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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시/천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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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은
퉁퉁마디(Saliconia herbacea L)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이곳은 소래포구 옆, 염전이 있던 갈대밭,
비가 그친 뒤에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갈대밭이 다 젖었습니다
소금쟁이가 기어 다니던 웅덩이 속의 길도
개들이 드나들던 철조망 밑의 움푹 파인 길도
사마귀의 길도, 날개도 젖었습니다
모든 길들이 고요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너무 먼 길이 될 것 같아서
혼자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해가 뜬 뒤에 갈잎이 마르고
갈잎 밑에서 젖어 있는 사마귀의 고불고불한 길이 마른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바람이 마른 잎을 세게 흔들어 주면
수만 마리 새떼처럼 갈대가 날아오르고
고불고불한 길 위에 한 발을 올려놓는
사마귀의 긴 다리를 볼 수 있습니까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그때는……
나도 한 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하얀 뼈가 녹아있는 이 염전을 못 떠납니다
강구
강구를 찾았다. 여러 사람에게 길을 물었으나
강구에는 가지 못했다
길은 있으나 강구는 없는가
강구도 길도 없었던 것일까
긴 망설임이 길도 목적도 지워버렸다
영덕을 지나 울진을 지나
불영계곡과 부석사에만 갔다
이 여름여행의
모든 길은 물이 되었다
모든 시간은 바람이 되었다
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송천강의 저녁 강물 소리는
길도 없이 누구의 마음속으로 스미는 걸까
미안하다
부석사의 풋사과나무들이여
계곡의 물소리여
마음이 없는 나는 너희들의 위로를 거절한다
오래 전, 내 마음을 던져놓은 곳
강구, 강구가 맞는가
밀란쿤데라의 농담을 읽었다
루치에, 그녀를 못 본 지 십오 년이 흘렀고……
그녀가 보헤미아의
서쪽 어디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 빛이
길도 없이 흩어진다
나도 농담 한마디 해야겠다
죽도록 너를 사랑했다
너를 못 보고 십오 년이 흘러도, 이십 년이 흘러도
나도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마음도 없이, 또 한여름이 간다
천혜은
경북 안동 출생
․2002년 ≪시현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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