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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시/정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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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란
데칼코마니
아이가 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짜고 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각각의 색들을 뭉텅뭉텅 짜놓은 아이는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 아귀를 맞춘다
끈끈하게 달라붙은 도화지를 쫙 펴자
나비 한 마리 내려와 앉는다
기하학 무늬를 가진 날개
우연의 결과가 신기해
아이는 자꾸만 물감을 짠다 그때마다
좌우대칭의 무늬가 생겨난다
젖은 날개 말리는 나비 보며
잊었던 말을 떠올린다
―난, 칠십 살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어!
아직은 살 날이 더 많다고 방심한 사이
벌써 십 년이 지났다
서른다섯, 한편엔 살아온 시간이
다른 한편엔 살아야 할 시간이
좌우대칭으로 놓여 있다
컵 속의 버드나무 잎
승강장에
버드나무가 있다
인부 몇이서 가지치기를 한다
잘린 가지에서 아픈 기억이
말줄임표로 떨어진다
버드나무를 말하기 위해 버드,라는 소리를 내는 순간 버드나무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버드나무 아래 벤치에서 나를 기다리곤 하던 사람,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한잔의 커피를 마실 여유뿐이었다 더런, 들고 있는 컵에 버드나무 잎이 떨어지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엔 시간이 부족해 컵 속에 맴도는 나뭇잎만 바라보았다 그가 유난히 느린 보폭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어주려고 서있었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
가지를 싣고 사라진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옹이 진 버드나무한테서
절단지증을 앓는 소리 들린다
*절단지증:팔이나 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수술 후에도 없어진 부위가 아프거나 가렵다고 느끼는 증세.
정경란․
2004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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