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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문화산책/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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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마음의 문을 열며
―김기덕의 <빈집>에 대한 정신분석적 소고―
김서영
우리의 반지르르한 삶은 항상 함정들이 있다. 그냥 믿고 살기엔 여기저기 숨어 있는 복선과 반전들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는 바로 그런 삶의 비밀을 들추는 작업이다. 꼬일 대로 꼬인 우리 인간사의 비밀들을 풀어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2003, p90)
1. 폐허의 이미지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의 주인공은 폐허가 된 도시였다. <무방비도시>, <독일영년>, <자전거 도둑>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카메라는 파괴된 건물과 굶주린 사람들을 그대로 프레임에 담아 그 안에서 무너진 건물들과 무너진 인생들을 오버랩시켰다. 정신분석은 사지가 멀쩡한 사람의 웃는 얼굴에서도 이러한 폐허의 이미지를 읽어낸다. 분석가의 눈이라는 필터로 세상을 보면 평범하다는 사람의 입에는 타인의 욕망이라는 재갈이 물려져 있고, 정상인들의 눈 속에는 공포와 분노의 기운이 서려 있다. 정신분석의 카메라는 사람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고립시키는 한 사람을 촬영해 내고 조화로운 집단의 살인적인 시선들을 포착한다. 분석가는 문화인과 교양인이 하나되어 만들어내는 화목한 공간에서 이 아름다운 공간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혈투를 읽어내며 동시에 숭고한 ‘하나’를 위해 도살당한 영혼들이 흘린 피의 흔적을 추적해 낸다. 초침은 매순간 겹겹이 쌓여가는 감정의 복합체들을 단단히 두드려 그 표피를 더욱 굳게 만들고 굳어진 외피는 우리와 그를 분리시키는 안전한 장치로서 아름다운 공간을 세상의 ‘나쁜’ 것들로부터 보호해 준다. ‘나쁜’ 것들을 한 손 가득 들고 나타나 이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내부에 침입한 것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다. 그의 영화들은 숭고한 ‘하나’가 사형을 선고한 이들에게 다가가 죽어 있어야 하는 이들을 말하게 한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집이 비어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고 내부의 상처를 드러내는 김기덕의 영화들은 정신분석의 과정을 반영하는 듯하다.
김기덕의 영화가 착해졌다고들 한다. <빈집>을 김기덕의 이전 작품들로부터 분리시키는 비평가들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외피를 벗겨내는 고통을 읽어내지 못한 이들이다. 그들은 김기덕의 영화에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폐허의 이미지 대신 조각난 이미지의 파편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에게 창녀가 되는 여대생과 선혈이 낭자한 살인과 살인 후 미친 남자와 사고 후 미친 여자와 살을 꿰는 낚시 바늘과 복부에 꽂힌 고등어와 가슴을 절단하는 칼과 마취제 없는 수술과 칼로 절단된 엄지손가락이 나오는 영화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이며, 말이 없는 남녀와 날갯짓하는 남자와 행복해 보이는 결말이 있는 영화는 착한 영화인 것이다. 그들의 비평은 조화로운 세상과 감동적인 예술 뒤로 착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밀어낸다. 그러나 착한 이미지들의 파편을 모아 그림을 완성하면 그것은 다시 김기덕의 이전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선혈이 낭자한 폐허의 모습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빈집>의 착한 이미지들은 지난 열편의 영화들을 통해서도 이미 충분히 강조된, 그래서 지금쯤은 우리에게 익숙해야 할, 김기덕 영화의 나쁜 이미지들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빈집>은 누구에게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것들의 이야기이다. 감독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것들에 손을 뻗어 먼지를 털어내고 쓸모없는 것들을 깊은 잠에서 깨워낸다. 정신분석은 사람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빈집에 혼자 남은 선화는 자신의 인생이 타자에 의해 정의되도록 방치하고 욕망하기를 포기하여 투명인간이 된다. <빈집>은 말하는 법을 잊은 여자인 선화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태석이 빈집에 침입할 때 그는 동시에 선화의 세계에 들어가 결국 그녀를 그녀 밖으로 이끌어내게 된다. 그녀가 침묵하기에 태석 또한 침묵하며 그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몸짓을 읽어낸다. 이것은 분석가가 환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타자의 욕망 속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환자들은 분석을 통하여 비로소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화와 태석의 대화를 매개하는 중요한 소도구는 골프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골프공이 스윙네트에 던져질 때 카메라는 네트의 바로 뒤에 배치된 여인의 조각상에 초점을 맞추어 폭력과 감금의 주제를 암시한다. 첫 장면의 잔상은 소리 없이 어두운 방 한 구석에 앉아 있는 선화의 멍든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까지 지속되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조각상을 향해 던져진 골프공은 선화를 멍들게 했다. 그러나 골프공의 의미는 태석의 등장 후 곧 바뀌게 되어 이제는 그와 선화가 대화하는 수단이 된다. 이때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면, 태석은 손으로 골프공을 선화에게 굴려 보냄으로써 골프공이 정상적 속도와 기능을 상실하도록 만들고 공으로부터 폭력의 의미를 제거한다. 그녀는 공을 집어 다시 그에게 굴려 보낸다. 이렇게 그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영화에서 태석이 골프를 치는 장면은 자주 반복되는데 이에 대한 선화의 태도가 조금씩 변해간다. 태석이 골프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장면들은 정신 분석에서 환자가 외상적 기억이 지배하던 고통스러운 부분들을 단순한 일상으로 변화시키는 연습에 비유될 수 있다.
자신의 집에 침입한 태석의 행동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던 선화는 태석에 의해 표현하는 방식을 조금씩 배워나가는데 그 첫 번째 단계가 모방이다. 태석이 빈집에서 행하는 의식과도 같은 일련의 반복 과정은 목욕하기, 사진 찍기, 빨래판에 빨래하기, 그리고 고장 난 물건 수리하기인데, 선화는 스스로 이 행동들에 동참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규칙을 습득한다. 그녀가 태석의 디지털 카메라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어린아이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과도 같다.
정신분석가인 멜라니 클라인에게 분석을 받은 ‘딕’이라는 아이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폐아였다. 그는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게 사람은 가구와 다를 것이 없는 듯했다. 클라인은 아이에게 언어를 강요하는 대신 아이의 언어를 읽어낸다. 그녀가 하는 것이란 단지 아이에게 여러 종류의 장난감을 준 후 오랜 시간 기다리고 어쩌다 아이가 장난감이나 방안의 어느 곳을 만지면 그 순간 그것에 가족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자 아이는 그의 놀이에서 창문을 엄마라고 부르고 ‘아빠 기차’와 ‘딕 기차’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언어의 체계에 편입된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은 이제 불안이나 반가움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일상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던 선화는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데 두려움이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그녀가 치유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때림으로써 분노를 표출하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말을 하게 된다.
선화는 외부와 차단된 자폐적 공간에 살고 있었으며 사람의 무게를 싣지 못한 그녀의 존재는 빈집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태석에게 보이지 않던 선화의 모습은 실로 무너진 건물들이 만든 폐허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즉, 빈집이란 타인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뜻하며 빈집에 들어가 고장 난 물건들을 고치고 빨래를 하고 나무에 물을 주는 태석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이 통로는 김기덕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인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대극의 합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2. 대극의 합일
<빈집>은 김기덕의 영화 중 대극의 합일이라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유일한 영화이다. 그것은 <빈집>이 지난 열 편의 영화에서 대극적 구조를 구축했던 인물들의 심리 변화만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빈집>이 선화가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만을 확대하여 보여주었다면 이전 작품들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변화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감독이 이전의 방법론으로 <빈집>을 만들었다면 주인공들은 선화와 태석이 아니라 극과 극의 대립을 선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선화와 그녀의 남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일련의 괴로운 과정을 통해 그들이 서로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김기덕이 제시하는 대극의 합일은 대극간의 화해를 뜻한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하나가 되기도 하고 시간을 통해 화해하기도 하며 함께 미치는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기도 한다.
<사마리아>에서는 여진과 재영이 대극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여진은 자살한 친구인 재영의 모습을 닮아감으로써 재영과 화해하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는 노승과 훗날 노승의 모습을 닮아가는 소년이 대극구조를 이루며, <해안선>은 애인의 죽음으로 인해 미친 미영과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강상병이 함께 미쳐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극간의 고통스러운 화해를 연출한다. <나쁜남자>에서는 한기와 선화가 대극구조를 만들고 <수취인불명>은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창국의 어머니와 창국을 화해시킨다. <실제상황>은 대극 구조가 한 사람을 통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유사하지만 전자는 양극에 대한 묘사에 더욱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는 대극의 합일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 밖에 <섬>은 희진과 현식을, <파란대문>은 진아와 혜미를,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청해와 홍산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어>는 악어와 현정을 대극 구조의 양극으로 삼고 있다.
위의 대극 구조는 서로 다른 두 인물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거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나 <실제상황>과 같이 한 사람 안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반면 <빈집>은 한 인물의 닫힌 마음이 열리게 되는 변화의 기작(機作)을 보여주었다. <빈집>에 나타난 변화의 과정은 대극적 인물들이 서로 부딪혀 닮아가는 과정의 전제가 되며, 한 사람이 그의 대극적 특성들과 하나가 되는 구조적 개방성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빈집>이 끝나는 곳에서 김기덕의 다른 열 편의 영화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주인공들은 이제 자신을 표현하고 그들의 욕망을 말한다. 그래서 악어는 현정을, 홍산은 로라를, 청해는 코린을, 코린은 끌로델의 흉상을, 희진은 현식을, 거리의 화가는 복수를, 창국모는 편지를, 한기는 선화를 욕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미세 기작에 초점을 맞춘 <빈집>에는 이러한 욕망의 여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빈집>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법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에 나타나는 변증법적 통합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극의 합일이 인물의 긍정적인 특성과 그의 부정적 그림자를 함께 표현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그의 영화를 통해 사회가 버린 그림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강에서 시체를 건져 살아가는 악어와, 원칙 없이 살며 친구를 배반하는 청해와 몸을 파는 진아와, 깡패인 한기와 원조교제를 하는 재영의 이미지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비판은, 영화가 사회의 현실로부터 관객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원조 교제를 하는 어린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고, 그녀가 서툴게 차를 모는 <사마리아>의 마지막 장면은,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해 내는 인물들을 보듬어 이끄는 감독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김기덕은 소외된 사람들의 환상과 그들의 욕망을 통해 사회의 그림자를 재현했고, 그들의 어두운 이야기를 밝은 빛으로 영사막에 투영했다. 그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돌보지 않는 빈집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빈집>은 시선이 머물지 않는 버려진 공간 속에서 그 기능이 마비되었거나,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태석이 빈집에 들어가면서 골프채 3번 아이언, 고장 난 체중계, 고장 난 시계, 빨래판, 빨래비누 등 잊혀졌던 사물들이 그들의 쓰임새를 되찾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던 해리 포터가 다른 세계의 주인공이 되듯, 김기덕의 영화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던 사람들을 꿈꾸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어른의 동화이다. <빈집>은 선화에게 언어를 되찾아주고 그녀를 위한 환상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인간에게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꿈을 꿀 수 있는 기능이 회복된 그녀는 이제 욕망할 수 있다.
3. 꿈과 현실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모두 꿈을 꾼다. 그들의 꿈은 의식의 통제와 문화인의 교양을 철저히 거부하고 본래의 모습 그대로 화면에 나타난다. 깡패인 한기가 여대생 선화를 창녀로 전락시키는 <나쁜남자>는 김기덕의 작품 중에서 가장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킨 영화이다. 이러한 반응은 비평가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이다. <나쁜남자>는 한기가 꿈을 꿀 수 있도록 만들어준 후 그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약 <나쁜남자>에서 꿈을 꾸는 주인공이 보들레르였다면 비평가들은 영화를 예술로 분류했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 중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라는 시에서 시끄러운 거리에서 마주친 여인에 대한 마음을 읊었다. 그는 거리에서 우연히 본 여인을 생각하며 순간을 정지시켜, 그녀를 사랑했을 그와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을 그녀에 대해 노래했다. <나쁜남자>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한기는 시끄러운 거리에서 곱게 차린 선화를 보고 그녀에게 다가가 강제로 키스를 한다. 그녀는 그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다. 주목할 점은 영화의 후반에 도입부과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즉, 선화와 한기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첫 장면의 벤치에서 선화가 상기된 얼굴로 조용히 한기의 손을 잡는 것이다. 혐오감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이 이제는 애타는 절실함으로 채워져 그를 바라본다. 그의 접근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던 첫 장면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그와의 이별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그곳에 남겨둔 채 떠난다. 이것은 아름다운 여인을 본 깡패 한기의 환상이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그가 아는 세상’을 통해 그녀를 욕망한 것이다. 그에게 보들레르적인 환상을 요구하는 것은 문화인들의 사치다. 영화가 한기의 환상이라는 사실은 그가 몇 번씩 칼과 유리에 찔리고 벽돌로 머리를 맞고도 살아나는 장면과 시간의 배열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환상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듯 꾸며내는 거짓 현실보다 더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독일어 ‘die Phantasie’는 환상과 상상력을 동시에 의미하며, 이때의 상상력은 보들레르의 ‘교감’과 동일한 의미이다. 정신 분석에서도 융이 주장하는 꿈의 세계는 조상의 모든 지혜와 지난날의 모든 기억이 배태된 보고로서, 치유의 잠재적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김기덕이 그리는 환상은 몽환적 세계와 현실 세계가 뒤섞여 그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경계를 허무는 것은 주체의 변화에 필수적인 요소인 선택의 과정 자체를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변화의 힘을 부여하는 공간이 바로 꿈의 세계이지만, 인물들이 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냉혹한 현실 속에 굳건히 정박했기 때문이다.
<빈집>의 마지막 장면에 다음과 같은 자막이 나타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망각한 사람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김기덕이 그려내는 꿈의 모습은, 고달픈 사람들의 분노와 욕망과 사랑을 아우르고 그들을 치유하는 <원형>의 표현이다. 김기덕이 꿈을 그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핵심적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이다. 인류의 기억을 담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로서의 물은 가능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김기덕의 영화 전체를 잔잔히 흐르는 물의 이미지는 세상의 모든 닫힌 문들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4. 닫힌 마음의 문을 열며
융의 ‘분석 심리학’에 의하면 물은 인간의 무의식을 뜻한다. 융은 무의식이 개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모든 기억으로 이루어진 원형적 구조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형적 구조로부터 비롯된 꿈을 ‘큰 꿈’이라 불렀는데, 다시 말하면 큰 꿈들은 개인이 기억해 낼 수 없는 조상의 기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영화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큰 꿈의 형상은 물의 이미지이다. 물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악어>의 한강,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센강, <섬>의 저수지 낚시터, <실제상황>의 만화방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 <수취인불명>에서 불로 녹여내는 얼음, <파란대문>, <나쁜남자>, <해안선>의 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호수, <사마리아>의 호수와 목욕탕을 통해 제시되었으며, <빈집> 또한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영화의 중심에 배치한다. 태석이 빈집에서 행하는 의식의 시작은 목욕이며, 의식의 또 다른 과정은 화초에 물을 주는 것이다. 그는 마른 풀에 생명을 주듯 비어 있는 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악어는 현정과 함께 한강 속에 마련된 그들만의 방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혜미는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진아를 이해하게 되며, 화가가 사랑했던 여인을 찾는 날 그녀의 만화방에 물이 샌다. 한기와 선화가 만들어내는 사진 속 연인은 바닷가에 앉아 있고, 강상병과 미영이 함께 미쳐가는 곳도 바닷가이다. 이렇게 물은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인 동시에 화해하게 하는 장소이다. 또한 <파란대문>에서 진아가 바다에 풀어주는 거북과 금붕어는 물이 생명을 상징함을 나타낸다. 더불어 물은 <사마리아>에서 볼 수 있듯이 정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진과 재영이 함께 목욕하는 장면이 반복되고, 여진의 아버지는 사람을 죽인 후 옷을 입은 채 샤워기의 물을 맞는다. <빈집>은 물의 치유력을 강조한다. 태석이 화초에 물을 주는 장면과 한 부부가 돌어항의 금붕어와 연꽃을 돌보고 화초를 가꾸는 장면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서서히 선화가 치유된다.
물은 <섬>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와 같이 외부로부터의 차단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란대문>과 <나쁜남자>처럼 일상이라는 작은 세상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영화들 사이에 물 자체의 대극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과 비명이 녹아 있는 <섬>의 저수지 낚시터와, 여유롭고 평온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호수는 또 다른 대극 구조를 이룬다. 이렇게 물의 이미지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합일을 향해 흐르고 있는 듯하다.
김기덕이 만들어내는 물의 이미지는 주인공들의 ‘큰 꿈’이 된다. 인물들은 꿈속에서 가혹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어 욕망하고 사랑하며 치유된다. <빈집>은 선화가 꿈을 통해 말을 배우고 욕망하는 법을 배워 자신을 가두는 자폐적 공간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온 선화는 이제 자신의 욕망을 말하고 그녀의 대극을 대면하며 현실을 살아나가야 한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과거의 분노와 현재의 고달픔을 읽어내며, 그들이 표현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고자 하는 김기덕 감독의 의도는 닫힌 현실의 문을 여는 하나의 시도임에 틀림없다.
김서영
․1972년 출생
․영국 셰필드 대학교 정신분석학 박사
․논문 「살인을 추억하는 영화 <살인의 추억>」 등
․강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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