을 설거지통에서 건져 올리자,
수면에 내내 아른거리는 얼굴이
주르륵 구멍 난 집 하수구를 흘러나간다
고무장갑을 벗으며 방으로 들어서자,
밑바닥이 드러난 아내의 화장품으로
분칠을 한 어린 딸아이는
내가 뒤적이던 구인광고를 깔고 잠이 들었다
TV 뉴스가 졸린 듯 쩍쩍 하품을 하다가
실업률로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밤이다
어떤 재회
주름치마 너울거리는 바다
속곳을 벗어던지면
개펄 더듬어 고막 잡는 울엄마
정글 속 남쪽나라 지도 같은 발자국
군사우편 소인처럼 푹푹 눌러 찍었지
백일해 앓던 누이 두 눈 감은
솔숲에서 꺾은 청솔가지로 군불 지펴도
곱사등으로 웅크린 서까래
잔기침만 뱉어내는 외딴집,
속절없이 ‘전선야곡’ 들려주는
라디오는 찌그러지고
석양이 문고리 잡아당기면
월남 간 아부지 기다리며
심지를 태우는 울엄마,
광화문 네거리,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타오르는 촛불 속에서 만났다
서동인․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 이전글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 본지출신시인들 신작시/박정규 08.02.23
- 다음글17호 창간4주념기념 특집 본지출신시인들 신작시/장성혜 08.02.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