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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특집/정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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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1회 작성일 08-02-2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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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말 한국문학의 비판적 반성․3

생태(환경)문학의 허와 실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위하여

정순진(문학평론가)


생태시의 양상과 한계, 그리고 그 대안에 대한 글을 고민하고 있을 즈음 뉴스는 연일 기상 이변으로 인한 재해를 보도했다. 작년 12월 26일,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해일의 공식 사망자는 16만 3천 명이지만 확인할 수 없는 사망자도 많아 실제 희생자는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기상 이변이 이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키려는 듯이 이어서 유럽 북부에 허리케인 수준의 폭풍우가 불어 닥쳤고,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폭설과 폭우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런 기상 이변의 가장 큰 원인은 석유, 석탄, 가스 등 화석 연료에 의존한 산업경제가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유발하여 역사상 어느 때보다 빠르게 더워지고 있는 지구온난화이며 남아시아 지진해일의 피해가 이렇게까지 커지게 된 데는 리조트 시설을 확대하여 관광수입을 올리려고 숲을 파괴하고, 관광 수입에 차질을 빚을까봐 지진 해일 경고를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한숨 돌리고 잊어버릴 일은 아니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이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녹색연합이 2003년 생태 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을 조사하여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모든 지구인이 한국인처럼 살아갈 경우, 지구가 2.26개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전력 사용량이 5800kwh로, 우리의 경제 규모 2배인 영국을 앞질러 일본, 독일을 뒤쫓고 있고 온실가스 배출 세계 9위, 석유 수입 세계 4위, 석유 소비 세계 6위를 기록하는 에너지 다소비 국가이다. 이렇듯 내 하루하루의 생활은 생태 문제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시에서는 그런 현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1998년 우리에게 필요한 생태 윤리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그 시적 형상화를 고찰한 글을 썼는데 생태시의 상황은 그 무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생태시는 나희덕의 지적처럼 의심과 낭만성 사이에 있다. 의심이건 낭만성이건 이런 상태의 생태시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 상황을 피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1. 마음과 몸의 거리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행복재활원 지나 배고픈다리를 지난다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전혀 행복하지 않을 때도
배고프지 않을 때도 그 곳을 지나야 한다
행복재활원 정문 앞에는
유난히 높은 과속방지턱이 있어
아무리 천천히 지나도 몸이 흔들린다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다리를 저는 아이들,
길 건너 마중 나온 엄마가 희미하게 웃고 있을 때
그 사이를 지나노라면 정상적인 몸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일종의 과속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차는 어느새 배고픈다리를 건너고 있다
가운데가 푹 꺼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천변을 끼고 낮은 지붕들이 늘어서 있다
누추한 담벼락에는 호박덩굴이,
다리 옆구리에는 담쟁이가 낮은 포복으로 세상을 건너고
배고픈다리 건너 창억떡집,
떡집의 제분기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많다
행복한재활, 배고픈창억,
그 높거나 낮은 마음의 턱을 넘으며
엔진은 갑자기 그르릉 소리를 낸다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이란
늘 그 모순형용을 지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희덕 「행복재활원 지나 배고픈다리 지나」 전문

이 시는 행복재활원과 배고픈다리를 지날 때 드는 시인의 상념을 진술하고 있다. 행복재활원 정문 앞에서는 과속방지턱에 걸려, 배고픈다리에서는 푹 꺼진 다리 가운데서 속도를 줄이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은 오늘 하루 내가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 생 전체가 통과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행복재활원을 지나면서는 ‘정상적인 몸으로/사는 일 자체가 일종의 과속이라는 생각’도 하고 배고픈다리를 지날 때는 주변의 낮은 지붕들, 누추한 담벼락, 낮은 포복으로 세상을 건너는 존재들, 입 다물고 있는 창억떡집 제분기를 바라보지만 시인은 그것을 ‘높거나 낮은 마음의 턱’으로 여길 뿐이다. 평생을 살자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고,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는 법이라며.
‘정상적인 몸으로/사는 일 자체가 일종의 과속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하지만 그 생각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시인이 차를 타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과속방지턱에 걸려 속도를 늦춘 사이 그런 상념이 불쑥 떠오르지만 차는 어느새 그곳을 지나쳐 시인을 다른 곳에 실어다 놓기 때문에 그 생각을 더 진전시켜 몸으로 실천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일상을 떠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즐기는 여행자에게 원주민의 고통과 슬픔은 그 여행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효과적인 배경이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과속이라는 생각이 들지만’과속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의 가장 큰 문제는 머리로 생각은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인데 생태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 주로 시인들이 어울린 자리에서 원로시인 한 분이 젊은 시인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자네도 차 가지고 다니나? 시인은 차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되네. 그걸로 마지막이야.”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뒤로 그 말씀은 불쑥불쑥, 특히 혼자 차를 운전하고 갈 때면 폐부를 찌르곤 한다. 물론 난 시인은 자가용을 타고 다녀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로 발명되었지만 각자가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시간을 더 많이 누리게 되지는 않았다. 차가 없었다면 가지 않을 더 많은 곳을, 더 먼 곳을 자동차로 움직이며 번잡하게 사느라고. 실제로 한국의 승용차 연간 평균 주행거리는 일본이나 프랑스의 10,100Km에 비해 2배가 넘는 25,700Km로 넓고 광활한데다 대중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미국의 17,900Km보다도 길다.
나 자신을 포함해 최소한 생태계의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만이라도 되도록이면 혼자 승용차 타는 횟수를 줄이고, 쓸데없이 먼 길 나다니는 일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걱정하고 몸으로는 그 걱정을 만들고 있다면 그런 자가당착이 어디 있겠는가.
이문재의 다음 시는 생태계의 위기와 관련해 마음의 깨달음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가 아님을 단호하게 언명한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지구의 가을」에서

우주에서 와서 우주로 돌아가는 쌀 한 톨, 그 과정에 내가 있다. 나 역시 우주에서 와서 우주로 가는 존재로 그 과정에 쌀이 있다. 이 시의 결구는 모든 존재의 생명을 완성하는 저 아름다운 순환의 고리가 내 몸에 들어와 끊기는 마당에 ‘마음으로 온갖 욕심 버리’는 일은 온전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문재의 다른 시 「도보순례자」는 마치 「지구의 가을」 속편처럼 읽힌다. 마음이 깨달은 이후의 다짐을 결연하되 나직하게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며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  
―「도보순례자」 전문

마음의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몸의 실천이다. 안달하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살아야지 마음먹어도 나날의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은 결단코 깨달음이 아니고 지식인의 허위에 찬 구두선일 뿐이다.
시인이 돌아가고자 하는 삶은 자연스럽다. ‘두 손과 두 발에게 머리 숙이’며 몸이 할 수 있는 만큼만 누리고, 몸의 오감에 정직하고, 몸이 내리는 판단을 존중하는 그런 삶.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삶. 문명을 건설하며 사람을 자연에서 분리시켜 이제는 낯설어진 삶. 시인은 그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빈번하게 쓰인 ‘-리라’는 아직 그 행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리는 종결어미이지만 막연한 추측보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표지로 읽게 되는데 그것은 ‘순례’라는 제목 때문이다. 순례란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종교적인 목적으로 차례차례 방문하여 참배하는 일이기에 이 일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한때 꾸어보는 꿈이 아니라 구경을 찾아가는 구도적인 행위임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마음은 생태계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몸은 직접 영향을 미치기에 생태문제를 고민할 때는 생각의 초점을 몸에다 맞추는 일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2. 먹고 먹이기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가장 큰 본능은 생명의 지속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먹을 수밖에 없다. 주지하다시피 식물이야 광합성작용을 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모든 동물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니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 먹이를 앞에 두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종교 유무와 상관없이 생태적인 의무라고 하겠다.
다음 시는 내 입으로 찐 고구마가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존재가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세 해쯤 묵은 밭 빌리고 암소와 쟁기도 빌려
시뻘겋게 갈아엎고 두둑 두툼하니 올려붙인 뒤
듬성듬성 고구마순 꽂은 그 여름내 해 쨍쨍
소나기 삼형제 자주 지나가며 무지개 이따금
호수에 하늘문 세우더니 거기 기러기 내려앉기 전
붉은 두둑 헐어 열댓 발자국마다
울퉁불퉁 고구마 한 가마씩, 나는 허리 펴며
푸른 하늘에 흰구름 대고 크게 외쳤다
고맙습니다

찐 고구마 한입 뚝 베어 물면
삶은 눈두덩이 따듯해질 만큼 곰곰 달다.
―이면우 「붉은 고구마」 전문

우리는 흔히 농부의 수고에만 감사하지만 천체와 기후, 동물과 식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고구마 하나도 키워내지 못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직접 다 해낸 사람은, 누구라도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수고가 결실을 거둘 수 없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기에 어느 문화권에서고 인류의 조상들이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으며, 이 시에서 시인도 고구마를 수확하며 삼라만상이 듣게끔 큰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외친다.
시의 첫 행 ‘묵은 밭 빌리고 암소와 쟁기도 빌려’에서 거듭 쓰인 동사 ‘빌리다’는 밭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 맛보는 삶의 단맛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내는 동시에 삶에 대해 보다 근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무엇이 내 것인가? 밭이? 암소와 쟁기가? 해가? 무지개가?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 실제 우리의 삶은 잠시 빌려 살다 가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시에는 고구마를 생산하기까지의 과정만 밝혀져 있지만 찐 고구마를 먹으려면 몇 과정이 덧붙여져야 한다. 고구마를 씻어 적당한 양의 물과 함께 불에 올려 적당한 시간만큼 찌는 사랑의 노동. 그러니 모든 먹을 걸 앞에 두고 우리는 한없이 겸손해지며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제 몸을 송두리째 나에게 주는 생명체의 헌신과 그 생명체를 키운 삼라만상의 마침한 조화와 그 생명체를 나의 먹이로 만들어준 사랑의 노동에.
다음 시에는 나에게 먹히는 존재를 둘러싼 감사와 기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 스스로 다른 존재에게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나타나 있다.

그 전에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감나무 두 그루 서있던 우리 집을 찾아
자주 생선함지 이고 드나들던
그 아주머니 아니신가
지도 뉘기신가 해꾸먼유 모처럼 만난
반가움에 함박꽃 웃음을 무는 중늙은이 아낙네
두어 개 모스라진 앞 이빨
추위에 벌겋게 부어오른 두 볼따구가
아무래도 두부를 닮았다
큼직큼직 가로 세로로 칼질이나 되었을 뿐
아직은 뜨끈뜨끈 온기도 남아있을
두부를 바라보며 나도 두부장수 아주머니에게
먹음직한 두부쯤으로
보여졌으면 좋겠구나 생각해 본다.
―나태주 「두부」에서

생선함지 이고 드나들던 중늙은이 생선 아주머니가 이제는 두부장수가 되어 사람들에게 두부를 먹인다. 그 두부장수 아주머니에게서 큼직큼직한 두부의 모양새와 두부의 뜨끈뜨끈한 온기를 느낀 시인은 자신도 그 아주머니에게 “먹음직한 두부쯤으로/보여졌으면 좋겠구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먹고 이만큼 산 것처럼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맛있게 먹히고 싶다는 이 바람이야말로 다른 생명을 먹음으로써만 살 수 있는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최상의 소망이다.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지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 안 먹을 것을 구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적정수준에서 먹되 내 몸의 일부가 되는 숱한 먹이에 감사하고, 먹으려고만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되고자 할 때 비로소 생명의 그물망에서 삼라만상과 함께 살아갈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으리라.

3. 최소한의 예의와 보루
생태계가 먹고 먹히는 섭식관계이면서 동시에 빈틈없는 상호의존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해도 사람이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일 뿐, 실제로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생태계가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에게 잊지 않아야 할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권정생은 이렇게 말한다.

하기야 우리 모두 끼니마다 밥상에 시체를 잔뜩 차려놓고 즐기며 먹는 드라큐라들이 아닌가. 시체를 먹고 시체로 된 옷을 입고, 시체로 만든 이불 속에 누워자고, 시체 위를 걸어다녀야만 살아갈 수 있는 목숨이니, 그 누구도 큰소리 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 한녘에 미안한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엄청난 파괴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권정생이 최소한의 예의가 ‘미안한 생각’이라고 말한다면 이정록은 ‘물끄러미’라는 부사를 제시한다.

모내기를 마친 논두렁에
왜가리가 서있다, 이가 빠진
무논의 잇몸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잡으려다
어린 벼 포기를 짓밟은 것이다
진창에 처박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 때문에
봄 논의 물살이 몸살을 앓는다
물은 저 떨림으로 하늘을 품는다
하늘을 따라 키 큰 미루나무가 문안 간다
쇠뜨기도 척추 한 마디를 뽑아 수액을 건넨다
물벼룩과 개구리와 어린 모가
가 닿아야 할 아뜩한 밥의 나라, 세상에
써레질을 마친 논만큼 깊은 것이 있으랴
식도를 접고 벌 받듯 서 있는 외발에게
많이 저리냐? 두렁 쪽으로 물결이 일렁인다
어린 순 부러지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발길 사나운 것이 삶이라서
늘 포만 다음이라야 깨우치는 나여
물끄러미, 개구리밥을 헤치고
마음속 진창을 들여다본다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에 흙탕물이 인다
언제 눈물샘의 물꼬를 열고
깊푸른 하늘을 들일 수 있을까
정처만이 흙에 뿌리를 박는 것,
마음의 바닥에 물끄러미라고 쓴다
내 그늘은 얼마나 오래도록
물끄러미와 넌지시를 기다려왔는가?
물꼬소리 도란거리는 마음과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질 때까지
나는 왜가리 발톱이거나
꺾인 벼 이파리로 살아가겠지만, 끝내
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
넌지시와 물끄러미 사이에서
써레처럼 발목이 젖어 있기를
―「물끄러미에 대하여」 전문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외발로 논에 서있는 왜가리를 묘사하고 있는 15행까지와 그 정경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머지 19행. 전반부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은 왜가리가 먹이를 잡으려고 움직이다 논 한켠에 외발로 서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움직임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미세한 떨림과 일렁임을 포착해 삶의 근원적 정경으로 바꾸어낸다.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해도 먹이를 잡으려다 애꿎은 생명을 짓밟은 왜가리, 억울하게 짓밟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이 생존을 사이에 두고 먹고 먹히는 살벌한 죽임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 때문에 몸살을 앓는 논의 물살, 그 물살에 비친 하늘을 따라 문안 가고 수액을 건네는 미루나무와 쇠뜨기는 돌보고 격려하는 따듯한 살림의 세계를 보여준다. 아무 일 없이 고요하게만 보이는 ‘써레질을 마친 논’은 서로 다른 존재인 ‘물벼룩과 개구리와 어린 모가’ 다 같이 가 닿아야 할 ‘아뜩한 밥의 나라’인 것이다.
이 정경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죽임의 세계와 살림의 세계를 모두 다독이는 물결의 존재이다. 누구나 쉽게 ‘살림’의 가치를 말하지만 살림의 세계는 죽임의 세계와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조차 날마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곳이며 나는 죽임을 통해서만 살아가는 존재이다. 내가 죽임의 세계에 관련되지 않았을 때는 살림의 가치만 찬양하면 되지만 모든 목숨은 죽임의 세계에 잇대어 있으니 현실적으로는 죽임의 세계가 살림의 세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죽임의 세계와 살림의 세계가 서로 맞물려 전체 생태계가 지속되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후반부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자기 다짐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 순 부러지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발길 사나운 것이 삶’이고 우리는 모두 ‘왜가리 발톱이거나 꺾인 벼 이파리로 살아’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무논의 물결’이 되자고, ‘넌지시와 물끄러미 사이에’ 있자고 다짐하는 것이다. ‘세상의 떨림을’ 읽을 수 있는 존재, ‘써레처럼’ 발목을 적신 채 땅을 고르고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물끄러미 그리고 넌지시 바라보는 존재가 되고자 다짐하는 것이다.
이 다짐은 한없이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가 생태계에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바로 그것뿐이다. 가슴 한켠에 미안한 생각을 지님으로써 개개인의 삶에서 죽임의 세계와 살림의 세계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 그를 통해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높여가는 것뿐인 것이다.
윤재철의 「인디오의 감자」는 종의 다양성 이야기를 쉽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본 안데스산맥
고산지대 인디오의 생활
스페인 정복자들에 쫓겨
깊은 산꼭대기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
주식이라며 자루에서 꺼내 보이는
잘디잔 감자가 형형색색
종자가 십여 종이다
왜 그렇게 뒤섞여 있느냐고 물으니
이놈은 가뭄에 강하고
이놈은 추위에 강하고
이놈은 벌레에 강하고
그래서 아무리 큰 가뭄이 오고
때아니게 추위가 몰아닥쳐도
망치는 법은 없어
먹을 것은 그래도 건질 수 있다니
전제적인 이 문명의 질주가
스스로도 전멸을 입에 올리는 시대
우리가 다시 가야 할 집은 거기 인디오의
잘디잔 것이 형형색색 제각각인
씨감자 속에 있었다
―「인디오의 감자」 전문

이 시의 장점은 ‘우리가 다시 가야 할 집’을 구체적 사물인 ‘인디오의 씨감자 자루’로 제시하는 점이다. 시인은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인디오의 생활을 보다가 문득 그 삶이 우리가 절멸을 피할 최소한의 보루임을 깨달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독자에게 추체험시키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시’라는 부사가 지시하듯 우리의 보루는 새로 지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인류가 오랫동안 짓고 살아왔던 집이다. 오래된 인류의 지혜를 여전히 지켜가고 있는 인디오의 생활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그들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소의, 그리고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소비를 먹고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을 부풀리는 자본의 원칙만이 전 지구를 휩쓰는 시대, 자본에 눈먼 우리는 우리를 절멸시키는 길로 빠르게 내달리고 있다. 최소한 이 속도를 늦추는 일, 궁극적으로 이 길에서 벗어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생태시의 몫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걸 실천에 옮기지는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시인이라면 아직껏 만물이 한 형제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태적 가치를 선언적으로 호소하는 시는 많아도 생태적 가치와 충돌하는 나날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파하는 시가 드물다는 것은 시인의 앎과 삶이 떨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시란 스스로의 체험과 고민에서 우러나야 설득력을 갖는 법이니 생태적 가치를 온몸으로 생활하는 시인이 많아져야 감동적인 시도 써지고,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현재의 생활 태도를 바꿔 소비를 줄여나가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정순진
․1957년 대전생
․저서 󰡔김기림문학연구󰡕 󰡔한국문학과 여성주의비평󰡕 등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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