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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시/예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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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현연
은색 회색 보라색
11월 먼지 낀 들판
너와 나는 소풍을 간다
시든 클로버밭 은박돗자리를 펴고
말없이 김초밥과 물을 먹는다
낯선 아이들이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다닌다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새처럼
바람에 펄럭이던 수십 개의 은박돗자리들
일제히 날아올라 흐린 하늘 먼 곳으로 날아간다
먼지 피어오르는 들판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너의 웅크린 뒷모습
점점 작아지는 너를 향해 나는 손 흔들지만
바람개비 들고 달려가던
낯선 아이들만 붉은 뺨으로 미소짓는다
깨어나면
들판에 혼자 누워 있는 나
보랏빛 바람이 사납게 입을 벌리고 덤벼든다
어둑해지는 하늘 가득 남으로 날아가는 은빛 새떼
아버지와 아들
―폴 게티 자서전
폴 게티는 아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 제일의 갑부였다
마피아는 아들의 귀와 코를 잘라
폴 게티에게 보냈다
그 대목을 펼쳐둔 채 나는 잠들었다
왜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지 않았을까?
얕은 잠 속에서 둥글게
의문부호가 소용돌이쳤지만 툭,
깊은 잠 속에서 모든 것이 정지했다
내가 잠든 사이 낡은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고
온통 젖어버린 문자들
손바닥으로 훑어내자
푸른 멍처럼 묻어나는 기록들
나는 그 생애의 뒷부분을 알지 못한다
가끔
비 들이치는 창을 닫다가 생각한다
오래 전에 지워진 이야기
아들을 구하지 않은 아버지의 남은 생애
빗물과 함께 휘발된 검은 페이지
예현연․
200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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