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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초점/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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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46회 작성일 08-02-2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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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친일예술 담론의 현재


진정 친일영화는 무엇인가?

강성률(영화평론가)


1. 서대문형무소에서 본 친일미술
가을이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 친일미술전도 보고 서대문형무소도 구경할 겸 해서 친일미전이 열리는 서대문형무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생각했던 것처럼 서대문형무소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냉엄하고 황량한 감옥방은, 그곳에 사람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스산했는데, 이런 것의 절정은 역시 사형장이었다. 죽은 이들의 원혼이 아직도 서려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기운이 감도는 그곳은 오래 머물기가 두려웠다. 그곳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마음이 씁쓸했던 필자는 친일미술전을 보기 위해 다시 형무소로 들어갔다. 친일미술작품은 형무소 복도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진열된 다양한 형태의 그림과 신문 기사와 사진들을 보면서, 특히 김은호․정인보 같은, 당대를 풍미한 화가들의 친일 그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려야 했을까, 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리고도 한마디의 사죄조차 하지 않았을까, 독립운동 때문에 숱하게 죽어간 이들에게 그들은 진정 미안한 마음도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필자는 그들이 친일미술의 행렬에 기꺼이 동참했던 그 시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친일미술에 동참했다. 기쁘게 친일미술을 하면서 자신의 부귀영달도 누렸다. 일제가 망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때, 프랑스가 동맹군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고 세계 최강국 미국이 일본에게 폭격을 당하던 그때, 어떻게 일본이 망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일을 했다.
자,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있다. 혹시 이런 일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미국이 남한을 자신들의 52번째주로 편입하려고 한다고 하자. 쉽게 말하자면, 미국이 우리나라를 영구 식민지화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전쟁 위기, 경제 문제, 입시 문제, 노후 문제 등이 동시에 해결되니 쌍수를 들어 환영할까, 아니면 우리나라가 없어지니 격렬히 반대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전자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 길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영구 분단을 획책할 것이라는 말이다. 일제 식민지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논리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시켰다. 그들이 보기에는 세계 최강국 일본인이 되는 것이, 즉 내선일체로 황국신민이 되는 것이야말로 조선이 사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선일체의 의무로 지원병 제도가 확정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친일영화에 대한 정의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친일영화의 정의에 따라 친일영화의 분류, 성향이 모두 달라진다. 때문에 친일영화의 시작이자 기본이 바로 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행해진 친일영화의 정의는 추상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조망한 후 일제 시기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서 보다 정밀하고 새로운 친일영화의 정의를 모색하고자 한다.
2. 일제에 협조한 영화=친일영화?
친일영화를 논할 때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친일영화’라는 용어가 과연 정확한 용어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친일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학계로 가보면, 이런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친일파라는 용어가 가진 모호함보다는 민족배반자, 또는 반민족행위자라는 용어로 규정함으로써 그 의미를 명확히 하자는 의견이 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그들의 의도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이것 역시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의견은 민족주의만 염두에 둔 개념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면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는, 그래서 친일파의 범죄가 민족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더 이상 범죄가 되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더군다나 지금 민족주의의 역효과가 뚜렷이 드러나 숱한 이들이 과열된 민족주의나 파시즘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고려하면, 또한 민족주의가 발생한 것이 겨우 근대라는 것을 들어 기원을 따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상상적 공동체’라는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민족배반자나 반민족행위자라는 용어로는 이런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친일파가 지니고 있는 모호성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 용어가 가장 일반적이고 또 그 속에는 반(反)민족주의라는 속성과 더불어 인류의 범죄자라는 속성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친일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영화 분야에서는 대략 친일영화라는 용어와 어용영화, 또는 국책영화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친일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반면, 유독 김종원만이 “어용영화”나 “국책영화”를 사용한다. 김종원이 친일영화를 어용영화나 국책영화로 명명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일제 식민지 시기는, 조선은 사라지고 일제에 의해 지배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일제가 자신들의 정책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영화는 당연히 어용영화나 국책영화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만든 어용영화를 두고 친일영화라고 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그 나라 사람이 만든 영화를 두고 친일영화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일리 있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까지 고려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시기는 이후의 시기와 매우 구별되는, 특이한 시기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김종원의 정의에 따르면, 친일영화도 어용영화가 되고, 유신 시대의 반공영화나 새마을영화도 어용영화가 된다. 그런데 둘 사이의 차이는 정말 없는 것일까? 식민지라는 상황과 독재일지라도 정부가 있는 상황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일제 시대에 만든 친일영화는 민족 말살을 노렸고 인류를 전쟁의 파시즘으로 몰아넣었던 영화이다. 이런 영화를 단지 어용영화로 명(名)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민족말살이나 파시즘의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하게 된다. 더군다나 다른 분야에서는 이미 친일문학, 친일미술, 친일음악 등의 용어들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유독 영화에서만 어용영화라고 명하는 것은 형평에도 맞지 않다. 때문에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친일영화로 명명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제 친일영화에 대한 개념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친일영화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기보다는 한국영화사라는 방대한 범위를 연구하면서 부분적으로 친일영화를 연구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영화사에 관한 책들은 일제말기의 한국영화사 부분을 친일영화로 규정하면서 그 시기의 영화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한국영화사를 단행본으로 저술하면서 친일영화를 연구한 것 외에 김경식․김소희․김수남․남인영․박준․양윤모․장우진 등이 학위 논문이나 소논문을 통해 친일영화에 대한 연구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엄밀하고 정밀한 연구는 수행되지 않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 필름으로 남아있는 영화를 분석하기도 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발굴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일영화의 개념에 대한 문제도 엄밀하지 않다. 친일영화에 대한 개념이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이후의 연구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기존 연구에 나타난 친일영화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친일영화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를 했던 이효인의 경우를 보자.

친일이란 곧 일본의 정책, 문화 등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하 조선에서 친일이란 우호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일제의 조선 탄압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부응하여 결과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강화하고 조선 민중의 해방 의지를 말살하려 했던 반민족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치가와 지식인, 지주들은 자신들의 영예를 유지시키고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친일행각을 하였다. 그러나 문예인들의 경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지나사변, 태평양전쟁을 앞뒤로 하여, 즉 1940년을 앞뒤로 한 10년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친일행각을 벌였다.

이효인에 의하면 친일영화는 1940년 전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것으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강화한 반민족적인 영화를 말한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친일영화가 조선인을 탄압한 반민족적인 영화라는 사실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효인과는 달리 약간 광범위한 설정을 한 김수남의 정의를 보자.

친일이란 일제의 정책에 우호적인 태도 내지 적극적인 협조를 하는 입장을 가르킨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영화제작자협회>와 1942년 <조선영화주식회사>의 발족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친일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상황으로 몰고 갔다. 다시 말해 민족영화인은 영화를 만들지 않는 영화인밖에 없었다.

김수남은 친일영화를 일제의 정책에 우호적인 태도 내지 적극적인 협조를 하는 입장의 영화로 규정했다. 이효인의 그것에 비해 광범위한 정의인데, 일제의 정책에 우호적이거나 적극적인 협조를 한 영화라는 그의 정의는 너무 추상적이다. 그런데 김수남의 정의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친일영화를 두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친일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효인과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 이효인은 친일영화가 반민족적 민중 탄압 영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라면, 김수남은 “누구나 친일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정의에 대한 논의를 좀더 하기로 하자.
김경식은 자신의 논문에서 이효인과 김수남의 정의를 모아 다시 재정의했다.

친일영화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의 식민정책에 직접적으로 복무하거나, 각종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자면 일제시대에 제작된 친일영화는 <군용열차> 이후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전에 식민통치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몽영화와 문화영화를 전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 된다.

김경식은 두 사람의 논의를 모아 친일영화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면서 정의는 비슷하게 했지만, 그 범위를 넓혀 놓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일제 시기 전반에 걸쳐 일제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계몽영화나 문화영화가 전부 친일영화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 범위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최초의 조선 극영화라고 할 수 있는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세>(1919)가 친일영화로 규정되는 것은 물론이고, 194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계몽영화 역시 친일영화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 기존의 친일영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요약하기로 하자. 이들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친일영화는 일제의 정책에 담합해서 민족을 말살한 영화인데, 그 영화를 만든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것을 제작했거나 강압에 의해 제작했으며, 계몽영화나 문화영화 역시 이런 분류에 포함되며, 또한 친일영화는 일제 시기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영화를 말한다. 얼핏 보면 완벽해 보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따져보면 이 정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가령 일제 정책에 담합해서 조선 민중을 탄압한 영화를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먼저 발생한다. 필름도 남아있지 않고 시나리오도 제대로 없는 가운데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소극적 친일, 적극적 친일이라는 분류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소극적 친일영화라는 것은 일제시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은폐하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옹호한 영화라는 식의 논의로 비약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제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친일영화로 둔갑하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자의 반 타의 반이나 강압에 의해 친일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강압에 의해 친일영화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무작정 비판만 할 수는 없다. 우리 역시 그런 강압에 꿋꿋이 버틸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몽영화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열심히 살자는 것이, 일제의 정책이 아니라 감독의 순수한 의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제 치하지만 열심히 살자는 것도 잘못이란 말인가?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친일영화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시점이다.
3. 새로운 정의, 새로운 기준
기존의 논의가 지니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은 기존의 논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기존의 연구가 해내지 못한, 친일영화에 대한 작품 분석이나 경향을 세세히 연구하는 작업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있는 것일까? 이제 그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도록 하자.
친일영화의 개념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기존의 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일제의 정책에 협조했기 때문에 반민중적이고 민족 말살적인 영화를 친일영화라고 명했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렇게 되면, 일제의 정책에 협조한 정도를 두고 소극적 친일과 적극적 친일을 논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문학평론가 김재용의 논의를 받아들여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를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영화는 친일영화로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를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영화만을 친일영화로 규정할 경우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과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명확하게 목적을 지니지 않고 있는, 다소 애매한 영화들을 판단할 기준이 되기도 한다.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는 일제정책의 핵심이었다. 서구의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동양의 권역이 바로 대동아공영권인데, 이를 위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가 일제 시대에는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런 권역을 위해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은 천황의 충성스런 신하라는 논리 역시 조선인들을 쉽게 매혹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일본이 중국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했을 때, 서구의 대안으로서 동양에 주목하게 되었고, 동양의 핵심이 바로 일본이었다. 때문에 당시 친일파들은 황국의 신민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정책은 민족을 말살하고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범죄 행위이다. 일제의 정책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영화를 친일영화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범위를 너무 넓히게 돼 필연적으로 논의를 흐리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때문에 이제까지 해왔던, 계몽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소극적 친일영화라는 식의 논의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다음으로 논할 것은 친일영화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기존의 논의는 친일영화가 1940년대 전후해서 팽창했지만, 일제 전 시기에 걸쳐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논의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인정한다. 친일영화라는 것이 일제 정책에 부합한 영화이니 후반기에만 그런 영화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일제 시기 전(全) 부분에 걸쳐 만들어진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실제로 1938년의 <군용열차>가 나오기 전에 문제가 된 친일영화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월하의 맹세>(1923)와 <남편은 경비대로>(1931)가 정도이고, 나머지는 총독부에서 제작한 문화영화가 전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화 영화는 제외하기로 하자. 그것은, 문화영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극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으로 관객이 돈을 주고 보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숱한 문화영화 역시 일반 영화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필자는 이미 1937년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로 친일영화의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일제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된 결정적 계기인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영화로 친일영화의 범위를 한정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위를 이렇게 좁히는 것은, 친일영화에 들어있는,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가 본격화된 것이 중일전쟁 이후라는 점 때문이다. 중일전쟁 이후 급박해진 일제가 핵심적으로 내세운 정책이기 바로 이 두 정책이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중일전쟁 이전에 일제는 영화 검열은 했지만 통제를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1937년 이전의 영화에는 그런 친일적 요소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설령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가 노골적이지 않다.
사실 이 문제는 좀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미술 분야의 경우, 미술평론가 최열은 1940년 전후를 기준으로 일제 초기의 친일미술을 1차 시기의 친일미술 활동으로, 이후의 친일미술을 2차 시기의 친일미술 활동으로 분류했다. 그에 의하면 1차 시기에는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반면, 2차 시기인 말기에는 일사불란한 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미술과 달리 1937년 이전의 친일영화는 많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월하의 맹세>나 <남편은 경비대로> 같은 영화가 고작이다. <월하의 맹세>는 저축을 장려하는 총독부 계몽 영화이지만, 내용을 보면 친일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순수한 영화이다. 노름을 그만하고 이제는 저축하자는 것을 두고 친일영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문제는 <남편은 경비대로>이다. 이 영화는 “조만 국경에 경비대를 보내기 위한 정훈공작용 영화”인데, 나운규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다. 일본인이 감독한 이 영화는 명확한 친일영화이다. 1937년 이전의 영화 가운데 오직 이 영화만이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만주의 독립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항상 예외가 있는 것이지만, 대동아공영권을 외치지 않던 시기에 그것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친일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영화가 친일영화라고 해서 친일영화의 시기를 1937년 이전으로 당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 극영화가 아니라 일본인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고 무료로 상영한 정훈영화이다.
세 번째로 논할 것은 친일영화의 제작에 있어서의 강압성 여부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대개 영화인들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친일영화를 만들거나 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가입하지 않으면 영화를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그 단체에 가입해서 친일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친일영화를 만든 이들이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제가 단체를 통합해서 영화인들은 그곳에 가입하게 했지만, 그것은 강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곳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고, 또한 가입했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만든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37년부터 1945년 8월 해방 이전까지 한국영화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친일영화는 10명의 감독이 연출한 19편이 전부이다. 그런데 의미 있는 것은 당시 살아있던 영화감독은 모두 44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44명의 감독 가운데 10명만이 친일영화를 연출했던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풀이하면 친일영화를 만든 감독보다 친일영화를 만들지 않은 감독이 더 많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일제시대에 모두가 친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친일영화를 연출한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그들은 대개 일본 유학을 다녀오거나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로서, 1901년부터 1912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이미 조선이 식민지 상태였거나, 철들어 세상을 알기 전에 이미 조국이 식민지였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조국이라는 말은 매우 생소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은 당시 세계 최강국인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때문에 그들은 살아생전에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을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엘리트인 그들은 중국과 프랑스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대동아공영권을 대안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내선일체를 통해 황국신민화를 꿈꾸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민족의식이 박약했던 그들이 친일영화를 만들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강압에 의해 친일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친일영화를 만들었다. 친일영화를 규정할 때 자발성은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계몽영화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일제시대의 계몽영화 역시 친일영화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주장 가운데 일리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 민족 계몽 운동과 일제의 계몽 운동을 쉽게 구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결국 민족 계몽 운동은 일제의 계몽 운동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식민지라는 현실을 염두에 두었을 때 계몽영화는 친일영화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민족 계몽 운동가였던 이광수가 친일의 길로 들어섰던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것을 고려하면, 분명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일제의 계몽과 민족의 계몽을 쉽게 구별하기 어려울 뿐더러 그런 계몽이 감독의 순수한 의도였을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많은 연구자들이 최인규의 <수업료>를 친일영화로 구분한다. “계몽적 성격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은폐한 작품”이기 때문에 친일영화라는 이도 있고, “대동아공영권의 구축을 위해 ‘열등한’ 나라인 조선과 중국,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우등한’ 나라인 일본의 지도 아래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친일영화라는 의견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수업료>는 대한 젊은 세대의 평가는 대개 친일영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만든 최인규의 이후 행적을 보면 친일영화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명확한 친일영화라고 규정할 수 없다. <수업료>는 “경일소학생신문에 입선된 광주 북정공립소학교 4학년생의 작문을 영화화한 것으로써 집안 살림이 가난한 까닭으로 수업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소년이 낙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수기 당선 공모작을 영화화한 것이고, 작업 과정에서 일본의 기술이 많이 결합된 것으로 보아 친일영화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필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 줄거리만으로는 친일영화라고 규정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친일영화는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에 국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몽영화로까지 범위를 넓혔을 때는 결국 신파 영화까지 친일영화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신파 영화 역시 식민지 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한 일본의 영화사조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내린 친일영화에 대한 정의를 요약하자면, 친일영화는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를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영화로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친일영화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비슷한 시기와 앞 시기에 만들어진 계몽영화와는 구별되는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들은 민족을 배반하고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파시즘을 찬양하고 선동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4. 식민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
친일영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식민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도모하는 작업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혹 우리가 다시 식민지가 된다면, 우리는 분명 제2의 친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친일영화를 연구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친일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철저히 분석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식민주의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자면, 친일영화를 연구하는 것은 식민주의를 넘어서 이 땅에서 학문하는 길을 찾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해방 이후 또 다른 강대국 미국에 의해 수입된 학문에 지배당하고 있는 지금, 한국의 학계는 구미(歐美) 학문의 잡화상이다. 구미 학계의 학문적 식민지인 지금의 한국에서 그것을 벗어나 자생적 학문을 추구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시작이 바로 식민주의를 넘어서는 친일영화 연구이다. 제1세계도 아니고, 제2세계도 아닌, 제3세계에서 학문하는 것은 결국 식민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하다. 탈식민주의를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학계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친일영화 연구는 이런 길을 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기존의 연구를 보강하려는 차원에서 썼다. 필자는 이미 친일영화에 대한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친일영화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썼다.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논리의 부족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기존의 글들이 지닌 논리적 허점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괴로웠고 그것을 쉽게 메울 수 없어 더욱 괴로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지금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이 점점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참으로 괴롭고 힘든 나날이다.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공저 󰡔한국영화감독사전󰡕 󰡔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문학의 논리󰡕
․건국대, 한성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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