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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초점/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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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친일예술 담론의 현재
대동아공영론과 식민지 주체의 존립 방식
홍기돈(문학평론가)
1. 포스트콜로니얼의 어두운 그림자
1939년 10월 ≪人文評論≫이 창간되었다. ≪人文評論≫이 지향했던 바는 발행인 최재서가 창간호에 썼던 권두언 「建設과 文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世界의情勢는 時時刻刻으로 變하고 獨波間에는 벌서 武力衝突이 發生하야 歐洲의危機를 告하고있다. 그러나 東洋에는 東洋으로서의 事態가있고, 東洋民族엔 東洋民族으로서의 使命이있다. 그것은 東洋新秩序의 建設이다. 支那를 歐羅巴的桎梏으로부터 解放하야 東洋에 새로운 自主的인 秩序를 建設함이다.…(중략)…우선 새로운秩序에서 誕生되는 새로운性格하나를 創造하는것만하야도 前線에 奮鬪하는 戰士에 뒤지지않는 偉大한 建設的行動임을 우리는 알어야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東洋新秩序의 建設’이 내선일체의 논리와 결합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컨대 이광수가 “內鮮一體라 하여서 우리 성인들이 벌써 평등을 주장하여서는 아니 된다. 의무교육을 받고 병역의 의무를 치르고 난 우리 자손부터가 비로소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편에 무엇을 설정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마르크시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歐美的인 모든 개인주의적 향락주의적 신변잡기적 병적인 그러한 조류에서 탈출할 것이다. 그리하여 新生 新興 국민의 문학다운 문학을 건설할 것이다.” 따라서 ‘東洋新秩序의 建設’이라는 논리 아래 내선일체 지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人文評論≫이 창간되었다고 이해하여도 무방하겠다.
≪人文評論≫이 놓이는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시대적 풍향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서구의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김기림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름의 반성을 꾀하고 있다. 반성에서 그가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근대의 파산’이다. “나는 앞에서 우리는 或은 지난 十年동안 西洋의混沌을 模倣하지나않었나하는 疑問을 걸어보았다. 事實 오늘에 와서 이以上 우리가 ‘近代’ 또는 그것의 地域的具現인 西洋을 追求한다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우수워젔다. ‘유토피아’는 뒤집어진세음이되었다. 歐羅巴自體도 또그것을 追求하던 後列의諸國도 지금에와서는 同等한공허와 動搖와 苦悶을가지고 ‘近代’의 破産이라는 意外의局面에 召集된 세음이다.” 이러한 방식의 반성과 반성 위에 구축하는 ‘東洋新秩序의 建設’ 혹은 ‘東洋文化의 本質’ 추구는 1940년으로 들어서면서 식민지 조선의 주류담론으로 떠올랐다. “비평정신의 상실이 개탄되는 반면에 있어 과거를 반성하고 동양문화의 본질을 찾는 글이 성한 것은 무슨 때문인가, 확실히 전형기에 들어섰다는 증거이다.”라고 단언하는 최재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정세 하에서 이곳의 평론가들은 무엇을 사색하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 <東亞>, <朝鮮> 兩大 新聞은 恒例인 그 신년특집을 「東洋文化의 재검토」와 「30년대를 검토한다」에 바쳤다. 2월에 와선 <東亞日報>의 「조선문화 20년」 3월에 와선 <朝鮮日報>의 「문화문제 三人 鼎談會」가 있었고 6월에 <朝鮮日報>는 「현대가 요망하는 신윤리」의 특집, 6월에 ≪人文評論≫은 「동양문학의 재반성」의 특집, <朝鮮日報>는 「명일에 기대하는 인간 타잎」 특집을 내놓았다. 이와 같이 速射的으로 반성과 전망의 특집을 내놓는데 있어서 이 방면의 개인적 勞作도 불소한 중,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글로서는 金起林 씨의 「朝鮮文學에의 반성」(≪人文評論≫ 10월)과 金南天 씨의 「小說의 運命」(同 11월)이 있다.
해방을 맞이했을 때 식민지 말기에 팽배했던 이러한 움직임이 평가의 대상으로 불거진 것은 당연하다. 해방된 마당에 친일행각이란 응당 단죄의 대상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윤리적인 단죄를 넘어서서 ‘東洋新秩序의 建設’이라는 논리 구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이르면 상황은 그리 단순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친일문학의 과(過)뿐만이 아니라 공(功)까지도 따지는 임종국의 태도나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정종현의 관점은 그래서 주목을 요한다. 정종현은 친일문학론의 공적인 측면을 인정하는 임종국의 저항 민족주의가 기실 식민 담론의 답습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임종국은 친일문학의 공과를 따지는 친일문학론의 결론부에서 친일문학의 과(過)를 정리한 뒤에, 문학에 관념을 도입한 ‘국가주의 문학이론’, ‘동양에의 복귀’, ‘자유주의적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을 친일문학의 공(功)으로 긍정한다. 임종국이 긍정하는 친일문학의 세 가지 특징은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임종국의 진술은 저항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식민주의)와 대척적인 위치에 있지만 식민 담론 속으로 회수된다는 포스트콜로니얼의 명제를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종국의 사유는 해방 이후 국가 및 민족문화의 건설과정에서 식민지 제국에서의 경험이 어떻게 온존하고 반복될 수 있었는가를 일러준다.”
필자가 파악하기에 정종현의 입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먼저 ‘국가주의 문학이론’에 관한 대목. 해방 이후 가장 시급하게 부각될 사안은 ‘국가 만들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종현의 견해에 따른다면 해방을 맞은 조선의 국가 만들기는 철저히 형식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친일문학 혹은 친일사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던 ‘일본’이라는 대상을 단지 ‘해방된 조선’으로 치환시켰을 뿐 내용의 측면에서 변별되는 지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작가들이 아무런 자의식 없이 친일로 곧장 나갔다가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국가 만들기에 몰두했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견해이다. 만약 식민지 말기의 강압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친일로 이끌려 나간 문인의 경우라면 너무나 부당하지 않겠는가.
둘째, ‘동양에의 복귀’와 ‘자유주의적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론의 핵심에 이러한 내용이 놓이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논리를 뒤집어서, 두 가지 사실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대동아공영론으로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90년대부터 거세게 일고 있는 탈근대 논의는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을 배경에 깔고 있지만, 이를 대동아공영권으로 묶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할 따름이다. ‘동양에의 복귀’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에의 복귀=대동아공영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 혹은 대동아의 중심에 일본적인 사상이랄까, 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일본적인 사상’ 대신 ‘한국적인 사상’을 설정하더라도 대동아공영론의 논리 틀은 여전히 유지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국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양에의 복귀’와 ‘일본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양에의 복귀’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애당초 배제되어 있다. 그저 ‘동양에의 복귀’ 그 자체가 타국(타자)을 억압하는 자기 동일성의 논리라는 선험적인 입장만이 강조되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안의 파시즘’을 둘러싸고 활발한 논의가 펼쳐지고 있으며, 포스트콜로니얼의 방법론으로 분석된 연구 결과물들이 대거 쏟아지고 있다. 정종현은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제국/민족담론의 경계와 식민지적 주체」를 써 내려갔다. 필자는 이런 경향에 대해 적지 않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 제국과 민족담론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강조하는 나머지 ‘주체’가 딛고 설 수 있는 자리를 깡그리 무시해 버린다는 혐의 때문이다. 각자의 내면을 살폈을 때 모두가 파시스트이고, 개개인의 의식을 분석했을 때 모두가 제국주의의 공모자라면 대체 누가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문학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범박하게나마 ‘식민지의 주체’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논의의 중심에 ‘동양에의 복귀’(서구문명 비판)와 ‘친일 문제’가 놓여 있으니만큼 분석 대상으로는 이태준, 김동리, 서정주를 설정하였다. ‘동양에의 복귀’라는 측면에서 이들은 공통점을 가지지만, 친일에 대해서만큼은 각각 소극적 친일․친일의 거부․적극적 친일로 선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태준, 김동리, 서정주를 통해 식민지 말기 상황 속에 존재했던 자기 인식의 양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2. 대동아공영론과 자기 인식의 세 가지 양상
2-1. 이태준의 경우:‘이상견빙지’(尼霜堅氷至)의 의미
이태준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無序錄을 발행한 것은 1941년이었다. 정종현은 이 책에 나타난 동양적 세계의 지향을 분석하면서 일제의 대동아공영론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획득하지 못하는 이태준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다분히 대상을 자의적으로 선별하여 분석한 결과라고 파악된다. 무서록이 발행된 것은 1941년이지만, 이는 이전부터 꾸준히 써왔던 산문들을 모아 발행된 것이다. 따라서 무서록에 나타나는 동양적 세계의 지향을 대동아공영론으로 한데 묶기 위해서는 발표 시기에 따른 변화를 살펴보는 세심한 접근이 요구된다. 특히 대동아공영권이 발호하는 시기에 씌어진 글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글을 쓰는 주체가 제국주의 이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리 감각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古翫品과 生活」의 한 대목을 보자. “젊은 사람이 그야말로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것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각 방면으로 조로(早老)하는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청년과 고완이란 오히려 경계할 필요부터 있을는지 모른다. …(중략)…젊은 사람이 ‘현대’를 상실하는 것은 늙은 사람이 고완경(古翫境)을 영유(領有)치 못함만 차라리 같지 못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태준이 정작 강조하는 것은 ‘동양적인 미’의 추구가 아니라 ‘생활’(현대)이다. 젊은 사람에게만 이러한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다. 고완경을 영유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는 해당된다. “남 보기에는 한낱 파기편명(破器片皿)에 불과하나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무궁한 산하요 장엄한 가람(伽藍)일 수 있다. 고완의 구극경지(究極境地)로 여기겠지만, 주인 그 자신을 비실용적 인간으로 포로(捕虜)하는 것도 이 경지인 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古翫品과 生活」은 애초에 ≪문장≫ 1940년 10월호에 발표되었다. 그러니까 대동아공영권의 논리가 전면적으로 확산될 즈음 발표된 수필인 셈이다. 「古翫品과 生活」의 이런 견해는 소설 「영월영감」(≪文章≫, 1939.2~3)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난다. 영월영감은 성익의 처사취미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 “난 이런 처사취미(處士趣味)엔 대-반대다.…(중략)…더구나 젊은이들이……우리 동양사람은, 그 중에두 우리 조선사람이지, 자연에들 너무 돌아와 걱정이야.…(중략)…자연으로 돌아와야할 건 서양사람들이지. 우린 반대야. 문명으루, 도회지루,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루 자꾸 나가야 돼……”. 영월영감이 성익에게 나이를 묻고는 “서른둘! 호랑이 같은 때로구나! 왜들 가만히들 있니?”라고 질타하는 대목이나 성익이 “계획? 내 자신에게 지금 무슨 계획이 있는가?”라고 자성하는 장면을 보면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가 어디인가는 분명하다. 바로 일제의 대동아공영론과 정면으로 맞서는 자리이다.
물론 작가 이태준은 그 자리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식민지 말기 ≪新時代≫ 1944년 6월호에 발표된 「목포 조선 현지기행」은 이를 보여준다. 전쟁에서 사용될 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선전하기 위해 목포에 다녀와서 쓴 글인 만큼 친일적 요소가 어느 정도는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글의 전반적인 흐름은 현장의 묘사에 기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동아공영론은 어느 대목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친일의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목포 조선 현지기행」의 이러한 측면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친일 혐의가 과연 제국주의와 민족담론 사이에서 주체의 자리를 상실해 버린, 그러니까 제국주의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거리 감각을 잃어버린 작가의 의식․무의식적 지표로까지 해석될 단초를 제공해주는가. 쉽게 긍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목포 조선 현지기행」의 다음 두 부분에 관심을 갖는다.
첫째, “나는 이번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의 일원으로서 총력연맹(總力聯盟)의 지시를 받아 이런 나무들이 환생하는 목포조선철공회사의 조선현지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라며 기행의 원인을 밝히고 있는 장면. 자발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일제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은연중에 못박아두고 있는 셈이다. 둘째, “자기 배가 바다로 나가는 것을 자기 자식이 세상으로 나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숭고한 것은 사상이라기보다 먼저 이런 본능적인 감정이었다.”라며 굳이 사상에 대한 본능적 감정을 우위에 두는 대목. 어쩌면 이 글 또한 사상과는 무관하게 그저 문인으로서의 본능적인 감정에서 씌어진 그런 류에 속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주위의 압력에 의해 쓸 수밖에 없었던 강압적 상황에 직면했다면 작가로서 이것 말고 달리 어떤 선택이 가능했을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으로서야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 정도는 덧붙일 수 있겠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많은 이들이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로 침잠해 들어갔다. 동양에 대한 관심의 확대는 이와 함께한다. 하지만, 동양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쏟아왔던 이태준은 오히려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족 현실의 실감 포착으로 선회한 것이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며 “이상견빙지(尼霜堅氷至)”를 되뇌는 「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을 보라. 다음 발표된 작품 「고향」(<東亞日報>, 1939.4.21~28)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는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조선인이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수모라든가, 조선인임을 자각하는 지식인들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양상이 그려져 있다. 물론 수모를 주고, 소외를 시키는 이들은 일제(세력)와 이에 결탁한 조선인들이다. 이태준이 1931년 봄에 일어났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소설화하기 위하여 뒤늦게 1938년 중국 장춘(長春)까지 취재를 떠났던 까닭도 여기에 추측할 수 있다. 중국관민과의 마찰로 인해 한때 전국적 규모에서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을 소설로 되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바로 ≪文章≫ 1939년 7월호에 발표된 「農軍」이다. 그러니까 「고향」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일본의 국경 넘나들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인 지식인의 비애라면, 「農軍」에서는 살기 위해 무작정 중국의 국경으로 넘어 들어간 조선인 이민족의 비애를 표현한 셈이다. 앞에서 살펴본 「영월영감」 또한 민족 각성의 흐름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태준이 1938년과 1939년 이태준이 발표한 단편소설은 이처럼 「패강냉」, 「고향」, 「영월영감」, 「농군」을 제외하고는 「阿蓮」 단 한 편밖에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필자는 여기서 “이상견빙지”를 중얼거리던 「패강냉」의 ‘현’이 어떻게 작가 이태준 위에 그대로 포개지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점차 기승을 더해가게 될 대동아공영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2-2. 김동리의 경우; 화랑의 세계와 반일의 논리
김동리는 자신의 큰형인 범부에게서 “무소부지(無所不知)와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인간”, “반신적(半神的) 인간”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 백씨가 지상에 있었던 두드러진 천재의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에게 만약 천재를 뒷받침할 만한 건강과 의지와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던들 공자나 기독에 준하는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럴 정도로 김동리는 범부를 믿고 따랐으며, 범부의 세계 안에 철저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이러한 김동리가 범부에게서 받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은의’ 가운데 첫머리에 오는 것이 화랑담의 전수이다. “내 伯氏씨는 同氣로서는 물론, 스승으로서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恩義를 나에게 끼쳐주신 분이다. 특히 내가 人生에 대해서 得力하게 된 것은 내 백씨의 花郞譚에서이다. 伯氏는 酒席에서나 座談中에서 斷片的이나마 화랑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는데 그 때마다 나는 남다른 감격을 받았었다. 그것은 내 핏줄 속에 花郞이 숨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내 伯氏의 信念的인 話術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화랑’은 김동리의 소설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예컨대 「巫女圖」(<中央>, 1936.5)로 대표되는 무녀 계열의 소설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산신사상을 담아내고자 했던 「山祭」(<中央>, 1936.9) 계열 또한 마찬가지다. ‘상룡설’(傷龍說)과 ‘아기장수 설화’를 차용한 「黃土記」(≪文章≫, 1939.5), ‘두꺼비 설화’를 차용한 「두꺼비」와 같은 작품의 의미는 이를 통해 해명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범부는 화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선의 仙道는 한국에서 발생하였다. 중국 上代의 문헌에는 신선설이 없다. 十三經 중의 老子에도 없으며 춘추시대까지도 없었다. 莊子에 비로소 선인, 神人說이 비치고 楚辭에 나왔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해당된다.
仙은 人邊에 山자 또는 僊자로 쓰는데, 산에 사는 사람 또는 인간 세상에서 遷去한 사람이라는 뜻의 회의문자이다. 곧 山人이다. 仙의 音이 ‘센’이니, ‘새이’는 무당을 말하고 경상도에선 ‘산이’가 무당이다. 그러므로 ‘산이씨자 무당의 씨자’라고 하는 속담이 있고, 땅재주하는 사람이 ‘아우구 산이로구나’ 하는데 이것은 降神하는 데에 쓰는 소리이다. 이 ‘산이’니 ‘센’이니 하는 어원은 근본 ‘샤만’에서 온 것이다. 몽고계에서 전한 샤만은 곧 무당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몽고계의 고대문화와 공통성을 가진 神道思想에서 온 것인데, 무당 중에서 강신이 잘 되는 이를 ‘샤안’이라고 하며 신 집히는 사람도 ‘샤안’이라고 한다. 센, 새이, 산이, 이 모두 샤만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花郞을 國仙이라고 하고, 花郞史를 仙史라고 하며, 花郞道는 風流道라고 하였다.
화랑은 神官으로서 그 지위는 사회적으로 최고위였으며, 風流道는 국교였다. 화랑도는 그 당시 하나의 종교로서 그 영도자가 ‘도령’이며 그 단체를 ‘낭도’라고 하였고 평시에 종교적 수련과 음악, 무당, 무술 등을 수련하였는데 음악, 무용은 신과 교제하는 의식으로 사용된 것이다.
화랑의 성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첫째는 宗敎的 要素입니다. 둘째는 藝術的 要素입니다. 셋째는 軍事的 要素입니다.…(중략)…最古代에 있어서 花郞의 一面이라는 것은 역시 巫俗과 直接 聯關이 있읍니다. 巫堂이 하는 일 大部分이 古代의 花郞이 하는 일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범부는 선도(仙道)가 한국에서 발생했다는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김동리의 창작 행위는 범부의 이러한 견해와 그대로 일치한다. 나라를 잃은 마당에 화랑의 군사적 요소는 현실적으로 쉽게 고려할 수 없었다. 다만, 화랑의 예술적 요소에 닿아있는 소설의 창작이 가능했고, 창작의 내용은 화랑의 종교적 요소가 되었던 셈이다. 신선에 대한 사상이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으니 여기서 김동리의 동양에 대한 관심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대동아공영론의 중심에 일본의 종교와 사상이 놓여 있다면, 김동리의 경우엔 신라적 화랑이 터하고 있다. 김동리가 서양의 근대정신과 정면에서 맞서면서 동시에 친일을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김동리가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과 맞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소설 「巫女圖」를 설명하는 그의 평론 「新世代의 精神」에 잘 드러나 있다. “東洋精神의 한 象徵으로 取한 ‘毛火’의 性格은 表面으로는 西洋精神의 한 代表로서 取한 예수敎에 敗北함이 되나 다시 그 本質的 世界에 있어 悠久한 승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이러한 인식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모화가 파우스트와 대체될 새로운 세기의 인간상이란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남들은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백년만 두고 봐라! 모든 것이 증명될 것이다! 역사가 바로 증명해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타협 없이 일제와 맞설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동양정신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일깨워줄 뿌리였기 때문이다. 전래의 설화를 차용하여 소설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저력은 여기서 솟아났다. 비극적 전망으로 인해 심리가 무겁게 짓눌렸을 때 김동리는 ‘상룡설’과 ‘아기장수 설화’를 끌어와서 「黃土記」를 써 내려갔고, 식민지 상황이 타개되리라는 신념은 ‘두꺼비 설화’를 이용한 「두꺼비」의 창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벌건 능구렁이에게 잡아먹힌 두꺼비가 능구렁이 마디마디에서 불개미 떼처럼 까맣게 되살아온다는 내용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친일에 대한 단호한 거부는 바로 이런 사상적 지반 위에서 펼쳐졌다. 친일단체인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에서 가입원서가 날아오자마자 김동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를 아궁이에 넣어버렸고, 나중에 다시 국민문학연맹(國民文學聯盟)의 가입원서를 등기로 받았을 때에도 단호하게 불살라 버렸다. 반일 활동으로 인해 범부가 두 번에 걸쳐 일경에 구속되었을 때 김동리는 육체적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나의 병세는 형님의 구속과 석방에 따라 묘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형님이 경기도 경찰국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갈비뼈 밑이 찌릿하게 아프고, 목구멍에서 무엇이 넘어다보는 듯하던 병세는, 그해 가을 형님의 석방과 함께 씻은 듯이 나았다가 이듬해 봄에 형님이 경남 경찰국으로 잡혀가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다시 기침이 몹시 나기 시작했다.” 붓을 꺾고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견디어내며 그저 술과 노름으로 허송세월하다가 김동리는 1945년 8월 15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두꺼비」에서 나타내던 바람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서정주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기 전에 덧붙여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범부․김동리의 ‘화랑사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분명히 해두지 않는다면 오해가 생기기 쉽다. 즉 논리의 전개 방식은 동일하되 다만 ‘천황’ 대신 ‘화랑’을 설정하는 면만 다르리라는 성급한 이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현실 상황의 한계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범부의 기획이 ‘대동아공영론’ 따위와는 상당히 달랐다는 점을 부기하도록 하겠다.
범부는 「國民倫理 特講」에서 “國家는 民族國家로서 完了”되리라 주장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발호와 붕괴는 이를 확인시키는 과정이다. “帝國主義가 崩壞한 다음에는 이미 完了된 民族國家”가 완전히 남게 된다. 그렇다면 민족국가와 민족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범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帝國主義國家性格으로서는 沒落하고 모든 國家가 전부 제 個性을 가지고 제 自主獨立을 유지하면서 완전한 國際社會라는 것이 이로부터 오는 世界社會의 形態입니다. 어떤 個性이 어떤 個性을 征服하고 全世界를 統一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안돼요. 民族國家의 個性은 個性대로 남고, 個性과 個性間 의 調和에서 世界平和는 올 것이고 世界社會는 展開될 것입니다.” 이러한 범부의 인식은 서구 근대사상의 바탕이 되는 진화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기보다는 동아시아 인문학의 ‘화이부동’(和而不同)에 가깝다고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화이부동으로서의 세계 인식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든가 ‘포스트콜로니얼’의 시선이 가 닿지 못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와 ‘포스트콜로니얼’의 방법론은 파시스트와 제국주의 공모자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2-3. 서정주의 경우; 종천순일과 역사의식의 증발
서정주가 1988년 펴낸 팔할이 바람:담시로 엮은 자서전(혜원출판사)에는 「從天順日派?」란 시가 실려 있다. 여기서 그는 “나를/‘친일파’라고 부르는 데는 이의가 있다.”, “‘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라면서 스스로를 ‘從天順日派’라고 명명한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필자는 스스로를 종천순일파라고 규정하는 서정주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에게는 오로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하늘’[天]과 ‘자신’의 관계만이 중요하였고, 그 밖의 삶의 질서라든가 가치․변화는 그저 ‘팔자’의 영역에 머무를 따름이었다. 이때 삶의 질서라든가 가치․변화를 주재하는 현실의 절대 권력자는 ‘하늘’의 뜻을 ‘자신’에게 일러주는 매개자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그는 언제나, 물결에 몸을 맡기듯,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권력자에게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고,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승만전을 지어 바쳤으며, 학살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에게 「처음으로」라는 찬양시를 헌정할 수 있었던 끊임없는 자기 변신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오욕으로 점철된 서정주의 삶은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 새삼스럽게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해명하여야 할 것은 이런 결과를 빚어낸 서정주의 인식 체계, 그러니까 동양정신의 면모가 되겠다. 서정주가 파악했던 동양정신의 실체는 다음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속 관주 친 곳에서 내가 얻은 것은 특히 죽은 자의 마음과 산 자의 마음을 연결하는 그 신라식 혼교이다. 몇백 년이든 상관없이 전화하듯 통화하고 있는 그 신라식 불교식 영통(靈通)이라는 것이다. 이 이미 매장된 고대 사유 고대감응의 방식들은 참 아름다운 불교적 은유의 가관 속에 나를 매혹시키기에 족했다.” 신라정신에 뿌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김동리와 서정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김동리가 주목했던 것이 당시 사회를 주도적으로 움직이던 ‘화랑’이었던 반면, 서정주는 ‘죽은 자의 마음과 산자의 마음을 연결하는 그 신라식 혼교’에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차이는 현실에 대한 응전에서 결정적 차이를 빚어내었다. 죽음과 맞대면한 마당에 삶의 질서․변화는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힘들어진다. 죽음의 가치가 삶의 질서를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시 세계는 여기서부터 접근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서정주의 의식은 짝사랑의 실패에서 유래하였다. 1936년 김동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임유나(任臾娜, 본명 임○득)에게 교제를 신청했으나 무참히 거절당한 것이 서정주 짝사랑의 전모이다. 당시 서정주의 참담한 심정은 「문둥이」(≪詩人部落≫ 1호, 1936.11)에 잘 드러나 있다. 마치 문둥이가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처럼 자신 또한 인간들로부터 추방당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격리감을 못 견딘 서정주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1936․7년 해인사로, 제주도로 부유했던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여기서 「花蛇」라든가 「대낮」 따위의 관능적인 시편이 고적한 해인사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대상의 실체도 없이, 다만 채우지 못하는 욕정 하나만으로, 그저 암수가 서로 뒤엉켜 나뒹구는 원시적 세계를 서정주는 그려나갔던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비극의 하상(河床) 위에 늠름하고 좋은 육신으로 일어서 있는 한 수컷인 신이고자 하는 마음”이 개입해 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이런 개입을 좀더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한다면, 신들과 서정주 자신의 동일화가 나타나고 있다고까지 표현이 가능하다. 그리고 동일화가 이루어지면서 현실의 구체적 물질성이 지워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花蛇集(南蠻書庫, 1941)이 드러내는 세계는 바로 이러한 서정주의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花蛇集의 이러한 세계는 오래 갈 수가 없다. “이런 따위의 육감이라 할 수 있는 것도 별다른 실제의 경험도 없는 마음속의 도가니 속만의 일”에서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花蛇集에 나타나는 강렬한 육체적 욕망이 지금 눈앞에 부재하는 대상을 찾아 나설 때 저승과 이승을 잇는 歸蜀途(宣文社, 1948)의 세계는 열리기 시작한다. 花蛇集의 마지막 시 「復活」은 이를 보여준다. 이미 떠나서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를 잡아끄는 행위는 서정주에게 이미 죽은 자를 살려내어 내 옆에 불러 세우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그는 짝사랑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스스로 신의 자리로 올라서야만 했다. “내 너를 찾어왔다……臾娜. 너참 내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새벽닭이 울때마닥 보고싶었다……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드냐.”(「復活」의 처음 일부) 그런 점에서 보자면, “東里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시 「葉書」에서 임유나를 일러 “솟작새같은 게집의이애기는, 벗아/인제 죽거든 저승에서나 하자.”라며 “巴蜀 의 우름소리가 그래도 들리거든/부끄러운 귀를 깎어버리마”라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셈이다. “巴蜀의 우름소리”를 따라가서 펴낸 시집이 바로 歸蜀途이기 때문이다.
歸蜀途는 「蜜語」로 시작하여 「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로 끝맺고 있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님아.//굳이 잠긴 재ㅅ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하눌ㅅ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蜜語」 1,2연)로 시작하여 「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의 ‘꽃’은 모두 사랑하는 원이를 살려내는 이웃집 정도령의 꽃이다. “붉은꽃을 문지르면/붉은피가 도라오고./푸른꽃을 문지르면/푸른숨이 도라오고.”(「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일부)의 바로 그 꽃이다. 그리고 歸蜀途의 한가운데에는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라며 전개되는 「歸蜀途」가 놓여있고, 바로 뒤를 이어 “門 열어라 門 열어라/鄭道令아”(「門열어라 鄭道令아」 4연)라는 외침이 퍼지고 있다. 이처럼 歸蜀途는 죽음이라는 ‘재ㅅ빛의 문’을 중심으로 꽉 닫힌 세계이다. 여기 어디에도 사회라든가 역사가 틈입할 여지는 없다. 그저 종교적인 요소만 강하게 부각될 따름이다. 서정주에게 천황의 국적이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천황의 자리에 이승만이 오든 전두환이 오든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궁금증이 생길 만하다. 서정주의 친일 행각과 김동리의 반일 의식은 어떻게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일까. 1947년 4월 4일 저녁 7시 자유진영 문학단체에서 최초로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다. 여기서 김동리가 연설했던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단초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시 장르에 내재하는 사회적인 요소를 깡그리 배제해 버린다면 시와 시인은 그저 종교의 차원에만 머무를 수 있게 된다. 김동리의 시 인식은 예컨대 그런 방식이었던 것이다.
言語의 多樣性은 이것을 極端的으로 圖式化시킬 수 있다면 陰陽 兩面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槪念(陽)과 陰影(陰)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太陽(槪念-陽)과 巫呪(陰影-陰)라고 표현ㅎ고자 한다.
같은 言語의 藝術이라 해도, 小說과 詩歌가 그 性質을 달리하는 것은 前者가 보다 더 言語의 太陽面을 驗使한다면, 後者는 보다 더 巫呪面에 依存하는 데 重要한 理由가 있다. 前者는 形象이요, 後者는 映像이다. 前者는 肉體를 갖춘 生命이요, 後者는 肉體를 거세한 靈魂이다.(중략)
詩는 祈禱란 말이 있다. 祈禱에서처럼 무엇을 求한다는 뜻이 아니요 祈禱에서처럼 神과 ‘내’가 마주 앉는다는 뜻이다. 이런 말이 許容될 수 있다면 神과 ‘내’가 짝이 된다는 뜻이라 해도 좋다. 이 경우 第三者가 介入하거나 參與할 여지는 없다.
神은 社會의 像이 아니요 宇宙의 혼이다. 小說의 중요한 機能이 社會의 像을 그리는데 가깝다면, 詩의 가장 重要한 機能은 ‘宇宙의 魂’을 읊는 일이다. 따라서 小說이 보다 더 ‘社會參與’에 適應된다면 詩는 本質的으로 ‘宇宙參與’에 맞다. ‘社會參與’와 ‘宇宙參與’의 어느 것이 더 크며 더 重要하냐의 問題가 아님은 太陽과 巫呪의 어느 것이 더 크며 重要하냐의 問題가 아님과 같다.
3. 해방 그리고 자기 인식의 현실 전개 방식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이태준, 김동리, 서정주는 각각 어떤 길을 찾아 나섰던가. 이태준은 「영월영감」에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루 자꾸 나가야 돼”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또한 식민지 말기의 엄중한 분위기에 대한 자기 다짐이었기도 하다.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루 자꾸 나가’는 자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이태준은 8월 17일 부랴부랴 상경하였다. 이후의 모습은 자전소설 「해방전후」에 묘사되어 있다.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서울 정황에 대해 ‘현’(작가의 분신)은 불쾌감을 느낀다. 특히 좌익이 제멋대로 발호하여 민족 상쟁 자멸의 파탄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쉽게 덮어두지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현은 ‘조선문화 건설 중앙협의회’란 데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는 마침 기초된 선언문을 수정하고 있었다.
현은 마음속으로 든든히 그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이 초안한 선언문을 읽어 보았다. 두번 세번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과 행동에 혹시라도 위선적인 데나 없나 엿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저으기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이만침 조선 사정에 진실한 정신적 준비가 있었는가?”
현은 그들의 태도와 주장에 알고 보니 한군데도 이의를 품을 데가 없었다. “장래 성립한 우리 정부의 문화, 예술정책이 서고, 그 기관이 탄생되어 이 모든 업무를 수행할 때까지 우선 현단계의 문화영역의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의 질서화를 위하야”였고 “조선문화의 해방, 조선문화의 건설, 문화전선의 통일” 이것이 전진구호였던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이 나아갈 노선에서 행동 통일부터 원칙을 삼아야 할 것을 현은 무엇보다 긴급으로 생각한 것이요 좌익작가들이 이것을 교란할까 보아 걱정한 것이며, 미리부터 일종의 증오를 품었던 것인데 사실인즉 알아볼수록 그것은 현 자신의 기우였었다. 아직 이 이상 구체안이 있을 수도 없는 때이나, 이들로서 계급혁명의 선수를 걸지 않는 것만은 이들로는 주저나 자중이 아니라, 상당한 자기비판과 국제 노선과 조선민족의 관계를 심사숙고한 연후가 아니고는, 이처럼 일견 단순해 보이는 태도나 원칙만엔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현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즐겨 그 선언에 서명을 같이 하였다.
이태준은 이렇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로 나아갔다. 월북은 그런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가 택한 길이었다. 그 길 위에 이태준은 장편소설 농토, 「먼지」(≪문학예술》, 1950.2), 중국기행 위대한 새 중국, 기행문 소련기행 등을 남겨 두었다. 그가 바라본 꿈틀거리는 역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이와는 달리, 김동리가 선택했던 세계는 현실이 아니었다. 화랑이 머무르다가 떠나간 자리, 그러니까 신라적 화랑의 정신이 복원되는 지점에 자신의 지향을 두고 있었다. 일제의 억압에 단호히 맞설 수 있던 힘이 여기서 솟아났던 만큼, 소련(좌)과 미국(우)의 물리력도 그를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서구의 근대정신을 비판하며 좌도, 우도 아닌 ‘제3휴머니즘’의 기치를 올렸던 것이 이를 보여주지 않는가. 따라서 이태준의 ‘민족’이 현실에 대한 긴장감에서 배태되는 개념이었던 반면, 민족문학을 주장하는 김동리의 ‘민족’은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뿌리를 가리키고 있었던 셈이다.
1939년 김동리는 선배 평론가들과 세대논쟁을 벌이면서 ‘한 개의 길’을 얘기한 바 있다. 해방 후에도 김동리는 그 길을 따라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人間의 個性과 生命의 究竟을 追求하여 얻은 한 개의 到達點이 이 ‘毛火’란 새 人物型의 創造였고, 이 ‘毛火’와 同一한 思想的 系列에 서는 人物로선 「山祭」의 ‘太平이’가 그것이다. 毛火나 太平이들이 이 時代 이 現實에 對하여 別般 意義를 가지지 못함은 내 自身 잘 알고 있으나, 그러나 人間이 個性과 生命의 究竟을 追求하여 永遠히 넘겨보군 할 그러한 한 개의 길이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이태준, 김동리에게는 ‘민족’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제국주의에 대한 자의식이 자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기의 혼란 속에서 나름의 길을 찾아 나갔다. 하지만, 애당초 민족의식이 서 있지 않았던 서정주로서는 그저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라는 자기 합리화만 있으면 상황이 종료되는 양상이다. 팔자는 자신의 선택 이전에 이미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기에 회의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러니 그 다음 열리는 길은 자연히 현실의 권력자를 따라가는 길이 아니었겠는가.
(梵山 金法麟-인용자) 선생은 어느 날 오후던가 나더러 프랑스어를 잘 공부하라고 당부하면서, 언젠가 우리나라에 밝은 날이 오거든 우리 같이 프랑스 학술․문학 번역 사업도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밝은 날이 올 걸 선생님만큼 믿을 수가 없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만 있었다. 1945년 해방 된 뒤 오래잖아 노상에서 우연히 선생을 만나
“보아. 내가 말하던 대로 되었지?”
해서야 비로소 그가 정확했던 것을 느낄 만큼……. 그렇게 우리 나이의 세대는 우리보다 일이십 년씩 앞선 세대보다 절망이란 것이 더 많았고, 불신이 더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선 이런 심산 속으로까지 스며 들어와서라도 먼저 자연이 준 싱싱한 젊음, 그것이나마 새로 자각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서정주, 「해인사」, 54~55쪽.)
초점|친일예술 담론의 현재
친일시의 세 갈래
박수연
(문학평론가)
1.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일제말 전 시기는 이른바 민족 말살의 암흑기라는 규정하에, 특히 근대문학 연구의 영역에서는 거의 외면되다시피 해왔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전반적 위기 속에서 일본 군벌 및 독점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천황제 파시즘을 기반으로 한 전쟁 동원을 식민 본국 및 피식민지 통치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던 때이다. 요컨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해방된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을 명분으로 하여 일본 독점자본주의를 보호, 유지하려는 목적이 천황제 파시즘과 태평양전쟁을 통해 추구되었던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결국 이 시기의 이념과 사회 체제는 일종의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적 무의식에 의해 일본을 동양의 서구화된 표본으로 지속시키려 했던 근대주의를 기본 동력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문학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역사적 과정의 한 결과라는 점이 부정될 수 없다면, 한국근대문학의 전체적인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제의 진출과 후퇴가 조선의 문학계에 어떤 흔적을 남겨놓았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일제의 진출과 후퇴가 전개되는 과정은,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다시 파시즘 권력의 부상으로 변이되는 과정과 맥락을 함께하는데, 이는 또한 세계사적 차원의 정치정세와 맞물리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말 전 시기에 서구에서는 반파시즘 인민 전선이 무너지고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의 파시스트 권력이 대두했으며, 일본은 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를 지나서 쇼와 파시즘으로의 이행을 완료하고 독점 자본의 이윤율 확보를 위해 대륙 진출을 꾀했다. 한국 근대문학은 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프로문학운동을 출발시켰으나, 쇼와 파시즘 시기에 이르러 그 활동을 중지당하고 이른바 순수문학이 문학적 본류로 부상하였다. 그 이후의 친일문학은, 한편으로는 천황제 파시즘의 명분이었던 반서구 동양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문인들이 동의했던 결과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근대문학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었던 후진 근대사회의 문학적 열등감을 천황제 파시즘의 공고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가져온 결과였다. 친일문인들이 이러한 선택을 감행한 것은 중일전쟁 이후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를 20세기의 역사적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패배의식이 그 근원에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렇다면 조선이 민족적 명맥을 유지하는 길은 승리자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제2의 패권자 노릇을 하는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친일문학은 한국근대문학이 이식된 근대성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근대주의가 왜곡된 형태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학계와 문단에서는 당시의 친일문학을 일제에 의해 강요된 문학으로 이해해 온 경향이 강했다. 이는 당시의 친일문인들이 해방 이후에 자신들의 행적을 변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가 이후의 한국문학사에서 그대로 통용되어 온 결과이다. 가령 백철은 해방 직후에 출판한 조선신문학사조사-현대편(백양당, 1949)에서 이 시기를 일제에 의한 민족 말살의 암흑기로 규정하고, 이 시기에 발표된 대부분의 문학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써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고 규정했다. 이 책의 5장이 ‘제2차세계대전의 열풍과 조선현대문학사상의 암흑기’이고 5장의 1절이 ‘일제 일색의 민족말살시대’이다. 그의 구체적인 시기 구분에 따르면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고 ≪국민문학≫이 발간되는 때부터 1945년까지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암흑기’라는 말에는 그러나 그 자신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저간의 정황을, 그의 표현을 빈다면, “백지로 돌려야 할 부랑크의 시대”로 묻어두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로 이 시기는 문인들 개인의 개별성이 이전과 같이 자유롭게 보장되었던 시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개별성으로부터의 전환이 또 다른 자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 즉 서구적 개인주의의 극복과 동양적 공동체 정신으로의 ‘귀환’, 그리고 그에 따른 ‘신체제-신윤리’의 수립이 문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 시대가 반드시 “부랑크”의 시대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귀환’을 하나의 근대적 ‘반동’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파시즘문학의 가능성’이 설문으로 응답되고 있는 당시의 정황 속에서는 분명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그 시대는 새로운 근대의 모색기, 정확히 말하면 ‘왜곡된 모색기’였다.
결국 이 시기를 민족 말살의 암흑기라고 규정하는 저간의 관행은 백철의 이 글로부터 비롯된 셈인데, 정작 백철은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세계사의 주인으로써의 일본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는 ‘사실수리론’을 주장하고, 이후 친일문인들의 대대적 출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당시의 정황 속에서 백철의 사실수리론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백철 자신이 자발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랬던 백철이 당시의 문학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로 평가하는 것은 그 시기를 문학적 백지 상태로 돌려놓음으로써 자신의 행적을 묻어두려 했던 의도적 주장인 셈이다.
이후의 한국문학사가 백철의 그 주장을 고스란히 반복하면서 일제말 파시즘기에 진행된 문학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것은, 그러므로 문학적 선배 세대의 주장에 기대어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복무했던 문학의 내재적 미학 원리를 탐구하는 일에 소홀했었음을 뜻한다. 문학사 연구의 이러한 결여 부분을 보충하고, 당시의 친일시인들이 뚜렷하게 자각된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밝히는 일이 따라서 필요해진다. 이 연구를 통해 ‘친일시-친일문학’의 내적 근거가 역사철학적 근대성의 구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근대성의 구도 속에서 시인들이 택했던 미학적 입장이 그들의 친일시에 투영되는 모습을 계보화시킴으로써 시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2.
1)국민문학파와 국민주의
친일시 연구는 첫째, 선행 친일문제 연구가 항용 빠지기 쉬웠던 맹목적 ‘국민주의’의 관점을 일종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유산으로 보아 비판하며, 둘째, ‘문학의 내재성’에 대한 논리적 정리를 시도하고, 셋째, 친일시의 계보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각 계파의 특이한 내재적 논리를 분석한 후, 마지막으로 이 논리들이 일제에 봉사하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문학이 억압적 국가 권력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필요한 작업은 친일시의 계보를 나누고 그것들의 특이성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친일시의 계보를 ‘국민문학파와 국민주의-이광수, 주요한, 김동환, 김억 등’ ‘순수시학파와 미학주의-서정주, 김종한 등’ ‘프로문학 및 납월북 문인-김용제, 이찬, 임학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인들 중 대표적인 문인을 중심으로 계파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국민문학파와 국민주의’를 하나의 계보로 살펴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속하는 문인들이 대부분 중일전쟁 직후에 친일로 전향한 민족 자치론자들로서, 상실한 국가 대신에 민족적 에스니시티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민족 미학적 국가를 상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속하는 문인들이 민족 미학으로 탐색했던 시조나 민요에 대해 이들이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식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민요 시인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민요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개념은 에스니시티(ethnicity)이다. 에스니시티란 권력 배분에 있어서 소수파를 점한 사람들의 사회적․문화적 특징을 일컫는 말로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출된 다수파의 국민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소수파의 집단적 귀속 의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월러스틴은 이 에스니시티의 기능을 세계체제를 존속시키는 역할로 규정한다. 하나의 에스니시티에 속한 존재는 그 그룹에 가장 적절한 사회적 위치를 인정하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그룹이 자본의 운동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에스니시티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의 주관적 계급 위치를 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말기의 역사적 경험은 민족적 에스니시티가 미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인종주의로 전화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일제가 침략자들에 의해 유린되는 장소로 동양을 설정하고, 스스로에게 소수파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박해받는 인종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동양인이라는 에스니시티를 창출한 결과였다. 이때 조선심에 주목했던 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을까?
일제말 인종주의 담론의 ‘동양’과 ‘황국정신’에 대응하는 것은 ‘조선’과 ‘조선심’이다. 그것은 조선민족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근대문학 형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인으로 상상하고, 그로써 조선 민족의 정신을 더욱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는, 허구적이었지만 신념에 찬 실천의 매개물이었다. 국민이 국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면 에스니시티는 자기 귀속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적인데, 조선심의 문제가 에스니시티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조와 민요시는 이때 그 집단적 자기 귀속의 문제로 연결된다.
김억의 경우 민족적 정서의 강조는 그의 문학적 초기시절부터 있었다. 「시형의 음률과 호흡」(<태서문예신보>, 1919. 1. 13)은 자유시의 호흡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나름대로 논리화해서 보여준 최초의 글에 해당한다. 실로 김억이 조선 시단에 기여한 점은 근대시의 내적 논리, 요컨대 자유시의 호흡률과 같은 형식에 대한 미적 탐구를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미적 탐구가 나아간 지점은 개성론이다. 김억은 이 예술 개성론을, 개인들이 각각 다른 것처럼 각 민족도 다르다는 논리를 전제하면서 민족 개성론으로 비약시킨다. 결국 예술은 민족 정신․정서를 민족의 육체와도 같은 삶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논의는, 아직까지는 민요시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 즈음의 김억 또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소개에 주력하면서 자신의 창작 방향을 그쪽에 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훗날 민요시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그 민족 정서가 “현대의 조선심”으로 환언되고 그 삶이 “현대의 조선심의 고민과 어쩔 수 없는 고뇌”(「조선심을 배경삼아」, <동아일보>, 1924. 1. 1)로 이해되는 곳에서, 그리고 “조선 사람의 사상과 감정 또는 호흡에 가장 가까운 시조와 민요”(「밟아질 조선 시단의 길」, <동아일보>, 1927. 1.3)가 조선 시가의 시형으로 이야기되는 곳에서 그의 민요시론의 직접적 계기를 볼 수 있지만 그것의 잠재성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이때 ‘조선심의 고민과 고뇌’라는 말로써 지시하는 것은 피식민지 상태의 조선 현실에 대한 고민과 고뇌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억은 그 현실의 고통을 미적 관념으로 돌파하려 한 경우였다. 삶의 고통은 “예술로 인하여 시화(詩化)되고 미화(美化)되어 모든 고뇌를 달게”(「조선심을 배경삼아」) 함으로써 잊혀질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조선심’이 현실의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 미학을 위해 논리적으로 요청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다는 것은 그의 조선심이 상실된 국가에 대한 상상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문학적 매개물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그가 조선심으로써의 민요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1924년인데 비해 민요를 절실한 감정으로 체험한 것이 1927~8년경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보면 이런 판단은 더욱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개인의 미적 매개물로 조선심과 민요가 추구되었다는 점 때문에 김억의 시를 개인적 취향의 그것으로만 놓아둘 수는 없는 문제가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는 개인의 시적 개성을 민족적 개성으로 직접 확장시킴으로써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맺어지는 방식을 암시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개인들의 예술적 충동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광의로의 한민족의 공통되는 충동은 같을 것”(「시형의 음률과 호흡」)이라는 진술에 미루어 판단할 때, 개인의 개성은 민족 정서의 일개 구성물로 환원되는 것이 된다. 더구나 김억의 문학적 과제가 조선심을 육체화하는 전형적 호흡률이었고 보면, 시적 개성 자체가 고려될 여지는 별로 없는 셈이다. 개인이 집단 속에서 집단의 공통성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실로 개인에게 실현되는 민족적 현실의 구체는 사라지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이때 남는 것은 오직 관념에 있는 민족적 고통이 될 것이니, 이 관념형으로써의 고통이 개인에게 구체화될 여지는 없어져 버리게 된다. 김억의 시가 개인적 서정의 관념적 애상으로 그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요컨대 개인이 집단에 의해 소멸되고 집단은 다시 관념형으로 제기되어 현실적 구체를 소멸시킨 것이다. 문제는 그 관념성이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소멸시킨 논리적 과정의 결과라는 점이다.
이 논리를 알게 될 때 김억이 일제말에 이르러 「국가와 개인」(<매일신보>, 1940. 11. 30)을 쓰고 신체제하의 개인의 윤리에 대해 멸사봉공으로써의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참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개인 정서의 집합인) 민족의 공통되는 충동은 같은 것”이라는 말을 친일의 시기에 국가와 개인의 관계로 바꿀 때, 그것이 언어만 바뀐 것일 뿐 실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그의 국가관은 일찍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문학적, 사상적 경향이 당대의 문단에서 국민문학파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고 보면, 그가 상상하는 국가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적할 필요가 없겠다. 그것은 실제 현실을 미적 관념으로 묻어버리고 고통의 현실을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하기 위해 조선의 미적 형식을 탐구한 행위의 종착지였다. 이때 미적 형식의 근원인 조선심은 실제 현실을 외면한 자가 그 행위의 심리적 보상물로 찾아낸 의지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찾아낸 결과라는 점에서, 민족의 형식이 아니라 민족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한 상상에 불과했다. 그것을 국가에 대한 상상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은, 상실된 것이 민족이 아니라 국가였으며, 나아가 국권 상실의 현실을 조선심이라는 미적 매개물로 대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억을 미학적 국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프로문인의 경우
김용제의 경우를 살펴보면 당시의 프로문인들의 전향 논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귀국 후 조선문단에서 고독감을 느끼던 김용제가 백철과 함께 일본 나프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백철의 ‘사실수리론’에 대해 김용제가 가졌을 느낌을 짐작하게 해주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1938년 11월에는 프랑스의 인민전선이 무너짐으로써 인민전선을 이끌던 소련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기대가 한풀 꺾이고 파시즘의 공세가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이 세계적 정세와 관련한 자포자기적 패배감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김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북지전선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는 백철의 글이 그에게 전향의 명분을 세워주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를 사후적으로 증명하는 글은 김용제의 「전쟁문학의 전망(戰爭文學の展望)」 ≪동양지광≫, 1939, 3)과 「조선문화운동의 당면 임무(朝鮮文化運動の當面の任務)」(≪동양지광≫, 1939, 6), 「현실의 언어(現實の言葉)」(≪동양지광≫, 1942, 6)이다. 김용제는 「전쟁문학의 전망」에서 “현재는 적을지라도 위대한 문학의 공상보다 위대한 현실에 대한 문학자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갖추는 일이 문학자의 명예로운 이름에 요구되는 시대”라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중일전쟁으로 압축되는 동북아 정세로서의 그것인데, 전쟁은 “역사를 개혁하는 위대한 모멘트”이며 따라서 “현실을 반영하고 그 소리를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이 그 내용과 형태를 전쟁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는 이 전쟁문학을 통해 문학의 ‘국가적 역할’을 도모하는 동시에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일을 통일시킬 것을 요구한다. 문학의 국가적 역할이라는 문제 설정과 함께 그가 논의하는 작품은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의 보리와 병정(麥と兵隊이다. 당시에 천황제 파시즘의 이른바 성전의식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을 모범적 전쟁문학으로 예증하는 김용제의 의식 구조를 조명하기 위해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국가적 역할’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의 파시즘에 대한 긍정이다.
「조선 문화운동의 당면 임무」는 문화와 정치의 상호적 협력을 통해 “강력한 국가적 문화”를 건설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글이다. 국가적 이념과 애국적인 목적은 정치와 문화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으며, 그로써 형성되는 것이 국민문화의 운동과 실천인데, 그를 위해 국가적으로 올바른 정치 이념과 문화 사상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것이 문화 통제의 필요성이다. 국가적 통제가 새로운 사회와 역사의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믿음의 배경에 내선일체의 주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김용제는 내선일체 운동에 소극적인 조선의 문화인들을 비판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통제적 문화운동을 통한 국가 사상의 전파에 힘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의 실례로 김용제가 제시하는 것은 원고 검열과 언론 검열에의 적극적 동참인데, 이런 통제론은 백철의 “통제적 통일적인 경향”론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백철은 김용제가 편집한 잡지 ≪동양지광≫의 1939년 4월호에 「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時局と文化問題の行き方)」을 발표하고 통제를 위주로 하는 정치에 문화가 보다 긴밀히 연결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글의 선후관계로 본다면 김용제는 백철의 논의를 충실히 이어받아서 그것의 구체적 실례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김용제는 「현실의 언어」에서 백철이 정리한 ‘사실수리론’을 다시 제기한다. 발레리는 19세기적 지성의 한 모습으로 시와 음악에 열광한 정신을 묘사하고 20세기에는 그것이 부르주아의 가치관에 의해 몰락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백철은 그 예술적 정신의 가치가 통시대적으로 면면히 지속되는 것임을 주목했다. 이른바 생명의 기운으로 약동하는 힘이 거기에 있을 터인데, 동양의 운명이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는 논리적 근거가 그것과 관련된다. “이번 ‘사실’을 통하야 동양의 지식인은 하나의 정신적인 것과 봉착했다.”는 그의 말은 바로 그 논리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그것이 출발점인 것은 질서 있는 생명의 정신이 먼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다시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귀결점인 것은 모든 진리의 행로가 변모에 있듯이 ‘사실’의 시대 또한 자신의 종말에 이르러 모종의 정신을 생성하는 것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제는 그것을 좀더 압축해서 ‘사실의 세기=시의 세계’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그대로 ‘발레리→백철’의 논점을 따온 것인데, 여기에도 현실 자체의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개입되어 있다. 1942년 6월에 발표된 이 글이 더욱 가혹해진 전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김용제는 그 현실을 원리나 진리가 관통하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때 그 진리란 곧 서양의 패배와 동양의 부흥이라는 사실로서 이는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대동아공영과 팔굉일우라는 천황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래를 향한 이상주의의 공상으로부터 탈피하여 현실의 객관적 행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전쟁문학론」에서의 김용제의 주장이 일제 파시즘의 중국 정벌을 역사적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백철의 사실 수리론으로부터 직접 영향 받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3)전통서정의 순수미학
마지막으로 순수 미학파의 친일문학을 살펴보자. 일본 문부성은 1937년 국체의 본의를 출판하고 학교에 배포함으로써, 황국정신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공식화하고 국가에 의한 사상 통제 대상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으로까지 확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의 문단은 이 국체 보존과 천황귀일(天皇歸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표어 아래 거의 모두가 전향을 이루게 된다. 이 전향은 따라서 단순히 프롤레타리아문학에서 순수문학으로의 전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정신에서 ‘동양정신-일본정신’으로의 전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문학은 그 전반기의 좌파 문학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등의 모더니즘문학까지도 부정되는 황국정신의 문학이었다. 모든 서구적 모더니즘은 부정되고 소위 전통 서정파-순정 예술파에 의해 ≪사계≫(1933)나 ≪일본낭만파≫(1935~38)(‘일본낭만파’는 일본 파시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등의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서정성은 대부분 황국정신으로의 자발적 전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일본정신론은 조선에서는 30년대 후반에 조선문화론, 동양정신론, 고전론으로 이어진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로 요약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첩로에서 일본의 국체와 황국정신은 조선인들에게도 공히 숙지되고 권장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어서 ≪인문평론≫지가 동양문학, 일본문학, 지나문학, 조선문학을 특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혹시 조선의 문인들에게 그러한 경향의 내재화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그래서 제기된다. 일본인들에게 모든 서구적 정신을 버리고 황국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연적 경향이었다면 조선인들에게 그 경향의 자발적 내재화는 없었던 것일까? 이것은 근대적 국가나 민족관념을 일본을 통해 형성시켰던 조선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얼마든지 제기해 봄직한 질문이겠다. 특히 일본의 동양정신론이 조선에서 동일하게 전개되고 마찬가지로, 유사한 형식으로 문학적 전향이 진행되던 당시의 정세 속에서는 일본문단의 경향이 조선으로 직수입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항목은 동양정신과 서정성이다. 동양정신의 주장이 당시 일본의 근대 초극론으로 합리화되는 것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서구적 모더니즘의 흐름까지도 부정하고자 했던 서정성으로의 귀환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일본문단의 지배적 경향으로 자리잡고, 그들의 국체론으로 연결될 이 서정적 경향의 내재화가 조선 지식인들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친일문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으로 자각되었겠느냐라는 문제의식을 가져볼 수 있다. 이 문제를 고찰하기 이전에 미당의 문학적 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길에서 미당은, 친일문학의 최종 종착지가 그랬듯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공동체라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그것은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획득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미당의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매일신보>, 1942.7.13-17)는 당시 그가 생각했던 문학의 요체를 보여주는 글이다. 일본에서 펼쳐진 근대의 초극론에 강하게 영향 받고, 직접적으로는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국민시에 대하여」의 형식과 내용을 뒤따르고 있는 이 글이 씌어진 때는 1942년 7월이다. “황국의 전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거나 서구 제국의 문화와는 다른 동양의 정신문화를 논하면서 “동아공영권이란 또 좋은 술어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고 진술하는 것은 그대로 친일문학의 논리로 해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전통의 발견을 통해 영원성의 구체화라는 과제에 답한 미당의 심리적 조건을 탐사해보는 일이다.
미당의 친일문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미요시 다쓰지이다. 미요시 다쓰지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일본의 초현실주의 계간지 ≪시와 시론≫(1928~1931)에서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했고, 모더니즘을 표방하면서 반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거점 역할을 한 ≪작품≫(1930~1940)지의 성원이기도 했다. 그는 또 ≪사계≫(1933)를 편집하면서 전통적인 서정정신을 옹호했고, 드디어 파시즘과 연관된 ≪일본낭만파≫(1935~1938)에 가담함으로써 ‘일본적인 것’을 주장한 인물이다. 1942년 7월에 개최된 <지적 협력 회의-근대의 초극>에서 그가 발제한 내용은 ‘서구 합리주의에 기초한 과학주의로서의 근대를 일본 고전에 담긴 이념으로 초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중국에 파견된 문인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런 시인의 시에 영향을 받은 미당의 내면은 무엇이었을까? 유럽 모더니즘에서 순정 예술파를 거쳐 일본정신과 파시즘의 세계로 나아가고, 전후에는 일본 서정성의 세계를 탐구한 미요시 다쓰지, 그리고 니체와 보들레르의 세계에서 동양정신을 거쳐 삼국유사와 신라 불교의 세계로 나아간 미당의 거리가 그리 크게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긍정될 수 있다면, 이른바 서정적 내면과 친일 파시즘의 거리 또한 그리 멀지 않다고 할 수 있다.
3.
이상으로 대표적 문인들을 중심으로 거칠게 살펴본 친일문학의 세 경향은, 일제말 전 시기를 정세적 국면에 따라 나눈 소 시기에 상응하는데, 그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문학을 수행하는 논리, ②1940년 코노에 내각의 신체제론 이후에 친일문학을 수행하는 논리, ③근대초극론의 영향을 받으며 태평양전쟁 이후의 대동아공영론을 따라 친일문학을 수행하는 논리로 나뉜다. 첫 번째의 논리는 주로 국민문학파 시인들에게서 나타나고, 두 번째의 논리는 프로문인 및 월북 문인들에게서 나타나며, 세 번째 논리는 순수 미학파의 문인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한국문학의 근대성이라는 주제로 연결시키는 일은 한국문학사의 균형 잡힌 복원을 위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인데, 왜냐하면, 친일문학은 국가를 상실한 피식민지의 지식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일본제국주의의 논리로 투사하고 실천하면서 근대적 국가를 미학적으로 상상한 결과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일제말 파시즘기 친일시의 계보를 나누고, 각각의 계보는 어떤 미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파시즘 및 억압적 지배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미적 이념의 관계에 대해 실증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저간에 진행된 ‘시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시적 창조 논리 외부에 있는 세계관적, 철학적 기준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시를 시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 외부의 기준에 시를 종속시킨 논리의 결과였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일제말 파시즘 시기의 친일문학을 외부의 강요에 의한 수동적 결과로 이해하도록 하는 경향을 만들어낸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의 우선적이고 진정한 원인은 문학 내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접근법은 일정한 한계를 내포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접근법은 당시의 친일문인들이 왜 절필하지 않고 계속 문학작품을 창조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문학의 논리로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에도 문학작품이 끊이지 않고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문학 내부의 논리로 대상 작품에 접근해야 하는데, 이는 친일시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본 연구자의 생각이다. 가령 김동환이 친일잡지 ≪대동아≫에 발표한 친일시 「군복 집는 각시네」를 시집 해당화에 재수록하면서 더 좋은 시(?)로 개작을 감행하는 경우를 보더라도 문학은 문학 내부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을 내재적 논리로 살펴본다는 것은 나아가 친일문학 전체를 친일문학의 내재적 논리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 내재적 논리를 계보화할 때 우리는 한국문학의 다양한 층위가 어떤 문학적 내재성으로 권력과 타협하고 어떤 문학적 내재성으로 왜곡된 권력에 저항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실례를 갖게 될 것이다.
홍기돈․
1970년 제주 출생
․1999년 ≪작가세계≫로 등단
․평론집 페르세우스의 방패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중앙대학교 국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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