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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외국문학순례/이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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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64회 작성일 08-02-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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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외국문학순례/이가림

아폴리네르의 시적 모험
―새로운 에스프리의 미학―


이가림(시인)

“l905년경에서 l920년 사이에 프랑스 예술이 열어놓은 모든 길에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또 그가 쓴 시 한편 한편 속에는 어떤 새로운 시인이 발견되는 느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의 진면목을 포착하는 것이 옳을까? (……) 그는 무엇보다도 사상의 모험가였다. 이 말이 내포한 모든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자유와 위험과 모험 등의 개념들을 가지고 실재적이며 자극적이고 위험천만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일단 광맥이 발견되고 나면 그는 그것을 개발하는 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버리곤 했다. 「그가 단 한 편의 시를 쓰기만 하면 다른 여러 시편들이 뒤따라 태어났고 󰡔알코올󰡕 같은 시집 한 권을 펴내기만 하면 그 시대의 모든 시의 방향이 송두리째 발견되어 버리는 것이었다.」고 필립 수포는 썼다. 아폴리네르 자신이 어느 날인가 「나는 씨를 뿌리듯이 내 노래를 뿌린다.」고 호기 좋게 말했다.”

마르셀 레몽이 말했듯이,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I9l8)는 새로운 시의 광맥을 발견하기 위해 “자유와 위험과 모험” 의 길을장메칭거가 그린 아폴리네르 초상화(1910) 항상 앞서서 걸어가며 “씨를 뿌리듯이 노래를 뿌린” 현대적 올페라 할 수 있다. “낡은 시의 놀음”의 규칙들에서 벗어나 자기 시대의 새롭고 불타는 듯한 삶에 꿋꿋이 발 딛고 서 있는 그의 시는 때로는 네르발을, 때로는 베르렌느를, 때로는 하이네를 연상시키는 감미롭고 우수에 찬 애가의 마력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 시의 방향을 수립하는데 기여한 시인들(알프레드 쟈리, 막스 쟈꼽, 앙드레 살몽) 가운데, 가장 완전한 독자성을 획득한 ‘전위적인’ 시인으로 아폴리네르를 꼽아야 할 것이다. ‘환상파’(fantaisisme)의 기수인 그는 회화나 영화, 또는 음악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시의 영역에 입체주의(cubisme), 미래주의(futurisme), 시뮐따네이즘(simultanéisme) 등의 이론을 전개하여 충격적인 실험과 감각의 새로운 기능을 광범위하게 펼쳐나간다. 진정한 리얼리즘에 맞는 새로움의 창조를 현대 예술이 가야할 지평으로 제시하면서 '호기심'과 '놀라움'의 의미를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새로운 정신과 시인들」이라는 글은 아폴리네르가 I9l7년 가을 비유 콜롱비에 극장에서 행한 강연으로서, 그 자신의 정신적 유서임과 동시에 현대 시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는 선언문이 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것은 모두 놀라움 속에 있는 것이다. 새로운 에스프리도 마찬가지로 놀라움 속에 있다. 그것은 가장 싱싱하고 가장 참신한 것 속에 있다. ‘놀라움은 커다란 새 원동력이다.’ 새로운 에스프리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예술 운동, 문학 운동과 구별되는 것은 실로 이 놀라움. 새로운 에스프리가 놀라움에 부과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에 의해서이다.”

이와 같은 탐색의 대담한 확대와 상상력의 해방을 통해서 아폴리네르는 공식화된 유미주의와 속물성을 배격함으로써 머지않아 다가올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즘을 예고하고 그 선구자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특히 l913년 그가 33세 때 엮어낸 첫 시집 󰡔알코올(AIcools)󰡕과 1918년 죽기 전에 비로소 끝낸 󰡔상형시집(Galligrarnmes)󰡕은 프랑스 현대시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새로운 에스프리’의 기폭제로 평가되고 있다.
마리로랑생이 그린 아폴리네르 초상22세의 폴란드 태생의 어머니와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 사이에서 1880년 8월 26일 로마에서 태어난 아폴리네르는 출생 신고 기록부에는 ‘기욤 알베르 블라디미르 알렉상드르 아폴리네르 드 코트로비츠키’라는 긴 이름으로 기재된다. 도박을 즐기며 놀기 좋아하는 어머니 코트로비츠키 부인의 행적을 따라 기욤은 모나코의 생 샤를르 학교, 칸느의 스타니슬라 학교, 니스의 고등학교 등을 전전하다가 리용을 거쳐 1899년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자기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빠진 그는 행정 관리나 은행원 자리를 찾아봤지만, 외국인이며 아무 자격증도 없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는 취직을 위해 타자 학원 초급반에 나가기도 했으며 막노동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1901년 5월 ‘파리 금고’에서 사귄 친구인 르네 니코시아의 어머니 주선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독일 과부, 드 밀호 자작 부인의 딸 가브리엘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 해 8월 드 밀호 부인을 따라 라인란트(라인강 서부 지방)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가브리엘의 영어 담당 가정교사인 영국 처녀 애니 플레이든(Annie Playden)을 만난다. 이른바 아폴리네르의 ‘독일 시대’를 열어주는 라인란트의 전원생활은 이처럼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와 같은 가정교사 신분인 한 낯선 처녀를 보는 순간부터 아폴리네르는 조급한 사랑의 열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랑에 완전히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폴리네르의 절제하지 못하는 위압적인 태도가 이 젊은 여교사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것은 아폴리네르의 연애 전략이 매우 서툴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알코올󰡕의 「라인강 시편」들이나 「사랑받지 못한 자의 노래」 같은 애달픈 짝사랑의 비가를 태어나게 한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아폴리네르가 라인란트에서 애니 플레이든과 함께 지냈던 기간은 기껏해야 8월 한 달뿐이었지만, 시인에게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남긴 애니의 영상은 「라인강 시편」들 도처에 나타난다.

우리는 바람 둘러쓰고 작은 돌담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중략)……
독일 땅 파리한 가을에 별이 뜨고
어둠이 다가와 눈물 흘리면 빛은 우리 발끝에 스러졌다
―「애가」 부분

눈시울 빛깔 라일락 빛깔의 콜히쿰꽃이 피어나고
너의 눈동자는 그 꽃과도 같이 보랏빛 돌아
눈시울 같은 가을 같은 자줏빛 돌아
내 인생은 네 눈동자 때문에 천천히 중독된다.
―「콜히쿰꽃」 부분

키리코가 그린 아폴리네르 초상(1914)이렇듯 직접적으로 또는 어렴풋이 숨겨져 있는 암시만으로, 젊은 영국 처녀의 영상이 라인란트의 풍경과 어울려 묘사된다. 서글픈 어조로 노래 불려지는 이러한 「라인강 시편」들 외에도 󰡔알코올󰡕에 수록되어 있는 다른 작품들 「밤바람」, 「가을」, 「병든 가을」등도 애니 플레이든의 추억과 은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902년 8월 말경 밀호 자작부인과의 계약 기간을 끝낸 아폴리네르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의 나플 가에 살고 있던 어머니 및 동생과 합류, 한 은행의 말단 직원으로 취직한다. 고달픈 파리 생활에 깊은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아폴리네르는 몇 차례 우연한 사랑에 열중해 보기도 하지만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한다. 지워지지 않는 애니 플레이든의 영상이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다.
l903년 11월 아폴리네르는 첫 번째 런던 여행을 시도, 애니와의 관계를 부활시켜 보고자 했다. 그러나 보람 없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어서 다시 l904년 5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런던 여행을 감행, 애니에게 적극적으로 청혼까지 했으나 여전히 그녀를 불안하고 두렵게 했을 뿐이다. 그녀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면 그녀를 납치하겠다고 협박하는 이 끈질기고 위험한 ‘코스트로’(본명이 코스트로비츠키인데서 그의 학생 시절 친구들이 부른 애칭)를 피해, 그녀는 주소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무렵 아폴리네르의 마음을 온통 지배한 것은 애니뿐이었다. 이러한 열띤 사랑의 홍역을 치른 뒤에 나온 시집이 󰡔알코올󰡕이니 만큼, 거기에 수록되어 있는 거의 절반 가량의 시편들이 미국으로 도망간 영국 처녀에 대한 감미롭고 애달픈 추억을 담고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5행으로 된 60연의 긴 길이에 의해 󰡔알코올󰡕의 다른 작품들을 압도하고 있는 「사랑받지 못한 자의 노래」는 “계절과 장소가 뒤섞이고 라인강의 아지랑이와 런던의 안개가 뒤섞인 가운데 기도와 애원과 위협과 거짓말이 시작이고 끝이었던 어느 보람 없는 탐색의 서정적인 전사(轉寫)”(파스칼 피아)로서, 애니와의 불행한 사랑을 노래한 가장 감동적인 한탄가라 하겠다. 특히 1행(“어스름 안개 낀 어느 날 저녁 런던에서”)과 59행(“지난겨울 독일에서”)을 보면, 이 시가 애니에게 입은 사랑의 상처를 모티브로 하고 있음이 뚜렷이 확인된다.

어스름 안개 낀 어느 날 저녁 런던에서
내 사랑을 닮은 부랑아 하나
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흘낏 쳐다본 그의 시선이
부끄러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중략)……

멀어져가는 저 여자인지
지난겨울 독일에서
내가 잃어버린
이제는 다시 못 볼 그녀인지
모를 거짓 사랑아 잘 가거라
―「사랑받지 못한 자의 노래」 부분

그러나 이러한 애니 플레이든과의 쓰라린 결별이 있은 뒤, 또 하나의 아름다운 불사조 같은 정열이 아폴리네르의 가슴속에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시인에게 다시 한번 ‘사랑받지 못한 자의 노래’를 쓰게 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과의 만남이다.
피카소가 그린 아폴리네르 초상화(1912)그가 파리의 라피트 가에 있는 클로비스 싸고의 화상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젊은 여류 화가인 마리 로랑생을 처음 본 것은 l907년 5월이다. 당시 22살의 마리 로랑생은 어머니와 함께 라 샤펠 구에 살고 있었는데, 얼마 후 오퇴이유로 이사하게 되며, 한편 아폴리네르도 몽마르트르 언덕을 떠나 미라보 다리 가까운 오퇴이유의 그로 가 15번지에 거처를 정하게 된다. 1912년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이 파국으로 끝나고 아폴리네르는 저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이 집에서 쓴다.
「미라보 다리」에는 마리 로랑생을 가리키는 어떤 암시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세느 강과 잃어버린 사랑이 함께 흘러가는 덧없음을 노래한 이 시가 ‘오퇴이유의 추억’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른다
우리들의 사랑을
나는 기억해야만 하는가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왔었다

밤이여 오라, 시간의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중략)……

사랑은 간다 이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간다
삶은 얼마나 느린 것인가
또 희망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

밤이여 오라, 시간의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날들이 가고 달들이 가고
흘러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시간의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1912년 2월 1일 ≪스와레 드 파리≫지 창간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 시에는 구두점이 있었으나, 이듬해 󰡔알콜󰡕에 수록되면서 ‘운율과 시구의 분절’에 성숙미를 부여하기 위해 아폴리네르는 일부러 구두점을 모두 삭제해 버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작품은 첫 연에서부터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을 낳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번역에서도 흔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네” 식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것은 원 시의 구분과 의미를 정확히 살린 것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지난날 사랑을 나누던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오늘도 세느 강은 흐르고 있는데, ‘나’(시인)만이 그 지나간 사랑을 미라보 다리 위에 서서 괴롭게 회상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쓰디쓴 회한의 감정이 절절히 전달되도록 옮겨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왔었다”라든가 “희망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 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시인 스스로 사랑의 고통을 참으며 극복하려는 강인함, 삶과 운명에 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미라보 다리이 「미라보 다리」와 더불어 ‘크나큰 슬픔이 깃든’ 오퇴이유의 추억을 노래 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마리」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1912년 말이나 1913년 초, 다시 말해서 마리 로랑생과 결별한 뒤 고통스런 추억이 너무나 많이 얽혀 있는 오퇴이유로 매일 저녁 귀가하지 않기 위해, 아폴리네르가 생 제르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무렵의 작품이다.

마리 정녕 그대 언제 다시 오려나
……(중략)……
하얀 파도 넘노는 바다처럼
물결치는 그대 머리 어디로 가나
그대의 머리칼은 무엇이 되며
우리의 약속이 씨 뿌려진
그대 손 가을 낙엽 어디로 가나

낡은 책을 옆에 끼고
세느 강변을 걷고 걸었지
강물은 내 슬픔과도 같이
흐르고 홀러 마르지 않는데
한주일이 언제 끝나려나

「미라보 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잃어버린 사랑과 시간의 사라짐을 회한에 잠겨 안타까이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강물은 내 슬픔과도 같이/흐르고 흘러 마르지 않는데”라고 노래함으로써, 시인의 마음속에 마리 로랑생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사랑했던 여자 마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오퇴이유와 세느 강은 시인에게는 “미련없이 떠날 수는 없는” 아쉬움의 장소가 되며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강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훗날  󰡔양안(兩岸)의 산책자󰡕(19l7)에서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우리 인간들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미련없이 떠날 수는 없으며, 자신을 가장 불행하게 만들었던 장소나 물건이나 사람들이라도 고통없이 버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l912년 내가 그대 먼 날의 오퇴이유, 내 크나큰 슬픔 깃든 매흑의 거리, 그대를 떠날 때도 쓰라린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는 l916년 그 때에 가서야, 몰리에르 병원에서 두개골 수술을 받기 위해 다시 너에게 돌아가야 했다.”

“사랑스런 강이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 낮의 모습 밤의 모습 가리지 않고 나는 이 강을 자주자주 노래 불러왔다.”

이렇듯 시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불러일으킨 뮤즈(이 두 연인을 주제로 한 앙리 루쏘의 유명한 그림 「아폴리네르와 그의 뮤즈」가 있음)이지만, l9l4년 6월 21일 마리 로랑생이 젊은 독일인 화가 오토 폰 베에첸과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떠나버림으로써, 그것으로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뒤이어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마리의 여정이 스페인까지 연장되고, 그녀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에 아폴리네르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리네르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연인이 나타난다. 전쟁으로 인해 저널리즘과 조그만 출판사에서 도움을 받던 생계의 방편이 끊어진 그는 파리를 떠나 니스를 거쳐 육군에 입대한다. 1914년 l2월 4일 님므의 포병부대에 입대함으로써 그는 생계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어린 시절의 무대였던 남 프랑스의 태양 아래서 꺼지지 않는 향수를 달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린날의 리비에라로 돌아온 그는 화가인 로베르 모르티에의 주변에 있던 한 젊은 여인을 알게 된다. 󰡔상형시집󰡕의 몇몇 시편들에서 루(Lou)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 여인은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옹(Louise de Coligny Chatillon)이라는 이름을 지닌 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아폴리네르의 친구인 앙드레 루브레의 말에 의하면,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옹 양은 “아주 젊게 보이고, 재기 넘치고, 지친 데가 없고, 경박하고, 격렬하고, 어린애 같고, 민감하고, 파악하기 힘들고, 어딘가 약간 광적인 데가 있는” 여자이다.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 또한 루브레의 언급과 일치하고 있다.
아무튼 아풀리네르는 이 훌륭한 족보를 가진 젊은 여인에게 현혹되어, 마치 마돈나를 떠받드는 하인과 같은 태도로, 처음에는 최고의 치성을 올린다.

“그대를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한 시인이 그대를 마돈나로 선택하고 스스로를 그대의 가슴 뜨거운 하인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옵기를 빌 뿐입니다. 그 자애로운 손끝에 이 몸 입 맞추었던 어젯밤의 내 이웃이여.”

그러나 이내 아폴리네르는 어조를 바꾸어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애로틱한 찬사를 보낸다.

“나는 지난밤 한숨 못 자고 그대를 생각했습니다 ……(중략)…… 한순간 잠들어 보려고 눈을 꼭 감았으나 석류나무 빛나는 정원을 보고 말았지요. 그 석류 열매는 끝없이 커지는 그대의 가슴이었으니, 전설의 주인공이 접근 못 하도록 히페리온이 지키는 저 황금사과인들 그보다 더 아름답겠습니까.”

이와 같이 아폴리네르가 대담하게 접근하자, 루는 그에게 쌀쌀한 태도를 보인다. 12월에 싹튼 사랑이 이듬해 1월에 시들어간 것이다. 일시적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루가 님므에 주둔하고 있는 포병 38연대의 아폴리네르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금방 실증을 느끼고 만다. 1915년 3월 말 마르세이유에서 루를 잠깐 만나고 곧장 전선으로 가야했던 아폴리네르는 그녀의 단호한 결별의 통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루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며 육체적 정복의 쾌락을 음험하게 꿈꾼다. 이 무렵 루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대부분의 시편들이, 여자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릴 수 없는 포병 막사 안에서의 금욕에서 비롯된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장밋빛 시한폭탄 두 개가
앞섶 풀어헤친 두 젖무덤처럼
건방지게 꼭지를 내밀고 있다.
―「잔치」 부분

루를 알게 된 것과 거의 같은 무렵에 포병 하사 아폴리네르는 마들렌느 빠제(Madelaine Pages)라는 아가씨를 알게 된다. 1915년 1월 1일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니스에서 마르세이유로 귀대하던 중 아폴리네르는 같은 기차에 탔던 21살의 이 아가씨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니스에서 방학을 마치고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같은 2등 찻칸에 나란히 앉게 된 한 포병 하사의 말솜씨에 그녀는 마음이 끌렸다. 이윽고 그녀가 자기도 시를 좋아한다고 털어놓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폴리네르는 자신이 시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녀가 마르세이유 역에 내리기 전에 그는 이 아가씨의 주소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그의 시집 󰡔알코올󰡕을 보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19l5년 5월에 쓴 시 「영어로 된 그 한마디」는 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I love you)라는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마르세이유의 플랫폼에서 헤어지고 말았던 한 병사와 한 아가씨의 우연한 여행의 추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귀엽고 예민했던 그 아가씨,
마르세이유 역 플랫폼에서 갑자기 고개 숙인 채 가버렸다
병사 하나 야영의 화롯블을 보며
그 모습을 애써 찾는 샹파뉴 숲에
그 추억이 어른거릴 줄을
알지도 못하고
파리 페르라세즈공동묘지 아폴리네르 무덤에서 필자
이러한 만남 이후 아폴리네르는 편지를 통해 마들렌느에 대해 점점 열기를 더해 간다. 그 열정은 뜨거워져 급기야는 그 해 8월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그 청혼이 받아들여지고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곧 결혼식을 올리기로 두 사람은 합의한다. l9l6년 포병 소위로 진급한 아폴리네르는 휴가를 얻어 약혼녀가 있는 오랑으로 간다. 그는 다시 전선으로 되돌아와 거의 매일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마다 시를 곁들인다. 이 편지들에 곁들여 보낸 50편 가까운 시편들은 대부분 나중에 󰡔상형시집󰡕 속에 묶여진다.
1915년 8월 30일자 편지에 곁들인 「있다」라는 제목의 시는 마들렌느를 위해 쓴 것으로,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불꽃을 꿈꾸는 아폴리네르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내 사랑하는 여인을 데려간 배 한 척이 있다
하늘의 구더기 같은 소시지가 여섯 있다 별이 거기서 태어난다
내 사랑의 원한을 품은 적의 잠수함이 있다
내 주변에 포탄이 박살난 일천 그루의 작은 전나무가 있다
독가스에 눈멀어 걸어가는 보병이 있다  
우리가 니체와 괴테와 퀼른의 참호에서 엉망으로 싸운다는 것이 있다
내가 마들렌느의 편지를 받고 애태운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시인의 번뜩이는 열정과 환상은 1916년 5월 철모를 뚫고 들어온 파편 하나가 그의 관자놀이에 위험한 상처를 입힐 때까지 이어진다. 애신느 전선의 뷔트 숲에서 입은 이 관자놀이의 부상으로 파리로 후송된 그는 당시 육군병원 별관인 몰리에르 관에서 수술을 받는다. 그의 오랜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두개(頭開) 수술 이후 성격이 눈에 띄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마들렌느에 대한 열정도 급격히 식어버려 파혼까지 하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태도 변화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하겠다.
애니, 마리, 루, 마들렌느로 이어지는 아폴리네르의 끊임없는 사랑의 편력은 소설집 󰡔학살당한 시인󰡕의 주인공 클로니아 망탈이 ‘샘물 곁에서 느끼는 갈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아폴리네르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큐피드의 화살을 꽂은 것은 쟈클린느 콜브(Jacqueline Kolb)양이다. 1918년 5월 2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시인의 아내가 되는 그녀는 ‘상냥하고 고결한 모습’을 지닌 ‘루비’ 같은 존재이다. 포르-파비에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폴리네르가 그녀를 만난 것은 1914년부터로 시인인 피에르 조드다앙의 집에서였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1914년 어느 날 밤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1917년 4월 우연히 얼굴을 마주 대하기 전까지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포르-파비에 부인은 말한 바 있다.
황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쟈클린느의 모습은 󰡔상형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빨강머리 여인」에서 그 구체적인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그녀가 다가와 자석이 쇠를 당기듯 나를 당긴다
그녀는 어느 근사한 빨강머리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그녀의 머리칼은 황금빛이라 말할까
꺼지지 않는 섬광
또는 시들어가는 다갈색 장미밭을 으시대며 걷는
불꽃이라 말할까

그러나 “자석이 쇠를 당기듯” 시인을 끌어당긴 이 “꺼지지 않는 섬광” 같은 여인과의 행복스런 결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독일군의 장거리포가 파리를 향해 불을 뿜는 가운데 거행된 결혼식이 있은 지 꼭 6개월 7일 만인 1918년 11월 9일 폐충혈과 스페인 독감에 걸려 아폴리네르는 38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페르 라쉐즈의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 보았던가.”


이가림
․1943년 만주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빙하기󰡕 등 ․역서 󰡔촛불의 미학󰡕 등
․인하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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