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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문화산책/류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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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원작이 있는 영화․4
조루즈 베르나노스와 로베르 브레송의<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류상욱(영화평론가)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연극의 수단들(배우, 미장센 등)을 이용하고 재생산(reproduire)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사용하는 영화; 시네마토그래프의 수단들을 이용하고 창조(creer)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는 영화.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트에 대한 노트
1. 다시 베르나노스에게로
나는 지난번에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Sous le soleil de Satan)>와 이 영화의 원작인 조루즈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비교하면서, 앙드레 바쟁적인 의미의 ‘각색의 윤리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논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원작을 각색하는 데 있어서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영상에 옮기려는 각색,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용과 표현 방식을 바꾸는 각색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좋은 각색은 문자와 정신의 본질에 성공하는 것이고, 우리는 개별 텍스트를 평가하는 작업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의 작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이루어질 것이다. 즉, 베르나노스와 브레송은 각각 자신의 창조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다. 우리는 그 우주와도 같은 세계의 특징들의 단면을 끄집어내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질문해보는 작업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달리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조루즈 베르나노스는 가톨릭 사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소설을 썼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Le journal d'un cure de campagne)」는 1936년 3월에 발표되었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사제가 악마의 유혹 때문에 갈등하고 있다면,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의 사제는 육체의 병으로 고통 받으면서 절망을 벗어나려는 은총을 갈구한다. 앙브리꾸르라는 시골 마을에 한 젊은 사제가 본당 신부로 부임한다. 그는 위가 좋지 않아 포도주에 빵을 담가 먹는 정도의 식사밖에 하지 못한다. 그가 맡은 본당은 “다른 본당과 조금도 다름없는 본당이다.” 비록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권태에 시달리는 그런 사회이다. 그런 병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그런 마을이다.
거기에서 사제(소설에서는 ‘나’)는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 사랑의 결핍과 싸워야만 한다. 젊은 사제는 자신의 교구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을 내쫓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 또르 씨의 본당 신부는 젊은 신부의 미숙함을 염려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한다. 그는 “본당은 으레 더럽기 마련이다.”라고 말하며 그 더러운 것을 뿌리 뽑으려 하는 것은 이상에 치우친 것이라고 강조한다. 젊은 신부의 지나친 정열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이 젊은 사제는 백작의 가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그 집안은 사랑과 믿음이 없는 황량한 사막과도 같은 곳이었다. 백작은 수많은 부정으로 아내를 속였고, 지금의 가정교사인 루이즈와도 떳떳치 못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백작부인은 어려서 죽은 아들에 대한 추억에만 사로잡혀 있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들의 딸 샹딸은 성질이 불같고 질투심이 많아서 죽은 남동생만 사랑하는 어머니를 증오한다. 아버지밖에 모르는 샹딸은 아버지와 가정교사와의 관계를 눈치 채고 가정교사를 집에서 떠나게 하려고 한다. 백작부인은 딸을 영국으로 보내려 한다. 이런 가정사에 젊은 사제가 휘말리게 된다.
샹딸은 자신을 영국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버리지 않으면 파리로 가서 몸을 버림으로써 부모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말한다. 젊은 신부는 백작부인에게 가서 샹딸의 문제로 긴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백작부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온갖 애정을 쏟았던 아들을 잃음과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애정, 더 나아가 모든 희망을 읽어버렸다. 그 절망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역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고, 그 은총은 젊은 신부에 의해 백작부인에게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백작부인이 그날 밤 세상을 떠난다. 건강이 더 악화된 젊은 신부는 질척대는 길에 쓰러진다. 그를 간호하는 사람은 세라피따라는 소녀이다. 그 소녀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하지 않다. 교리 문답 공부를 열심히 해 사제의 질문에 대답을 총명하게 하는 그 소녀는 “신부님의 눈이 예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한다. 신부는 릴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다. 위암이라는 선고를 받은 그는 신학교 시절 친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가 은총인 것을.”이었다.
2. 베르나노스에서 브레송으로
로베르 브레송은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각색하면서 그 소설 텍스트에 충실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진작부터 어떤 작품들(작가가 자신의 모두를 던져넣은 듯한 작품들, 그리고 내가 각색한 베르나노스의 책이 이 범주에 속한다) 가운데서 작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경험들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종합하고 배열하는 그 사람만의 방식, 다시 말해서 구성 작업을 하면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그가 (종종 무의식적으로) 내놓은 해결 방안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따라서 각색자로서의 나는 책의 구성과 균형을 존중함으로써 작품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작품들은 각기 고유의 진실을 지닌다. 나는 애당초 영화의 진실이 책의 진실과 판박이처럼 똑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 시나리오는 죽은 물체이다. 영화는 그것이 실행되는 동안에만 형태를 이루고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브레송은 각색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충실성의 원칙을 공언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소설과 영화가 말 그대로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충실성의 원칙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의 문제가 우리에게 놓여진다. 원작 텍스트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매체의 차이에 의해 무엇인가를 덧붙이거나 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프랑수와 트뤼포가 그렇게도 증오했던 시나리오 작가인 장 오랑슈와 피에르 보스트는 스크린 상의 시각적 효과와 작품의 극적인 밸런스에 신경을 써서 새로운 인물을 첨가하는 각색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각색은 원작자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에 비해 브레송은 각색하면서 무엇인가를 덧붙이지 않고 오히려 삭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단순화의 작업이다. 원작의 정신을 변형시킨다거나 뭔가를 첨가하려는 의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것이 오량슈와 보스트 그리고 브레송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브레송이 베르나노스의 텍스트를 각색하려고 결심했을 때에는 세계관의 동질성이 어떤 작용을 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베르나노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의 대표적인 가톨릭적 세계관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가이다. 브레송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죄의 천사들>은 수녀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변심한 애인을 살해하고 수녀원에 들어온 떼레즈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안느 마리 수녀의 이야기이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와 <무셰뜨>는 베르나노스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잔다르크의 재판>과 <호수의 랑슬로>도 가톨릭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형수 탈출하다>나 <소매치기> 등도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룬다. 가톨릭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은 어쩌면 브레송의 모든 영화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우리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를 생각하면서, 파스칼적인 장세니즘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의 교리는, 은총은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숨은 신’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선한 사람들만 선택받는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이라도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그들이 실천하는 율법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악인이라고 반드시 외면당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과 저주는 모두 신의 자비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브레송의 영화들은 이런 원리와 부차적 테마들(자유의지와 숙명, 희망과 절망, 계시와 신앙 등)에서 보이는 브레송의 진화에 따라 정리 혹은 재편성된다.
베르나노스와 브레송의 인물들은 모두 운명과는 다른 예언의 질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예정되어 있다. 다시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떠올려보자. 도니상 신부는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고 기적을 행하게 되지만 죽음에 이르게 된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의 젊은 신부도 마을을 개선하고 백작의 가정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려고 하지만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결국 초라한 친구의 집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 과정을 앙드레 바쟁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비극의 구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수난극(Jeu de la Passion)’의 구성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십자가의 길(Chemin de Croix)’의 구성이라고 평가한다. 이 젊은 사제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백작을 비롯한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경원시된다는 것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바쟁의 이런 평가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바쟁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제시한다. 특히 그것은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젊은 사제와 그리스도와의 유사점은 밤에 두 차례에 걸쳐 실신하고 진창에 쓰러지며 포도주와 피를 토해낸 토사물 등이다. 그 피는 예수의 수난의 피에 대한 은유이다. 베로니카의 베일에 해당하는 것은 젊은 사제를 돌보는 세라피타의 남루한 옷이다. 마지막으로, 골고다에 해당하는 다락방에서의 죽음이다. 결국 베르나노스와 브레송은 종교적으로 서로 만난다. 이것은 단순하게 원작자와 각색자와의 관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두 사람의 작품의 미학적 가치는 신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젊은 사제는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었다. 그것은 수난의 십자가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젊은 사제는 죽어가면서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가 간절하게 은총을 소망했기 때문에 신이 그런 말을 하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구원은 원하는 자에게만 온다.
3.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식적인 특징은 네레이션에 있다. 브레송적인 네레이션의 사용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수잔 손택의 것이다. 해석에 반대한다에 실린 글에서 수잔 손택은 그 효과를 브레히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에는 감정 이입을 야기하는 것이 있고, 사색하도록 하는 것이 있다. 브레송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이 사색적인 예술에서는 작품의 형식이 두드러진 요소가 된다. 관객들이 형식을 의식하도록 만들면, 감정을 연장하거나 지체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형식이 주제와 완벽하게 부합할 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는데, 브레송이 그러한 경우이다. 브레송은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완벽하게 표현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와 완벽하게 상응하는 형식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형식이야말로 브레송이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것이다.
수잔 손택이 보기에 브레송의 영화에 나오는 보이스 오버는 중복의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젊은 사제가 절박하게 토르시의 신부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관객들은 사제가 자전거를 타고 토르시의 신부 집 문 앞에 당도하고 가정부가 대답하고 그 다음에 문이 닫히고 사제가 문에 기댄다. 그 다음으로 “나는 너무 낙담해서 문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라는 보이스 오버가 흘러나온다. 이 ‘불필요한’ 보이스 오버는 이야기의 흐름을 잠시 끊어주는 효과를 거둔다. 이는 관객이 곧이어 나올 다음 장면을 예상하려는 것에 제동을 걸어준다. 설명이 나온 뒤에 장면이 이어지든 장면이 보이고 설명이 이어지든 효과는 동일하다. 이처럼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흔히 일어나는 감정의 연결이 중단되고 더욱 더 강렬해진다. 이것은 이 영화가 ‘일기’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브레송은 일기를 읽는 음성과 화면에 나타나는 일기를 일치시킨다. 이미지는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대사는 사제의 의식 상태를 표현한다.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장의 소리는 사라지고 보이스 오버가 그 소리들을 대신한다.
그렇다면 과연 브레송이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의 말처럼, 그 보이스 오버들이 브레히트적인 소외 효과를 가지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사실 브레송의 영화들은 일반적인 촬영기법이나 서사구조를 거부한다. 그가 배우들을 모델이라고 부르며 연기를 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유명하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도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브레송의 영화들 중에서 비직업 배우들이 기용된 최초의 작품이다. 브레송은 연극적인 표현 방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바쟁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의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그렇다면 그 보이스 오버들은 무성영화의 자막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브레송은 연극적인 표현보다는 사운드와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는 50미리 표준렌즈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돌리나 파노라마 쇼트를 구사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에서 가능한 한 정확하고 자연적인 응시를 정확하게 포착하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그는 얼굴을 컨텍스트에서 고립시켰다. 보이스 오버와 함께 신체의 클로즈업은 브레송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얼굴의 클로즈업을 말하면서 바쟁은 브레송의 영화가 인간 얼굴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서 클로즈업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또 손의 클로즈업은 브레송의 쇼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브레송은 인물의 심리 분석을 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심리 분석은 성공할 수 없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단지 행동하는 것을 볼 뿐이다. 브레송은 그래서 육체성과 그 육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중력의 무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의 젊은 사제는 항상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그런데 그는 위암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에 역시 시달리게 된다. 육체는 고통을 주는 감옥이다. 브레송의 영화에는 감금과 자유라는 주제가 들어 있다. <죄의 천사들>에서부터 <사형수 탈출하다>, <잔다르크의 재판> 등은 감옥에 갇힌 수인이 등장한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의 젊은 사제는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절망 속에, 유한한 신체의 질병 안에 감금되는 이야기이다. 브레송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과 싸워야 한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젊은 사제는 자기 자신의 질병, 고독, 마을사람들의 편견, 백작부인, 샹딸 등과 계속 정신적 싸움을 해나간다.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다. 사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브레송의 세계에서 비극적 세계관의 총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각색의 새로운 단계
앙드레 바쟁은 <시골사제의 일기>와 더불어 영화적 각색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브레송은 베르나노스의 원작을 충실하게 각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충실성의 의미는 원작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사실 원작은 영감의 원천일 뿐이다. 원작에 충실한다는 것은 소설의 작가와 영화작가 사이의 공감대를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베르나노스-브레송은 장세니스트적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공감대를 공유한다. 이렇게 영화는 소설과 나란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공감하면서 존중한다고 하는 것은 소설과 영화가 변증법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문학과 영화의 변증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것은 단순하게 소설을 영화가 얼마나 교묘하게 각색하고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을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설에 근거해서 영화의 의해 제2의 상태에 있는 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미학의 창조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브레송의 영화는 소설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각색되었다. 영화의 장면들은 사제가 일기를 쓰는 것으로 전환된다. 일기의 형식을 지닌 소설의 각색인 만큼 보이스 오버로 일인칭 시점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어떻게 보면 브레송은 영화로 소설을 각색하면서 다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각색은 필연적으로 배제의 과정을 거친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릴에서 사제가 의사의 진찰을 받는 부분이 빠져 있다. 백작부인과 사제의 기나긴 논쟁은 영화에서는 그 만큼의 분량으로 나올 수 없다. 그렇지만 브레송의 영화는 소설이 제공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것은 브레송적인 의미의 충실성을 이 영화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쟁은 영화가 소설보다 더 좋은 작품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판단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소설보다 뒤따라온 영화는 그 원작보다 다르고 어떻게 보면 좀더 그 이상의 작품일 수 있는 것이다.
브레송의 영화가 나온 이후 베르나노스의 독자는 열 배 이상 증가되었다고 한다. 브레송의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가 나온 이후 문학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경쟁이나 대용의 관계는 종식되었다. 그것 대신 새로운 각색의 단계가 시작되었고, 진정한 의미의 문학과 영화의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영화가 등장한 시기는 1951년이다. 그렇다면 2004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변증법은 존재하는 것일까?
류상욱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졸업
․저서 호모 시네마쿠스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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